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화는 당신의 내장을 울려야 한다"
다들 당신에게 화를 내는 일은 안좋은 일이라고 말한다. 화를 내는 대신에 더 노력해서 성공을 이루고, 당신을 화나게 하는 것들보다 더 높아지는 것이 진정한 승리라고 말한다.
그래서 당신에게서는 화가 멈추지 않게 되어버렸다. 언젠가 승리하기 위해 끝없이 화를 내며 투쟁해가는 구조에 사로잡혀버린 것이다.
당신이 왜 화가 나는지는 분명하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엿을 먹였기 때문이다. 자신은 순수하고 착한 척하며 당신을 무시하고, 그렇게 선의의 얼굴로 시치미를 뚝 뗀 체 당신을 짓밟으려 했기 때문이다. 당신을 철저히 소외시키고, 당신에게 와야 할 것들을 갈취해 당신을 서럽게 했으며, 그렇게 당신이라는 존재가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취급하려 했다.
존재의 부정.
당신은 바로 그런 취급을 당한 것이다.
실은 당신을 그처럼 잔인하게 무시하고 부정한 그 역시도 당신과 동일한 취급을 받은 아픔이 있는 것이라고, 그 아픔을 자신이 소화하기 너무 힘들어 당신에게도 피치 못해 넘기게 된 것이라는 그딴 말들은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 불교 좀 배웠나 보네. 마음의 인과작용이 그렇게 일어난다는 것을 자신이 좀 안다고 잘난 척하고 싶은가 보네. 이 이상의 어떤 피드백이 기대될 수 있을까?
상대적인 대립과 갈등이 극도로 심화되어 있으며, 또 그 상대적 구조 때문에 만들어진 열등감을 남에게 성공적으로 전가하는 일이 극상의 승리의 조건이 되어 있는 이 현대사회에서는, 화는 단지 화를 알아차린다거나, 가라앉힌다거나, 화의 내용을 이해하는 등의 일로는 결코 효과적으로 다루어질 수 없다.
져서 화가 나고, 또 이기려고 화를 내며, 결국에는 누구나 다 졌지만 자기는 이긴 것처럼 보이려고 화가 안난 척하기도 한다.
이처럼 오늘날은 가장 화가 폭주하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화는 가장 은폐되며 회피된다.
오히려 자기는 꾹 참으면서 남이 대신 화를 내게 만들면, 그 또한 자신의 도덕주의적 승리로 여기곤 하는 미친 현실이다.
이런 현실에서 당신은 계속 화가 날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당신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당신 자신이 시한폭탄 같다는 것을. 위태위태하다.
자신의 내부에 가득찬 그 압력을 조금이라도 낮추어보려고 당신이 대개 하곤 하는 일은, 당신을 정의의 편으로 위치시킨 뒤 정치인들이나 연예인들 또는 직장상사들의 비도덕성을 규탄하는 일이다. 정의라는 것은 화를 내는 일을 일정 부분은 정당화시켜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 짧은 기회를 살려 당신의 화를 퍼부어본다. 만족스러울리는 없지만, 그래도 또 며칠간은 살 만해지는 것 같다. 물론 압력은 빠르게 다시 차오를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당신은 화를 '계속' 내게 되는 상황에 처해 있다.
계속되는 것은 완결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말로 끝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신이 화를 참거나, 누르거나, 떠넘기거나, 화가 안난 척하는 방식으로, 마치 자신은 화와 관계가 없는 사람인 것처럼 시치미를 떼며 모른 척하고 있으면 화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 그러한 당신에게서 계속된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화를 정말로 끝내는 것이다.
화를 그 끝으로 가게 하는 일.
화의 끝까지 가는 일이, 당신에게 정말로 필요한 일이다.
그러니 끝내자.
죽여버리자.
문명사회가 만든 착각 때문에, 당신을 짓밟으려 하면 당신에게 죽을 수도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몰라서 당신을 호구 취급하던 것들에게 정확히 알려주자.
당신은 당신이 정말로 왜 화가 났는지 모르겠는가? 실은 당신도 알고 있지 않은가?
당신은 끝내버리고 싶어서 화가 난 것이다.
그리고 화는 증명한다. 당신이 정말로 끝내버릴 수 있는 힘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런 조잡한 게임규칙에 봉사하기 위해 화는 생겨나지 않는다. 당신을 엿먹이는 게임판 자체를 뒤엎고 원자폭탄처럼 모든 것을 날리기 위해 당신의 화는 피어난 것이다.
당신이 학창시절 일진들에게 당했을 때를 떠올려보자. 당신은 왜 밤을 설치며 부들부들 떨었는가. 당신이 정말로 그 새끼들을 죽여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이면 당신이 지는 것 같아서, 또 사회는 그러한 당신을 오히려 패배자로 심판할 것이기에, 당신은 꾹 눌러 참았던 것이다. 당신이 힘이 없는 찐따라서 참은 것이 아니다. 죽일 수 있는 엄청난 힘을 갖고 있었기에, 어떻게든 오른팔의 흑염룡을 억누르듯이, 그렇게 자신의 힘을 눌러 참은 것이다.
문명사회가 만들어낸 가상현실에 기생해서, 그 가상현실의 법칙 속에 자기 몸을 숨긴 채, 당신을 엿먹이던 이들이 너무 많다. 무인도에서 당신과 둘만 있었더라면 이미 맞아 죽었을텐데.
미디어의 보호 속에 숨어서 사람들을 우습게 보며 자기 생각대로 조종하고 농락하려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SNS의 스머프 마을 안에서 모두 착한 척하는 그 도덕주의의 방패를 들고는 자기의 열등감을 교묘하게 다른 이들에게 떠넘기고 있는 이들은 또 어떠한가.
다 해보라고 해라. 이제 당신하고는 관계없다.
당신은 그냥 죽여버릴 것이다. 그 의지를 품는다. 다 끝내려는 의지를.
이러한 말들이 좀 미친 소리 같은가? 너무 위협적으로 들리는가?
그래서 당신이 화의 문제를 벗어날 수 없게 된 것이다.
처음부터 위협받고 있던 것은 당신이었다.
당신이 죽이려고 시작한 것이 아니다. 당신의 목숨이 위협받고 있던 것이 먼저다.
아무 것도 모르는 순수한 아이 마냥 순둥순둥 선량한 표정을 짓던 이들은, 당신을 죽이려는 살의를 숨기기 위해 그런 표정을 연기하고 있던 것이다. 물론 그들 자신에게도 그 의도는 숨겨진다. 자기들은 정말로 당신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이 없었다는 듯이 무오하고 순결한 표정을 또 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원래 연기를 잘하려면 자기최면을 걸어야 한다.
그런 의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결과가 증거한다. 당신에게 문득 거대한 화가 자각된다면, 어마어마한 그 살의가 경험된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당신에게로 향하던 살의가 먼저 있었다.
당신을 죽이려고 하면서도 자기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양 시치미를 떼며, 순수하고 온후한 평화의 목가주의자인 것처럼 자기를 위선적으로 꾸며내던 이가 당신의 주변에 있었기에, 당신이 그렇게도 거대한 화를 경험하게 된 것이며, 또 자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위선의 연기 때문에 화의 실제가 은폐되었기에, 당신은 화를 자각했으면서도 이제 그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그저 당신 자신의 몸에 계속 두고 있을 수밖에는 없던 것이다. 남이 전한 살의를 자신의 문제처럼 여기며 당신만 혼자 힘들게 계속 화를 내고 있던 현실의 모습이다.
이제는 헷갈려할 필요가 없다.
당신 주변에서 가장 화를 내지 않는 척하면서, 그렇게 자신이 가장 올바르고 순수하며 무오한 척을 하고 있으면서, 그러나 왠지 모를 이상한 위화감과 불쾌감을 반드시 당신에게 느껴지게 하는 그가 바로 당신을 죽이려 하는 그 새끼가 맞다.
사람을 죽이려고 하면 자기도 죽는다는 것을 당신은 이제 이러한 이들에게 알려줘야 하지 않겠는가.
좋아. 이제 다 끝이다. 끝내버리자. 그 의지를 발현하자. 그 의지로 당신 자신을 개방하자.
그리고 지금 바로 그 자리, 그렇게 열린 당신의 몸에, 이제 화를 한번 맡겨봐라.
무슨 일이 생길까?
들어보았는가. 내장이 막 운다.
저런 병신에게 쫄아 있던 자신의 모습이 자각되어 당신의 내장이 마구 울린다. 그 설움이 소리가 되어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나온다. 쩌렁쩌렁한 뇌성으로 시원하게 폭발한다. 이럴 때 락앨범 녹음을 해두면 좋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당신이 당신의 몸에 화를 맡겼더니, 화가 자신의 일을 한 것이다. 그 즉시 당신의 힘을 회복시킨 것이다.
됐다. 그냥 끝내자. 끝내버려야겠다. 그리고 정말로 그러고자 이 모든 것의 끝을 향해 내딛는 그 결단의 순간, 당신에게 일어나는 그 힘은 어마어마한 크기의 것이다. 당신을 엿먹이던 게임규칙 때문에 혼란스럽게 분열되지 않고, 아주 온전히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당신이 원래 갖고 있던 힘이다.
그 힘 속에서 당신이 이 모든 것을 보면 이제 아무 것도 두렵지 않다. 획책에 넘어갈 수도 없고, 바보처럼 속지도 않을 것이며, 남용당할 수도 없을 것이다. 당신은 이제 그런 것들은 다 됐기 때문에. 당신은 이제 끝내기로 했기 때문에.
끝을 향하는 화 속에서 당신은 유혹되지 않는다. 당신은 그동안 게임의 유혹에 넘어가 당신의 힘을 잃은 까닭에 당신 자신이 바보인 줄 알았지만, 이제는 명징하다.
그 눈으로 보니, 보이게 된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병신 같은 것들에게 쫄아 있었는지가. 또 그것들에게 억압당해 대체 어느 만큼이나 자신이 꾸겨져왔던지의 그 비루한 모습이.
그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내장이 운다. 내장 끝에서부터 요동을 친다. 터져나온다.
그것은 기지개.
당신이 꾸겨져 있던 곳에서 당신 자신의 본래적 면모를 찾으려고 일으키고 있는 기지개다.
화의 끝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죽음을 향해 끝까지 달려간 그 마지막에서 이제 삶이 부활한다.
화는 성대하게 당신의 삶에 불길을 지핀다.
가장 죽어있던 것을 가장 살아있게 하는 그 끝에서 끝까지의 스펙트럼으로 화는 작동한다. 그러니 끝까지 가야 한다.
혹자들은 화가 아니라 자비와 용서가 진정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전제가 있다. 힘이 있는 이만이 진정으로 자비를 베풀고 용서도 할 수 있다. 화의 끝까지 가서 자신의 힘을 회복한 이에게 발현되는 것이 곧 자비인 것이다.
자비는 만물을 살리는 힘. 그것은 죽음을 향해 달리던 화의 끝에서만 발견된다.
이 세상에 자비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정녕 누구를 위한 것이겠는가?
끝없이 무시되고, 소외되고, 남용되어 결국에는 끝으로밖에는 갈 수 없던 이를 위해, 바로 당신을 위해 가장 먼저 자비는 임하지 않을까.
당신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나 여기에 있다고 당신의 내장을 울리던 그것은 자비였을 것이다.
가장 죽어가던 당신을 살리기 위한 그 울림은, 그러한 당신을 알아본 자비의 울음.
화는 그 끝까지 가서 마침내는 이처럼 자비를 길어올린다.
뒤집어 말하면, 자비는 화의 시작부터 자신이 있음을 알리고 있다는 것이다. 죽여버린다, 라는 그 목소리 안에서 분명.
왜 죽이려는 것인가? 이렇게는 살 수 없기에. 정말로 당신은 살고 싶기에.
죽음에 대한 강한 의지는 그대로 살고 싶다는 강한 의지다.
그렇게 다른 쭉정이들을 다 날려버리고 오직 '죽여버린다'의 의지만을 현실화하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지금 '살고 싶다'의 현실을 향해서만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 황금의 목표를 향해 흔들림 없이 질주한다.
새로운 시작이 될 그 끝을 향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간다. 반드시 자신이 살아나게 될 그 현실로.
이것이 화라는 이름의 자비가, 또 자비라는 이름의 화가 운동하는 방식.
당신의 내장이 울릴 때, 그것은 이 운동이 시작되었다는 알림이다. 끝까지 달려갈 것이다. 이 모든 것의 끝, 당신이 온전한 당신으로 살아갈 그 현실을 향해, 그렇게 이제 당신의 삶은 대지를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