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정치화를 벗어나"
우리가 어떻게 깨닫는지 그 방법론이 궁금하다면 붓다에게 물을 수 있다. 그가 아주 상세히도 다 밝혀 놓은 까닭이다.
우리가 왜 못깨닫는지의 그 이유를 알고 싶다면 니체에게 물으면 된다. 그가 다 말해놓았다.
니체의 철학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이라는 존재가 깨달을 수 있는 많고 많은 길을 놓아두고 어쩌면 저리도 일부러 못깨닫는 그 유일한 길만을 고집하는지를, 어떤 때는 통렬하게 또 어떤 때는 냉소적으로 전한 모든 얘기다.
니체의 철학이 심리철학이라고 불릴 때, 그 '심리'라는 것의 의미는 매우 분명하다.
'자신을 바꾸는 일'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소재'다.
생의 현상인 마음을 섬세히 잘 관찰하는 인간은 그 자신을 바꿀 수 있다. 그 자신을 초극할 수 있다. 이것이 니체의 심리철학의 핵심이다.
그래서 '심리'라고 하는 것과 가장 가까운 것은 '종교'이며, 가장 멀리 있는 것은 바로 '정치'다.
심리적인 것 또는 종교적인 것은 그 자신을 바꾸려 한다. 반대로 정치적인 것은 자기 바깥의 것들을 바꾸려 한다.
원래 자신을 바꾸려 하지 않는 이들, 자기를 고집스럽게 지속하려 하는 이들은 자기 바깥의 것인 세상을 대신 바꾸어야 하는 까닭이다. 그래야만 자신이 자신의 모습으로 지속될 수 있다고 믿어서다.
쉽게 말해, 심리종교적으로 사는 이들은 자신의 몸이 커지면 이제 유모차에서 내린다. 그리고 두 발로 걸어다닐 수 있는 형상으로 그 자신을 변화시키려 한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사는 이는 이렇게 말한다. "내 몸에 맞는 새롭고 커다란 유모차를 제공받아야 하는 일이 나의 정당한 권리다!" 이러한 방식으로 유모차에 타고 있는 응애응애의 자신을 지속하려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이렇게 '자기진리화된 유아적 관점'으로 보며 그 시선을 권력화시키는 것이 정치화다. 정치화의 본질은 자아의 유지다. 정치화된 이는 왜 반드시 권력을 추구하게 되는가? 자기가 변하지 않기 위해서다. 자아 자신이 절대 변하지 않는 것처럼 연출하려면 막대한 힘이 필요한 그 까닭이다.
그리고 깨달음에도 이것이 작용한다. '깨달음의 정치화'라고 부를 수 있다. 사람들이 깨달았다고 착각하는 대부분의 경우가 이 깨달음의 정치화와 관련되어 일어나는 현상이다.
우리가 깨달았다고 착각하는 경험이 대개 어떤 식으로 일어나는지 한번 살펴보자.
자기가 내심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 외적으로는 겸손한 척하겠지만 실은 그는 자신을 남들과 다른 특별한 위상으로 간주한다. 그러한 이가 어느날 물리적인 폭력을 당하는 입장에 처했다고 해보자. 폭력이 극심해질수록 그만큼 분명해지는 것은, 자신의 똑똑함이 그 물리적 폭력 앞에 아무런 가치를 발휘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지금 자신이 옥좌에서 추락할 위기에 처했다. 고통은 이로써 육체와 정신 둘 다를 극한의 지경까지 몰아세운다.
그럴 때 이러한 이들은 갑자기 온몸이 이완되는 경험을 하곤 한다. 정신도 갑자기 해방된 듯한 편안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던 이를 보면 이러한 생각조차 든다.
'참 안쓰럽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고 인간을 학대함으로써 자신을 학대하고 있구나. 얼마나 슬픈 일인가.'
가슴속에 어떤 짠한 기운이 저릿하게 퍼지면서,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던 그를 용서하고 싶어진다. 아니 용서 정도가 아니다. 그도 온전하다. 다만 그 자신이 온전한 것을 모를 뿐이다. 자신들이 얼마나 온전한지를 모르고 살아가는 이 세상이 가엾다. 어떤 거대한 자비가 자신의 가슴에서 나와 이 우주를 둘러싸는 것만 같다.
모든 것이 다 괜찮다. 자신은 폭력을 당하는 상황에 있지만 이것 또한 괜찮다. 무엇도 자신을 진정으로 파괴할 수는 없다. 자신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제는 다 괜찮을 것 같다. 한 인간에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이란 없으며, 한 인간이 받아들일 수 없는 일 또한 없다. 수용, 그 거대한 의미가 모든 것을 온전하게 덮어간다.
대개 이런 상태를 경험할 때 우리는 자신이 깨달았다고 착각하곤 한다. 이것은 물론 신비체험의 전형적인 한 양상이다. 그러나 깨달음이 아니다. 이 체험의 결과를 통해 개인이 얻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면 이는 더 분명해진다.
지금 체험자는 무엇을 얻었나?
특별한 위상에 위치한다고 생각했던 그 자신의 자아가 지속되는 이득을 얻었다.
그 전에는 자신의 지성에 입각해서 자신이 우월한 존재라고 간주했다가, 지성이 폭력에 의해 위협받음으로써 자아가 자신의 특별성을 더는 지속할 수 없는 위기에 처하자, 이제 자아는 신체가 받는 스트레스를 경감하고자 뇌가 분비한 화학물질이 만들어낸 이완감을 소재로 삼아, 자신이 정신적으로 높은 경지에 도달한 것처럼 상황을 조직한 것이다. 그렇게 지성적 우위가 무너져도, 자신은 깨달음이라는 언술을 통해 여전히 특별한 우위의 입장을 지속하고 있는 것처럼 행세할 수 있는 이득을 자아는 성취했다.
이것은 똑똑한 척하다가 다른 이들에게 맞거나 따돌림을 당한 아이가, 자기는 그러한 사람들조차 용서할 수 있다며 자기의 도덕적 인격을 내세우려 하는 상황과 전적으로 동일하다. 물리적(육체적)으로는 패배했으니 대신 그 수준이 더 높다고 가정된 도덕적(정신적) 승리를 거두고자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기는 늘 남들보다 우월한 존재로 남으려 하는 자아의 기획이다.
깨달음이라는 언술은 분명 이 자아의 정치적 기획에 봉사하는 도구로 자주 남용된다.
세간에 생겨나있는 깨달음에 대한 선입관도 이 때문이다.
깨달음이 무슨 고고한 정신적 소양과 인품을 가진 선비 같은 것이 되는 것처럼 인식되곤 하는 것은, 분명 깨달음의 정치화가 우리의 세간에 뿌리깊게 침투해있는 까닭일 것이다.
과거 학생운동을 하거나 문화예술계에 종사하다가 끌려가서 수감상황에 놓이거나 고문을 받던 중 일종의 신비체험을 하게 된 보고는 많다. 이 경험은 이러한 이들이 평소 갖고 있던 세계관과 결합됨으로써, 또는 그 세계관의 방식으로 해석됨으로써 깨달음에 대한 한국적 표상을 낳게 되었다. 민족정신, 하늘과의 합일, 한, 거대한 모성애, 동학운동, 유불선의 통합, 민중의 얼 등의 정신주의적 개념들이, 이제 기존에 소비하던 정치적 담론과 결합되어 하나의 형이상학적 세계관으로 변주된 것이다.
그렇게 하나의 세계관은 그 한계에 부딪쳐 초극되기보다는 정신적 우회를 통해 지속되는 길을 택했다. 이것을 웰우드는 '영적 우회(spiritual bypass)'라는 표현으로 명명한다. 이는 쉽게 말해, 신비체험 같은 비일상적 경험을 자아의 이득을 위해 봉사시키는 일을 일컫는다. 신비체험을 통해 자신이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무수한 경우가 실은 이 영적 우회에 해당된다.
결국 우리가 '깨달음의 정치화'라는 표현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영적 우회의 현실이다. 니체의 심리철학 또한 인간이 어떻게 영 내지 정신이라는 소재를 통해 그 자신의 삶을 계속 기만하려 하는가의 문제만을 일관적으로 묘사했다. 우리가 왜 깨닫지 못하는가의 그 이유를.
깨달음에 대한 어떤 상을 붙잡고, 자신을 그 상과 일치시켜 가는 일을 깨달음이라고 착각하고 있어서 우리는 못깨닫는다. 되어감(becoming)의 환상. 과정의 환상. 왜 그렇게 모든 것은 다만 영원한 그 되어감의 과정 속에 있다고 말하고 싶어하는가? 그게 바로 지속의 의미다. 자아가 계속 그 자신으로 유지되고 싶기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은 '되어감'이 아니다. '바로 됨'이다. becoming이 아니라 being itself다.
깨달음에 대한 한국적 표상은 우리가 진보정치론, 조선의 선비문화, 유교적 어른의 모델, 민중친화적 실천, 민족정신, 이런 것들과 일치해갈수록 깨닫는 것처럼 주장하곤 하나, 또 미디어를 통해 그런 선전을 이루곤 하나,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런 일을 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영영 못깨닫는다.
니체가 자유정신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했을 때, 이것은 저항하는 진보의 정신 같은 정치적인 표현이 아니었다. 아무리 진보적인 세계관을 말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 자신을 변혁시키는 그 일이 아니라면 그 모든 것은 다 수구(守舊)일 뿐이다. 자아는 언제나 수구의 세력이다. 아무리 똑똑하고 도덕적으로 훌륭해진 자아라 하더라도 그 속성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니체는 우리가 이와 같은 자아로 고착되어 있기에, 자기 자신을 초극하지 못한다고 말한 것이다.
자아는 실체가 없고, 곧 뿌리가 없기에, 역사에 집착한다. 역사를 자기의 뿌리로 삼아 가상의 근거를 얻으려는 것이다.
때문에 신비체험을 통해 자기를 더 특별한 위상의 존재로 설정하고자 하는 자아일수록 역사에 대한 집착은 더욱 심해진다. 깨달음에 대한 한국적 표상은 이처럼 역사를 통해 자아가 자기의 근거를 얻어보려는 집요한 시도다.
그러나 깨달음은 탈역사적인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 존재하는 그 누구(somebody)가 아니라, 역사에 의해 구성된다고 믿어진 그 누구도 아닌 이(nobody)라는 아주 분명한 '존재의 사실' 위에 서게 되는 것이 깨달음이다.
곧, 우리가 올바르고 진정하며 역사와 합치한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고 요구된 그 환상으로부터의 자유, 그것이 깨달음이다. 이를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인 것, 자기 자신 대신에 세상을 바꾸라는 그 부조리한 강요로부터의 해방이 바로 깨달음이라고.
이러한 관점에서, 분명 오늘날의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은 깨닫기에 좋은 조건 속에 있다.
깨달음이 민족정신 같은 것과 관계있기 때문이 아니다. 한국인이 특별하게 종교적 감수성이 발달해있다거나 영적인 민족이라서가 아니다. 한국인의 얼 안에 깨달음과 친화적인 어떤 위대한 품성이 흐르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오직 하나, 오늘날 한국사회의 문화적 공기가 매우 경직되어 있고 억압적이어서다. 자아의 세력이 강대한 영토, 정신승리를 꾀하는 도덕주의가 지배하는 세상, 정치화가 만연한 환경 속에서는 원래 깨닫기가 좋다. 아니, 차라리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깨달음은 바로 그것들로부터의 온전한 자유를 위해 발명된 것이라고.
조금만 더 가보자.
이것은 핵심적으로 결국 어떠한 자유일까?
바로 부모로부터의 자유다. 역사는 부모의 다른 이름이다. 정치적인 것은 부모적인 것을 상정해 계속 그것을 기대하거나 그것과 합치되려는 역사적 기획인 반면, 심리적인 것 또는 종교적인 것은 부모를 넘어 온전한 그 자신의 존재로 서려는 탈역사의 운동이다.
그래서 정치적인 것은 '자기효능감'과 연관되고, 심리적인 것 또는 종교적인 것은 '자존감'과 연관된다.
그 둘은 비슷해보이지만 전혀 다른 것이다. 자기효능감은 자기가 사회에서 요구되는 가치를 유능하게 실현함에 따라 자기 자신을 괜찮은 존재처럼 경험하게 되는 감각이다. 반대로 자존감은 그런 모든 것을 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스스로를 온전하게 경험하는 감각이다. 전자는 행위와 관련되고, 후자는 존재와 관련된다.
자존감(self-esteem)이라는 용어를 처음 심리학계에 제안한 이는 윌리엄 제임스다. 그는 누구보다 뛰어난 종교심리학자였으며, 그 자신도 종교체험을 통해 거듭났다. 그러한 이가 제안한 이 자존감이라는 용어는 필연적으로 종교적 함의를 담고 있을 수밖에 없다. 가장 종교적인 것은 가장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 그것은 인간 자신의 존재의 온전성을 깨닫는 일과 관계된다. 누구에게 의존하지 않더라도 그는 태어난 그 자체로 그 자신으로서 온전하다는 바로 그 사실.
이 자존감이 부재할 때, 우리는 대신 자기효능감을 얻으려 한다. 곧, 심리적이고 종교적인 것의 부재를 대신 정치적인 것으로 채우려 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생겨난 깨달음의 한국적 표상이 우국지사 놀이다. 역사[부모]를 위해 진정하게 몸바쳐 활약하는 시대적 인물인 것처럼 자기 자신을 연출하려 하는 그 방식이다. 이것의 본질은 결국 자신이 부모에게 제일 잘 하는 자식으로 인정받으려는 것이다. 제일 똑똑하고, 유능하며, 도덕적으로도 훌륭한 그런 자식이 되어야 자기효능감을 경험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조선의 엄마들이 좋아할 이런 유교적 본을 추구하는 일에는 물론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는 이런 것을 깨달음이라고 말할 때 생겨난다. 그러면 깨달음이라는 것이 고작 부모에게 칭찬받고 인정받기 위해 하는 어떤 것이 된다. 역사적으로 수치스러운 존재가 되지 않도록, 민중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도록, 등의 이런 표현들이 시사하는 것은 결국 다 부모에 대한 얘기다. 부모가 보기에 부끄러운 존재가 되면 자신은 정당하게 존재하지 못할 것 같다는 그 두려움이다.
이처럼 엄마의 착한 아이가 되는 것에 깨달음이라는 이름을 자주 붙이곤 하는 한국사회이기에, 우리가 진짜로 깨닫기에는 매우 좋은 환경이다. 그리고 그것이 실은 얼마나 우리가 원하던 바였는지 떠올리는 일은 어렵지 않다.
정치화는 곧 부모화다. 정신분석에서는 이 구조를 말한다. 세상을 경영하는 부모의 윤리적 언어를 내사해 그 부모의 모습과 합치되는 것이 정신분석의 목표다. 그래서 정신분석은 선불교 및 실존주의와 반대편의 입장에 선다. 이 전통들은 깨달음을 더 노골적으로 지향하는 전통들이다. 부모와, 또는 스승과 합치되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곧, 세상을 경영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변혁하려 한다. 부모[역사]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그 자아의 초극을 통해.
그런데 자신을 초극하는 변혁이란 또한 자기 존재의 본성을 다시 찾는 회복이기도 하다.
자유는 회복이다. 어떤 당위적 표상의 억압에 의해 일그러졌던 우리 자신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이란 다 이 회복의 운동으로 기능하는 것이며, 그렇게 삶의 사건들은 근본적으로 자유의 운동이다.
그러나 자아는 이 운동을 거부한다. 삶을 통제하려 한다. 바뀌고 싶지 않아서다. 그렇게 자아는 회복의 일을 한사코 거부한 채 자신을 계속 일그러진 상태로 방치하려고 한다. 나아가 자신의 일그러짐을 기준으로 삼아 오히려 그러한 자신에 맞추어 세상을 바꾸려고 한다. 그 결과 세상도 일그러진다. 그러면 이제 자신이 만든 그 일그러진 세상 앞에서, 자아는 자신이 더 열심히 해서 이 일그러진 세상을 건강하게 회복시키겠다고 한다. 그게 자신의 역사적 임무라고까지 말한다.
그러지 말고, 자아는 자신만 건강해지면 된다. 자아 자신이 초극될 때, 자아 자신의 건강성은 가장 담보된다. 니체는 계속 이 얘기만을 한다. 그가 자신의 철학을 정신위생학이라고 부를 때, 이것은 일그러진 자아를 위한 처방이었다.
우리가 생명의 뿌리를 잃어 건강 또한 잃었다고 한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실제의 뿌리를 다시 얻는 것이지, 가상의 뿌리를 만들어내서 그것이 뿌리인 척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부모가 우리의 뿌리가 아닌 것은, 부모 또한 뿌리를 잃은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들도 그들 자신의 부모가 뿌리인 줄 알고, 그들 자신과 똑같이 일그러진 그 선대로 계속 근거를 기인시키기만을 거듭할 뿐이다.
니체의 철학은 또한 왜 계보학이라고 불리는가? 니체가 그러한 근거들을 계속 거슬러 올라가며 추적해보았더니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다 허상이었다. 환상이었다. 그러한 환상에 근거하여 우리는 가상의 뿌리를 만들어온 것뿐이다. 그 가상의 뿌리의 이름이 바로 역사다. 그러니 그런 것에 우리 자신의 건강성을 위탁하고 있는 한 우리가 휘청이는 일은 필연이다. 자존감은 늘 바닥일 수밖에 없다.
존재.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의 존재가 필요하다. 그것이 진짜 뿌리이기 때문이다. 존재는 존재 그 자체에만 기인한다. 존재는 원래 스스로가 뿌리다. 자존감의 의미란 그런 것이다. 곧바로 이 우주에서 가장 견고한 근거와 연결된 그 감각이다.
그렇기에 존재는 애초 정치화될 수 없는 것이다. 깨달은 척할 수 없는 것이다. 깨달았는가 못깨달았는가만 있지, 깨달음으로 점점 되어간다는 것이 성립되지 않는다. 우리는 현재 존재하는 척함으로써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진정한 존재로 점점 되어가고 있는 과정의 상태로 존재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지금 100%로 존재하고 있으며, 누구도 이 존재의 사실성을 부정할 수 없다. 누군가가 존재하지 말라고 감히 명령해도 우리의 존재함을 결코 막을 수 없다. 존재는 다른 그 어느 것에도 뿌리를 두지 않고, 오직 스스로만을 뿌리삼고 있기에.
그래서 존재는 자유롭다.
스스로에 근거하고 있는 그 상태를 우리는 자유라고 말한다. 우리가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려면 우리 자신의 존재가 아닌 우리 바깥의 것을 위해 행위하며 그것에 의존해야 한다고 말하는 그 모든 정치화의 속박을 벗어나 우리가 얻게 되는 그 현실이다.
붓다도, 니체도, 그 현실을 무척 좋아했을 것이다. 그 '깨달음의 현실'과 우리가 친해질 수 있기를 바라는 하나의 소망으로 모든 말을 했을 것이다. 친해져야만 이미 그것이 우리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을 바로 만나게 될 수 있기에.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은 당연히 인간의 것이어야 하며, 그렇게 이미 원래 인간의 것이다. 우리는 자유다. 인간이 스스로를 자유로운 존재라고 제대로 다시 기억하는 그것이 초극이며, 변혁이고, 영원히 지속될 바로 그 의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