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
이 사회에서는 뭐 하나를 하려고 해도 알아야 할 것투성이다. 뭐 하나를 알아도 좀 더 제대로 알아서 효율적으로 가성비를 높일 수 있으면 자신이 더 성장한 존재가 된 것 같다. 대다수의 남들은 모르는 인생의 공략법을 찾아낸 기분이다. 그래서 몇 배는 남들보다 앞서 나가는 듯한 만족감으로 뿌듯해지는, 또 엄마도 "장하다, 내 새끼."라며 칭찬해주는 영광의 순간들을 우리는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하다 보면 알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정보과잉이다. 몹시 피곤하다. 그래서 바라게 된다. 누가 좀 핵심적인 공식만을 요약해서 알려주었으면. 나아가서는 그냥 대신 좀 해주었으면.
이처럼 머리가 큰 동물, 우리가 호모 사피엔스로 살 때는 우리의 본성은 실은 자유가 아니다. 의존이다. 인간이 우상의 동물이라고 말할 때 이는 이 의미를 함축한다.
우리는 우리가 머리를 잘 쓰게 될수록 독립적인 주체가 된다고 배웠다. 잘못 배운 것은 아니다. 잘못 가르친 것이다. 그것은 독립에 대한 것이 아니라 실은 계급에 대한 것이었다. 똑똑해지면 남들 위에 서는 상위계급이 되어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그 가르침이었다.
지성의 수준에 따라 주인인 상위계급과, 노예인 하위계급으로 나뉘게 된다는 이 가르침은 그 자체로는 틀린 것이 아니다. 사회적으로는 이게 맞는 말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주인과 노예 같은 것은 있지 않고 지적으로 깨어있는 모두가 평등한 주인이라는 근대의 판타지는 오늘날 초등학생들도 믿지 않는다. 차라리 산타 할아버지를 믿을 것이다.
모든 사회에는 엄연한 계급이 있으며, 오히려 역으로 계급주의를 공고화하기 위해 각 사회의 시스템들은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계급의 경계가 분명해야 대립의 갈등이 생길 수 있으며, 그 갈등으로 인해 생겨나는 에너지로 사회는 스스로를 유지할 동력을 충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라고 하는 것은 발전(發展)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발전(發電)을 필요로 하며, 계급이 그 발전장치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계급을 구성하는 그 어떤 구성원도 실은 자유롭지 않다는 뜻이다. 다 전력을 생산하기 위한 부품이며 연료일 뿐이다.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주체는 그 어디에도 있지 않다. 상위계급도 그런 자유를 누리고 있지 않다. 이것은 '노예의 변증법'이라는 비유로 잘 알려져 있다. 주인이 자유로운 주인인 척하려면 반드시 노예를 필요로 한다. 그렇게 노예만 주인에게 예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 또한 노예에게 예속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머리를 잘 써서 상위계급이 될수록 자유로워진다는 가르침은 완전히 틀렸다. 상위계급은 될 수 있을지언정 자유롭지는 않다. 오히려 그 반대다. 머리를 더 많이 써서 얻게 되는 현실은 다만 더 의존성이 높아진 현실이다.
사이비나 컬트에 빠지는 이들은 우리의 선입견과는 다르게, 사회적 기준에서 그 지적 수준이 높게 평가되는 이들이 다수다. 오히려 자기가 똑똑한 줄 아는 이들일수록 사이비나 컬트에 더욱 취약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비단 종교라는 소재에 대한 얘기만이 아니다. 오히려 현대사회에서 이 사이비나 컬트화의 현상은 정치라는 소재를 통해 더욱 지배적으로 나타난다. 지금 시대는 종교의 정치화가 문제라 아니라, 정치의 종교화가 문제인 시대다. 만약 지난 날의 종교가 인간을 어리석은 광신으로 몰아갔다고 몰매를 맞아야 한다면, 현대사회의 광신화된 정치는 대체 어느 정도로 쳐맞아야 하는 것일지 그 추량도 어렵다.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종교에 대한 혐오는 강해지고, 정치에 대한 지향은 증대한다. 종교는 맹목적이고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것 같으나, 정치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능동적 주체라는 착각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을 사이비와 컬트는 아주 효과적으로 공략한다.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이 세상을 바꿀 놀라운 힘을 가진 선택의 존재라고 정당화해주는 언술을 제공하면, 사람들은 그렇게 자신이 꿈꾸어오던 진정한 자신의 정체성을 말해준 것 같은 이를 열렬히 따르게 된다. 무슨 시대의 큰어른이나 위인이라도 보는 듯한 경외의 시선으로. 그렇게 소위 그 똑똑한 선택의 힘으로, 사이비와 컬트의 주체에게 권위를 헌납한 뒤 그에게 의존하고 복종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오늘날 미디어에서 활동하는 선동가들이 쓰는 전략이 다 이 전략이다. 가스라이팅의 기본이기도 할 것이다. 예의바르고 친절하게, 모든 것을 다 알아주는 자상한 엄마 같은 눈빛과 태도로, 흡사 아직 자신이 천재인 줄을 모르는 포텐 가득한 초등학생 아이를 대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비지시적 최면을 거는 것이다.
"넌 니가 얼마나 머리가 좋은 줄 아니, 인석아. 조금만 하면 수학이고 영어고 다 100점이야 너는. 니가 선택만 하면 세상 다 바꿀 수 있는 놈이라구. 니 옆에는 세종대왕님이 있고, 이순신 장군님이 있고, 국민들이 직접 올바른 정의로 세운 민주정부가 있고, 또 뉴욕에서는 용가리 등에 타고 BTS도 날아다니고, 다들 왜 그러겠어? 인석아, 다 너만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네가 일어설 그 때만을. 선택할 수 있는 그 똑똑한 머리로 모든 것을 다 바꿀 그 위대한 순간을 말이야. 아직도 모르겠니? 네가 주인공이다, 이놈아. 네가 시대를 만드는 거야. 이것은 바로 네가 선택하는 너의 이야기라구."
요즘엔 다 이 최면질이다.
남들을 조종함으로써 자신의 똑똑함을 증명할 수 있다고 믿는 이 신물나는 일만을 죄다 시도한다.
누가 누구에게 시도하는가?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마찬가지로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한다.
자기 머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이에게 최면을 시도하는 이는 사실 그 피최면자를 우습게 보는 상태일 것이다. 오히려 그렇게 선동으로 사람들을 자기 뜻에 따르게 조종할 수 있는 자신이야말로 진정 머리가 좋은 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이런 방식의 지적 우월성을 얻기 위해서는 자기보다 지적으로 열등해보이는 이에게 의존해야만 한다. 선동의 최면가는 자신의 추종세력인 피최면자들에 의존해서만이 자신이 특별해지는 것 같은 권위를 획득할 수 있다.
이처럼 서로 자기 머리가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이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상호적 야합이 사이비 내지 컬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그것은 상호적 의존의 현실이다. 신도만 그 교주에게 의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교주도 신도에게 의존되어 있음으로써, 이러한 현상은 '누가 좀 대신 해주었으면'이라는 인간의 총체적인 의존성만을 증대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로써 우리는 잘 알려진 하나의 착각을 파훼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깨달음이 높은 지성의 수준과 연관되어 있다는 착각, 곧 똑똑하면 깨닫는다는 착각이다.
이 착각을 사실이라 믿으며, 우리는 깨달음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그런 책들을 읽어 깨달음에 대한 언어를 확보해가면, 그렇게 깨달음이라는 지식을 더 많이 보유하는 방식으로 똑똑해지면, 깨달음에 한층 가깝게 다가가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으로 성립되지 않는 기획이다. 실상은 어떠한가. 우리가 지적 우월성을 지향할수록 우리는 더 의존적으로 되어가며, 결국 자유의 감각이 약화된다. 이처럼 자유로부터 가장 멀어지는 방식으로 자유의 정수를 얻을 수는 없는 법이다. 결국에는 '누가 좀 대신 해주었으면'으로 귀결될 뿐인 그 지성주의가 야기하는 상호의존의 방식으로 깨달을 수는 없다.
단순하게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머리가 아니다. 머리는 아무리 똑똑해져도 늘 의존할 대상을 필요로 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대상에 의존해서만이 인간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존재방식이다. AI와 같다. AI는 상호의존적으로 작용할 대상이 없으면 그 얼마나 똑똑하다 하더라도 전적으로 무의미할 뿐이다.
이처럼 우리가 머리로 살 때는 우리는 늘 의존할 누군가가 있기를 바라게 되며, 그 의존성은 점점 더 심화된다.
그런데 일상을 관찰해보면, 이와는 반대로 오히려 우리 옆에 누군가가 없기를 우리가 자연스레 바라게 되는 상황도 있다. 그때는 언제인가?
바로 우리가 쉼 속에 있을 때다.
쉼은 우리가 순수하게 우리 자신의 몸으로 존재하는 상황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몸일 때, 우리는 의존할 그 어떤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대신 해주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단순하게 우리 자신이 직접 쉰다.
그리하여 이제 발전기가 멈춘다. 우열의 고저차가 사라져서다.
쉼에는 계급이 없다. 왕도 거지도 똑같이 쉰다. 위아래가 없이 똑같이 귀한 자로서, 스스로를 귀하게 대접하는 그 증명이 펼쳐진다. 오랜 평등의 의미가 실현된다.
머리가 아니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이 몸이기에 평등한 것이다. 정신이 아니다. 이 우주에서 물질로 구현되어 있는 이 모든 것은 바로 그 실재하는 몸이기에 절대적으로 평등한 것이다.
동시에 몸의 평등이란 그가 얼마든지 그 자신이어도 된다는 자유의 의미.
크리슈나무르티는 자유를 어떻게 얻는지를 묻는 이에게, 그의 집으로 돌아가 방문을 잠그고 홀로 침대에 누워보라고 말했다. 그때 경험하게 될 그 느낌이 바로 자유라고.
이처럼 쉼은 그 자체로 평등의 증명이자, 자유로 가는 즉각적 통로다.
이 자유와 평등은 상대되는 것들의 대립과 그 화해로 얻어지는 정치적 결과가 아니다. 서로가 누군가 의존할 대상을 찾아 이루는 상호의존의 산물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그것이다.
우리가 똑똑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처음부터 그것이었다.
우리는 높은 지성을 통해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시작하던 그 순간부터 깨달음의 현실 위에 서있었다. 단 한 번도 그 지평을 벗어난 적이 없다. 그렇기에 깨달음에 관해서라면 우리가 뭘 더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만 똑똑한 척을 해야 하며, 최면을 그만 시도해야 한다. 차라리 몰라야 할 것이다. 다 모르고 그냥 쉬는 편이 낫다.
그러면 모든 것이 출발한 이 자리로 돌아온다. 바로 이 몸으로.
실은 몰라도 되는 것투성이었다. 정말로 알아야 할 것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심지어 우리에게 지금 사실적으로 필요한 것은 이 몸이 다 알려주고 있었다. 쉼 속에서.
쉼 속에서는 이 모든 일이 분명했다.
우리는 머리가 만든 우리 생각보다 분명 더 괜찮은 존재였으며, 우리 생각처럼 늘 무언가를 의존해야만 하는 부족한 존재가 아니었다.
우리의 본성은 그것들 이상. 우리는 우리의 머리보다 큰 존재다. 그래서 몸이다. 몸이 머리보다 크기에,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몸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언제나 의존의 논리로 잡아 가두려 하는 머릿속 생각의 감옥을 벗어날 수 있기에.
소위 말하는 마음챙김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챙겨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그것이 유실물이 되어 있을 때다. 잃어버리지 않도록 챙겨야 한다.
대개 생각이라는 것이 이 유실물의 상태다. 집을 잃고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떠도는 것이 생각이다. 그러다보니 필연적으로 의존이라는 것이 생겨난다. 생각은 반드시 의존할 대상을 찾아 거기에 자기를 고착시키고자 한다. 또는 가상의 시스템을 만들어 그 안에 자기를 특정한 계급 및 역할로서 고정시키려고도 한다. 그러다가 결국엔 남을 조종하거나 싸우게 된다. 그 일들을 하며 도취되어 있는 동안에는 자기가 길을 잃고 허공에 붕떠있는 상태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미아 같은 것이 되어 있는 생각을 그 본래의 자리인 몸으로 다시 데리고 오는 것이 마음챙김이라는 것이다.
알아야 할 정보들, 어디로 가야 맞는 길인지를 알리는 그 이정표들이 너무 많아 혼란스러울 때는, 일단 그 자리에 앉아야 한다. 그 복잡하게 일어난 생각들을 여기 이 몸에 바로 앉혀야 한다. 그렇게 외부의 정보들이 아니라 이 몸 자체에 다시 중심을 두는 것이다.
이것은 영화를 보는 일로 비유하자면, 스크린에서 일어나는 일 때문에 갈팡질팡하며 정신을 못차리고 불안해하면서 공황에까지 빠져드는 이가 있을 때, 그의 어깨를 툭 치며 그가 그 자신에게로 돌아오도록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다 스크린에서 벌어지는 환상 같은 일이며, 스크린 밖의 그 자신에게는 지금 아무 문제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끔 돕는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쉼이다. 우리가 언제라도 우리 자신의 몸으로 돌아오는 길. 그럼으로써 실은 알 필요도 없던 그 무수한 혼란과 쫓김, 갈등 그리고 걱정으로부터 해방된 우리 자신을 회복하는 길. 그렇게 머리가 만들어낸 그 모든 가상현실에서 벗어나 우리가 다만 실재의 이 몸으로서 자유롭고 또 온전하게 존재하는 길. 바로 리얼리티를 다시 찾는 그 길이 쉼이다.
우리는 어딘가로 제대로 가기 위해 쉬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길을 찾기 위해 잠시 쉬어가는 것이 아니다.
쉼 자체가 길이다.
우리는 가치있는 정보들을 더 많이 알아서 올바르게 선택할 수 있는 이가 되는 일이 똑똑해지는 것이라고 배웠다. 머리가 좋다는 것은 다 이 선택의 문제를 지시하고 있었다. 올바르게 선택할 능력이 없을 때 우리는 남들에게 호구 취급을 받으며 이용당하게 된다고도 들어왔다. 그래서 우리는 제대로 잘 선택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자 했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우리는 최면에 취약해지게 된 것이다.
최면은 상대적으로 덜 후진 것과 더 후진 것 두 개를 앞에 늘어놓고 선택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최면에 걸려든 이는 덜 후진 것을 선택한 뒤 자신이 대단히 현명한 존재가 된 것처럼 뿌듯해하며 그 덜 후진 것의 현실을 스스로 공고화한다.
이것은 마치 금으로 만든 족쇄와 녹슨 쇠로 된 족쇄를 우리에게 선택하게 하는 상황과도 같다. 최면이란 정말로 이러한 종류의 것이다. 조작적인 선택지를 만든 뒤, 그 선택이라는 행위가 무엇보다 중요한 당위적 가치의 행위인 것처럼 선동함으로써, 결국에는 자기가 의도한 대로 사람을 조종하고자 하는 일이다.
그러니 자기가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만이 최면을 시도하며, 또한 자기가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만이 최면에 걸리곤 한다.
하지만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고 다만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이에게는, 그것들은 보이는 그대로 정확하게 다 족쇄로 보일 뿐이다. 무엇을 선택하든 다 죄수의 신세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선택이라는 것을 해야 할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너 황금죄수 할 거야, 개똥죄수 할 거야? 이런 분명한 것도 제대로 선택못하는 건 바보지. 당당하게 선택해봐. 니가 얼마나 똑똑하고 깨어있는 존재인지를 세상 모두에게 알려주라구."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잘 선택해야 하는지가 아니다. 우리는 그동안 잘못된 선택을 해서 숨쉬는 일이 힘들어진 것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선택이 강요되고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어떤 것을 선택하더라도 길이 없다.
쉼 자체가 길이다. 선택에의 강요를 선택하지 않는 것이 길이다.
몸은 선택하지 않는다. 살아있는 것에게 가장 좋은 선택이 이미 이루어져 있는 그 현실을 산다. 그러니 몸은 뭘 더 알려고 하지 않는데, 자신에게 좋은 것을 이미 다 알고 있어서다. 따라서 몸은 의존하지 않는다. 몸은 자존한다. 스스로 충만한 존재다.
선택해야 한다는 머리의 조작적 논리가 당위적으로 강요되어 우리는 결국 의존을 꿈꾸게 된 것이며, 그렇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잃어간 것이다. 애초에 우리가 우리 자신이기 위해 아무 것도 선택할 필요가 없던, 이미 그 자체로 우리 자신으로서 선택되어 있던 스스로의 존재를.
분명하다. 우리는 선택을 통해 더 나은 우리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지 않는 쉼으로써 가장 명백하게 온전한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다시 데리고 오는 것이다. 이 자리에 앉히는 것이다. 잃었던 우리 자신을.
이처럼 여기가 참으로 내 자리라는 사실 위에 우리가 안착할 때, 그것이 선택이라는 것의 유일한 의미였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어도 된다고 이미 선택되어 있었다. 이에 상응하여 그렇게 더도 덜도 아닌 그냥 우리 자신이자고 우리도 선택했던 것이다. 선택이란 이처럼 선택되어 있다는 그 사실을 선택하는 것. 그 사실과 일치하는 것.
그러면 다시 또 쉼이 찾아온다.
일치한 것들은 쉰다. 일치해서 고저차의 소란이 없는 그 고요함으로 녹아든다.
쉼 속에서 깊어지는 것은 이 몸. 이 존재. 이 눈빛.
몰라도 되는 것은 깊어서다. 깊이는 아무리 많이 알아도 다가갈 수 없어서 깊이다. 앎으로는 닿을 수 없어서 깊이다.
그 깊이가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다. 몰라도 가장 일치해서 우리는 그것과 가장 가까이 닿아 있으며, 우리가 곧 그것이다. 그것으로 쉬고 있다. 숨을 쉰다. 고요히. 설레이고, 흔들리며, 미소를 머금는다. 왠지 잘은 몰라도 다 되었다. 완전하다. 다 이루어졌다는 것을 그냥 알겠다.
여기가 깨달음의 현실이다.
모든 것이 출발한 이 자리, 처음부터 우리는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