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닫는다고 뭐가 바뀔까?"
사람들이 어떻게 깨닫는지를 물을 때 내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만약 제가 지금 500억 원을 그냥 드린다면, 그래도 깨달음 필요하세요?"
이에 대해 진지하게 한번 생각해보라고 청한다.
그러다가 고민이 길어지면 다시 선택지를 만든다.
"이 우주에서 반드시 내 자신에게 일주일 안에 실현될 일이라면, 500억 원과 깨달음 중 어떤 걸 갖고 싶으세요? 하나만 가지실 수 있어요."
그러면 조금 겸연쩍어하다가, 마침내 마음을 다잡았다는 듯이 씩 웃으며, "네, 전 깨달음을 갖겠습니다."라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말하는 이가 있다.
그 눈을 다정하게 마주보며 말한다.
"그게, 우리가 왜 못깨닫는지의 이유입니다."
또 강의 때는 이러한 질문도 한다.
"여러분이 깨달음이라고 생각하는 건 어떤 건지 자유롭게 말씀들 해주세요."
그러면 많은 것들이 나온다. 사랑, 평화, 흔들리지 않는 안정감, 무엇에도 속박되지 않는 자유, 누구도 자신을 무시하지 못할 어떤 힘, 죽음의 극복, 영원한 지복, 살아있는 삶, 진정한 행복, 존재, 공함, 운명의 초월, 마음으로부터의 해방, 주인공이 되는 일, 연기와 함께 춤추기, 지혜, 알아차림의 일상적 증득, 그냥 살아가기 등등.
그 모든 것을 화이트보드에 가득 쓴다. 공간을 다 채울 때까지 계속 물어 계속 쓴다.
그리고 말한다.
"여러분들이 얻기를 원하시는 것은 깨달음이 아니라 바로 이것들입니다. 우리는 깨달음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대체 무엇을 원하고 있었는지만은 이제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가 출발점입니다."
또 다시 묻기도 한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원하던 '사랑'을 얻는 대신에 깨달음은 얻을 수 없다고 한다면, 그렇게 둘 중의 하나만 얻을 수 있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것을 얻으시겠습니까?"
앞선 예시의 질문과 결국 같은 질문이다.
이것은 벗겨내려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집중시키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진실된 소망에 정직할 수 있게끔.
왜냐면, 우리는 바로 그것으로만 깨달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직한 마음의 소망으로만. 그것이 아무리 유치하고, 조잡하며, 더럽고, 경우에 따라서는 악하고, 또 모자라며, 한심해보이는 것일지라도, 그것만이 깨달음으로 가는 직행통로다.
이를 선에서는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라는 표현으로 형상화한다. 우리의 삶에 날아드는 먼지를 늘 쓸고 닦아 없앰으로써 깨끗한 본성의 자리를 만드는 것이 깨달음이 아니라, 그 먼지로 말미암아 본성을 깨닫는다는 의미다. 선불교가 '삶의 불교'인 이유며, 혜능선사가 의발을 물려받게 된 그 연유이기도 하다.
내 선생님은 이러한 말을 자주 하곤 했다.
"마음의 소망은 다 이루고 가야죠."
그는 '번뇌'라는 표현을 '마음의 소망'이라는 표현으로 바꾸어 말하기를 좋아했다. 그건 아주 참신하고 재미있었다. 번뇌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번뇌를 더 적극적으로 있게 하려는 이 방향성은 적어도 나에게는 아주 옳았다.
번뇌가 자유롭게 있게 되고, 그럼으로써 가장 있게 될 때, 거기에는 가장 있음만 남는다. 근데 실체적으로는 가장 없다. 가장 없어서 가장 있고, 가장 있어서 가장 없다. 없이 계신 것이다. 존재는 공하다. 그래서 그것은 우주와 합일된 것처럼 우주만큼의 가장 큰 무엇이기도 하고, 가장 텅빈 공간에서 다만 터져나오는 아주 거대한 웃음이기도 하다.
가톨릭 신학자인 칼 라너는 인간의 먼지성에 대해 말한다. 그는 인간이 하나님에게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이 먼지성이라고 전한다.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는 먼지이기에 그는 사랑받는다는 먼지의 역설적 신비성을 라너는 말하고자 한 것이다. 번뇌에 대한 얘기와 같다.
희망적으로, 우리의 내면에는 번뇌소년단이 창단될 필요가 있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가 아니다. "소년이여, 번뇌를 가져라. 그러면 깨달으리라." 이것이다.
번뇌는 그 자체로 모순적 성질을 갖는다. 즉, 거기에는 언어적 금지의 명령이 개입하고 있다는 뜻이다.
하면 안된다고 믿는데 하고 싶거나, 또는 할 수 없는데 하고 싶은 그것이 번뇌다.
우리는 이 번뇌의 문제를 묘한 방식으로 깨달음이라는 개념을 남용해서 해결해보려고 한다.
자신에게 금지된 것이, 깨달으면 누구에게도 비난받지 않는 방식으로 정당하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실은 500억 원이 갖고 싶으면서 그 대신 깨달음을 원한다고 말한다. 클럽에 가서 낯선 이성을 만나고 싶으면서 그 대신 깨닫고 싶다고 말하고, 회사에서 자신을 구박하는 과장을 한 대 때리고 싶으면서 그 대신 깨닫고 싶다고 말한다.
번뇌의 소재 자체도 물론 언어적으로 미화시켜놓는다. 노년의 나이가 되었어도 여전히 10대 아이돌이라도 된 것처럼 사람들이 자기를 귀엽게 봐주기를 소망하는 이는, 그 대신에 자신은 모든 이의 다양성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는 현실을 원한다고 말하며, 또 그런 것을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비난받는 것이 두려운 이유도 있겠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많이 수줍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생얼굴이 아직 낯설다. 그다지 친하지 않은 사이라서 그 얼굴을 보는 일이 좀 부끄럽다.
수줍음이 있는 곳은 귀여움이 있는 곳이다.
귀여움은 귀함의 가장 원초적인 표현.
귀여움이 있는 곳에 깨달음도 있다.
우리가 수치스러운 그 자리가 바로 우리가 가장 귀해질 그 자리다.
말은 쉽게 하지만 물론 이 지점이 가장 어렵다. 수치스러운 것을 귀한 것으로 포착하는 일은 분명 우리에게 무척이나 어렵게 생각되는 일이다. 수치심 안에서는 도무지 귀하게 볼 여지가 나오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힘들게 귀해지는 일은 또 무슨 의미가 있나. 가성비도 안맞는 것 같다. 차라리 500억 원이 있다면 바로 귀해질 수 있을텐데.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다들 500억 원을 꿈꾸는 것이다. 깨달음은 뭔 깨달음인가. 자신을 진정하게 변화시켜줄 것은 500억 원이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필요하다. 오케이. 결정했다. 500억 원을 갖겠다.
이처럼 우리가 정직해질 수 있다면, 아주 좋다. 여기가 출발점이다.
자신이 정말로 무엇을 원하고 있었는지를 분명하게 알게 된 바로 이 자리에서부터, 깨달음의 모험은 시작된다.
자신이 원하는 그것을 100%로 소망하고 있는 그 순수함. 100%의 순도.
그래서 그것은 100%다.
최대로 있는 것. 바로 온전함이다.
그러니 소망하던 그것은 어설프게 이루어지지 않을수록 좋다. 한 30% 정도 이루어서 만족한다면 그건 단지 30%일 뿐이다.
불가능한 것을, 할 수 없는 것을, 되지 않는 것을 소망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역설적으로 그것이 불가능한 소망이어야 그 소망은 100%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번뇌라는 것이 원래 그러한 속성을 갖는다.
이를테면, 엄마가 이 세상에 없는 이가, 자기를 무조건적으로 지켜줄 엄마를 여전히 소망한다. 그러한 번뇌에 사로잡혀 있다. 엄마와 같은 여자친구를 찾아 그는 긴 시간을 헤맸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대상들을 통해 한 60~70% 정도는 자신의 소망을 채워봤을 수도 있다. 어느 때는 99%에 육박했을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순수하다. 100%로 이루어지지 않는 한 그는 정직하게 만족할 수 없다.
그러다가 그는 세상의 어떤 대상을 통해서도 자신의 소망을 100%로 이루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필연적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순도 100%로 대상의 추구를 끝까지 해본 이라면 반드시 이 결론에 도달한다.
대상으로 이룰 수 없다면, 이제 그가 이 세상에서 자신의 소망을 이룰 길은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이 100%로 달려온 길이 완전히 닫히려고 할 때, 모든 가능성이 이제 완전히 사멸되려고 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득 고개를 치켜드는 것이 있다.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이루고 싶어."
바로 이 순간이다.
여러가지가 일어난다.
주마등 같은 것도 보게 되고, 전신에 번개도 치고, 열려야 할 것은 다 열리고, 흘러야 할 것은 다 흐르며, 정체성도 초월한다. 더는 자신이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그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이 대체 무엇이었는지 그냥 다 알게 된다. 알 수밖에 없다. 이 모든 것은 바로 지금 이순간만을 위해 달려왔던 그 모든 것이므로.
이때 분명 하나의 인격이 죽는다. 그래서 다시 태어난다는 그 비유적 표현은 정말로 맞다. 종교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는 회심의 순간, 개인에게서 심리적 인격이 죽고 이제 종교적 인격이 탄생한다고 말한다. 아주 정확한 진술이다.
이 상태가 끝이 아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남아있던 것이 있다면 몇 번 더 죽는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깨닫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자신의 소관이 아니다. 자신이 깨달음의 주체 같은 것이 아니다. 마음이 한다. 스스로 한다. 그러니 자기가 쓸고 닦아야 할 것이 애초 아니었다. 그것을 잃기라도 할 것처럼 뭘 해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잃을래야 잃을 수 없는 것이었다. 애초 쓸고 닦을 필요가 없는 것. 그러니 나는 자유다. 영원한 자유다. 다 가졌으며, 영원히 가졌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도, 우리는 이것만 알면 된다.
소망은 지금 완벽하게 100%로 이루어졌다.
모든 불가능성 속에서 그래도 이루고 싶던 그 소망은 이 순간 완전히 실현되었다.
통장잔고는 여전히 28600원이지만 그럼에도 가장 정확하게 이루어졌다. 500억 원의 현실이, 아니 500억 원으로 간절히 꿈꾸던 그 현실이.
번뇌가 이룬 것이며, 마음의 소망이 이루어진 것이다.
스스로.
그럼으로써 이제 모든 것이 변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변한다.
어떤 당연한 법칙이 체화된 까닭이다. 그러니 앞으로의 삶은 그 법칙으로 살게 된다. '스스로'라고 하는 존재의 법칙으로.
이것은 추상적인 이념이 아니라, 자연법칙 중의 자연법칙이다. 중력이 작용한다는 자연법칙의 사실 속에서 사는 이는 50층에서 자신을 내던지지 않듯이, 존재의 법칙으로 사는 현실에서도 동일한 일이 일어난다. 스스로 귀한 그 길로 자연스레 가게 된다.
보이는 것들이 기존과 완전히 달리 보이는 것은, 보는 방식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도 보이고, 보이던 것은 새롭게도 보인다. 그러니 그에 따른 생각도 감정도 달라진다. 삶의 경험들이 바뀐다. 의미의 깊이들이 달라진다. 유행가 가사도 찬송가처럼 들리게 되는 것은, 이제 그 법칙에 따른 구조가 보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보는 그 시선이 완전히 바뀌기에, 자신의 실제적인 신체도 달라진다. 피부도 좋아지고 얼굴에는 빛이 난다. 깨달음은 미용에 좋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막혀있던 것이 이제 흐르게 되었기에, 또 억압해서 막는 일에 낭비되었던 그 심리적 에너지를 이제는 순환계의 유지에 자연스레 동원할 수 있게 되었기에 생겨나는 일이다.
자잘하게 말할 것들은 많겠지만, 핵심은 이것이다.
변한다. 통째로 변한다. 다 바뀐다.
애초 이 글의 제목은 변화에 대한 것이지 않았나. 변화 정도가 아니다. 변혁이다.
가상의 허깨비 같던 것에서 우리는 이제 진짜로, 그 리얼리티로 변혁된다. 완전히 다른 세상에 입성한 것이고, 완전히 다른 삶을 얻은 것이다.
그 무엇과도, 우리가 그 전까지 그것에 대해 상상해온 그 어떤 것과도 다른, 바로 나이기에.
만나봐야 알 수 있다. 우리가 그 모든 소망으로 그리워했던 것이 바로 이것임을.
그러니 만났으면 다 이룬 것이며, 완벽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만나기 전에는 우리는 그것을 직접 소망할 수 없다. 또 만나고 나면 더는 소망이 아니다. 이미 그것이므로.
깨달음을 소망한다는 말은 그래서 실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웃나라 왕자에게 시집가겠다는 말과도 같다. 우리가 정말로 그런 것을 순도 100%로 소망하는 일이 가능하겠는가?
차라리 그것은 안개 속에 있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용기있게 안개를 헤치고 진격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아주 멋진 일이다. 혹여 그 끝에서 두꺼비 얼굴을 한 왕자를 만나게 되더라도, 그냥 여기에서 이번 인생은 종쳤다 치고 대강 결혼해서 살아야겠다며 그렇게 맹진하는 이의 모습은 훌륭하다.
조금 덜 훌륭한 이들, 그래서 수치스러움을 자주 경험하는 이들을 위해서라면, 그들 자신을 수치스럽게 비추고 있는 지금 그것, 바로 마음을 따라가는 방법도 있다.
이웃나라 왕자는 됐고, 지금 우리 앞의 거울에 비치는 500억 원만을 정직하게 따라가다보면 우리는 자연스레 안개 너머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마음을 등불로 삼아 안개숲을 건너는 것이다. 또는 나비처럼 바람을 따라 흐르고 있는 저 먼지를 좇아 우리는 안개의 골짜기 저편으로 나아간다.
그러면 우리는 반드시 도착한다. 깨달음의 현실에. 우리의 모든 것이 다 바뀌는, 우리가 가장 소망하던 바로 그것으로 변혁되는 바로 그 현실에.
그러니 나는 이런 말을 듣고 싶은 것이다.
"500억 원만 있으면 제가 우주짱인데요. 나쁜 놈들 다 날아차기로 해치우고, 치료비 하라며 돈다발 툭 던져주고, 가족과 친구들에게 1억 원씩 주고, 쌤한테도 한 2억 드리고, 그리고, 그리고, 고양이들한테도 이제 비싼 그레인프리 사료 사주고, 캣타워도 원목으로 된 걸로 다 바꾸고, 아픈데 수술비가 없어서 고양이별로 먼저 떠나보내는 일은 이제 절대 없을 거예요."
나는 들었다.
모든 수치스러움은 다 아픔이었음을.
그리고 그 눈물이야말로, 이 우주에서 가장 귀한 것을 스스로 증거하고 있었음을.
우리가 번뇌라고 한때 불렀던 그 사랑은, 이제 모든 것을 다 바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