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계명: 너희는 재미있으라"
제도종교들은 왜 점점 더 망해가는가?
성직자들의 비리 때문일까, 정치와의 야합 때문일까, 아니면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어떤 것도 핵심적인 이유가 아닐 것이다.
정말로 핵심적인 이유는, 이제 그것들이 재미가 없어서다.
루돌프 오토는 말한다. 종교의 생명력은 그것이 인간에게 야기하는 '떨림(tremendum)'과 '끌림(fascinans)'의 느낌에 있다고. 이 둘은 상반되는 느낌이다. 하나는 두려움의 표현이고, 다른 하나는 매혹됨의 표현이다. 그러나 분리된 것이 아니다. 이 둘이 하나의 상태다.
우리는 이 역설적 상태를 반드시 경험한 적이 있다.
우리가 첫사랑에 빠졌을 때를 떠올려보자. 그때의 상태가 바로 이것이다.
상대가 너무나 거대하게 느껴져 그 앞에서는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지는 이 상황이 너무나 두려웠으며,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상대에게 강렬히 매혹되어 끌려가는 마음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또 떠올려보자.
그때 우리는 엄청 재미있었다.
사랑 속에서 떨리고, 끌렸기 때문이다. '떨림'과 '끌림'은 재미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두 요소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좋아한다. 사랑이 무엇보다 재미있어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사랑을 향한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종교를 원래 좋아했다. 그렇게 종교가 인간에게 정말로 재미있는 것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붓다가 사람들과 숲속에 모여 앉아 얘기를 하며 놀 때, 그 자리는 윤리적 교훈으로 가득한 무슨 훈장님 말씀을 듣는 자리였을까? 절대 그럴리가 없을 것이다. 세상에서 처음 울려퍼지는 엄청난 얘기들로 그 시간은 저 하늘의 별빛처럼 빛나고 있었을 것이며, 얘기를 듣는 사람들의 눈동자도 그 얘기만큼 빛나고 있었을 것이다. '와, 너무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다.' 사람들의 가슴도 이제 막 태어난 새로운 우주와 같았다.
또 예수는 무슨 깨시민들을 위해 살다간, 도덕적으로 올바른 소리만 입에 달고 사는 진보정치인 같은 것이었을까? 그 반대다. 예수와 제자들은 술집에 모여 엄숙한 깨시민들이 보기에는 '삐뚤어진 얘기들'이나 하며 서로 크게 웃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뭐 저런 또라이들이 다 있냐, 라고 불쾌하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점점 그 파격의 얘기들이 전하는 어떤 거대한 자유와 사랑의 공기에, 그 마력적인 재미에 저도 모르게 끌려들어가, 어느새 자신도 또라이 중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또라이들이 하나둘 모이다보니 26억 명이 되었다. 재미 하나로 일어난 일이다.
재미는 무엇보다 정직하다. 재미가 있으면 인간은 끌리고, 재미가 없으면 인간은 떠난다.
제도종교에서 사람들이 점점 떠나가는 것은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제도종교를 대신할 소재로서, 소위 말하는 개인적 종교성의 추구, 즉 영성이라는 것은 기능할 수 있을까?
차라리 반문해보자. 백날 정해진 루틴에 따라 수행하고, 먹거리 예민하게 가려 먹고, 여여한 것처럼 감정 억지로 통제하고, 그런 게 정말로 재미있겠는가?
제도종교만큼이나 영성이란 것 또한 이미 재미를 상실한지 오래다. 우리가 깨달음에 대해 갖는 어떤 전형적인 상을 떠올려보면 이 점은 더 분명해진다.
늘 매사에 허허 하는 인자한 웃음이나 보이고, 화도 안낼 것 같으며, 생태주의나 다양성 같은 거 강조하는 진보정당 지지하고, 그 책장에는 금강경 옆에 민중신학이나 한민족의 영성 같은 책이 경건하게 꽂혀 있을 것 같으며, 삼겹살집에 같이 가면 티내면서 상추에 밥만 먹을 것 같고, 왜 그러냐 묻건 자기만 아는 뭐라도 보고 있는 것처럼 또 허허 웃기나 할 것 같으며, 개량한복이나 파키스탄 민속의상 같은 거 입고, 타로카드 들고 다니며, 요가하는 무슨 초식남 할배나 애늙은이의 모습 같은 것이, 흡사 깨달은 이에 대한 어떤 전형적인 모델을 구성한다.
이건 뭐 퇴계 이황이 즐겨 먹던 필라델피아풍 마라된장나베 함경도 에디션도 아니고.
떨리지도 않고, 끌리지도 않는다.
지루할 뿐이며, 그렇기에 자극적일 뿐이다.
'떨림'과 '끌림'의 역설처럼, '지루함'과 '자극'도 동일한 역설을 이룬다. 지루한 것이 자극적인 것으로 드러나며, 자극적인 것이 지루한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언어적으로는 그 둘이 서로 다른 현실을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착각되기에, '자극'은 마치 '지루함'에 대한 대안인 것처럼 추구된다. 때문에 지루한 제도종교 대신에 영성이 자극적인 대안으로서 대두되었던 것이나, 그 본질은 실상 동일한 재미없음, 동일한 지루함일 뿐인 것이다.
이 구도를 더 확장해보면 오늘날의 상황의 많은 것이 설명된다.
사람들이 이처럼 결국에는 그 모든 종교적 지향을 재미없는 것으로 경험한 까닭에, 그 대신 추구하게 된 대안이 바로 게임이다. 오늘날 종교의 경쟁자는 다른 무엇도 아닌 게임이다. 여기에서 게임이라고 일컫는 것은, 하나의 미디어적 소재만이 아닌 그러한 생활양식까지를 총칭하는 표현이다. 그것은 결국 네트워크의 문법이다. 가상현실. 유튜브와 OTT와 SNS의 생활양식. 이것들이 오늘날 종교 대신에 사람들이 향유하는 소재가 되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분명히 동의할 수 있다. 종교보다는 게임이 재미있다. 나아가 깨달음 같은 것보다도 게임이 더 재미있게 생각된다.
게임의 영향력이 이처럼 강력한 것은, 게임이 분명 재미에 대한 어떤 핵심을 일정 부분 담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바로 '다른 현실에 대한 지향성'이다.
오늘날 이세계물은 왜 유행하는가? 우리가 다른 세상, 다른 현실로 가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게임은 우리 앞에 이 다른 현실을 펼쳐낸다. 인스타그램은 왜 대세가 되었나? 그 안에는 우리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어서다. 우리 자신은 재미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 같은데, SNS에서는 다들 엄청 재미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
"엄마, 나만 없어, 다른 세상. ㅜㅜ"
다른 세상에 대한 이 지향성이 오늘날의 생활양식으로 표현될 때, 질투와 시기가 되고, 초조한 쫓김이 되며, 우울과 소진의 이유가 된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는 없다. 아니, 애초 포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다른 현실에 대한 지향성, 이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종교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는 왜 첫사랑의 순간을 그리도 강렬히 경험했는가? 첫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 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현실을 얻게 될 것이라고 꿈꾸었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질 때마다 이처럼 우리는 늘 그 사랑을 통해 다른 현실을 꿈꾸어볼 수 있었던 것이며, 그래서 사랑이라는 것이 좋았다. 사랑의 생리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떨림'과 '끌림'은 분명 무엇인가 다른 현실 앞에 서게 된 우리의 반응이다. 결국 우리는 다른 현실을 만났을 때 재미라는 것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종교는 원래 이 '다른 세상' 얘기에 특화된 전통이었다. 예수와 붓다는 얼마나 많이 '다른 세상' 얘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주었을까. 그 얘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사람들은 자연스레 종교인이 되었다. 자신의 본성에 따라, 자신도 재미있는 사람이 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종교성은 종교에 거의 없다. 종교는 '다른 세상' 얘기를 하지 않는다. '이 세상'을 어떻게 윤리적으로 잘 경영할지에 대한 얘기만을 주로 한다. 이런 것을 '종교의 정치화'라고 부른다. 이처럼 종교가 정치문법이 되어 다른 현실에 대한 지향성을 포기한 순간부터, 종교의 몰락은 필연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현실에 대한 지향성'을 더 짧은 표현으로는 '초월성'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초월적 종교성'과 '내재적 종교성'이라는 표피적 구분에서의 그 초월의 의미가 아니다. 내재적인 것 또한 초월성에 대한 것, 곧 '다른 현실'에 대한 것이다. 씨는 꽃을 내재하지만, 씨에게 꽃은 완전히 다른 현실인 것과 같다.
이 초월성이 실현될 때 우리는 그것을 자유라고 말한다. 또 그것이야말로 자기 자신이라고도 말한다.
꽃은 꽃으로 필 자유가 있으며, 그것이 바로 꽃 자신이다.
그렇게 피어나게 된 꽃은 그 모든 삶의 순간을 재미로 경험했던 것임에 틀림없다.
삶이라는 것은 거듭해서 다른 현실을 만나가는 것, 그럼으로써, 역설적으로, 자기 자신으로서 빛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사랑에 빠지고, 더 많이 사랑하게 되며, 그만큼 자유로워져서, 마침내는 가장 온전히 자유로운 자신으로 드러나는 그 초월의 일.
'가장 다른 세상'의 이름은 결국 '나'일 것이다.
나를 향한 이 초월적 삶의 여정을 바로 '모험(adventure)'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모험은 오늘날 어디에 있는가?
종교에는 없다. 영성에도 없다. 거의 대부분, 모험은 게임속에만 있다. 게임을 하는 이는 오히려 게임속 자신의 모습이 더 자신답다고도 경험한다. 거기에 모험이 있어서다.
모험을 하는 이는 사랑에 빠진 이. 게임을 하는 이의 마음은 진실로 사랑에 빠진 이의 마음과 동일하다. '다른 세상'을, 궁극적으로는 '나'를 향한 어떤 초월성이 작용하고 있다.
그러니 오늘날 종교가 게임을 절대 이길 수 없는 것이다. 종교는 상실한 그 종교성-초월성-재미를 일정 부분이라도 게임이 대신 제공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한계는 분명하다.
이렇게 한번 물어보자.
오늘날 게임은, 유튜브는, 넷플릭스는, SNS는 그렇게 재미있기만 한 것인가?
재미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자유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이제 당위에 가깝지 않은가?
재미와 자극의 차이는 그것이 자유인가 당위인가에 있다. 자극이 선정적인 것은 끌어들일 수 있는 당위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꼭 해야만 할 것 같은 것 내지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것으로서의 당위적 자극이 오늘날 게임이 보이는 통상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게임은 점점 더 자극적인 형상만을 추구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자극적인 것은 실은 지루한 것이다. 이 현상은 이미 실증적이다. 하루종일 누워서 유튜브가 알고리즘에 따라 펼쳐내주는 영상들을 보고 있는 이는, 정말로 재미있어서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말로는 재미있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과정이 끝나고 난 뒤 남는 심신의 피로함이 실은 그것이 재미가 아니었다고 스스로 증거해준다. 재미는 삶의 성분이기에, 재미있는 것은 오히려 우리의 생명력을 증대시키는 까닭이다.
이것이 게임의 아주 명백한 한계다. 게임은 우리가 이 몸으로 살아가는 생리적 삶과 괴리되어 있다. 아무리 게임이 '다른 세상'을 펼쳐내주는 것 같더라도, 우리는 그 안에서 생리적으로 살 수가 없다. 반드시 그 세상에서 밀려나 이 몸으로 돌아오게 된다. 우리는 결코 그 '다른 세상'에 정착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뭔가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 같으면서도, 정작 그 가능성에 이르는 일은 불가능해서 계속 좌절될 때, 우리는 잘 알려진 표현으로 '학습된 무기력'에 빠지게 된다. 게임을 하면 할수록 불감증을 경험하게 되는 일은 이 때문이다.
그래도 게임밖에는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것이 없는 것 같으니 당위적으로 계속 게임적인 것을 붙잡고는 있지만, 실은 이것은 약속된 절망이다. 아무리 강렬한 자극으로 다가와도 결국에는 우리 자신의 것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지루하다. 해봤자 안되는 것은 지루하다. 가장 강한 자극은 가장 안되는 것이니 가장 지루하다.
그렇게 우리는 정직할 수 있다.
게임적인 것도 이제는 그리 재미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너무나 지루한 소재라고.
그나마 종교보다는 나은 것 같으니, 주말에 교회나 절에 가는 대신에 하고 있는 것뿐이다. 반대로 말해, 이런 지경의 소재에도 종교가 패배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종교가 몰락해있는가에 대한 방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가 모험의 재미를 잃었을 때, 그 대안으로 게임은 선택되었지만, 종교의 몰락만큼이나 게임 또한 빠르게 몰락해가고 있다. 빠르게 그 자신의 강력함을 내세운 만큼 그 몰락의 추세도 급격하다.
지금은 그래서 게임적인 것을 세속으로 두고, 종교적인 것을 탈속으로 두는 구분 자체가 붕괴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둘 다 똑같이 몰락해가는데 그 붕괴는 필연이다.
그러니 게임에 빠지는 일을 그만 하고, 진정하고 본질적인 종교로 돌아와야 된다는 식의 주장은 씨도 먹히지 않는다. 또 반대로 고답적인 예배당이 아니라, SNS 속에 더 진정한 자유와 자기실현의 현실이 있다는 식의 주장 또한 얼토당토 않은 것이다.
이것은 마치 10계명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놓고 다투는 종류의 얘기일 것이다. 그것은 흔히 세속과 탈속의 경계를 나누듯이, 1부터 5까지는 세속의 영역에서 맡고, 6부터 10까지는 탈속의 영역에서 맡는다는 조율과 통합의 방식으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재미없는 애들 둘이서 조율하고 통합해봤자, 그 판 자체가 재미없는 것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재미없는 것을 날리려면 판 자체를 날려야 한다.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제11의 계명이다.
1에서 10까지의 현실과는 전혀 상관없는, 완전히 새로운 시작의 현실. 제11번째의 새 계명.
그것은 이렇게 말해질 것이다.
"너희는 재미있으라."
부연해서 이렇게도 말해질 것이다.
"내가 재미있듯이, 너희도 재미있으라."
재미, 우리는 재미에 대한 진짜 대안이 필요하다.
살펴보면, 세속이나 탈속에서 하는 일은 현재 다 똑같다. 상대를 갈라치기하고 혐오하거나, 각자 내적으로 갈라치기하고 혐오한다. 대립과 투쟁은 재미를 잃은 이들이 반드시 향하게 되는 귀결점이다. 재미가 없는 이들은 원래 싸우는 것이 일이다. 싸우는 동안만큼은 재미를 대신하리라고 믿어지는 자극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데 이 자극이라는 것의 성질을 한번 보자. 그것은 상대에게 의존함으로써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엄마가 아이에게 떠먹여주는 이유식 같은 것이다. 아이가 칭얼거리면 엄마는 자극을 계속 공급한다. 자극에 빠진다는 것은, 이 일만이 계속 반복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결국에는 어떠한 현실이 펼쳐지는가? 엄마가 없으면 이제 아이는 스스로 재미를 찾을 수 없게 된다. 재미에 대해 철저하게 무력해진다.
이런 것을 '자극중독'의 현실이라고 말한다. 늘 싸우는 이들은 다 이 자극중독에 빠져 있는 상태다. 그렇다고 자기에게 자극을 제공해주는 상대를 거대하게 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의존하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아랫것을 대하듯이(흡사 엄마를 대하듯이) 만만하게 본다. 두려워하지도 않고 매혹되어 있지도 않다. 그저 도구일 뿐이다. 누르면 자극을 제공해줄 자판기 같은.
이처럼 상대가 도구가 되어있을 때, 우리는 상대로 말미암아 새로운 다른 현실을 꿈꾸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늘 자신이 뽑아먹던 제로콜라나 반복해서 소비하게 될 뿐이다.
상대를, 나아가 삼라만상을 '떨림'과 '끌림'이 느껴지는 거대한 것으로 보게 될 때야, 그 동일한 시선에 의해 우리 자신도 거대한 것으로 개방될 수 있다. 초월성의 모험이 이루어진 것이며, 곧 재미는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펼쳐진다.
재미에 대한 진짜 대안은, 우리가 이처럼 스스로 재미있을 수 있는 현실을 발견하고 거기에 안착하는 일이다.
우리는 스스로 재미있을 수 있는 능력을 잃었다. 종교는 재미없게 살라고 우리에게 명했고, 게임은 자신이 대신 다 재미있게 해줄 것이라면서 우리에게서 그 능력을 박탈했다. 그 결과 우리는 유튜브가 떠먹여주는 자극이나 수동적으로 소비하며, 바로 그렇게 유튜브를 엄마로 모시는 무력한 아이의 신세가 되었다.
즉, 우리는 무엇을 잃은 것인가?
창조의 힘을 잃었다.
스스로 만든 것을 보며, 스스로 좋아할 줄 아는 그 창조의 실제를.
그 궁극의 재미를.
구약성서의 신화를 인용해보자. 신은 이 모든 것을 창조한 뒤에 분명하게 말했다. 자신이 만든 것이, 보기에 너무나 좋았다고.
그게 재미의 원형이다.
신이 재미도 없는데 이 모든 것을 창조했을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엄청난 궁극의 재미를 느끼면서 신은 창조의 일을 즐겼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온전하듯이, 너희도 온전하라."라는 말에는 "내가 재미있듯이, 너희도 재미있으라."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자신이 재미있게 창조한 인간이, 자신처럼 재미있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은 너무나 지당하다. 신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한대로, 인간 또한 창조의 재미를 느낄 수 있기를 신은 무엇보다 바랐을 것이다.
그렇다면 창조라는 것의 실제는 무엇인가?
앞선 얘기들과 엮어보자. 그것은 결국 '다른 세상'에 대한 것이다. 창조를 통해 우리에게는 지금껏 없던 다른 현실이 펼쳐진다. 뒤집어 말해, 우리를 떨리고 끌리게 하는 무엇인가 다른 현실이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다면, 우리는 지금 창조의 힘 속에 있는 것이며, 그 힘을 집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창조의 힘을 쓰고 있으니, 우리가 재미있게 되는 일은 당연하다.
원래 종교란 다 이 얘기였다. 다른 세상을 향할 수 있는 인간의 창조력에 대한 얘기. 그러한 인간의 재미있는 모험담이 종교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그것을 잃어서, 사는 일이 이토록 재미없어진 것이다. 재미가 없으니 매일매일 쌈박질이나 하고 자극이나 소비하며 스스로를 불행하다 여기게 된 것이다.
그러니 더욱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제11계명이다.
우리는 다시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사실 0계명이었다. 모든 계명은 다 이 위에서 성립된 것들. 엄밀히는 판 그 자체다. 그러나 그 위에 쓰인 문자만 보이고 판 그 자체는 쉬이 인식되지 않아서, 우리는 그런 것이 있는지조차 차마 믿기 어려워진 것이다.
그래서 노골적으로 문자의 형태로 다시 표현하는 것이다.
"너희는 재미있으라."
이것이 우리가 진짜로 놓여 있던 그 판의 의미다.
재미없는 판 자체를 날리면, 원래 우리가 속한 그 판이 떠오른다.
흡사 우리가 처음 보는 이세계처럼.
원래부터 그것이었지만, 그것을 잊고 살아온 우리에게는 분명 새로운 것이다. 다른 세상이다. 다른 현실이다. 이제 그것이 우리의 삶으로 떠오른 것이다. 우리의 삶이 된 것이다. 우리가 그 위에서 이 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우리의 본래적 고향이자, 우리가 새로 찾은 개척지가 그렇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재미뿐이었다. 진짜 재미. 스스로 즐기고 창조할 수 있는 자신으로 드러나는 그 재미. 우리는 그러한 재미만을 위해 태어난 것이고, 재미있는 것만을 언제나 사랑했다. 아낌없이 우리의 창조력을 스스로 발휘하고 스스로 향유할 수 있는 그 재미의 현실로 우리는 진입하고 싶다. 초월하고 싶다. 그러한 현실에서 살기 위해.
종교의 핵심이 재미라면, 깨달음의 핵심은 더욱더 재미다.
가장 떨리면서도 가장 끌리는 것, 그래서 가장 살고 싶은 것이다.
누구라도 그 자신이 뿌리를 내려 살고 싶은 자리는 결코 붕괴되지 않을 아주 든든한 기반이다. 그러니 인간은 재미를 좋아하는 것이다. 재미야말로 반석이기에.
"너희는 재미있으라." 그렇게 우리는 이제 이 가장 든든한 제11계명 위에 안착한다.
모든 것이 다 망해갈 때에도, 전부 다 우리를 떠나갈 때에도, 이 현실만은 살아남는다. 재미만은 인간을 떠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재미를 떠나지 않을 것이므로. 인간 자신의 본성을.
자신의 본성껏, 자원과 능력이 있다면 있는 재미를, 또 자원과 능력이 없다면 없는 재미를 누릴 수 있는 인간이 있다면, 그렇게 있으면 있는 것들을 살려서, 또 없으면 없는 것들을 살려서 어떤 조건으로도 창조할 수 있는 인간이 있다면, 그 인간은 무적이다. 그는 언제라도 스스로를 살릴 수 있는 인간이다.
이처럼 결국에는 재미가 인간을 구원할 것이다. 인간 자신의 본성이 인간 스스로를. 그것은 우리가 너무나 사랑할 수밖에 없을 그 현실. 바로 깨달음의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