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나여도 존재해도 될까요?"
존재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전에는, 또 그 존재를 만나기 전에는 누구에게나 인생은 고통이다.
나는 처음에는 내가 고아라서 이리도 이 삶이 고통스러운 것인가, 라고 생각했다. 절반은 맞는 생각이었다. 고아라는 것은 불편함 그 이상의 수치스러움, 총체적인 결격사유였다. 고아로 살아가는 내내 나는 내 자신이 무엇을 하든 근본적으로 중요한 어떤 것이 결여되어 있는 부적격자라는 자기인식을 지울 수 없었다.
내가 틀렸던 것은 나만 그렇게 고아로 살아가고 있다는 그 생각이었을 것이다. 실은 누구나 고아다. 부모가 다 생존해있다 하더라도 인간은 다 정신적인 고아다. 자기 자신이 통째로 버려진 것처럼 느껴지며, 철저히 소외되었고, 이 세상의 누구에게도 온전히 이해받을 수 없을 것만 같다. 이러한 운명 속에 있다면 그도 분명 나처럼 고아였을 것이다.
대략 20년 전 내가 심리상담이라는 것을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우리 모두가 고아라는 이 발견이 번갯불처럼 나를 직격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혼자만의 비극 안에 빠져있던 자폐의 다락방에서 저 문 밖의 세상으로 나를 이끌었다. 설령 비바람이 몰아치고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이라 할지라도, 나는 내리치던 번갯불 사이로 비치던 어떤 길을 분명 보았던 것이다. 저기로 가야 한다. 그것은 갈망이었다. 본능이었다. 살고자 하는 짐승의 몸부림과 같았다.
심리학 전문출판사에 들어가 일을 하면서 책을 보고, 메모를 하며, 퇴근 후 그 메모들을 다시 살펴보다가 울음을 터뜨리고, 그렇게 눈물이 가르쳐준 어떤 통찰들을 내 생각으로 정리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공부가 재미있던 시절이었다.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분명 하루하루 나아가고는 있다는 실감 속에 있었다. 그것은 회복이자 동시에 전진의 의미. 나도 괜찮은 존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희망을 조심스럽게 품을 수 있던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대학원에 들어가게 되면서 본격적인 심리상담사가 되기 위한 배움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얘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다. 지루해서다. 늘 똑같은 자리를 헤매는 방황은 지루하다. 대학원에 들어가기 전만큼이나 나는 지독하게 방황했다. 물론 차이는 있다. 그 전에는 몰라서 방황했다면, 대학원에 들어가고 난 후에는 아는 척하느라고 방황했다. 후자가 분명 더 지독한 종류의 것이다. 모르면 찾을 수 있지만, 아는 척하고 있으면 영영 길을 잃는다.
차라리 내가 어떻게 길을 잃었는지를 간단하게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이 세상에 아무도 내 자신을 제대로 받아주는 이가 없다면, 나는 내가 그런 사람이 되자고 생각했다. 세상에 없으니, 이제 내가 만드는 것이다. 나는 그런 것을 길이자 답이라고 믿었다.
나도 모르게 아주 전형적인 어떤 생각에 동의하고 있던 것이다.
그것은, 고아에게는 고아를 받아줄 엄마가 필요하다는 생각. 참된 엄마가 이 세상에 출현하면 모든 고아가 구원될 것이라는 그 생각.
나도 여느 상담자들처럼 메시아병에 걸렸던 것이며, 아주 전형적으로 다 받아주는 모성이라는 것을 구원자상으로 놓고 있던 것이다.
내면아이, 융의 분석심리학, 현대정신분석의 재양육모델, 인간중심적 수용, 여신사상, 대안적 내러티브치료, 탈구조주의의 다양성상담 등, 모성과 관계된 방식은 질리도록 다 해봤으며, 정말 열심히 파고들어 해봤다.
내담자도 그렇게 상담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를 온전한 인간으로 바라보며, 그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겠다는 그 태도를 성실히 견지하려 했다.
그렇게 내 상담자로서의 인생은 한 번 망했다. 철저하게 망했다.
번아웃 정도가 아니다.
그것은 세상을 집어삼킬 정도의 거대한 분노.
화가 계속 나서 미칠 것 같았다. 일상을 통째로 화가 잠식해갔다. 상담이 있는 날에는 어떻게든 평정심을 찾아 또 진정으로 내담자를 만나기 위해 노력해보지만, 상담이 끝난 후에는 여지없이 더욱 격심하게 찾아오는 분노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나는 한없이 지쳐가기만 했다.
보수정권이 문제인가, 대기업이 문제인가, 약자를 더욱 힘들게 하는 이 잘못된 계급착취의 구조를 어찌 해야 하는가, 인간의 고통을 조장하는 이 더러운 욕망의 수구세력들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그때 나는 소위 좌파라고 부르는 이들의 그 상태였을 것이다. 광화문에 나가 시위도 하고, 인권위원회 앞에서 오체투지도 하는 등, 그런 것이 더 진정한 상담사다운 일이라고 믿었다.
정직하게는, 상담이라는 것 자체는 이제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활동이 필요하다. 힘이 필요하다. 상처가 났을 때 회복시켜주고 다시 또 상처가 나는 일을 지켜봐야 하는 이 밑빠진 독에 물붓기 같은 일이 아니라, 근본적인 구조를 바꿀 수 있는 일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내가 돈이 무한정으로 많다면 내담자들을 더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을텐데, 그러지 못하는 내 자신의 무력함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계속 화가 났다. 자꾸만 화가 났다. 엄청난 화를 도저히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나는 알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엄마의 상태임을.
자신이 모든 것을 다 받아주며 모든 아이를 구원하려는 거대한 엄마가 되고자 하는 이는 반드시 이 상태로 귀결되고야 만다는 것을.
상담사로서의 나의 길은 그렇게 그때 한 번 끊어지고 닫혔던 것이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나 홀로만 있었다. 자폐의 방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서 무서웠을 것이나, 나는 그 대신에 이 깜깜한 숲속에 버려진 가상의 아이들이 얼마나 무서워할지만을 망상했다. 그렇게 자신의 무서움을 회피하고는, 그 감정을 다 분노로 바꾸었던 것이다. 분노의 불길로 자신을 불태우면, 혼자여도 춥고 무섭지 않을 것이라는 그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매일매일 시비거리만을 찾아다녔다. 포탈사이트의 정치권 기사를 보며, 인면수심의 악행을 묘사하는 뉴스를 보며, 또 주변에서 윤리적이고 진정한 인간으로 살지 않는 모습들을 보며, 그 모든 것에게 시비만을 걸고 있었다. 나와 싸워달라고, 내가 계속 화를 낼 수 있게 연료를 공급해달라며, 하얀 재가 될 때까지 자신을 영원히 소진시키고 있던 것이다.
가진 것이 미천한 이는 빨리 소비된다. 나는 금방 재가 되었다. 이제 살기 싫었다. 숨만 붙어 있었다.
그러자 바람이 불어왔다.
내 앞에 어느덧 서있던 것은 한 사람의 선사(禪師)였다.
나는 그의 등 뒤로 그가 내 앞으로 걸어온 길을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은 아주 오래전 번갯불이 치던 그 날 내가 분명하게 보았던 그 길이었다.
나는 지금은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길을 영영 잃었을 때, 길이 직접 나를 찾으러 왔다고.
배움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얘기도 별로 하고 싶지 않다. 말할 수 없어서다. 글로 쓸 수 없어서다. 써놓으면 거짓말이 된다. 말하면, 말하고자 하는 그것만을 쏙 비켜간다.
이런 것은 말할 수 있다.
나는 내 인생에서 최고를 살았으며, 그때 다 살았다. 완벽하게 이루었다.
그때 나는 한 번 죽었던 것이다. 하나의 인격이 완결되었다. 다 살고서는.
나는 피구원자인 고아도 아니었고, 고아가 부른 구원자 엄마도 아니었다. 고아와 엄마가 동시에 끝났다. 둘이 만났기 때문이다.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나였을 뿐이다.
그러자 먼저 죽었던 상담사라는 것이 다시 살아났다. 내가 살아나니, 나의 것들이 다시 다 살아났다.
그것을 이제 상담사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떻든 나는 숨쉬듯이 상담 같은 것을 하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구원자 엄마가 되려는 일에 상담이라는 이름을 붙여 하던 그 일을 안하게 되니, 나는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리고 알았다.
고아 같은 인간의 상황에 필요했던 것은 정말로 엄마가 아니었음을.
그동안 나는 결국 무엇을 했던 것일까. 누군가가 나를 다 받아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세상에 그런 이가 없으니 나는 내가 그런 이가 되어 다른 이들을 받아주려 한 것이다. 그렇게 가장 높은 권위의 자리에 올라,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위장된 신성을 집행하려 한 것이다. 즉, 나는 신인 척했으며, 그게 내 모든 고통의 이유였다.
이러한 일들이 생겨난 이유는, 내 자신을 다 받아주는 누군가가 있어야, 내가 내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착각 때문이었다.
이 모든 것은 진실로 다 존재의 문제였다.
내가 다른 이를 받아줌으로써 그를 존재하게 해야 하는 그 문제가 아니다. 이것이 완벽한 착각이다.
받는 것이 아니다. 주는 것이다. 던지는 것이다. 내 자신을.
이것은 프로포즈다.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회복하는 방법은 프로포즈다.
나는 상담사를 꿈꾸기 전이든, 그 이후든 간에, 늘 동일한 양상의 고통 속에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내 자신을 타인들에게 맞추어가야 하는 그 문제였다. 나는 어떻게든 내 자신을 변화시켜, 사람들이 좋아할 모습으로 내 자신을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내가 결격사유없이 정당하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 일은 처음부터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척은 할 수 있다. 내가 내 자신이 아닌 다른 좋은 것인 척하는 동안 생겨나는 그 고통을 이를 악물고 버텨내며, 그런 척은 한번 해볼 수 있다. 오래가지는 못한다.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누가 내 자신을 받아준다 해도, 받아진 그것은 내 자신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 나는 늘 채워지지 않았던 것이다. 존재의 결핍을 계속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가 내 자신의 존재를 꾸기고 뒤틀어 다른 이들의 품에 받아지려는 그 일을 하고 있는 동안, 나는 스스로 내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던 것이기에.
내가 내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데, 이 우주의 누가 그것을 긍정할 수 있을까?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은 분명 할 수 있다.
나는 고아라서, 다른 모든 이들처럼 내 자신이 너무나 결격사유가 있는 못나고 부족한 사람 같아서, 그런 척이라도 하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을 것 같았다고.
이것이 모든 고아, 모든 인간이 품고 있는 가장 본질적인 문제일 것이다.
자신의 존재가 죄스럽다.
자신이 존재하는 일이 잘못인 것 같다. 자신의 존재로 인해 너무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고 힘들게 된 것만 같다. 그러니 죄스럽다. 너무 죄송하다. 이렇게 태어나고 싶지 않았는데 이럴 수밖에 없어서 너무 죄송하다.
어쩔 수 없다. 이럴 수밖에 없다. 그 말은 분명 할 수 있다.
그 말을 분명 해야 한다.
이것은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다. 노력해봐도, 안하려고 해봐도, 나는 결국 이렇게 존재한다.
내 자신이 맞추어야 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 아니며, 그런 내 자신을 누군가가 받아주어야 하는 일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전자도 고통이고, 후자도 고통이다.
그러니 어디 좋은 데로 갈 곳이 있는 것이 아니다. 어디로 가든 고통이다.
다만 이 자리로 오는 것이 있는 것이다. 고통의 반대편에서 반드시 길을 따라 오는 것이 있다. 길 자체가 온다.
프로포즈의 시간이 온다.
프로포즈는 맞추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받아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내 자신과도 함께 존재할 수 있냐고 묻는 것이다.
지구상 어딘가에 이런 모습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런 나와도, 이 지구에서 같이 살아도 괜찮겠냐고 묻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답이 필요한 물음이 아니다. 물음 자체가 답이다.
나는 선택한 것이고, 결정한 것이다. 분명하게 소망한 것이다.
이런 나이지만 당신과 함께 살고 싶다고.
이런 나여도 당신과 함께 꼭 존재하고 싶다고.
그것은 존재하겠다는 약속이었다.
아무 조건 없이도, 나는 반드시 존재하리라는 그 영원의 약속. 절대적 약속.
내 자신의 존재는 지금 가장 긍정된 것이다. 내 자신의 존재를 다 주고, 다 던지고, 다 드리는 프로포즈로 말미암아.
나는 상담사가 이 프로포즈의 일을 하는 이들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배웠다.
상담사는 받아주는 이가 아니다. 그는 프로포즈를 한다. 내담자의 존재를 받아주는 위대하고 좋은 어떤 것이 아니라, 위대하고 좋은 어떤 것이 아닌 그 자신임에도 내담자와 함께 존재하고 싶어한다.
그게 바로 상담자가 내담자에게 전하고 싶은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약속.
내담자가 바로 그렇게 지금 상담자의 그 모습과 동일한 방식으로 존재하며, 그런 존재방식에 아무런 잘못이 없이 얼마든지 그 자신으로 존재해도 된다는 그 존재로부터의 약속을.
그래서 받아준다는 표현을 쓴다 해도, 그것은 상담자가 받아주는 것이 아니라, 내담자가 받는 것이다.
내담자가 스스로의 존재를 받는다.
자신이 존재해도 된다는 사실을 받는다. 그 자신의 존재로부터.
상담사의 프로포즈를 통해, 내담자도 그 자신에게 프로포즈를 하게 된 것이다. "이런 나라도?"의 물음은 원래 프로포즈가 이루어지는 양쪽에 동시에 걸리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동시에 그 존재를 회복시킨다.
그리고 이제 존재가 있는 곳에 고통이 없다. 다 이루어진 것이며, 완수된 것이다. 고통을 치유하고자 하는 존재의 일이. 자신이 존재하는 일이 너무나 죄스럽다던 고통의 인격이 죽고, 이제 나는 그냥 내 자신이다. 내 자신으로 살아났다. 이제 뭘 하든 내가 나여도 되는, 내가 나이기만 해도 되는 이 존재의 일 속에 있게 될 것이다. 존재가 계속 내가 나일 수 없던 고통의 이유를 죽이고 나를 살릴 것이므로.
이렇게 나는 상담사라는 것이 존재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배웠던 것이다.
존재의 상담사.
상담사라고 하는 것은 결국 이것이다.
존재의 길을 언뜻 엿보았고, 그 길을 꿈꾸었으며, 가끔은 길을 잃기도 했지만, 마침내는 그 길로부터 다시 찾아진 이들.
그러니 이것은 직업이나 역할에 대한 의미가 아닐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이름이다.
인간이라는 그 존재방식이다.
태어난 일이 죄가 아닌, 얼마든지 그 자신의 존재를 누려도 된다는 그 존재방식. 이것은 프로포즈로 완성된다. 인간을 향해 프로포즈할 수 있기에, 나는 인간이며, 내 자신으로 존재한다.
한 번만이라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유롭게 숨쉬며 살 수 있는 인간이고 싶고, 한 번만이라도 태어난 이 모습 그대로 괜찮은 내 자신이고 싶어서, 나는 프로포즈한 것이다. 그렇게 나는 존재의 상담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