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의견은 동등하게 중요하지 않다"
언제나 우리 자신의 견해가 남들과 동등한 위상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착각이 우리 자신을 망친다.
형식적이고 기계적인 평등의 환상에 입각해 자신의 권리를 설정하지 말라. 그러면 자기 자신만 상처입게 될 뿐이다. 원망할 대상도 없다. 처음부터 그것은 환상이었고, 허물어질 그 환상 위에 집을 세우고자 했던 것은 당신이기에.
환상을 벗겨내고 본다면 당신도 반드시 그럴 것이다.
협곡을 가로지르는 길에 장님의 의견은 동등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무조건 자기도 어떤 상황에 대한 의견을 낼 권리가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이 필요하다. 초등학교 학급회의 시간에 너도나도 짹짹이는 그 모습을 보고, 뒤에 서있는 엄마들이 즐거워하라고 만들어진 그 엔터테인먼트의 가상현실을 진짜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자기의 의견을 당당하게 주장하는 일이 주체적인 자발성의 표현이라고 들어왔다. 아이들이 하고 싶은 걸 다 하게 해줌으로써 자발성을 키워주어야 한다는 말 또한 들어왔다.
그 실체와 진의는 책임의 유기였을 뿐이다.
자신도 어떤 길이 좋은지 모르겠고, 그에 대해 책임지고 싶지 않으니, 허울좋은 말들로 아이들에게 책임을 떠넘긴 것이다. 니가 선택했으니 그 책임을 떠맡는 법도 배워야 한다며, 그게 바로 자발성을 햠양시키는 길이라며, 장님에게 자신의 진로를 선택해보라는 임무는 맡겨졌다.
자신이 깨어있는 좋은 부모인 척하고 싶어하는 이들은 다 이 일을 한다.
부모로서의 책임유기를 한다.
이 친절하고 선량한 부모들이 보기에 아주 독재적이고 폭력적인 부모들은 대신 소리를 지르며 아이를 혼낸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 길로 가라고. 다른 길로 가면 지금 절벽 밑으로 떨어진다고.
그래도 답답함을 느끼는 이 사악한 부모들은 그래서 아예 그 길을 아이와 같이 간다. 아이에게 하고 싶은 걸 다 하라고 말한 뒤 흐뭇하게 뒤에서 지켜보는 대신에, 자신이 먼저 책장에서 책을 꺼내와 읽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아이에게 책을 읽으라고 소리를 지르며 자기 옆에 앉힌다.
이들은 망해도 같이 망하겠다고, 그 길을 끝까지 함께 가겠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들은 형식적이고 기계적인 가족회의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아이에게도 가족의 평등한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의견을 말할 권리가 있다는 공허한 얘기 따위는 하지 않는다. 어차피 아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친절하게 어르고 달래는 교묘한 가스라이팅으로 결국에는 부모 생각을 따르게끔 조종할 거면서, 그런 가식을 굳이 부릴 필요가 있겠는가.
이들은 차라리 아이가 따라주었으면 하는 자신의 그 뜻을 아주 단순하고 명료하게 말한다. 설득하는 것이 아니다. 안전벨트를 매라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약속이다. 장님이 그 눈을 뜨기 전까지는 반드시 안전하게 지켜주겠다는 약속.
어미고양이는 눈꺼풀이 아직 열리지 않은 새끼고양이를 이동시키기 위해 그 어떤 친절한 설명도 동원하지 않는다. 뒷덜미를 물고 그냥 옮긴다. 삐약거리는 새끼고양이의 소리는 무척 귀엽지만, 진로에 대한 의견으로서는 전혀 동등하게 중요하지 않다.
더 쉽게 얘기해보자.
볼 눈이 없는 이들에게 작품의 감상평을 묻는 일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당신이 정말로 누구인지 제대로 보지도 않고 내뱉는 이들의 말을 당신이 왜 신경쓰며 존중해주어야 한단 말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조금 더 실감된다면, 이제 반대로도 뒤집어보자.
당신이 어떤 것을 알아볼 눈이 없을 때, 당신의 의견이 중요해야 할 이유가 대체 어디 있을까?
사람들이 지금 그 상황에서 장님 같은 당신의 의견을 형식적이고 기계적으로 존중해야 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눈을 뜨는 일만이 중요할 뿐이다.
또 정직해져보자.
당신이 원하는 것은 모두가 똑같이 동등하게 존중받는 일이 실은 아니다. 당신의 의견이 적어도 남들만큼은 존중받아야 한다는 그 현실을 억지로 만들어내더라도 당신은 그 결과로 뭔가 찜찜한 패배감 같은 것을 경험할 것이다. 이것은 무엇인가? 당신은 결국 이기고 싶었다는 것이다. 당신의 의견이 참된 중요성으로 다른 어떤 의견보다 우선되는 현실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이 가장 환히 그 시야가 열린 자라면 어땠을까? 그러면 당신의 의견은 자연스럽게 가장 중요한 그 자리에 위치하게 되었을 것이다. 빠르든 늦든 간에. 만약 정말로 운이 없어 당신 빼고는 다 장님들이었다면, 당신은 열린 눈으로 보고 있는 그 길을 그저 가로질러 가면 된다. 우왕좌왕하다가 낙하하는 그 모든 소리를 뒤로 한 채. 당신만이 생존했고, 유일한 승자다.
만약 당신이 자비심이 아주 많은 이라서, 주위가 다 장님들로 둘러싸인 상황에서도, 그들과 함께 길을 모색하겠다고 하고 있다면 기억하는 것이 좋다. 그들의 의견을 구하고, 어르고 달래서 그들을 설득하는 일에는 아무런 의미와 효용이 없음을. 시간낭비다. 어떤 길을 가는 것이 좋을지를 실천적으로 논하기보다, 차라리 그들이 눈을 뜨도록 돕는 일이 나을 것이다. 아니 그 일만이 유일하게 의미있다.
진실로 당신이 눈을 뜨기 전까지는, 당신의 어떤 의견도 동등하게 중요하지 않다. 당신 자신에게조차.
눈을 뜬다는 것은 사실을 본다는 것.
사실을 본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이다.
우리가 자기 자신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은 단 하나다. 소크라테스가 이미 알려주었다. 우리는 자신이 모른다는 그 사실을 알면 된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곧 자신이 정말로 장님이라는 사실을 안 이는, 역설적으로 그 장님의 모습을 본 이. 눈을 떴으니까 본 것이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안 이가 곧 눈을 뜬 이다.
자신이 실은 모른다는 사실은 저 뒷전으로 밀어둔 채, 그저 형식적이고 기계적인 평등의 개념에 입각해 잘난 듯이 자기의 의견이라는 것들을 개진하고 있는 동안, 또 나아가 별점도 매기고, 깨어있는 평론가라도 된 양 훈수도 두고 있는 동안, 우리는 대체 얼마나 큰 어리석음으로 드러나고 있는 중인가?
정말로는 알지도 못하면서, 어디에서 주워들은 정보를 자기 얘기처럼 복제해 떠드는 이들이 마치 중요한 오피니언 리더이기라도 한 것처럼 중요성을 갖는 오늘날의 모습이다. 그렇게 무지의 현실만이 복제되고 재생산되어 장님들의 나라를 만들 뿐이다. 만약 그러한 정보들에 의지해 당신 자신도 떠들고 있다면, 또 그렇게 자신의 길이라는 것을 모색하고자 한다면, 그 견해는 전혀 존중될 필요가 없으며, 애초 존중되어서도 안될 것이다.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신기루처럼 사라질 그 장님의 견해들과 함께 당신도 사라져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저 절벽 아래로.
그러니 당신이 눈을 뜨기 전까지는, 당신도 당신 자신의 견해를 무시하는 것이 좋다. 아무 것도 믿지 말라. 당신이 눈을 뜨고 본 것만을 사실로 알라.
무슨 말인지, 무슨 형상인지, 또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내가 아직 이것을 알아볼 눈이 없다. 그 눈을 갖고 싶다.
당신은 지금 스스로 눈을 뜨고자 하고 있는 것이며, 그 눈에 이제 길도 들어올 것이다.
그런 당신의 의견이 이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것임을 당신 자신도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