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적 상위 10%가 되는 법"
복잡하고 어렵게 뭘 더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인류의 90%가 하는 불건강한 일을 하지 않으면 당신은 그것만으로 상위 10%다.
인류의 90%는 그렇다면 무슨 일을 하는가?
남의 집에 심리적 쓰레기를 버린다.
심리상담을 오래 해온 이들은 누구나 이 사실을 안다. 이 일이 거의 대부분의 인간사에서의 갈등의 이유이며, 늘 지겹도록 반복되는 상담의 주제라는 것을, 그리고 바로 이 일에서 벗어나는 것이 결국 상담의 주된 목적임을.
그렇다면 이 쓰레기투기의 일은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는가?
부모와 자식의 갈등에서 시작된다. 그 갈등은 유착이 만든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떠날 수 없는 그 끈적한 야합. 이 야합이 지속되려면 갈등이 없어야만 한다. 유착의 상태를 위협하는 갈등은 사라져야만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한 좋은 전략이 있다. 외부에 악을 만들어 그것을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가족 사이에서 경험하던 모든 갈등의 이유는 우리 가족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외부의 악 때문이다. 그것만 퇴치하면 갈등은 사라질 것이다. 이에 따라 부모와 자식은 이제 외부의 거악을 상대하기 위한 연대를 이루며 극적인 화합의 그림을 연출한다. 그럼으로써 자기들끼리는 문제가 없어진 척을 한다.
보통은 이 경우 부모가 자식을 지키기 위해 초능력을 행사하는 어벤져스 놀이를 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우리 아빠가 하늘을 날아 강력한 힘으로 벽을 부수고 나를 구하러 왔어. ㅠㅠ" 내지 "우리 엄마가 파이어볼로 나쁜 놈들을 다 혼내주고 나를 보호해줬어. ㅠㅠ" 등과 같은 유아적 판타지의 그림이 그 안에는 농후하게 내재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부모의 초능력으로 기대되는 것은, 실은 부모-자식 사이에서의 갈등을 야기한 바로 그 소재다. 자기를 두렵게 한 것이 자기를 지켜주기를 바라는 이것이 바로 주술신앙이다. 고로, 이 어벤져스 놀이는 주술을 가동시키기 위한 일종의 종교적 제의인 셈이다. 희생양이라는 것 또한 원래 그러한 주술적 소재다.
이처럼 근본적인 갈등의 구조는 전혀 다루지 않고 은밀하게 회피한 채, 희생양을 제물로 바친 뒤 얻게 되는 이 주술의 약빨로 주술을 꿈꾸던 이들은 얼마간 모든 것이 다 괜찮아진 것처럼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주술효과가 떨어져 다시 갈등이 불거지면 또 다른 희생양을 찾아 동일한 일을 반복한다.
인류의 90%가 이렇게 살고 있다.
희생양 주술에 빠져, 부모-자식 관계에서 만들어진 심리적 쓰레기를 남의 집에 투기하는 일들을 서로가 서로에게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 쓰레기지옥을 우리는 민주국가니, 시민사회니, 정의와 평화의 공동체니, 사랑이 꽃피는 가족이니 등의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뭐라고 부르든 간에, 당신의 심리적 건강성을 평정할 척도는 분명하다.
당신이 얼마나 자기 쓰레기를 스스로 치울 수 있는지만이, 당신이 하나의 성숙한 인격이고, 건강한 심리적 개인이며, 또 스스로를 행복하게 할 능력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결정지을 뿐이다.
확실한 것은, 이 쓰레기투기만을 반복하며, 마치 자기 가족만이 순결하고 선량한 집단인 것처럼 꾸며내는 일을 지속하는 이들이 정작 자신의 인생을 행복하게 경험하는 일은 좀처럼 없다는 것이다. 인류의 90%가 자신들이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그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왜 그렇게 되는 것일까?
가족주의라는 폐쇄적 경계의 환상에서 벗어나 실제로 작동하고 있는 사실을 살펴보면, 자신이 남에게 한 그 일은 결국 자신에게 한 일이기 때문이다. 남을 힘들게 만들면 자기도 힘들어지며, 남을 불행하게 하려는 의도는 정확하게 자신의 불행을 불러온다. 인간이 인간에게 하는 그 모든 일은 다 인간인 스스로에게 하는 일이다. 그 자신에게도 그 일이 반드시 일어나리라는 예언적 명령과도 같다.
그러니 실상 쓰레기는 어디 가지 않는다. 자신이 투기한 만큼 동일한 양이 자신에게 다시 돌아온다. 자신이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만든 것처럼 자신도 똑같이 희생양이 되며, 문제는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다. 어차피 자신이 치워야 할 쓰레기다.
더 많은 이들을 악마로 만드는 지난한 과정 뒤에 치우거나 또는 그럼에도 치우지 않든가, 아니면 그냥 바로 자신이 치우든가의 문제일 뿐이다.
다행인 것은 한 번 치우면 이제 그 쓰레기는 사라진다는 것이다.
투기하면 다시 돌아오고, 직접 치우려 하면 영영 소멸된다. 후자가 압도적으로 쉽고 그 효과가 분명하지만 다들 전자의 길로만 간다.
두렵기 때문일 것이다.
실은 부모도 어린아이고 자식도 어린아이라서, 다들 유기의 공포가 있다. 유기의 공포가 유착을 만든다.
그래서 갈등을 직접 다루어 해소하기보다는 서로 딴청을 피우며 기회를 엿보다가, 끝내 다른 곳에 전가하는 방식으로 그 갈등을 회피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으니, 인류의 90%는 심리적 아동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자신은 무력하고 약한 존재라는 착각에 계속 지배당한다. 이에 따라 관계라는 환상을 계속 자기에게로 끌어들이게 된다. 소위 말해, 관계를 이루어 구조적으로 함께 있는 그림을 만들면 두렵지 않다는 것이다. 관계라는 이름으로 이 상호의존적인 유착의 상황에 강제적 당위성까지 부여하면 두려움은 더 봉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기대된다.
이것이 어떻게 가족이라는 언술이 인류사에서 그리도 중대한 것처럼 취급되어 왔는지, 그래서 아주 많은 경우 인간에게 가장 무거운 저주의 족쇄로 작용하게 되었는지의 그 내막이다.
세상의 모든 곳에서 판타지의 문법으로 가족영화를 만들고, 가족에 대한 이상적인 신화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모든 귀결을 다 가족주의에 대한 지향으로 이끄는 것은 오직 하나 두려움 때문이다.
어린아이의 두려움.
그것은 근원적인 차원에서, 자기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다.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
어린아이에게는 이것이 낯설다. 자신의 존재를 자각한다는 일이 너무나 거대한 충격이다. 그동안 부모의 종속물로 살며, 자신이 부모로 인해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믿어왔던 착각은, 자신이 스스로 존재하고 있다는 그 사실로 인해 전부 해체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린아이에게는 세계가 무너져내리는 경험과도 유사하다. 그러면 자신은 아무 것도 없는 커다란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질 것만 같다. 그 차갑고 고독한 공간을 어디 관짝 같은 데 갇혀 영원히 표류하게 될 것만 같다.
이것이 바로 유기의 두려움이다.
어린아이들에게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또 그 자각은 이 유기의 두려움을 야기한다.
물론 완벽한 착각이다. 실제로는 자기 존재에 대한 자각은 유기는 커녕 오히려 더 든든한 현실을 얻게 해준다. 무너지지 않는 어떤 근거와 연결된 듯한 힘과 안정감을 개인에게 확보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득들은 그러한 본원적 특성으로 인해 어린아이들에게는 흡사 부모를 부정하는 일처럼 경험된다. 부모가 없어도 그 존재의 이득들은 반드시 획득되는 까닭이다.
바로 그렇게, 자신이 존재한다는 일이 실은 부모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사실, 나아가 부모가 없어도 오히려 자신은 더 잘 존재하게 된다는 사실이 어린아이들에게는 가장 두려운 것이다. 곧, 자신에게 가장 근본적인 '존재의 사실'로 인해, 피상적인 '관계의 환상'이 깨지는 일을 어린아이들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주술적 사고를 하고 있는, 정말로 어린아이다운 착각이다. 주술의 기초적인 구조를 떠올려보자. 가상으로 어떤 일을 벌이면, 그 일이 실제의 현실에서도 일어나리라고 믿는 것이 주술이다. 그러니 주술적 사고에 빠진 어린아이들은 관계라는 환상 속에서 작동하는 부모라는 것이 부정되면, 부모역할을 하던 실제의 그 사람도 죽거나 사라질 것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자신이 자기 존재의 사실을 자각해서 그 일이 일어났다면, 자기가 곧 부모를 죽인 살인자다. 자기가 자기의 부모를 죽여 스스로를 유기의 상태로 만들었다. 어린아이들이 갖는 유기의 공포는 이러한 이중고를 갖는다.
이 유기의 공포가 심해지면 각종 정신병이 된다. 모든 정신병은 다 존재의 문제다.
자신이 자신의 존재를 자각할 수 밖에 없는 그 필연적 사건으로 인해, 기초적인 관계인 부모-자식 관계의 차원에서부터 갈등이 발생하고, 또 그 갈등을 회피하기 위해 결과적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타인과 세상에게 자신의 심리적 쓰레기를 투기하게 되는 그 일이, 곧 정신병의 다양성을 구성한다.
말은 심리라고 쓰지만, 엄밀하게는 그것은 존재에 대한 것이다. 정신병은 존재질환이다. 오늘날 인류의 90%가 다소간에 이 존재질환에 시달린다. 심리적 아동들이 필연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질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니 차라리 이런 표현을 써보자. 이 존재질환은 피터팬들에게만 발병한다고.
피터팬은 성숙을 거부하는 주술체다. 주술 자체와 동화되어 주술이 되어버린 이.
그는 어른을 혐오하기에, 그 자신이 어른이 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혐오가 아니라, 실은 두려워하는 것이다. 어른이 되는 일을. 여기에서 어른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사회의 관계적 역할에 능숙해진 어떤 기능적 모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단순하게 성숙의 문제를 의미한다.
제비꽃이 제비꽃으로 피는 일이 바로 성숙이다.
존재가 존재 그 자신으로 드러나는 일, 그런 것이 다만 성숙이다.
곧, 성숙은 더럽고 냄새나며 추악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되는 일이다.
피터팬이 성숙이라고 착각했던 것은 결국 자기 부모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자기 부모처럼은 되고 싶지 않아서 그는 자신에게서 성숙을 봉쇄했던 것이다. 이 또한 부모-자식 관계라는 환상에 사로잡혀서 일어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인류의 90%는 다 자기 부모처럼만은 살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한 뒤, 어느 날엔가 거울 속에서 자기 부모와 완벽하게 똑같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결국 피터팬이 하는 일도, 자신이 버려진 것처럼, 자신 또한 버리는 그 일이다. 사악한 어른을 상정해서 자신의 쓰레기를 거기에 투기한 뒤, 자기는 아이들의 히어로인 척하는 일.
유기에의 공포가 투기를 낳지만, 실은 투기가 곧 유기인 것이다. 남들에게 자신의 심리적 쓰레기를 투기한 이는, 자신의 존재를 유기한 것과 같다.
그렇게 자기가 자기의 존재를 버리니 성숙되지 않는다. 자신이 자신으로 꽃피는 현실이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니 어떻게 불행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불행은 필연이다. 인류의 90%를 차지하는 피터팬들에게 불행은 패시브다.
하지만 당신은 다를 수 있다.
아니, 달라야만 할 것이다. 한번뿐인 당신의 이 인생에 대해, 태어나서 정말로 행복했다고 마침내는 말하고 싶은 당신이라면 분명 달라야 할 것이다.
다를 수 있다.
쓰레기 투기를 멈추면 된다. 쓰레기 투기를 멈춘다는 것은, 자신이 자신의 존재를 그만 버린다는 것.
이제 당신이 당신의 존재를 떠맡으면 된다.
언제나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의 정당한 의미는, 자신이 자신의 존재를 떠맡는다는 것이다.
심리적으로 성숙해진다는 것 또한 바로 이 의미를 시사한다. 자신이 자신의 존재를 떠맡을 수 있는 그것이 성숙함이다.
당신이 성숙함을 향해 나아가는 만큼, 당신은 두렵지 않아진다. 더는 당신을 두렵게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자신이 부모와 무관하게 스스로 존재한다는 그 존재의 사실 때문에, 착각된 유기의 두려움이 우리에게 생겨났다. 그 두려움을 없애고자 우리는 부모-자식이라는 기초적 관계를 유착의 형태로 더 강화하려 했다. 나아가 가족주의를 통해 더 많은 우리편이라는 것을 만들려고도 했다. 그렇게 함께 있으면 두렵지 않을 것이라는 환상을 붙잡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이들이 모이면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모인 수만큼 몇 배로 두려워진다. 그럼으로써 두려움의 사건도 계속 생겨난다. 어벤져스 놀이를 하고 있으니, 이제는 먼 우주에서, 각종 평행세계에서 두려움의 위협들이 찾아오게 되는 것과도 같다.
두려움, 그것은 우리가 주술적 환상에 빠져 있는 만큼, 그래서 우리 자신이 덜 존재하게 되는 만큼 생겨나는 것이다.
존재의 부재가 곧 두려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존재질환에 빠져 있는 이들은 다양한 망상에 빠져 자신의 일상을 얼마나 두려워하며 살고 있는가.
당신이 당신으로서 단순하게 존재하고자 한다면, 그 모든 두려움은 사라진다.
태양이 뜨면 그림자가 만들어낸 환상의 공포가 사라지듯이.
당신이 당신으로 존재하며 발하는 그 존재의 빛 속에서, 어린아이가 망상했던 두려움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처럼 두려움 없이 당신이 가장 참된 당신으로 존재하고 있으니, 마침내는 환하게 피어날 당신 자신을 결코 유기하고 있지 않으니, 당신 밖으로 쓰레기를 버리게 될 일도 없다.
쓰레기지옥이었던 그곳에는 어느새 당신이라는 꽃이 피어나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모든 것을 바꿀 것이다.
어느 날 우리는 자신이 만든 광활한 꽃밭에 안겨 행복하게 웃고 있는 당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알아볼 것이다.
상위 10%로 살아가는 성숙한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이 대체 어떤 것인지를.
당신이 당신 자신의 존재를 떠맡고자 하는 그 작고도 단순한 일에서 이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시작하고 싶은 당신이라면, 그런 당신에게 존재의 비밀을 말해주겠다. 실은 비밀이 아니지만, 오늘날에는 다들 무시하기에 이것이 숨겨진 비밀인 것처럼 되어 있다. 상위 10%만 아는 비밀 같은 것. 그것을 말해주겠다.
자신이 자신의 존재를 떠맡으려는 이는, 이제 존재가 그를 떠맡는다.
누구에게도 전가하지 않고 자신이 자신의 존재를 책임지려는 이, 존재가 바로 그러한 이를 책임진다.
안으려고 하는 이가 안겨진다.
지금 하찮고도 초라해보이는 그래서 두렵기까지 한, 바로 그 자신이라고 하는 작은 꽃 한 송이를 내다버리지 않고 소중히 안고 있는 당신이, 반드시 꽃밭에 안겨 환하게 웃게 될 그 필연의 이유다.
쓰레기로 버리지 마라. 버려지는 것은 자신이다.
지금 그런 방식으로 존재하는 자신의 존재를 떠맡으면, 그게 당신 인생을 가득 덮어가는 행복의 이유가 될 것이다.
행복한 사람들은 누구나 다 이 비밀을 알며, 이제 당신도 안다. 10%가 100%가 될 때까지 계속해서 알려질 것이다. 꽃바람을 타고는. 당신은 이제 두려움 없이 인간의 행복을 진심으로 꿈꿀 수 있는 그런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며, 그 속에서 당신이 가장 환히 웃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