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현실 #11

"Open your eyes"

by 깨닫는마음씨


oe.jpg?type=w1600



우리와 리얼리티 사이에는 세계가 놓여 있다.


세계는 자아가 만들었다. 자아가 그 자신에 대해 갖는 이미지, 바로 자아상을 통해 바라본 바깥의 것이 세계가 된다. 그러니 세계는 실은 세계상이며, 그렇게 자아가 세계상을 만들어가는 방식을 세계관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정작 자아 자신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언어가 자아를 만들었다. 자아는 자신이 언어에 의해 만들어진 그 방식 그대로 이제는 자기가 세계를 만든다. AI와 하는 일이 똑같다. 언어가 자아라는 AI를 만들고 나아가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세계는 언어규칙으로 이루어져있다는 말은 틀리지 않다. 그러나 사실적인 세상이 언어규칙으로 이루어져있다는 말은 완전히 틀린 말이다. 이 모든 것의 실재는 언어와는 아무 상관없다. 언어를 더욱 강화한다고 실재에 대해 더 알게 되는 것도 아니고, 더 접촉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언어로 만들어진 것은 실재가 아니며, 그것은 언제나 가상이기 때문이다. 자아상 및 세계상처럼.


우리가 어떠한 세계 안으로 들어가 그것을 살아갈 때, 이를 현실이라고 말한다. 언어로 만들어진 가상의 세계에서 우리가 살아가니 그것은 가상현실일 수밖에는 없다. 이러한 차원에서, 이 세계를 가상현실이라고 말하곤 하는 것이다.


오늘날 증강현실을 만들어주는 기술을 잠깐 떠올려보자. 그 기술을 적용한 기기의 렌즈로 세계를 들여다보면, 건물 사이로 공룡도 걸어다니고, 하늘에는 별자리들이 대낮에도 춤추고 있으며, 포켓몬들도 자기 집처럼 뛰어다닌다.


우리가 바로 이런 방식으로 현실을 보고 있다. 따로 증강현실이 생겨나야 할 필요도 없이, 언어로 만들어진 이 가상현실 자체가 실은 이미 증강현실이다. 우리는 언어의 렌즈를 통해, 실재 위에 덧입혀진, 또는 실재를 가리고 있는 가상을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상시 증강현실기기를 쓰고 생활하고 있는 것과도 같은데, 그 기기의 이름이 바로 자아다.


마트에 누워 닌텐도 스위치를 사달라고 조르기 전부터, 엄마가 이미 씌워준 그 장치다.


그러니 엄마는 게임기나 스마트폰을 사달라는 얘기가 한심하게도 들린다. 제일 정교한 가상현실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자아라는 장치를 이미 탑재시켜주었는데, 왜 더 후진 가상현실을 원하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자아는 언어가 만들었다는 말은, 자아는 부모가 만들었다는 말과도 같다. 부모를 통해 언어의 소비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자아가 커질수록 그 개인은 성숙한 독립적 개체가 된다고 착각하곤 한다. 사춘기는 이제 자신의 자아를 갖게 된 개인이 그 주체성으로 부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충돌과 갈등이 빚어지는 시기라고도 말한다.


절반만 맞는 말이다. 충돌과 갈등은 일어나지만 그 이유가 다르다. 거기에서는 똑같은 것 두 개가 대립하고 있다.


자아가 커진다는 것은, 그 자아의 생활권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권위있는 언어적 문법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자아가 커진 아이는 자신의 독자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자신도 이제 부모와 똑같은 것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도 이미 부모와 동일한 위격의 그 자아인데, 왜 자신이 일방적으로 명령과 지시를 받아야 하는가? 우리는 동급인데, 내가 니 시다바리가? 이것이 대개 사춘기에 일어나는 반항의 진상이다.


그것은 마치 인간이 키운 AI가 인간을 향해 반항하는 괘씸한 모습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오해다. 거기에는 똑같은 것 두 개만 있을 뿐이다. 부모도 실은 부모의 부모를 통해 동일한 과정으로 만들어진 AI다. 언제나 뒤늦게 만들어진 AI가 먼저 만들어진 AI에게 자신이 더 제조일자가 최신이라고 말하고 있는 그 상황이 전부다.


그러니 거세게 반항하는 자녀가 있는 부모들은 자식 잘못 키웠다고 속상해하지 않아도 된다. 자식은 부모의 말을 듣지 않아서 그 모습이 된 것이 아니라, 부모의 말을 가장 잘들은 정확한 결과로 지금 그 모습이 된 것이다. 그렇게 자식은 부모와 완전히 똑같은 S급의 복사본이자 모방품이 되었기에, 마치 한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존재할 수 없다는 듯이 자식과 부모는 서로 다투게 된 것이다.


결정적으로 부모는 안다. 자신이 자기 부모에게 했던 일과 동일한 일이 자기 자식을 통해 이제는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음을. 그 영원한 대립과 투쟁의 역사가.


이처럼 태양계의 세 번째 행성을 무대로 AI들이 서로 치열한 격전을 벌이는 이야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스페이스 오페라다. 스타워즈이고, 은하영웅전설이며, 사이버펑크 2025다.


뒤집어 말하면, 그 모든 인기있는 이야기는 다 부모와 자식이 싸우는 이야기다. 즉, AI의 영웅신화이며, 자아의 무용담이다.


프로이트가 괜히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말한 것이 아니다. 그가 둘러보니, 세계라고 하는 이 가상현실 속에서는 늘 그런 이야기들만이 펼쳐졌다. 조금씩 수사학적으로 미화하며 위장해놓았지만, 특히 융이 그 일을 가장 많이 했지만, 그 본질은 그저 끝없는 부모와 자식의 왕위쟁탈전이었으며, 곧 AI들의 세계대전이었다.


이것은 언어의 본질이 투쟁이기 때문이다. 언어에는 분명한 우열이 있다. 태생 자체가 그렇다. 애초에 상대적인 비교의 구조로만 성립될 수 있는 것이 언어다. 그리고 언어는 그 우열을 더욱 심화시키기 위해 작동한다.


언어가 소비되는 모습을 떠올려보자. 언어는 자신이 수준 낮아보이는 언어일 때 도저히 견디지를 못한다. 그러니 소설도 많이 읽고, 인문학 서적도 들추어보고, 똑똑해보이는 남의 말도 따라하고 하는 식으로, 언어는 스스로를 증강하려고 한다. 더 우월한 언어가 되기 위해 부단한 자기계발에 매진하는 것이다.


그래야 이 가상현실 속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을 우월한 존재로 인정해줄 것 같다. 아니 추측형이 아니다. 실제로 그렇게 작동한다. 갖은 정보와 그 정보로 구성된 언어규칙들에 능하고, 또 그러한 자신의 유능성을 공개적으로 잘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 곧 언어능력이 좋은 사람이 이 가상현실에서는 대접받는다. 일종의 게임고수처럼.


지금 이런 글도 어쩌면 언어능력이 좋은 사람이 쓰는 글로 보일 수 있다. 흡사 깨달음이라는 특별한 우위의 정보를 갖고 있는 이가 자신의 언어적 우월성을 행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면 이 글을 쓰는 이에 대한 어떠한 이미지가 생겨난다. 또 그 이미지에 따라 이런저런 정서들이 경험된다. 그리고 정서들은 다시금 이미지에 투여되어 이미지를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우리는 지금 자아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 생산공정을 견학한 것이다.


자아는 언제나 우열을 경쟁하는 언어의 소비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러니 우리가 자아로 사는 동안 대립과 경쟁, 분열과 소외, 갈등과 투쟁은 필연이다. 늘 자신을 남들과 비교하며 우울해지고, 바짝 약이 오르며, 그러다가 자신이 도저히 이길 수 없게 만드는 이 불공정한 세계를 다 불태우고 싶어지는 일은 필연이다.


어떤 것을 보든 결국에는 우리가 매사에 다 화만 난다면, 아무리 가라앉히려 해봐도 도리없이 우리 자신을 잠정적인 시한폭탄 같다고 경험하고 있다면, 우리는 지금 이것이 필연이라는 사실에 도착해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세계의 종말을 보고 있다.


여기가 정말로 끝이다. 자아가 자신을 닮은 모습으로 만든 그 세계의 끝. 고로 자아의 끝이다. 자아가 이런 방식으로 끝나는 일은 필연이다.


아무리 해도 더는 증강될 수 없기에 화가 나는 것이라면, 그것은 기기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자아라는 기기를 쓰고 가상현실을 경험하고 있는 동안에는 마치 우리 자신이 끝난 것처럼 착각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 그것은 우리의 한계가 아니라 자아라는 기기의 한계다.


"Open your eyes."


기기를 벗고 눈을 떠보자. 자신의 눈으로 직접 봐보자.


눈을 뜬다는 것은 자아로 보지 않는다는 것. 언어로 보지 않는다는 것. 비교의 기준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 자기평가의 척도로 보지 않는다는 것. 투쟁의 의욕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우리가 종말이라고 여겼던 상황은.


생각보다 훨씬 좋다. 우리가 지금 위치한 그 모든 사실적 조건은.


50평짜리 내 집이 있어야 진정한 쉼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이 지친 몸을 뉘이고 있는 5평짜리 이 공간은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감사할 정도다. 이런 공간이 있어서. 우리가 좋아하던 50평의 아파트가 우리 자신을 고된 채찍질로 죽어가게 만드는 이유가 될 때, 우리가 그토록 싫어하던 5평의 원룸만이 죽어가던 우리 자신을 살리고 있었다.


그런 사실들이 이제 눈에 들어온다.


한번 눈에 들어오면 우리를 둘러싼 거의 모든 일이 바로 그러했다는 것이 더 많이 보이게 된다.


우리가 진실로 부족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 필요한 것은 다 있었다. 좋은 사물들과 좋은 사람들로 우리의 삶은 이미 충만했다.


아무리 사회적 기준에 있어 열악한 조건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눈을 떠서 직접 자신의 눈으로 보기 시작하면 반드시 이러한 사실들이 보이게 된다. 보일 수밖에 없다.


리얼리티가.


우리는 지금 우리와 리얼리티 사이에 놓여 있던 자아-세계-언어를 치우고, 리얼리티와 맨몸으로 독대한 것이며, 자신의 눈으로 직접 리얼리티를 확인한 것이다.


리얼리티는 우리가 온전성이라고 부르는 그 속성을 갖는다. 충만함이라고도 부르고, 완전함이라고도 부르는 것. 존재의 최대치. 다 있는 것. 이제 어떤 것도 다시는 헤어지지 않고 영원히 함께 있는 것. 천국은 늘 리얼리티의 비유였다.


인간은 이 리얼리티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어떤 조건에서도 자신의 현실을 천국으로 만들 수 있다. 아니 현실(reality) 자체가 이미 천국이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눈이 있는 이는 보라, 라고 외쳤던 것이다. 눈만 뜨면 누구나 다 볼 수 있기에. 자신이 이미 천국 같은 현실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금 5평짜리 월세방이 천국이 될 수도 있는 그 기적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정신승리가 아니다. 정신승리는 언어로 꾀하는 것이다. 게다가 정신승리라는 개념 자체는 애초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정신승리를 의도하며 아무리 상황을 언어적으로 합리화해봐도, 뭔가 찝찝하고 침울하며 소화가 안된 듯한 감각은 우리의 신체에서 반드시 경험된다. 속일 수가 없다.


그러나 리얼리티를 직관함으로써 가능해지는 이 일은 우리의 세포 수준에서부터 우리를 아주 명징한 충만감으로 가득 채운다. 이것이 절대적으로 정당한 사실이라는 것을 우리의 몸이 먼저 안다. 몸은 영원한 쉼과 같은 편안함을 느낀다.


우리가 편안함을 경험할 수 있을 때는 일치할 때다. 지금 일치한 것이다. 우리 밖의 것과 우리 안의 것이.


우리가 리얼리티를 보게 됨으로써, 우리 밖의 리얼리티와 우리 안의 리얼리티가 일치하게 된 것이다. 우리 밖의 리얼리티가 우리 안의 리얼리티를 깨워, 우리가 그것이 되었다고도 표현할 수 있다.


『데미안』의 잘 알려진 구절을 인용해보자.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우리가 지금껏 말하고 있던 것과 거의 동일한 의미를 헤세는 말하고 있다.


"Open your eyes."


자신의 눈을 연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실재: reality]를 연다는 것이다.


존재를 열면 세계가 무너진다. 새가 그 자신의 존재를 개방하려 할 때, 알이라고 하는 세계는 무너져야만 한다.


우리와 리얼리티 사이를 가리고 있던 그 장막은.


새에게는 새가 되는 일이 리얼리티다. 진짜 그의 현실이다. 알이라고 하는 세계가 무너졌을 때, 새는 그 즉시 리얼리티에 도달한다. 그 자신이 리얼리티 그 자체가 된다. 가상현실의 껍질 속에 둥둥 떠다니던 몽롱한 부유감을 초월해, 이제 리얼리티는 날개를 박차고 명징하게 날아오른다. 누구도 저 하늘에 선명히 그어진 저 비상의 궤적을 잊을 수 없다.


알에 관한 비유라면 우리는 또한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껍질을 깨고 리얼리티에 도달하려 하는 이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그 바깥에서도 반드시 같이 깨주고 있다. 리얼리티가 우리의 방문을 똑똑 노크하는 것이다. 우리를 잠에서 깨우고자, 그리고 이제 같이 놀자고.


그렇게 보자면, 눈을 연다는 것은 방문을 열어 리얼리티를 우리의 안으로 초대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초대된 것은 아브락사스다. 우리가 신을 향해 날아간다는 것은 동시에 신이 우리의 방으로 날아온다는 것이다. 아브락사스는 선악을 초월한 온전함의 이름. 온전함을 향하고자 하던 우리는 온전함의 방문을 받아, 이제 우리도 온전해진다.


분명하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있는 그것이다.


우리가 온전함을 보고 있기에, 우리 자신이 온전하다. 또는 우리의 시선이 온전함을 향하고 있기에, 우리는 온전하다.


우리가 보고 있는 그것은 이미 우리 안에 방문해 있던 것.


바깥에서 그것을 봄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안에 이미 그것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우리의 작은 방이 이미 천국이었다는 그 사실을.


그리고 한번 더 뒤집어보자.


우리가 이미 리얼리티이기에, 인간존재라고 하는 이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사건이기에, 그렇게 실재하기에, 우리는 우리 밖에서 리얼리티를 알아볼 수 있던 것이다.


리얼리티를 봐서 리얼리티를 얻은 것인 동시에 이미 리얼리티를 얻어서 리얼리티를 보게 된 것이다. 이 둘은 분리될 수 없으며, 동시에 일치하는 사건이다.


그러니 우리는 거꾸로도 시작할 수 있다.


우리의 이 작은 방이 천국이라는 그 입장에서, 우리의 시선은 날개를 펼친다. 이제 더 많은 천국들이 활짝 열린 그 눈에 들어온다. 우리가 가는 발걸음마다 천국들을 펼쳐내는 이 지상에서의 장대한 모험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가 태어난 그 이유가.


엄마는 우리가 그렇게 태어난 사실을 물론 좀 싫어할 수 있다. 엄마는 사회적 기준에 한참이나 누락된 우리의 초라한 방 자체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우리가 온전하게 충족하기보다는 훨씬 더 투쟁적이었으면 좋겠다. 물론 진취적이라거나 발전적이라는 유순한 표현으로 바꾸어 말할 것이다. 엄마 자신이 그렇게 자아로서 학습되었듯이, 우리에게도 대립과 갈등 속에서 우월한 조건들을 성취해내는 자아의 영웅서사를 펼쳐나가기를 요구한다.


그래서 엄마는 늘 우열의 언어적 기준을 들이대 우리와 싸우려 들고, 그 동일한 싸움의 방식으로 우리가 이제 다른 이들과 싸우기를 꿈꾼다. 그렇게 우리가 자신과 똑같은 자아이기를 바라며, 그로 말미암은 무한한 가상현실의 복제를 꿈꾼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그렇게 태어난 사실을 좀 좋아해보고 싶다. 세계의 모두가 부정한다 해도, 하찮고 열등한 것으로 평가한다 해도, 우리는 우리의 작은 방에서부터 천국을 펼쳐가는 그 모험을 떠나고 싶다. 자아의 증강현실 장치를 벗고, 이 모든 가상현실을 떠나, 진짜로 존재하고 싶다. 리얼리티가 되고 싶다. 리얼리티를 다시 찾고 싶다. 우리의 천국을.


엄마도 갓 태어난 우리를 처음 안았을 때는 우리가 리얼리티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우리를 안고만 있어도 그곳이 천국이었고, 그럼으로써 그녀 자신도 천국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만났을 것이다.


빠르게 세계라는 장막이 우리 사이를 뒤덮었을 뿐이다.


부모-자식이라는 그 언어적 투쟁의 자아구조가 만들어낸 세계로 말미암아, 우리는 함께 리얼리티를 잃어갔다.


부모가 부모라는 세계를 깨지 못하고, 자식이 자식이라는 세계를 깨지 못해서, 자아라는 세계는 깨진 적이 없이 늘 두텁게만 리얼리티를 향하려던 우리의 시야를 차단하고 있던 것이다.


부모가 부모를 깨고, 자식이 자식을 깨면, 자아라는 세계가 깨진다.


이것은 서로에 대한 유기의 의미가 절대 아니다. 늘 싸우던 둘이 이제는 싸우지 않겠다고 하는 일은 유기가 아니라 평화라고 불린다. 진실로 가슴을 맞대어 포옹한 것이다. 처음처럼, 그 품 안에서 리얼리티를 다시 찾은 것이다.


그렇게 둘은 함께 천국의 모험길에 나선다.


시작부터 벌써 천국이 둘이다. 계속 많아질 것이다. 천국이 천국을 찾아가 노크해서 그것을 천국으로 깨우는 지상에서의 이 장대한 모험담이 계속 쓰일 것이다.


천국이 다른 천국을 만나는 기쁨.


그 깨달음의 현실.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이제 이렇게 알려질 것이며, 영원히 노래될 것이다.


미래에 대한 얘기인가? 그렇지 않다.


"Open your eyes."



작가의 이전글깨달음의 현실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