깨달음의 현실 #4

"깨달음의 생활양식"

by 깨닫는마음씨




이번에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현실이라고 말할 때의 그 현실적인 얘기를 해보자.


지금의 사회현실 속에서 깨달음으로 사는 어떤 삶의 모델은 개발될 수 있는가? 결국 이런 글들은 다 그러한 생활양식을 발견해보고자 하는 시도들일 것이다.


몇 년 전에 서울의 모 대학교에서 종교심리학 강의를 진행하던 당시 20대 초반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깨달음 리서치를 한 적이 있다. 30명이 조금 넘는 수업에서 대략 10명 정도가 아주 상세하게 자신의 종교적 체험을 보고했다. 개중 자신이 깨달았다는 자각을 가진 학생들은 3명 정도 있었던 것 같다. 전체의 10% 비율이다.


깨달음의 증대는 분명 사회의 발전도에 정비례할 수 있다. 그건 사회가 깨달음을 지지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사회를 이루는 핵심인 규범 및 규칙이 더욱 복잡다단해짐에 따라 개인이 경험하는 한계상황들이 더욱 많아지게 되었다는 의미에서다. 울타리가 더 많이 생기면 울타리를 넘어설 일 또한 증대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특히나 포퓰리즘화된 민주주의 시스템은 깨닫기에 무척이나 좋은 조건을 형성한다. 이 또한 민주주의가 깨달음과 친화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 반대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통속적 정치화의 담론으로 주장되곤 하는 민주주의는 대단히 반깨달음적인 속성을 갖는다.


비단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인간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 역으로 언어적 이념과 가치를 위해 인간의 희생을 조장하게 될 때 그 모든 것은 다 반깨달음적인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위해 발명한 냉장고가 편리하게 쓰이는 일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냉장고가 없으면 인간은 저 사악한 무리들에게 재산과 생명을 다 빼앗기고 비참한 말로를 맞게 된다고 하는 일은 인간을 위해 불리한 일. 곧, 반깨달음이다.


생리적으로 비유하자면, 민주주의는 전두엽을 중심으로 한 시스템이다. 전두엽은 신체의 모든 부분의 의견을 대표해서 자신이 최선의 언어적 명령어를 집행함으로써 생명을 가장 현명한 길로 이끄는 역할처럼 가정된다. 이러한 전두엽이 아니면 인간의 삶은 커다란 위협에 빠지게 될 것처럼도 묘사된다. 근대에 보편적 이성이라고 말해진 그 기능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신경생리학 및 인지과학의 연구는 전혀 다른 얘기를 한다. 쉽게 말해, 우리 몸은 민주주의로 작동하지 않는다.


"아, 위가 여전히 배가 고픈가 보구나. 그런데 먼저 소외되어있던 취약계층인 폐를 배려해서 산소를 먼저 공급해보는 일은 어떨까? 얘 코야, 음식 냄새를 맡는 것보다 먼저 공기를 흡입하는 일을 집행해볼 수 있겠니? 우리가 이런 경우 갈등이 생기지 않게, 뇌 의회에 법안을 제출해서 취약한 신체부위에게 자원이 고루 돌아갈 수 있는 유기체적 현실을 실현해보도록 하자. 아, 발가락들과 무릎, 오른손과 항문, 그리고 큰창자는 동의한다고? 그럼 우리 총신체투표를 통해 한번 결정해보기로 하자꾸나."


우리의 자연스러운 신체는 절대로 이런 통합과 수렴의 방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몸은 스스로 알아서 조화롭게 움직인다. 우리 몸은 깨어있는 주체적 시민이 아니라, 스스로를 깨닫고 있는 자율적 생명이라서다. 곧, 몸은 '옳은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한다.


"이것이 나에게 옳다!"를 추구하는 것을 무엇이라고 할까.


바로 그것을 '욕망'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윤리는 원래 가장 욕망이 큰 이들이 좋아하는 소재다. 윤리와 욕망은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은 같은 운동이다.


민주주의는 정확하게 이 욕망의 촉진장치다. 그리고 동시에 제어장치다. 때문에 민주주의는 최선의 윤리적 장치라고 평가받는다. 당연하다. 인간이 발명한 최상의 욕망장치이기 때문이다. 흔히 통속적으로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를 욕망과 연결짓곤 하지만, 자본주의는 단지 욕망에 봉사하는 시녀일 뿐이다. 욕망 자체를 더 많이 낳아 수육하는 욕망의 여왕은 민주주의다.


욕망의 여왕은 욕망을 만들어낸 뒤 그 욕망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려 한다. 거기에서 신적인 권위의 쾌락이 생겨나는 까닭이다.


스스로 욕망의 자극을 만들어내고 스스로 그 자극을 통제하려 하는 이 욕망장치의 일은 흔히 '중독'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뇌가 도파민을 돌리는 방식이며, 곧 민주주의가 욕망을 돌리는 방식이다. 병주고 약주는 그 방식. 갈등을 만든 뒤 통합하는 그 방식. 전두엽과 도파민의 야합처럼, 민주주의와 욕망도 뗄래야 뗄 수 없는 야합이다.


이 야합으로 만들어진 추상적 구조가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자아'라고 부른지 좀 됐다.


민주주의는 자아의, 자아에 의한, 자아를 위한 시스템이다. 아니, 자아 그 자체다.


자아는 언제나 민주주의로 작동한다. 욕망덩어리인 자아는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엄청 윤리적이다. 인간의 모든 구성요소를 다 챙기려고 하며, 어떤 소외도 생겨나지 않도록 자신이 다 돌보고 통합하려 한다. 우리 몸을 가상의 국가로 비유한다면, 자아는 아마도 가장 이상적인 민주적 지도자의 모습으로 형상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자아의 핵심적인 문제점은 단 하나다.


우리의 몸은 민주주의를 원하지도 않고, 민주적 지도자 같은 것은 전혀 필요로 하지도 않는데, 자기가 대뜸 그 자리에 올라가 앉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거꾸로 말한다. 다양성의 몸이 자신을 선출했다고. 각양각색의 욕망으로 가득한 몸의 각 부위들이 서로 자기 주장만을 하면서 갈등이 커지기에, 자신을 대표자로 임명해 이제는 화합과 발전의 역사를 이루기로 했다고.


아니 그런 적 없다.


변태처럼 자기 혼자 민주주의 놀이를 시작해서, 자기의 쾌락을 위한 도파민 착즙의 그 일을 하고 있을 뿐이면서, 왜 모든 몸의 세포가 자기를 필요로 했다고 말하는지 무척 당황스럽다. 심지어 자기가 욕망장치면서, 왜 몸에게 욕망을 부정적으로 기인시키려 하는지도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자아가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을 살펴보자.


자아는 언제나 더 많은 다양성의 자아들로 분열되고자 하며, 그 각각의 자아들은 자신만의 당당한 목소리를 내라는 자아 자신의 내적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 그리고 그렇게 무수한 자아들의 목소리가 불협화음이 될 즈음에 이제 자아는 다시 통합의 명령을 가동시킨다. 그 다양한 자아들의 목소리를 조화롭게 만들어줄 주체로서 '자아 중의 자아' 곧 신적인 '참자아'를 출현시키려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자아는 '셀프권위'를 얻는 일에 능하며, 오직 그 일만을 위해 기능한다. 이 복잡다단한 '셀프게임'이 도파민 분비에 최고라서다.


차라리 바둑 같은 것을 떠올려보자. 우리 몸은 자아-전두엽이 도파민게임을 즐기는 놀이판이 되어 있다. 이처럼 자아가 자기 왕국처럼 판치는 '자아판'이 되어 있다는 것이, 우리 몸에 대한 실제적인 고통의 요소다.


이러한 자아와는 상반되게, 깨달음은 몸의 방식이다. 곧, 정말로 살아있는 것의 방식이다. 이 방식은 자신을 위해 '옳은 것'이 아니라 생명을 위해 '필요한 것'으로 살아간다. 몸이 바로 그렇게 작동한다.


몸은 욕망하지 않는다. 몸에 대한 아주 지독한 편견과 달리 몸은 욕망의 소재가 아니다. 쉽게 말해, 몸이 있어서 더럽고 추악한 욕망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든 것이 자아의 전략이다. 개체적 몸은 이기적인 것이며, 연대해서 보편적 통합의 구조를 이루어야 참된 인간이라는 식의 그 계략.


그러나 실증적으로 우리는 확인해볼 수도 있다. 자신이 남들만큼은 윤리적으로 괜찮은 어떤 참된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욕망에 치이고 있을 때, 잠깐 앉아서 가만히 몸을 살펴보라. 아니, 그 몸으로 그냥 있어보라. 몸은 지금 그런 것을 원하고 있지 않으며, 그런 것 없이도 편한 상태다. 몸은 아무 문제를 느끼지 못한다. 이미 몸은 욕망을 초월해 있는 상태다. 아까 밥에 물을 말아 김치랑 먹었고, 잠깐 낮잠도 잤으며, 나무 그늘 아래 바람도 시원하기 때문이다. 몸은 그 필요를 아주 작은 소재들로도 너무 쉽게 완벽히 다 채웠다. 그러니 여분으로 욕망할 이유가 없다.


몸이 욕망하는 것이 아니다. 욕망장치인 자아가 욕망한다. 자아는 몸에서 온 것이 아니다. 생리학적으로 몸의 어느 기관에도 자아가 존재하는 자리가 없다. 전두엽이 만든 추상적 언어세계에서 자아는 온 것이다. 그래서 자아는 몸의 고통을 모른다. 몸의 고통을 모르니 깨달음을 모른다. '옳은 것', 윤리만을 알며, 윤리를 깨달음이라고 착각한다. 곧, '남들만큼은'이라는 상대적 욕망을 깨달음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그러니 자아가 주체가 되어 있는 상황은 매우 반깨달음적인 것이다. 자아는 깨달음조차도 도파민 착즙을 위한 장난감으로 삼는다. 또, 바로 자아 자신이 깨달아서 더 높은 경지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나아가서는 자아는 자기가 이미 살아가는 민주주의의 방식이 진정하게 깨닫는 길이라는, 곧 민주주의가 깨달음이라는 참담한 주장까지도 시도하곤 한다.


그러나 자아가 깨닫는 일은 없다.


자아를 딛고 나를 깨닫는 것이다.


사실 자아에게는 임무가 있다. 그 임무를 위해 자아는 튼튼하게 자라야 하는 것도 맞다. 자아가 약하면 밟았을 때 무너진다. 자아경계가 아주 견고해야만 그 울타리를 딛고 우리는 울타리 밖으로 점프할 수 있다.


자아 자신이 성장해서 대단한 뭔가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자아는 우리가 깨닫기 위해 세운 울타리다. 자아는 그러한 울타리로서 자신이 그 안의 것들을 다 보호하고 있는 자상한 왕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 울타리는 다만 넘어가려고 만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민주주의의 발전 또한 좋은 것이다.


우리가 깨달음의 관점에서 민주주의를 논하고 있을 때, 이는 민주주의를 대신할 새로운 깨달음의 정치체제 따위를 말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깨달음은 정치담론이 아니며, 정치화가 될 수도 없다. 그러는 순간 이미 깨달음이 아니다. 우리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단 하나, 민주주의는 깨달음이 아니라는 그 엄연한 사실뿐이다. 그리고 깨달음이 아닌 것에 깨달음적인 것을 요구하고 기대하는 일은 우리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든다는 그 이해를 분명히 하고자 할 뿐이다.


민주주의가 발전한다는 것은 자아의 세력이 왕성해진다는 것. 울타리가 튼튼하게 지어지고 있다. 더 많은 이들이 뛰어넘어도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견고한 울타리라면, 깨달음을 위해 무척 좋은 것이다. 반깨달음적인 것의 강화는 이처럼 우리가 더 많이 깨닫는 일을 위해 좋은 것이다.


이제 이런 얘기도 해보자.


자아의 판타지는 민주주의다. 자아는 어떻게든,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자신의 왕국인 민주주의를 이룩하려고 한다. 그러나 자아는 이렇게도 말한다. 민주주의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과정일 뿐이라고. 그러나 그 과정 자체가 의미있는 것이라고.


깨달음에 관심이 있는 우리는 이런 의문이 자연스럽게 들 것이다.


'그런 걸 대체 왜 하지?'


깨달음은 바로 영원에 도달하는데, 왜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것을 추구함으로써 영원을 판타지적 소재로 만들어야 할까?


여기에는 어떤 착시효과가 있다.


영원히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은 영원히 이루어질 과정이라는 것. 어떤 것이 영원히 이루어진다고 하면, 거기에 참여하고 있는 이 자신도 영원히 존재할 것 같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바로 이 영원에 대한 착시효과를 통해, 자기가 영원에 가깝게 다가가 있는 척해보고 싶은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는, 민주주의라는 언술은 거의 사이비종교가 되어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판타지다. 민주주의 판타지. 자아의 환상.


우리는 왜 환상을 강렬히 추구하고 그에 빠지려 할까?


살기 힘들어서다. 살기 힘들 때 환상은 강렬하게 추구된다.


뒤집어 말하면, 민주주의라는 환상이 강화되는 것은, 오늘날 살기 힘들어하는 인간이 많다는 뜻이다. 동시에 그 환상이 그러한 인간의 고통에 효과적으로 응답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미 인간을 위한 편리성을 많이 상실했다는 것.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은 또한 좋은 일이다. 한계는 경계의 끝까지 간 것이다. 그로써 경계가 분명해진다. 울타리는 경계를 분명히 하기 위해 세워진 것. 경계가 분명해지면 그것이 울타리였다는 사실이 참으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현실로 뛰어 넘고 싶었기에 그러한 울타리를 세웠던 것인가?


이제 이것은 핵심이다.


자아는 민주주의를 통해 자기가 다 줄 수 있다고 말해왔다. 안정, 번영, 평화, 성장, 배려 등등, 사회생활에서 기대할 수 있는 최상의 가치는 다 실현할 수 있다고 자임한 바 있다. 다 맞을 것이다. 그런 것을 전부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만은 자아가 줄 수 없다.


자아는 그게 무엇인지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안다.


우리는 영원성만을 바란다.


심지어 그것을 절대 줄 수 없는 민주주의라는 것의 착시효과로라도 우리는 영원성을 꿈꾸었다. 그만큼 우리에게 영원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간절한 소망이다.


그래서 우리는 깨달음을 바란 것이다. 우리가 그토록 소망하던 그 영원성을 직접적으로 얻고자.


우리 모두의 진실된 소망은 깨달음이다. 정말이다.


반깨달음적 상황이 커지는 것도 우리가 깨달음을 그렇게 원하고 있어서다. 그에 따라, 깨달을 조건들이 자꾸만 마련되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깨달음을, 영원성의 획득을 왜 그리도 원하고 있는가?


당연하지 않은가.


우리가 살아있는 이 몸으로 만난 것들. 그래서 정말로 좋아한 것들.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이 영원하기를 바라서다.


사랑하는 것들이 남들만큼은 성공적인 계급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저 영원하기만을 바란다. 그래서 자꾸자꾸 보고, 또 만날 수 있기만을 바란다.


우리가, 인간이라고 하는,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영원을 소망하게 된 일은 필연이다. 깨달음을 바라게 된 일은 필연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우리의 생활양식이 되지 않아야 할 어떤 이유가 있을 수 있을까?


깨달음의 생활양식이란 곧 인간을 둘러싼 모든 울타리의 한계상황을 깨달음의 계기로 삼을 줄 아는 삶의 모델이다. 곧, 반깨달음적인 것들을 통해 깨달음의 현실로 도약해가는 것이다.


이를 영원성을 배워가는 삶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소망은 빌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소망으로부터 배울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배워간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정말로 단 한 번뿐임을. 그래서 생생하게 빛났으며, 그래서 너무나 좋아했고, 그래서 영원하기를 간절히 소망했음을.


우리가 그토록 사랑했던 우리 자신의 인생이라는 것을 그렇게.


현실, 우리는 어떤 현실 속에서도 우리 자신의 인생을 사랑해볼 수 있을까? 아니, 우리 자신의 인생으로부터 사랑이라는 것을 배워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영원을 향하고 있는 것이며, 이것이 우리의 새로운 생활양식이다. 어떤 현실이라도 우리는 그 울타리를 딛고 새로운 현실을 출현시킬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아니 유일하게 바라던 그 깨달음의 현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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