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알려주지 않던 진짜 처세술 <깨현 외전> #1

"불친절한 이를 따르라"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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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움직이려면 나에게 자상한 눈빛으로 친절하게 계속 설명해줘봐. 맞춤형으로 하나하나 다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반복해서 설명해줘봐. 내가 충분히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게끔, 너의 친절한 태도를 보여줘봐."


이게 바로 엄마 같은 상위의 대상을 상정해 자기가 주도권을 쥐려고 하는 전형적인 유아적 퇴행의 상태다. 가장 미숙하고 미발달된 상태. 오늘날 널리 유행하고 있는 상태다.


이런 상태에 몰입해있는 당사자들은 자신이 아주 현명하고 정당하게 자신의 힘을 발휘하고 있는 상태라고 착각하며 이 상태를 견지하려 한다. 또 그 반대편에서는 이 상태에 있는 이들에게 뭐 하나라도 팔아먹기 위해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친절한 서비스의 공급자임을 자임하며 마찬가지로 이 상태가 지속되도록 하는 일에 힘을 제공한다.


그래서 남는 것은, 스스로는 점점 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정신적 유아들뿐이다. 몸은 커져도 마음이 계속 유아의 상태에 머무르고 있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놀랍게도 현대사회는 이러한 이들이 더 많이 출현하도록 조장한다. 봉으로 삼기 쉬워서다. 몸은 크니까 경제적 능력은 있되, 떠먹여주는 것에만 길들여져 스스로 판단할 수는 없으니, 가장 손쉬운 소비자다.


소비자, 그것은 오늘날의 세상에 새로 출현한 가축의 이름.


우리는 소비자로 길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눈치챌 수 있다. 자기가 가장 친절하고 쉽게 모든 것을 이해시켜줄 수 있다고, 다 떠먹여줄 수 있다고 말하던 이들이 실제로는 우리를 어떻게 보고 있었던가를.


우리는 대단히 얕잡아보이고 있던 것이다. 잘봐주어야 축사 안의 닭이나 돼지다.


진실로 이해해보자.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에게 아무리 친절하게 설명한들 그게 무엇인지 정말로 이해시키는 일이 가능할 것 같은가?


친절한 설명이 통하려면 환원되어야 한다. 원래의 그것과는 다른 아주 축소되고 열화된 형태로 전할 때만이 친절함이라는 것이 성립가능하다. 그렇다면 대체 그는 무엇을 전하고 있는 것인가? 진짜가 아닌 것을 진짜인 것처럼 전하는 일, 사기와 날조에 불과하다.


자기가 친절한 사람으로 보이려고 그는 세상에 대한 거짓의 상을 우리에게 팔아먹는다.


그는 우리를 얕잡아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시스티나 성당의 그림도 얕잡아보고 있다. 아니, 그 자신을 제외하고는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얕잡아보고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이 아동을 대하는 부모의 상태 같은 것이다. 요즘엔 이게 인기상품이다. 다 자기가 최고로 우리 생각을 하는 자상한 부모인 것처럼 행세함으로써 우리의 지갑을 열고자 한다. 우리는 그렇게 실은 우리를 얕잡아보고 있지만 표면적으로는 왕자공주를 대하듯이 하는 상술에 길들여진 상황이다.


이러한 이들은 우리의 경제적 자원만을 취하는 것이 아니다. 더 결정적으로는 심리적 자원을 갈취해간다. 우리는 우리에게 친절한 이를 마치 스승이나 선생 같은 것으로 보며, 그에게 우리보다 더 나은 자로서의 권위를 헌납한다. 그럴수록 우리는 점점 더 무력해지며, 그에게 더 의존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 쉽게 말해, 가스라이팅의 현실이 펼쳐지는 것이다. 모자란 아동이 부모에게 의존하듯이. 거기에서 우리는 모자란 아동 역할을 맡고자 적극적으로 손을 드는 꼴이다.


이 모든 일은 대체 왜 일어나는가?


우리가 좌절을 회피하기 때문이다.


모르는 것 앞에서 똑똑한 척하며 좌절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친절한 정보제공자들을 꿈꾸었다. 그리고 이 하이에나들은 정확하게 우리의 취약점이 어디인지를 파악하고, 따듯한 눈웃음과 예의바른 몸짓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아무 걱정하실 필요없다고, 친절하게 다 알려드리겠다면서.


그러나 전술한 것처럼, 우리가 우리 삶에서 만난 미지에 대해 이들이 정말로 알려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들이 하는 그 일의 실체는 다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속이는 일을 언어로 미화해주는 것에 불과하다. 이제는 알게 된 척, 좋은 고급정보를 이제는 얻게 된 척, 그럼으로써 막혔던 것이 풀리게 된 척.


우리가 우리 인생에 치는 사기를 소비하려고 하니, 정확하게 사기꾼이 그 판매자로 온 것이다.


이런 현실을 그래서 상호기생의 현실이라고 말할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생하고 있으니, 그저 자원만 계속 고갈될 뿐이다. 여기에는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이것이 핵심일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만나야 창조할 수 있다. 한 개인이 창조할 수 있을 때야 우리는 그가 정신적으로 성숙했다고 말하곤 한다. 창조가 없는 기생의 현실, 곧 소비의 현실만을 지속할 때, 그는 그 몸이 아무리 자라도 정신적 아동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 자신과 친절함의 사기꾼들이 그렇게도 열렬히 합심하고 단결하여, 어떻게든 우리가 좌절하는 일을 원천봉쇄하려 드는 상황에서 어떻게 창조가 가능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우리는 계속 미숙한 아동의 상태로 고착되고 눌어붙은 채로 남게 된 것이다.


재수없는 미소를 띠고 팔짱을 낀 채 "어디 한 번 친절하게 나를 이해시키고 납득시켜봐보세요."라는 그 태도로만.


그러나 왜 당신을 이해시켜야 하는가?


이해가 필요한 것은, 몰라서 막힌 것에 대한 이해에 주린 것은 바로 당신이다.


이것은 당신의 목마름이며, 당신의 필요다.


당신에게 지금 정말로 필요한 것은 불친절함이다.


당신의 한계를 분명하게 알리고 있는 그 불친절함.


언젠가는 분명 친절함이 미덕이었던 시대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는 아니다. 오늘날에는 오히려 불친절함이야말로 미덕이다.


오늘날의 불친절함은 당신의 자기기만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당신이 아무리 기분나빠한다 해도, 당신은 50층에서 뛰어내려 하늘을 날 수 없다며, 아주 분명하게 말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불친절함은 원래 심리상담사들이 필수적으로 가져야 할 역량과 직업윤리로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많은 심리상담사들은 친절한 엄마놀이를 하는 데 여념이 없다. 그래야 정신적 아동들의 지갑이 열릴 거니까. 코흘리개의 지갑을 털어먹고는 자기가 실제의 엄마보다 더욱 친절한 모성을 제공했다며 뿌듯하게 눈물짓는 모습은 가증스럽다.


심리상담사들이 당신을 미숙한 아동으로 길들이고자 하는 그 사육의 세력에 합류했으니, 적어도 깨달음을 말하는 이들만은 타협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당신이 당신 자신을 계속 모자란 정신적 아동으로 보려고 하는 당신의 그 자기기만에 타협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불친절함이다.


불친절함은 친절한 사기꾼들처럼 절대로 당신을 낮은 수준으로 대하지 않기에 불친절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어떤 한계를 만나 그 한계 너머로 향하는 창조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아주 커다란 존재로 이미 당신을 보고 있기에 그것은 불친절함으로 착각되었던 것이다.


늠름한 날개를 가진 새에게, 절벽 끝에서 그냥 휙 뛰면 돼요, 라고 말하는 그 불친절함의 실체는 대체 무엇일까?


그게 바로 본래적인 스승의 의미다.


스승은 친절한 이가 아니라, 사실적인 이다. 사실적으로 우리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며, 동시에 그 한계 너머에 펼쳐질 창조의 현실로 우리를 안내하는 이가 바로 스승이다.


그러한 이를 따라야 한다.


우리에게 불친절한 이를 따라야, 우리는 이 시대에 우리에게 내려진 그 모든 주박을 벗어나 우리 자신의 참된 면모를 회복할 수 있게 된다.


오늘날, 친절함은 독이며, 불친절함은 해독이다.


그리고 해독만 되면 충분하다. 우리는 이미 충분한 존재다. 우리가 응애응애 모자란 아동처럼 굴기를 그만하면, 이미 우리는 충분한 가능성 속에 있다.


가능성이라는 것은 원래 불친절하다. 그것은 누가 떠먹여주는 것이 아니라, 목마른 자가 직접 찾아나선 오아시스다. 다시 말해, 이것이 자신의 목마름이라는 사실을 이해한 이들만이 오아시스를 발견한다.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모든 사실이 이와 같다. 중력은 친절한가? 지구의 자전은 친절한가? 그것들은 우리에게 결코 친절한 것이 아니다. 다만 정확한 것이라서,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에게 불친절한 것들이 실은 우리와 동행하는 것들이다. 우리가 곁에 가깝게 둘 수 있는 것들. 우리가 진정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들이다.


우리에게 불친절하면서도 우리 곁에 함께하고 있는 이가 있다면, 그러니 놓치면 안된다. 그가 지금 우리의 스승이다. 우리 자신이 얼마나 중대한 존재인지를 아주 정당하고도 분명하게 바로 알려주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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