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알려주지 않던 진짜 처세술 #3

"당신은 지금 권위에 너무 취약하다"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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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오늘날 불안하게 갈팡질팡하거나, 어떠한 쫓김을 경험하거나, 또는 열등감이 야기한 망상에 시달리게 되는 것은 다 권위의 문제다.


당신은 권위에 취약해도 너무 취약하다.


특히 거짓과 날조로 만들어진 가짜권위에 대해 거의 방어가 불가능할 정도로 취약하다.


가짜권위를 만드는 방식은 전형적이다. 이것은 해당 분야에 대해 실제적인 권위를 가질 아무 근거가 없음에도 권위를 얻으려는 이가, 별점이나 리뷰 조작 등으로 그런 자기의 모습이 외부로부터 높은 권위를 얻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가상현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자기계발의 성공포르노들은 다 이 전략을 쓴다. 오늘날에는 마케팅의 기본이라고도 여겨지곤 한다.


이런 일이 지금 이 사회에 만연한 것은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즉, 권위에 취약한 이들이 너무나 많기에, 그러한 이들에게 이 거짓의 전략을 통해 권위를 얻어내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권위에 취약하다는 것은, 자신이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인테리어도 후지고 메뉴들도 맛이 없는 어떤 가게가 있다. 그런데 건물주가 주인이라 돈은 많아서 그 돈으로 최상급의 평가를 날조해내는 거짓의 리뷰들을 한 500개 쌓았다고 해보자.


그러한 가게 앞에서 사람들은 분명 그 후진 모습을 자기의 눈으로 직접 보고도, 오히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가게의 인테리어를 극찬하는 리뷰를 더 믿으려 하곤 한다. 들어가서 맛없는 음식과 음료를 자신의 혀로 직접 맛보았으면서도, 자신의 경험을 역으로 리뷰의 내용에 길들여 "아, 이게 진정한 '맛'이라는 거구나."라며 셀프가스라이팅을 시도하기까지 한다.


우리가 우스갯소리로 하는 "인터넷에 써있는 말은 다 진리다."라는 현실과 무엇이 다른가.


요식업계의 교과서라고까지도 불리는 만화인 『라면요리왕』에 나오는 명대사가 있다.


"그들은 라면을 먹고 있는 게 아니야. 정보를 먹고 있는 거다."


오늘날의 정보화사회에서 정보는 분명 권위의 소재다. 남들보다 빠르게 어떠한 정보를 선취하는 일은 계급을 가른다. 이러한 차원에서 리뷰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누군가가 나보다 앞서 그 정보를 취득했다는 권리, 일종의 기득권인 셈이다. 그러니까 리뷰라는 것에 대해 우리는 이미 다소간에 권위를 헌납할 준비를 마치게 된 것도 같다.


나아가 조작된 리뷰가 많을수록, 자신은 더 정보약자인 하층계급의 지위로 몰리게 된다. 정보가 임의적으로 통제되는 그 불리한 지점에서 시작하게 된다. 다수결의 폭거는 여기에서도 작동한다. 아니 정보화사회이기에 가장 잘 작동한다. 다수가 여론을 형성해 특정한 방향성으로 상황을 몰아가면 그에 반하는 개인은 도저히 버텨낼 수가 없다.


차라리 자신이 정직한 자신이기를 포기하는 편이 안전할 것이다. 이미 구성된 외부의 권위에 그저 순응하는 편이 무탈하게 중간은 갈 것만 같다.


그렇게 우리는 점점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자신의 귀로 직접 들으며, 자신의 혀로 직접 맛보고, 또 자신의 손으로 직접 접촉하는 그 일들을 포기하게 된 것이다.


자신이 자신의 경험을 포기하면, 우리가 무언가를 경험할 수 있는 힘은 약화된다. 점점 더 믿을 수 없는 것으로 화한다. 그렇게 우리는 더욱 우리 자신을 믿을 수 없게 되었고, 자신감을 잃었으며, 끝내는 권위에 대한 취약성을 드러내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심리학적인 하나의 진실은, 우리가 어떤 것에 취약하게 되면, 이내 우리는 그것에 집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권위에 취약한 이는 결국 권위에 집착하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는 자기가 당한 그 방식을 이제 자기가 집행하는 주체가 된다. 그럼으로써 더 많은 이들을 권위에 취약하게 만들며, 총체적으로 권위의 쟁취를 위한 거짓과 날조가 가득한 현실만이 증대되는 구조를 출현시키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구조를 역으로도 말할 수 있다.


우리가 권위를 억지스럽게 추구하고 있기에, 결국 우리는 권위에 취약해진 것이라고.


원래 사기를 치려는 이들이 동일한 방식의 사기에 당하게 된다.


우리 자신이 거짓과 날조로 권위를 얻어내려 하고 있을 때, 우리는 바로 그 거짓과 날조의 방식이 우리에게 작동하도록 허용한 것이며, 그 결과로 우리 자신이 권위에 취약해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법도 분명하다.


우리가 억지스럽게 권위를 추구하는 일을 멈추면, 우리가 권위에 취약해지는 일 또한 멈추게 될 것이다.


그러나 쉬이 멈출 수 없는 것은 역시 자기 자신에게 자신이 없어서다.


자신이 없는 이들이 대신 소비하고자 하는 것이 권위다. 자신이 없으니까 권위라도 세워보고 싶은 것이다.


다시 또 예를 들어, 부자인 엄마가 차려준 가게를 하는 이가 있다. 건물이 엄마의 소유라서 월세도 낼 필요가 없고, 시설의 개축도 자유롭다. 성공할 조건이 아주 좋다. 그럼에도 이러한 이들은 만성적인 자신감 부족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결국에는 권위를 집요하게 추구하며, 어떻게든 거짓과 날조를 통해 자기를 권위있는 존재인 것처럼 보이려 하는 그 일에만 목숨을 건다.


왜 그런지는 분명하다.


인간으로서의 격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다 근본적으로는 엄마라고 하는 외적 권위에 의존하고 있었을 뿐, 자기 혼자서 그 시작부터 끝까지 무언가를 해본 적이 없다. 성공도 실패도 어느 하나 오롯하게 자신의 것이었던 적이 없다. 엄마 덕분이거나, 엄마 때문이다. 즉, 자신의 눈과 귀와 입으로 직접 그 모든 삶의 사건을 최후까지 완결지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삶을 온전한 그 자신의 것으로서 충분히 살지 못한 반푼이의 입장과도 같다. 그 자신이 인간으로 태어나 있던, 이 인간의 삶에 대해.


그러니 인간으로서의 격이 떨어지며, 자신이 온전한 인간이라는 충실한 그 실감, 자존감이 결여된다.


그 결여된 자리를 보충하고자 추구하게 된 것이 이제 남들에게 대단한 존재처럼 보이고자 하는 권위이며, 이로써 앞서 묘사한 악순환이 시작되는 것이다.


자신이 현재 인간으로서 결격사유가 있는 것 같아서, 누군가가 그러한 자기를 무시하거나 비웃을까봐 자신을 권위의 껍질로 보호해보고자 시작된 일이다. 그러다보니 역으로 거짓과 날조를 통해 오히려 자기가 더 많은 남들을 무시하고 비웃는 결과로 드러나게 된 일이다.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얘기하자면, 결국 자신이라는 인간의 내면이 텅비었기에, 외부의 평가로 그 공백을 메워보고자 생겨난 이 모든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지금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분명하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외부로부터 얻는 권위가 아니다. 그런 것을 얻고 있는 것처럼 꾸며내는 거짓과 날조의 수작은 더욱 아니다.


격이다. 인간으로서의 격. 그것만이 인간인 당신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


그것은 한 인간으로서 그 자신의 삶을 정말로 자신의 것으로 살 때만이 생겨난다.


아무리 실패만을 거듭하더라도, 그 실패의 삶을 그 자신의 것으로서 분명하게 살아낸 이가 있다면, 그는 무척 격이 높다. 그 존재에서 빛과 향기가 난다. 잘 숙성된 술처럼 깊고도 맑다.


당신이 이런 격을 가진다면 외부의 평가를 조작해서 만들어낸 조잡하고 비루한 권위 따위는 거들떠볼 이유도 없을 것이다.


살아있는 진짜 자신감, 당신은 지금 그것으로 가득차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격'이라는 것의 다른 이름은 무엇일까?


바로 '내적 권위'다. 이것이 이제 당신 안에 가득히 채워진다.


권위에 취약하다는 표현은 다시 말해 내적 권위가 없다는 뜻과도 같다. 자신에게 이 내적 권위가 없기 때문에, 바깥의 대상으로부터 얻는 외적 권위에 집착하며, 어떻게든 그것을 얻어내려 하는 거짓의 삶을 쌓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경험'을 단지 흘려보내거나, 외부에 그 책임요인을 돌리거나, 또는 남들이 하는 평가에 맞추어 그 경험을 해석하거나 하지 않고, 그 경험을 순수하게 '자신의 경험'으로 삼는 만큼 이 내적 권위는 쌓여간다.


이는 경험중독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날 유행하는 방식처럼, 엄마가 준 돈으로 호사가적인 체험활동을 즐긴 뒤 "나도 한번 경험해봤어. 재밌더라. ^^"라고 하는 식의 것이 아니다.


"그게 바로 내 삶이었고, 내 전부였다." 이 전적인 일치성의 태도가 '하나의 경험'을 '자신의 경험'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핵심이다.


생명이 태어나서 번성했다가 다시 죽어가는 그 사계절의 순환을 그 자신으로서 무수하게 경험하며 자라온 나무를 보라. 격이 다르다. 힘찬 중심으로 우뚝 서있는 그 모습은 그 자체로 내적 권위의 소리없는 웅변이다.


그런 나무는 텅빈 쭉정이가 아니다. 그 속이 충실하게 나이테로 채워져 있다. 그 자신으로서 한 경험으로 그 자신이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이다. 성공의 순간도, 실패의 순간도, 또 기쁨의 미소도, 좌절의 눈물도, 다 자기 자신의 경험이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그는 자기 자신으로서만 울고 웃었다. 무엇으로도 그는 그 자신이었다. 그러니 그 자신은 언제나 최대치. 언제나 최상격의 그 자신일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이 모든 경험의 순간은, 우리가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것을 경험할 기회다.


당신은 어떤 대상적 소재들을 경험해가는 소비의 주체 같은 것이 아니다.


당신은 언제나 그 모든 것을 통해 당신 자신만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당신 자신이라는 것은 쌓이고, 충실해지며, 그 존격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텅비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그 텅빈 자신이라는 것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자신이라는 그 소재밖에는 없다.


남의 것, 남에게서 유래한 아무리 좋은 것들로도 채워지지 않는다. 그러한 것들은 다 가짜권위들.


자신에게 들어맞는 것은 자신뿐이다. 자신은 자신으로만 채울 수 있다. 자신이라는 것을 거듭 경험해감으로써.


일어나는 이 모든 경험을 다 자신의 경험으로, 그렇게 자신이라는 것을 경험할 기회로 살아간다면, 당신은 이제 이 우주에 치솟아있는 거대한 나무. 막강하게 흔들림이 없으며, 스스로 듬직하다. 당신은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을 자신감 있게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옳다고. 그것이 바로 당신이니까. 당신이 당신인 일은 늘 옳고, 영원히 옳으니까.


자신이 자신으로 사는 그 일이 옳다는 것을 분명하게 아는 존재, 그렇게만 분명하게 사는 존재, 그것이 곧 인간이며, 당신은 이제 찾은 것이다. 일치한 것이다. 당신이 바로 그 인간이다. 당신에게 딱 맞는 것. 아주 제격이다. 이제 당신의 격에 맞아서 부족함이 없고, 취약함이 없다.


이처럼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격을, 그 내적 권위를 얻고자 하는 당신에게는 무슨 말이 필요할까?


괜찮으니까 한번 해봐도 된다는 것이다. 당신 앞의 그 경험을 당신으로서 직접.


자신을 한번 믿어봐도 된다.


남들은 다 맛있다는데 맛을 못느껴도 되고, 남들은 다 재미있는 영화라는데 재미를 못느껴도 된다. 얼마든지 몰라도 되고, 실패해도 된다. 당신 자신으로서 그 일을 했다면, 다 당신의 알찬 양분이다. 몰라서 속상하고, 실패해서 슬프다면, 그만큼 당신 자신이 무너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신 자신을 세운 것. 속상하고 슬픈 만큼 당신이 당신 자신으로서의 경험들을 분명 소중히 했다는 것이다.


하나의 경험을 그렇게 자신의 경험으로 아낄 수 있었던 당신은, 이 인간의 삶을 사랑하는 자. 그 사랑이 이미 격이 다르다. 삶의 대가라고 불릴 것이다. 어떠한 정보로도 그 실제를 다 파악할 수 없는 인간의 삶에 대한 진짜 권위자, 당신이 이제 그것이다. 믿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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