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의미"
깨달음에 대한 중2병 판타지가 있다.
그것은 대체로 유신론적 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한 완벽한 오해와 착각에서 시작되곤 한다. 인간을 억압하는 신을, 또는 그러한 환상을 숭배하는 어리석은 전통으로 기독교를 상정한 뒤, 그에 대한 대안으로 깨달음이라는 표현을 남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오용되는 깨달음의 내용은 또한 매우 자주 불교에 대한 완벽한 오해와 착각으로 구성된다. 신을 믿는 유치한 기독교와는 달리, 불교는 인간의 문제를 인간이 스스로 해결하는 자립적인 전통이라면서, 마치 부모에게 의존적인 초딩의 상태에서 벗어나 자기가 독립적인 어른인 줄 아는 중딩적인 어떤 것이 종종 깨달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중2병이다.
이 중2병은 무협지적 내러티브와 결합해 더 나아가기도 한다. 신에게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특별한 지성의 힘으로 자신만의 길을 가는 어둠의 귀공자 같은 모습은 종종 묘사된다. "기도하지마! 기도를 하면 손이 놀잖아. 네가 쥐고 있는 그건 뭐야!"라는 걸작만화 『베르세르크』의 명대사를 인용해, 어떤 고독한 투쟁의 순간을 시지프처럼 비장하게 관통해나가는 일이 흡사 깨달음의 모습이기라도 한 양 그려지는 일도 빈번하다.
깨달음에 대한 이러한 오해와 착각의 이미지는 다 자기 부모와의 관계가 투사된 것이다.
부당한 권위의 폭력을 행사하는 독재자 아빠에게 굴복하지 않고, 비굴하게 의존하지 않으며, 그것을 넘어 혼자 할 수 있는 힘과 권위를 갖춘 내가 되겠어, 라는 식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깨달음에 대한 오해와 착각의 이미지는 또한 엄마와 유착된 내용을 포함한다.
엄마가 아빠에게 주도권을 빼앗아 자기가 독재하려는 그 의도를 오히려 아빠에게 투사한 뒤, 이제 아빠를 권위적인 독재자로 만들고 자기는 그에 대한 억울한 피해자처럼 행세하고 있던 그 작위적이고도 기만적인 연극의 상황이 있다. 그러면 아이는 그러한 연극이 창출해낸 엄마의 감정과 융합하여 동일시된 뒤, 그게 자기 감정이라고 믿으며 아빠를 공박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가 무슨 정의로운 히어로가 되기라도 한 것 같은 그 연극적 도취 속에서, 기만에 기만을 더해간다.
부당한 독재자인 아빠로부터 순수한 약자인 엄마를 지킨다는 이 엄마와의 기만적 유착의 일은 더 나아가, 마치 이것이 깨달음의 모습인 것처럼 착각되는 일도 빈번하다. 이런 경우 거의 대부분 모성은 신성화된다. 신화적으로 엄마가 주도권을 쥐는 일이 맞다고 정당화하려는 의도다. 그 일을 위해 힘쓰고 있는 자신은 무슨 여신의 성투사 같은 것이다. 엄마가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 신성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바로 그 일이 흡사 깨달음의 진정한 임무인 것처럼도 철저히 기만된다.
아주 많은 경우, 신비체험이 바로 이런 방식으로 일어나곤 한다. 자기 안에서, 자기를 다 품어주는 어떤 거대한 수용의 세력을 경험하는 식으로. 그래서 자기는 다 용서받았고, 무슨 일을 해도 이제 다 괜찮을 것 같다. 위대한 모성을 만난 것이다. 마마보이인 자기가 늘 꿈꾸고 희구하던 그것을.
그러니 신비체험이 깨달음이라고 오해하던 이는 이러한 체험을 한 뒤 모성적인 것이 깨달음의 내용이라고 착각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자기가 다 품어주겠다고 하고, 소외되었던 대극의 반대편을 다 알아주겠다고도 하며, 모든 것의 온전성을 다 수용하겠다고 하는 등, 자기에게 늘 그렇게 얘기해주던 엄마의 말과 동일시되어, 이제는 자기가 엄마놀이를 하게 된 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것은 깨달음과 아무 상관이 없다.
그저 자기최면일 뿐이다. 명백한 사실은, 자기에게 그렇게 말해주던 엄마조차 말만 했을 뿐 한 번도 그런 것을 해준 적은 없다는 것이다. 신비체험 후에 자기가 엄마놀이를 시작해보면 그 실체는 여지없이 폭로된다.
자기도 멋있는 척 그렇게 말만 하지, 실제로는 그 일들을 전혀 하지 못한다. 자기 앞에서 징징대듯이 호소하는 이들에 대해, 속으로는 "씨발씨발."하고 있으면서, 겉으로만 자상한 미소로 "네, 그렇지요. 제가 다 이해합니다. 이제 제가 다 알아드리겠습니다."라고 기만적인 연극을 펼치고 있을 뿐이다. 자기 엄마가 자기를 대했던 그 방식과 똑같이.
특히 융의 소설을 따르던 이들이 이러한 양상을 자주 보이곤 한다. 그들은 신비체험을 통해 모성적인 것을 주로 경험하며, 그 자신이 이제 모성의 아바타가 된 것처럼 자주 행세한다. 융이 굉장한 마마보이였고, 평생 그렇게 엄마에게 고착되어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신비체험을 권위로 삼아 모성에 신성을 부여하는 일을 정당화하곤 했다.
그러나 신비체험의 진실은 무엇일까?
우리는 종교심리학을 통해 아주 핵심적인 지점을 이해할 수 있다.
신비체험 속에서는 언제나 자기가 꿈꾸던 바로 그것이 실현되며 또 경험된다. 이상적인 모성을 꿈꾸던 이는 이상적인 모성의 기운을 만나게 되는 식이다. 의식이 그렇게 만들어내는 것이다. 일종의 자각몽 같은 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자기최면이며, 동시에 자기기만인 것이다.
엄마를 꿈꾸던 이가 신성한 엄마를 자기의 의식 속에서 경험하게 되었을 뿐, 이것이 이 우주의 사실적인 구조는 아니다. 자기가 엄마를 갈망하며 엄마에게 집착하고 있다고 해서, 모성이라는 것이 사실적으로 신성화될 수는 없는 것이다.
깨달음은 모성이 아니다. 백날 세상의 모든 것을 향해 친절한 모성을 발휘하는 어떤 선비 같은 모습을 깨달은 자의 모습인 것처럼 온갖 글을 써대며 설파해도, 그것이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계속 언어로 사기를 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자기는 신비체험 속에서 그렇게 경험했으니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이겠지만, 그건 마치 자기가 꿈속에서 로또에 당첨되었다고 현실에서 그 권리를 주장하려는 일과 같은 것이다.
종교심리학의 대가인 윌리엄 제임스는 이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개인의 그 어떤 신비체험의 내용도 다른 이들에게 행사될 수 있는 아무런 권위를 갖지 못한다고 말한다. 개인이 경험한 신비체험은 오직 그 자신에게만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뿐이다.
자기가 꿈속에서 아무리 예수님과 오병이어의 먹방을 찍었든, 관세음보살과 제로투댄스를 추었든, 또는 엄마의 품에서 영원히 사랑받는 금쪽이가 되었든 간에, 리얼리티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 『구운몽』의 주인공 성진처럼 그저 좋은 꿈을 꾼 것이다.
"그런 꿈을 꾸고 싶었구나."
다만 이것이 리얼리티다.
글에 몰두하며 정신없이 문장을 만들어나가던 이가, 문득 고개를 들고 자기가 쓴 글을 보며, "아, 이런 글을 쓰고 싶었던 거구나."라고 경험하게 되는 것과 유사하다.
그것은 무엇인가?
간절히 하고 싶던 어떤 말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말을 못해서 대신 꿈을 꾼다.
꿈을 통해 그 말을 암시하려 한다고도 할 수 있고, 동시에 은폐하려 한다고도 할 수 있다. 꿈은 원래 이중적이다.
하지 못한 말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이중적이기 때문이다. 말하고 싶으면서도, 말하면 안될 것 같은 그 양가적 모습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꿈은 굴절된다. 어딘가 비틀린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앞서 묘사한 모성의 꿈은 어떠한가. 실은 자기 아빠에게 하고 있던 그 얘기들은 자기 엄마에게 하고 싶던 얘기들이다. 그러나 말할 수 없던 것이다. 엄마가 무서웠기에. 그런 말을 하면 엄마가 자기 곁을 떠나 자기가 우주의 미아가 될까봐.
아빠를 억압적인 독재자로 만들며 용감하게 퍼부었던 그 모든 말은 다 엄마에게 외치고 싶던 말들. 실제로 엄마가 늘 주도권 싸움을 감행하던 독재자였기 때문이다. 아이는 엄마가 힘이 없어 엄마의 편을 들던 것이 아니라, 엄마가 가장 힘이 있는 자였기에 엄마와 융합된 것이다. 아이는 순수한 동물이기에 역학관계를 본능적으로 잘 파악한다. 어느 쪽이 힘이 있는 쪽인지, 어느 쪽에 붙어야 자기의 생존이 유리할지 등을.
힘이 있는 엄마가 두려워 엄마와 유착되었으면서, 그런 엄마를 사랑하기에 엄마 편을 든 것이라고 자기를 속이는 기분은 어떨까. 그러면 어떤 분열이 생겨난다. 일치하지 않게 된다. 사람들이 심리상담을 찾는 대부분의 주제가 엄마와 관련된 것인 그 이유다.
우리가 일진을 너무나 무서워했기에 '착한 일진' 같은 낭만적 환상을 꿈꾸게 된 것과도 같다. 우리반 대장 찬식이는 담배도 피고 조금 짓궂지만 그래도 천성은 착한 아이고, 내가 다른 반 일진에게 괴롭힘을 당하면 지켜주는 멋지고 듬직한 녀석이야, 라고 그 환상을 믿고 싶겠지만 사실은 어떠한가. 다른 반 일진에게 우리가 쳐맞을 때 늘 막타는 웃으면서 찬식이가 날리곤 한다. 그리고는 다른 반 일진과 찬식이가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처럼 명랑한 하이파이브를 나누던 것이 우리가 실제로 목격한 모습이었다.
아픔.
어떤 아픔이 있어서 우리는 꿈을 꾸려 한 것이다.
꿈은 망각제다. 우리는 꿈의 환상을 만들어내어 아픔을 잊어보려 했다.
그러다보니 삶이 잃어졌다. 리얼리티가 잃어졌다.
말하고 싶었던 그 말, 내고 싶었던 그 소리를 내지 못해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잃어진 것이다.
심리상담은 분명 깨달음의 현실로 안내하는 일정 부분의 기능을 하는데, 그것이 내담자로 하여금 하고 싶던 말을 할 수 있도록 작용하고 있을 때 그러하다. 무슨 엄마와의 애착이 중요하고, 상담자를 통해 안정애착을 재경험해야 하고, 이런 식의 얘기를 하고 있으면 심리상담도 답이 없다.
심리상담의 원형이 고해성사라는 점을 떠올려보자.
하지 못했던 말, 그러나 너무나 하고 싶었던 말을 우리가 하게 될 때, 이것을 '고백'이라고 부른다.
고백은 그러나 꼭 어떤 특정한 대상에게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으로써 그 말을 통해 특정한 대상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타인을 바꾸려는 그 의도를 갖고 있으니 우리는 더욱 말을 못하게 된다. 말해봤자 안 바뀔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말해서 뭐하나, 라는 무기력한 생각이 자동으로 작동한다.
고백은 대상에 대한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 자신을 위해 말하는 것이다.
그냥 우리 자신이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것뿐이다. 그런 말을 해서는 안되는 사람이라고 금지당했기에, 또 우리가 스스로를 금지했기에, 이제 그런 말을 함으로써 그 금지를 해지하고, 그럴 수도 있는 자유로운 사람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다시 찾고 싶은 것이다.
바로 이것이 기도의 원형이다.
고백은 기도다.
깨달으면 중2병 판타지처럼 정말로 "기도하지마! 기도를 하면 손이 놀잖아!"라고 할 것 같은가? 절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깨달음은 상시적인 기도다. 늘 기도하는 자세로 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기도하는가?
엄마의 판타지를 따라, 권위적인 독재자인 아빠에게 더는 우리 자신을 지배하지 말아달라고 기도하는 것인가? 또는 그 엄마의 판타지를 해체한 뒤, 실상 권위적인 독재자였던 엄마에게 더는 우리 자신을 괴롭히지 말아달라고 기도하는 것인가?
아니다. 기도에는 대상이 없다.
부모와의 관계를 투사해서 만들어진 그 모든 신적 대상은 전부 다 기도의 대상이 아니다.
대상이 없이 이루는 고백이 기도다.
그것은 기도할 수밖에는 없을 정도로, 사방이 다 막힌, 혹은 사방이 다 끊긴 우리에게 유일하게 남은 회생의 기회.
아파서, 그 아픔이 낳은 소리들이 순수하게 우리의 입에서 흘러나올 때, 세상에서 이제 막 처음으로 태어난 그 자유의 소리들은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가장 가까이에 있는 바로 우리 자신의 귀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말하고, 듣는다.
이 가장 근본적인 순환이 이루어진다. 아니, 회복된다.
작위적으로 수용하듯이 듣는 것이 아니다. "웅웅. 그래그래. 엄마가 다 알겠어. 웅웅." 하듯이 어설픈 공감과 경청, 수용 따위의 태도로 듣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말은 끊긴다. 언제나 자유를 가로막는 것은 어설픈 친절함과 배려다.
정말로 듣는다는 것은 듣는다는 그 행위를 의식하면서 듣는 것이 아니다. 잘 들으려고 듣는 것이 아니다.
아무 생각없이 말이 나오게 하면, 그 자체가 듣는 것이다.
오히려 아픈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것이 우리가 지금껏 처해있던 비극임에 틀림없다. 생각으로, 또 그 생각을 통해 만들어낸 꿈으로 아픔을 잊기 위해서, 우리는 아픈데도 그 아픔을 방치한 채 생각만 굴리고 있던 것이다.
모든 아픔은 근본적인 단 하나의 의미만을 내포하고 있다.
'살고 싶다.'
아픔이 자아내는 "살려주세요."라는 그 모든 변주된 언술 속에 담겨 있는 유일한 의미, 그 신성한 의미다.
살고 싶다고 그렇게 진심으로 호소하고 있는 이는, 지금 아는 것이다.
이 삶이 얼마나 멋지고 좋은 것인지를 실은 눈치채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막 눈치챈 참이다. 그는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에 감사하고 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이라며 그 감사를 온몸으로 경험하고 있다.
모든 아픔에는 바로 이 삶에 대한 감사가 내재되어 있으며, 고백이란, 기도란, 결국 이 감사의 진실된 표현이다.
"제발 살고 싶어요. 살게만 해주세요, 부디."
살아있다는 그 사실만으로 그것이 얼마나 위대한 사실인지를, 지금 이렇게 스스로의 고백으로, 정직한 기도로 발견한 이는 이제 수직이동을 한다.
그는 살아있는 것 그 이상이다. 그러한 지평으로 이동되었다.
그는 살아있으면서, 살아있다는 그 사실에 감사할 수 있는 존재. 고로 살아있다는 사실을 그 밖에서, 그러면서도 가장 가까이에서 목격하고 있는 존재다.
그렇게 그는 살아있는 것들과 동행하는 이, 그 동반자.
살라고 창조된 이 모든 것의 동반자.
바로 창조의 동반자다.
창조의 동반자는 창조를 완성하는 이.
글은 독자에 의해 완성되고, 작품은 그 감상자에 의해 완성되듯이, 창조는 삶이라고 하는 그 창조의 일에 감사할 줄 아는 창조의 동반자에 의해 창조로서 완성된다.
고로, 기도는 창조를 완성하는 일이다.
기도는 감사하는 일. 일어난 일에 대해. 이 현상의 실존에 대해. 바로 이렇게 창조된 자신의 현실에 대해 감사하는 일. 그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알아보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다시 청하는 바로 그 감사의 고백이 기도인 것이다.
그러니 깨달았다는 것은 그 삶이 기도가 되었다는 의미다.
인간이 직립보행을 하게 된 것은 기도하기 위해서다.
두 손의 자유는 기도를 위해 이루어진 것.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두 손이 서로를 맞잡을 때, 그것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기도는 넘쳐나는 사랑의 표현.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
하지 못했지만, 너무나 하고 싶었던 말.
누구에게 하고 싶었는가? 엄마인가? 아빠인가? 또는 그들의 모습을 투사한 애인인가, 아니면 또 다른 인물인가? 추상적인 세상인가?
아니다. 다 아니다.
아팠던 우리 자신을 위해, 그 말은 가장 먼저, 또 가장 빠르게 간다.
막혔던 벽을 깨고, 다시금 연결짓는다. 순환을 회복한다. 파문이 퍼져나간다. 눈치만 보며 살던 저주받은 비루한 것을 원래의 그의 자리로 되돌린다. 더욱 퍼져나가, 그 모든 살아있던 것들의 아픔과 동반한다. 아픔을 위로하고 수용하기 위해서인가? 그런 조악하고 저질스러운 일은 하지 않는다. 그가 가장 완전한 창조의 결실로서 지금 그렇게 살아있는 것이라는 그 위대한 사실을 전하기 위해서다. 그 기쁜 소식이 퍼져나간다. 그 기쁨의 소리가.
사실 이것은 우리에게 남아있던 유일한 회생의 기회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정도가 아니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유일한 기적의 기회.
기도는 아픔의 꿈을 기쁨의 현실로 순식간에 바꾸어놓았다.
좋은 꿈인 줄 알았는데 실은 아팠던 꿈. 아픔을 잊어보려고 꿈꾸었는데, 꿈을 구성하는 그 모든 대상에게 치이고 또 치여 아픔만 더해갔던 꿈.
자각은 눈을 뜨는 일. 눈을 뜨니 아픔이 이제 없다. 아픔이 없는 것만으로 이렇게 기쁘다.
기도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말함으로써,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의 그 자각을 안내한다. 우리는 결국 이 악몽에서 깨어나고 싶다고, 현실(reality)로 돌아가고 싶다고 기도했던 것이다.
남의 꿈에 휘말려들어 우리는 아팠고, 그 아픔을 망각하려고 우리 자신의 꿈을 만들었으며, 그래서 더 아파졌다. 아프니까 사람인 것이 아니라, 아프니까 병이다. 중2병의 판타지는 그렇게 만들어졌을 것이다. 모두가 다 자신을 아프게 할 뿐 누구도 의지할 이가 없으니 아파도 혼자서 해야 한다며.
그러나 대상이 없는 현실이란 혼자 노력해서 해야 하는 현실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런 것이 바로 꿈이다. 혼자 하면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또 누구로부터 피해를 받지도 않으면서, 더는 아프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꿈.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럴 때 나오는 자연스러운 것이 기도.
그 기도가 한다.
사방이 다 아팠던 우리를 위해 기적을 시동하고자 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도가 스스로 하는 것이다. 폐가 스스로 가장 좋은 일을 하듯이, 입이 말하고, 귀가 듣는다.
무엇인가 맑은 파문이 퍼져간다.
우리의 회복을 알리는.
우리가 이제 그만 속상해도 될 어떤 현실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그 소식이.
우리가 가장 듣고 싶었던 그 말이 우리의 귀에 들리는 것은, 우리가 너무나 하고 싶었던 말이 지금 우리의 입에서 나오고 있어서다.
그 말이 언제나 창조의 최고걸작인 우리와 동반하고 있기에, 우리는 가장 온전한 것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이것이 기도의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