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알려주지 않던 진짜 처세술 #4

"주인공을 찾아라"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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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주인공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당신의 인생은 피곤해졌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기대가 강요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주인공이지 않았던 것 같은 부모가 자기 자식은 주인공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 기대는 맹목적이고도 당위적이다. 자식의 내면에 어떤 빛나는 주인공의 씨앗 같은 것이 잠재되어 있다고 당연하게 믿곤 하는 것이다.


자신은 자식에게 아무 것도 바라지 않으며 그저 건강하게만 살아줬으면 좋겠다고 모든 부모는 말을 하나, 이 말을 진심으로 듣는 자식은 아무도 없다. 검증도 이미 끝났다.


세포의 재생을 돕기 위해 하루에 12시간씩 자고, 광합성은 잊지 않도록 그래도 꼬박꼬박 담배를 물고는 햇볕을 쬐러 나가며, 먹성도 좋게 라면 두 개에 늘 공기밥까지 꾸역꾸역 말아서 완전식품인 김치 반포기와 함께 섭취하는 그 날백수의 생태는 실은 얼마나 건강에 좋은 것이었을까. 그러나 부모는 좋아하지 않았다.


이렇게 살면 주인공이 될 수 없다, 그것이 부모의 따가운 눈초리를 통해, 또 등짝에 강렬히 내리꽂힌 손자국을 통해 결국 자식들의 내면에까지도 자리잡게 된 그 목소리였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있을 때, 자기가 뭘 잘못한 줄 안다. 매사에 자신이 없고, 늘 혼날 것 같으며, 비굴하게 눈치만 보게 되는 사회적 죄책감은 이런 방식으로 형성된다. 지금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는 그 이유가 흡사 하늘로부터의 명을 어긴 대역죄인 같은 심정을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구책으로서 소소한 반항들도 출현했다.


소위 말하는 소확행 같은 것.


마스다 미리의 책 등을 경전삼아, 자기들끼리 베이킹도 하고, 수제맥주도 만들고, 시집도 쓰고, 꽂꽂이도 하고, 커피도 볶으면서, 그 모든 올망졸망한 소품들을 하얀 린넨천 위에 고이 모아 연 포트럭 파티에서는 이렇게 선언하기도 했다.


우리가 세상을 바꿀 거창한 주인공 같은 것은 아닐지 몰라도, 그래도 분명 우리 자신의 이 소소한 삶에서는 저마다가 다 저 밤하늘의 작은 별들처럼 빛나고 있는 엄연한 자기 인생의 주인공들이라고.


킨포크와 이케아 사이의 그 어딘가에서 발화된 이 선언은 그만큼이나 허세로움과 허술함을 동시에 갖추고 있었다. 바로 그 특성. 무슨 인디문화 내지 하위문화의 주체가 담지할 법한 그 특성에 의거해, 우리는 자신이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어떻게든 모색해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반항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협상이었다. 이 정도 주인공으로 부모가 좀 만족하면 안되겠냐고.


그럴 수 있었더라면 우리는 지금같은 이 대혐오시대를 살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사회적 갈등의 본질은 결국 자기 자식이 주인공이 되기를 꿈꾸는 부모들의 전쟁이다. 욕망전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 대립하고 혐오하는가? 저게 지금 우리 대신에 주인공이 될 것 같아서다. 그러면 우리는 영영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엄마는 얼음여왕처럼 대노할 것이다.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어 살아있는 것이 숨쉬는 일은 버거워지고, 자연스러운 생리적 욕구로 화장실에 가는 길조차 살얼음판일 것이다.


이처럼 우리 아이가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이 당위적 압박이 우리 모두를 힘들게 하며, 사회를 병들게 한다.


그러나 떠올려보면 좀 이상하다.


정작 부모들 자신도 가족 내에서조차 자식들을 주인공으로 대했던 적이 없으면서, 왜 그러한 강요를 자식에게, 사람들에게, 또 사회에게 하고 있는 것일까.


주인공이 주인공인 것은 자율적이라서다. 하고 싶을 때 하고, 하기 싫을 때 안하는 것이 주인공이다. 그러니 실은 자식들의 날백수 시절이 그들이 정말로 주인공이었던 때다. 그러나 그 거룩한 순간은 부모들 자신에 의해 가장 거부되지 않았던가. 진짜 주인공은 땅속 깊이 파묻어놓고는 대관절 어디에서 주인공을 찾고 있단 말인가?


주인공은 당신에게서 이미 실종되었다.


그러니 당신은 주인공이 아니다. 거창한 주인공도 아니고, 소소한 주인공도 아니다. 그저 주인공이 아닐 뿐이다. 당신이 시작해야 할 지점은 이 지점이다.


그러면 당신이 해야 할 일도 분명해진다.


당신은 당신에게는 있지도 않은 주인공이 되려 하거나, 당신의 내면에서 숨겨진 주인공 같은 것을 찾아야 할 필요가 전혀 없다.


당신이 주인공이라거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착각을 해지하고, 당신이 이제 정말로 해야 할 것은 주인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는 일이다. 당신 자신이 주인공이어야 한다는 당위에 빠져 있으면 이것을 배울 수 없다. 주인공이기를 포기하고 배워야 한다. 그래야 주인공을 알게 된다.


그러면 당신의 밖에서 서서히 눈에 들어온다. 주인공이라는 것의 모습들이.


당신 안에 내사된 부모의 당위적 명령에 따라, 당신 자신이 꼭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며 주인공의 자리를 놓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투쟁하려는 그 일만 멈춘다면, 당신은 반드시 알아볼 수 있다. 빛나는 주인공의 모습을.


표현 그대로다.


당신이 현재 있는 공간, 상황, 지역, 거리, 장면, 환경 등 그 장에서 가장 빛나고 있는 그것이 주인공이다.


주인공은 초등학교 시절 학부모회에서 좋아하던,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예의도 바르고, 외모도 곱고, 친구들과 사이도 좋은 무슨 선량한 몰개성의 반장 같은 것이 절대 아니다. 장미도, 해바라기도, 안개꽃도, 결코 이러한 방식으로 주인공이지 않다.


주인공은 오직 자율적인 것. 곧, 자체발광한다.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어도 거기에서 반드시 스스로 빛나고 있는 것이 주인공이다.


다수결로 가장 좋은 평가를 얻은 이가 주인공인 것이 아니고, 최대치의 인기를 수집한 이가 주인공이 되는 것이 아니며, 돈과 힘, 외모, 재산 등의 자원이 가장 많은 이가 주인공 자격을 얻는 것이 아니다.


주인공이 주인공인 이유는 오직 하나, 스스로 자체발광하고 있어서다.


떠올려보면 당신도 그러지 않았던가. 당신은 인기투표에서 1등을 해서 백수를 하고 있었나? 동네주민들의 민주적 절차로 선출되서 우리 동네 공인 백수의 자격을 당당히 얻었던 것인가? 그런 것 하나 없이, 당신은 스스로 백수였다. 가진 것이 없어도, 되는 일이 없어도, 조금 답답할 때도 있고, 한참 외롭기도 해서 가끔 눈물지어도, 그러나 도무지 연유를 알 수 없는 어떤 이상한 충만감이 분명 그 가슴속에서 일렁이던 자체발광의 시절을 살았다.


지금 돌아보면, 분명 그때의 백수시절이 정말로 행복했었다는 사실이 떠오를 것이다. 일상의 사물들이 다 생생한 빛으로 물들어 있었으며, 혼자 걷는 밤거리마저도 어떤 그리운 존재의 노래로 매순간이 가득 차있었다고, 당신은 분명히 그렇게 기억할 것이다.


아무도 당신에게 주인공을 시켜주지 않았지만, 또 악으로, 깡으로, 독기로 어떻게든 주인공이 되어보겠다고 당신이 발악하고 있지 않았지만, 당신은 분명 스스로 주인공이었다.


당신이 몰랐던 것은, 자체발광하는 것이야말로 주인공이라는 사실, 당신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는 사실.


당신이 스스로 부정해버린 것도 이것이다. 당신의 빛을 당신이 부정했기에, 그 주인공의 빛은 당신에게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때 당신이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주인공이 주인공으로서 정확하게 알려질 수 있었더라면 또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니 당신이 이제 해야 할 일도 이 일이다.


주인공을 찾아라.


당신이 잃은 주인공을 찾아 돌이키는 것이다.


당신의 주변에서, 당신이 있는 모든 곳에서, 그 자리의 주인공이 무엇인지를, 또 누구인지를 찾아, 그것이 정말로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알려라. 그 사실에 힘을 더해라.


이것은 여론을 모아 특정한 대상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오늘날의 킹메이커의 방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평민 A를 SNS의 매직으로 아서왕이 되게 해주는 마법사 멀린놀이를 하라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이제 알아볼 수 있게 된 주인공을, 이미 자체발광의 주인공으로 존재하고 있던 그 주인공을 정확하게 주인공으로 알아보라는 것이며, 주인공으로 참되게 대접하라는 것이다.


그게 바로 당신이 잃은 그 빛의 시절, 당신이 상실한 주인공이라는 것을 당신에게로 돌이키는 실제적인 방법이다.


당신이 참된 주인공을 살아오르게 하면, 이제 당신이 참된 주인공으로 살아오른다.


당신이 당신에게서 존재했던 참된 주인공을 스스로 부정함으로써, 결국 당신 자신이 영영 참된 주인공이 될 수 없게 되었던 그 필연의 과정을 반대로 뒤집는 것이다. 그러면 동일한 필연의 힘이 작동한다.


주인공을 긍정해라. 주인공을 찾아 그에게 힘을 주어라. 아주 단순하게 당신은 그 일만을 하면 된다. 당신이 주인공이 아니다. 당신이 아닌 실제의 그 주인공을 긍정해라. 주인공의 자리를 다투려는 시기와 질투로 실제의 주인공의 길을 가로막으며 그 빛을 꺼트리려 들지 말고, 오히려 주인공의 길이 더 열리도록 도우며, 그 빛이 더욱 환히 퍼지게 하는 일에 힘을 쏟아라.


그게 당신이 주인공이었던 시절, 바로 당신이 필요로 했던 것이 아니던가?


그 필요가 오랜 시공을 넘어 이제 비로소 주인공에게 닿을 수 있게 되는 그 기적의 현실을, 당신이 지금 이루는 것이다. 당신이 지금 돌이키는 것이다. 주인공의 시간을. 바로 당신의 시간을.


인기있는 것, 권력을 가진 것, 많은 이들이 추종하는 것, 유행하는 것, 대세인 것, 심지어는 소확행인 것, 이런 것들이 아니다. 주인공인 척하는 이런 것들을 실제의 주인공이라고 착각하게 된 것은, 당신에게 저주처럼 부여된 부모의 명령 때문이다. 그 명령에 따라 자꾸만 거짓의 주인공을 지지하며 추구하게 되니, 당신의 인생도 거짓에 휘둘려 몹시 피곤해진 것이다.


당신이 거짓에게 힘을 주면 당신의 인생이 거짓의 무게로만 더욱 가득차고, 당신이 진짜를 보고자 하면 당신의 인생이 진실한 빛으로 자체발광한다.


그러니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이 모든 거짓의 주인공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직접 지금 무엇이 정말로 주인공인지를 알아보는 일이다. 당신은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다. 스스로 빛나고 있는 그것은 또한 당신을 위해 빛나고 있기도 한 것. 거기에는 반드시 당신이 잃어버린 당신 자신의 모습, 그 설렘과 그리움의 빛이 가득 피어나고 있기에. 그렇게 왠지 모르게도 몹시 반가울 것이기에.


이러한 참된 주인공에 대한 긍정은 곧 당신 자신에 대한 긍정. 당신은 지금 당신 자신을 바로 찾은 것이다. 이제 잃어버리지 말라. 주인공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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