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알려주지 않던 진짜 처세술 #8

"성공하고 싶다면 엄마에게 붙어라"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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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알려주지 않지만, 누구나 다 알고 있다.


당신이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싶다면 엄마에게 붙어야 한다. 엄마의 세력에게 잘 보이고, 아양을 떨며, 또 엄마가 좋아할 그런 모습이 되면 된다.


1984에서는 '빅 브라더'였겠지만, 2025에서는 단연코 '빅 마더'다. 아니 인류의 역사 속에서는 언제나 그것이었다.


엄마는 사회의 지배자다. 인간이 사회라는 것을 이루며 살아오게 된 그 시작부터 지금까지 그 지배자의 자리는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 가부장제? 엄마 아래에 있는 장남 같은 애들이 주인공놀이를 하면서 그냥 노는 것이다. 엄마가 뒤에서 지켜보며 자기의 왕자님들이 놀 수 있게 깔아준 그 판 위에서.


엄마는 자기 자식이 아무리 능력과 재능이 없는 범부라 하더라도, 자식이 자기에게 재롱도 잘 부리고 순종적이기만 한다면, 반드시 그에게 일정 이상의 성공을 제공해줄 수 있다. 뉴스에도 자주 나오며, 우리 주변에서도 일상적으로 목격되지 않는가. 엄마는 사기를 치고, 날조를 하며, 거짓을 꾀하고, 남의 자식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한번 하기로 했으면 반드시 자기 자식을 성공시키려는 그 의도를 달성하고야 만다.


자영업자들은 엄마의 이런 힘을 너무 잘 안다. 아무리 그 내공이 출중한 가게라도, 엄마들이 괘씸하게 보며 '지 혼자 잘난 줄 아네? 어디 한번 잘되는지 보자.'라고 하면 그 가게는 망한다. 그래서 자영업자들은 그 속내야 어떻든 표면적으로는 늘 엄마들 앞에 겸손한 서당 학동 같은 태도를 보인다. 그러면 엄마들은 흡사 신사임당이 키워낸 듯한 그 모습을 보며, 그러한 이상적 모성상에 자신을 투사한 뒤 이제 자영업자의 사회적 엄마, 가장 든든한 지지세력이 되어주는 것이다.


반대로 엄마 같은 이가 가게를 하는 경우라면 어떨까. 그러면 가게는 자기의 자식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자식을 명문대에 보내야 한다는 그 광적인 집착이 이루는 일처럼, 가게는 어떻게든 잘될 것이다. 자기 자식을 위해 애쓰는 그 엄마의 필사적인 노력을 보고는, 주변의 다른 엄마 같은 이들이 충성고객이 되어 그 성공을 조력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사기와 거짓의 현실이 있다 하더라도, 엄마의 세력들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우리 아이가 지금 엄마의 힘이 필요하다는데 그게 대수냐, 라는 식이다.


엄마의 세력은 이처럼 흡사 불도저와 같다. 맹목적이고 위력적이다.


그 불도저로 자연을 개간하여 우리는 문명사회를 이룰 수 있지 않았는가.


숲을 밀어낸 그 자리에 세워진 것이 마을이다. 엄마라는 울타리로 둘러싸인.


그래서 사회라고 하는 것은 원래 엄마의 것이다. 엄마가 자신의 지배권 내지 선점권을 충분히 주장할 만한다.


이에 따라 엄마는 사회 내에 있는 것들 중 자연스럽게 자신을 가장 높은 위상으로 둔다. 정확히 말하면 계급의 가장 위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엄마는 계급을 초월한 별격이다. 그래서 하위계급에 의해 상위계급이 전복되는 소위 사회변혁의 어떤 순간 속에서도, 엄마의 자리는 위협받지 않는다. 부동의 지배자인 셈이다.


게임으로 비유하자면, 엄마는 게임의 운영자다. 게임 속 인물들에게는 신과 다름없는 존재다. 엄마는 게임 속 세상을 자신의 기준으로 질서있게 관리하고자 한다. 너무 잘난 것이 있으면 누르고, 안쓰럽게 못난 것이 있으면 밀어준다. 전자는 마왕이라고 불릴 것이고, 후자는 철부지영웅이라고 불릴 것이다. 여신이 영웅을 이끌어 마왕을 퇴치하는 신화구조의 원형이다.


그러다가 마왕을 물리친 영웅이 이제 건방져지면 그는 새로운 마왕으로 여신에게 낙인이 찍힌다. 그럼으로써 또 다른 철부지영웅에게 퇴치될 것이고, 역사는 반복된다. 엄마의 손바닥 위에서.


엄마는 자신이 신처럼 어떤 것을 살렸다 죽였다 하는 일을 좋아한다. 최고의 취미활동이다. 엄마가 자기의 남편에게, 또 자식에게 하던 일들을 떠올려보자. 완전히 죽이지도 않고, 완전히 살리지도 않는다.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복사해서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도 똑같다. 자기 주변의 것들을 완전히 죽이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살리는 것도 아니다. 너무 죽어있으면 우쭈쭈 하며 살려주고, 너무 살아있으면 고르곤 같은 차가운 석화의 눈빛으로 그 생명력을 뺏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모든 것이 엄마를 의존하게끔, 엄마가 없으면 살 수 없게끔 만들려는 것이다. 완전히 죽이지도 않고 완전히 살리지도 않은 채, 그렇게 자기 옆에만 계속 두려는 것이다. 그래야 자신이 막강한 지배력과 통제력을 가진 신인 것처럼 행세할 수 있는 그 짜릿한 취미생활을 계속 즐길 수 있으니까.


엄마에 대해 너무 나쁘게 얘기하는 것 같은가? 우리 엄마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아무 것도 모르면서 무례하게 너무 폭력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은가?


엄마가 자기의 자식을 대단한 존재인 것처럼 만들기 위한 그 거짓과 속임수의 의지로 인해, 대신 희생되어야만 했던 그 무수한 이들은 그럼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우리는 지금 아무도 말해주지 않던 진짜 독재에 대해 말하고 있는 중이다. 심지어 그 독재는 반영구적이다. 문명사회라는 것이 존속되는 한, 엄마의 독재는 멈출 일이 없다.


역으로 말해, 오늘날 유독 엄마가 자기 자식을 위해 부리는 기만과 거짓, 날조, 위선, 억까 등이 심하게 경험된다면, 그것은 지금 이 지구 위의 거의 모든 문명이 한계에 부딪혀 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의 이유는 분명하다. 모두가 다 알고 있다. 지구상의 인구수가 너무 많아서다. 엄마에게 자식이 너무 많다. 그러니 그 자식들 하나하나에게 다 제공할 성공의 자리가 부족하다.


자식에게 성공의 자리를 마련해주지 못하는 엄마의 모습은 엄마 자신에게는 가장 위협이다. 그것은 신의 전능성이 도전받는 일과도 같다. 그러니 엄마는 늘 스트레스다. 그러면서도 달리 방법이 없다. 기존의 문명구조에서는 이 비약적으로 늘어난 자식들을 다 성공의 자리로 이끌 동력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신이 즐기던 가장 보람찬 취미생활, 그 거룩한 여신의 활동을 더는 즐길 수 없게 될 것 같은 위협이 현실화되니, 엄마의 세력은 더욱 기승을 부리는 것이다. 자기의 건재함을 어떻게든 증명하기 위해 한층 더 불도저가 된다. 귀를 막고는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다.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아이를 지켜야 한다며, 어디 잘생겨보이는 정치인이나 연예인 같은 것을 구원할 대상으로 삼아, 엄마의 힘을 합체로봇처럼 집결시킨다.


문명이 한계에 도달했을 때는 원래 이처럼 광장에서 불기둥이 세워진다. 숲속에서 열리는 디오니소스 축제를 뒤집어, 마을의 광장에서는 아폴론의 축제가 열린다. 그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사악한 존재를 규탄하는 마녀재판이고, 또 어떤 때는 촛불을 들고 이루는 평화의 집회지만, 그 본질은 같다. 동일한 불기둥이다.


곧, 엄마의 질서로 다시 이 문명사회를 재정비하기를 꾀하는 주술이다.


이 주술에는 두 가지 효과가 있다. 첫 번째는 문명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한 번 더 세력화해 알림으로써 엄마의 권위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자식들의 불만을 엄마가 아닌 다른 악마화된 대상에게 전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주술효과로 속이려 해봤자, 문명의 울타리 안에서 일어난 고통의 이유는 문명 자체에 다름아니다. 다른 악마는 없다. 엄마가 독재하고 있기에 그 독재로 인한 고통이 생겨나는 것뿐이다.


나쁜 엄마의 모습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를 극복하고 점차 더 좋은 엄마를 이루어가면, 이 모든 문명의 한계는 극복될 것이라는 착각도 있었다. 그래서 오은영 방송인도 유행하고, 애착이론과 대상관계접근도 유행하며, 철학적으로는 헤겔이 다시 한 번 주목받고, 그 부록처럼 융과 MBTI도 딸려왔다.


그러나 애초 나쁜 엄마라는 것은 또 하나의 주술적 소재로 만들어진 가상의 개념에 불과할 뿐더러, 나쁜 엄마가 좋은 엄마로 바뀐다고 해봤자 엄마의 총량에는 변함이 없다. 나아가 좋은 엄마를 추구하는 그 의도는 더 강렬해진 지배력에의 지향에 불과하다. 좋은 엄마가 행사하는 선한 영향력이라는 표현은 단지 지배력이라는 표현에 포장지를 입힌 것일 뿐이다.


오해는 없도록 분명히 하자.


엄마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 아니다. 늘 열심히 성실하게만 살아온 당신의 엄마에게 대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신이 되려고 하는 엄마가, 또는 이미 자신을 신처럼 생각하는 엄마가 문제라는 것이다.


곧,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엄마가 고통의 이유가 된다.


문명 또한 마찬가지다. 문명이 스스로의 한계를 받아들이지 않고 신적인 장치인 것처럼 굴 때, 그런 문명의 실제는 이제 인간을 억압하는 역기능으로 작용한다.


붓다는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이러한 엄마들에게 많은 얘기를 했다. 개중에는 붓다의 얘기를 정확하게 알아듣고는 깨닫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엄마들은 대체로 듣지 않는다. 자기가 말하려고만 한다. 자기는 다 아는 사람이라도 되는 양. 특히 어떤 것을 키우는 문제에 대해서라면 더욱 그렇다. 자기가 빅 마더로 지속되려고 할 뿐, 자기보다 더 커다란 것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불쾌하게 생각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억까라는 것이 출현한다. 빅 마더는 자기보다 대단해보이는 것이 있으면, 또는 자기가 키운 자기의 자식보다 예뻐보이는 것이 있으면, 이제 그것을 억까한다. 어떻게든 그것의 세력을 약화시켜서 죽이려 든다. 그래야 자기가 계속 독재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기보다 높은 것이 있으면 안된다. 자기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제일 잘 키우는 존재여야만 한다.


하지만 진실은 무엇인가?


키워야 할 어떠한 대상이 없으면 엄마는 무력하다. 엄마가 자식에게 집착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엄마는 자기 밑에 늘 자기가 키울 수 있는 것을 위치시켜야, 그에 의존함으로써 자기를 신적인 것으로 경험할 수 있다. 자식이 자기 곁을 떠나면 엄마도 그 즉시 신의 옥좌에서 내려와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맨날 자식 때문에 못살겠다 하면서도, 본질적으로는 엄마는 자식을 계속 자기에게 붙잡아두려는 그 의도 속에 있다. 자기가 제일 잘 키울 수 있다는 그 미명만을 걸고는.


그렇다면 더욱 핵심으로 가보자.


엄마가 그렇게 모든 것을 잘 키우는 자라고 자임한다면, 엄마는 왜 자기 자신은 키우지 못하는가?


문명이 한계에 부딪힌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문명에 길들여질수록 사람들은 모성화가 되어가며, 자기가 뭘 좀 아는 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 듣지 않으며, 듣지 않으니 크지 않는다. 마을의 울타리 안에서 자기가 천재대장이라고 주름잡는 꼴과 같다. 거기에는 배움이 전멸해있다.


배운다는 것은, 미지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


배움은 마을의 울타리를 넘어선 숲에 있는 것이다. 배우는 이들은 숲으로 향하는 이들. 그들은 숲의 소리를 붓다처럼 들으며, 그 소리의 파동으로 자기 자신을 키워간다.


스스로 배워 스스로 자라는 자, 이것은 깨달음을 사는 이들의 원형이다.


문명이 한계에 부딪힌 그 핵심적 이유는 깨달음을 잃어서다. 깨달음의 감수성이 실종되어버려서다.


어떤 한계가 극복되려면, 깨달아야 한다. 깨서 닿아야 한다. 그러나 엄마는 깨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울타리를. 그러니 닿을 수도 없다. 새로운 현실에.


그러니 당신에게는 두 가지의 길이 있는 셈이다.


엄마에게 붙으면 당신은 성공할 것이다.


엄마의 울타리를 넘어 숲으로 향하면 당신은 깨달을 것이다.


우리는 당신의 이 선택을 돕기 위해 지금껏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엄마에게 붙어 성공하는 이 방식이 아직까지는 유효하나, 이미 막다른 한계에 달해 있다는 사실을. 또 그렇게 해서 이룬 성공이란 완전히 살지도 못하고 완전히 죽지도 못하는 반푼이의 성공이라는 사실을. 그렇게 당신이 반푼이가 되는 일만큼은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다 얘기했다.


당신에게 깨달음을 선택하라고 종용하고 있던 것은 아니다.


당신의 진짜 필요는 깨달음이라고만 말하고 있던 것이다.


사람들은 왜 이런 처세를 당신에게 알려주지 않았을까? 사람들이 착해서다. 자신에게 무가치한 것을 굳이 당신에게도 전해야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엄마의 착한 아이가 되는 일에는, 그럼으로써 사회적 성공을 꾀하는 일에는 아무 쓸모도 없는 이런 얘기들은 무가치한 처세술이다.


그럼에도 왜 말하고 있는가?


재미없으니까.


당신만큼이나 나에게도 지금 이렇게 사는 일은 너무나 재미없으니까. 재미도 없을 뿐더러, 매력적이지도 않으니까.


당신이 재미있으면 좋겠고, 매력적인 사람으로 살아가면 좋겠다.


그런 사람들을 더 많이 보려고 이 세상에 왔던 것이라고, 나중에 내 자신이 그렇게 말할 수 있게 되는 일은 얼마나 행복할까. 이 삶이라는 것을 살았던 내 자랑일 것이다. 가서 자랑할 것이다. 얼마나 당신이 재미있고 멋진 사람인지 아냐고, 바로 그런 사람을 나는 만났던 거라고.


이것은 아무도 말해주지 않던 처세술.


처세술이 아니라서, 당신과 만나는 법.


당신이 당신 자신을 만나는 법.


당신이 당신 자신을 깨닫는 법.


당신에게는 늘 선택이 있다. 어떤 한계 속에서도, 어떤 울타리 속에서도,


당신이 늘 그 너머의 숲을 꿈꿀 수 있기에. 이미 그렇게 꿈꾸었던 것이기에. 엄마의 뱃속에서 꿈꾼 것이 아니라, 그 한참 전부터 숲의 꿈을 꾸고는 그 숲으로 가고자 당신이 엄마의 배를 빌려 이곳으로 온 것이기에.


늘 그렇게 당신은 이미 선택했던 것이다. 이 깨달음의 현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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