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중독의 도시"
서울에는 경험할 소재가 많은 만큼 중독될 소재도 많다.
모든 경험은 다 잠정적인 중독의 소재가 될 수 있다. 이 이해가 없으면, 어떤 경험은 분명 수많은 중독을 낳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중독의 소재라는 사실이 은폐된다. 그리고 은폐된 것은 이제 더 큰 중독의 이유로 작용한다.
오늘날 대표적으로 도덕이 그렇다.
우리는 도덕에 중독된다는 말이 조금 낯설기도 하며, 도덕 같이 뭔가 선하고 좋아보이는 단어와 중독이라는 뭔가 나쁘고 안좋아보이는 단어를 서로 연결시키는 일을 어렵게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한 일 자체가 이미 도덕에 중독되어 있다는 방증이기도 할 것이다.
중독은 임의적인 가치를 묘사하고 있는 언어들에 대한 우리의 호불호와는 아무 상관없이, 한 개인이 특정한 소재에 얼마나 부자유하게 속박되어 그것을 의존하고 있는가의 개념이다.
그러니 선, 정의, 정치적 올바름, 예의, 친절, 선량함 등과 같은 도덕의 소재들이야말로 실은 가장 큰 중독의 소재들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좋은 것으로만 생각하며, 우리 자신이 더욱 그것들과 일치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아가 우리의 성공적인 삶이 그것들과 얼마나 일치하고 있는가의 그 정도에 달려 있다고도 간주한다.
떠올려보면, 분명 도덕은 오늘날 성공을 담보하는 소재다. 그 무수한 미디어 장사꾼들에게 우리는 왜 힘을 몰아주었는가? 미디어가 만드는 신화 속에서 그들은 우리의 눈에 일종의 도덕적 영웅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또한 도덕적 이미지를 대중들에게 뿌리깊게 각인시키는 데 성공한 정치인은 그의 실제모습이 어떠하든 간에 열렬한 지지를 받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연예인들도 다 자신이 얼마나 도덕적으로 깨어있는 인물인지를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호소함으로써 자신의 주가를 높여간다.
과거 조선이라는 나라가 전세계적으로도 유래없는 강박적 도덕중독국가였다는 사실도 이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어떻든 그 터 위에 자리잡았고, 아직까지도 조선의 주술적 망령들이 활발히 배회하고 있는 지역이다.
주술은 묶는 것이다. 언어로 삶을 묶어, 결국 삶이 언어에 의존하게 될 때 그것이 주술의 목적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렇게 말해도 될 것이다.
주술의 목적은 중독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주술 중 최고로 강한 주술은 바로 도덕이다.
더 많은 이들에게 주술의 영향력을 증대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언어를 보급해야 한다. 주술은 언어가 없는 곳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
우리의 어떤 선입견으로는, 주술은 비합리적인 것이고 언어는 합리적인 것이라는 착각을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주술이야말로 철저히 언어적 정합성에 근거해 작동하는 것이다. 그러니 언어가 널리 보급되는 만큼 주술의 영향력도 확장된다. 사람들에게 언어를 편리한 도구로 쓰게 만든 뒤, 이제 그 언어에 스스로가 묶이게끔 하는 일을 통해 이 주술의 기획은 완성된다. 그렇게 완성된 주술의 이름이 바로 도덕이다.
조선은 엄연한 주술국가였으며, 필연적으로 도덕중독국가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쿠데타를 통해 만들어진 것은, 그 자신의 자리도 동일한 기제에 의해 위협받을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니 아래를 더 철저하게 통제해야 한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누르면 오히려 쿠데타의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사람들이 스스로를 누르도록, 그러면서도 그런 줄을 모르도록 어떠한 장치가 설계되어야 한다. 이것이 주술의 의도였고, 그 의도에 따라 만들어진 장치가 도덕이다.
도덕지수가 높은 사회는 굳이 건강한 사회가 아니라, 그 도덕지수를 높이려고 하는 지배층 자신들이 그 자리를 얻은 동일한 쿠데타의 방식에 의해 현재 자신의 자리를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그 공포지수가 높은 사회일 뿐이다.
오늘날 서울에서 주요하게 일어나고 있는 현상의 모습이기도 하다.
한국의 계급갈등은 원래 처음부터 자본이라고 하는 생산수단이 그 핵심적인 소재가 아니었다. 조선이 그러했듯이, 도덕만이 계급갈등의 유일한 소재였다. 도덕을 쥔 자가 헤게모니를 얻으며, 언어적 주술을 통해 다시 그 도덕의 소유권을 영구적으로 공고화하려는 그 일만이 이 땅에서는 계속 펼쳐져왔을 뿐이다.
도덕이 이처럼 곧 권력이었기에, 그것은 더욱 중독재일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 시대에 정의나 통합 등의 어떤 도덕적 이름을 부르짖는 이들의 정체는 실은 주술사다. 언어적 주술을 통해 자신이 가장 권력을 얻기를 꿈꾸며, 또는 자신이 이미 갖고 있는 권력을 가장 잃게 되지 않기를 꿈꾸며, 그러한 만큼 그 자신도 가장 주술에 걸려 있는 이라고 할 수 있다. 곧, 도덕중독자다.
주술사들은 언제나 자기가 한 말에 자기가 위협받는 상황을 빈번하게 경험하게 되는데, 이는 스스로를 말로 묶는 주술의 특성으로 인해 생겨난 필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주술사들은 90% 이상의 에너지를, 자기가 한 말에서 어떻게 자기만은 빠져나갈까를 궁리하는 데 쓴다. 내로남불을 기획하는 것이며, 이것이 그대로 그들이 도덕이라고 말하는 것의 실제가 된다.
자기가 권력을 얻기 위해 주장할 때는 도덕이며, 남이 권력을 얻기 위해 동일한 것을 주장하면 그것은 적폐다.
이것이 오늘날 서울의 도덕이라는 것이며, 서울하늘 아래 가장 민낯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실은 아무도 도덕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것은 가장 의심스러운 것이다. 그럼에도 도덕에 의존할 수밖에는 없다. 도덕을 주장하는 이들, 곧 권력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붙어야 자신도 그 권력의 콩고물을 얻어먹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이 여타의 중독의 모습들과 무엇이 다른가?
이를테면, 누구도 알코올을 믿지 않지만, 거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알코올만이 유일하게 자신에게 힘을 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심지어 도덕이라는 것은 술이나 도박, 마약 같은 것들과는 다르게, 중독되어도 왠지 자신에게 나쁜 일은 생기지 않을 것 같은 언어적 착시효과를 가져다준다. 아니 그것이 중독이라는 사실 자체가 이미 인식 밖에 있다.
그러니 실은 도덕은 합법화된 마약 같은 것이다.
누군가가 도덕적 행위를 집행할 때, 근래의 보편적인 모습으로는 어떤 정의의 심판자 같은 것이 되어 적극적으로 자신의 감정에너지를 남발하며 자신의 힘을 뽐내게 될 때, 거기에는 얼마나 커다란 도파민의 작용이 일어나는지 아는가?
오늘날 도덕뽕은 최상위의 쾌락이다.
네트워크의 발달로 인해 상대적인 비교의 구조가 본격화된 현대사회에서는 특히 그렇다. 도덕은 다른 이들에 대해 가장 비교우위를 점하며 극상의 우월감을 경험할 수 있는 소재다.
이 도덕뽕에 가장 중독된 이들이 보이는 모습을 '자아팽창(ego inflation)'이라고 부른다. 도덕지수가 낮은 이들에게 자아팽창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도덕지수가 높은 이들에게서만 일어나는 것이 이 자아팽창이다. 당연하다. 자아는 원래 도덕적 주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팽창된 자아는 결코 자기 혼자 잘났다며 설치는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자아팽창된 개인은 가상의 청중들 앞에 고개를 깊이 숙이는 '겸손한 신'의 모습을 취한다. 자신을 향한 비난이나 질책이 있으면 그것 또한 자신이 겸허히 수용하고, 그 어떤 아픈 화살이라도 그 화살을 쏜 분 또한 얼마나 아프셨으면 그러겠냐며 자신의 가슴으로 다 받아들이겠다고 말하는 것이 매우 전형적인 자아팽창의 모습이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영적 우회(spiritual bypass)'라는 표현으로도 말한다. 영적이라고 말하지만, 실은 이것은 도덕에 관련된 표현이다. 개인이 자신에게 일어나는 심리적 현상들을 정직하게 경험하기보다는, 고급언어로 구성된 도덕의 기제들을 통해 그것들을 회피하고자 하는 그 기만의 모습을 영적 우회라고 부르는 것이다. 쉽게 말해, 자신이 정신적으로 높은 사람인 척해서(자아팽창해서), 실제 자신의 심리적 문제들로부터 도망치려는 그 모습을 가리킨다.
결국 이것이 도덕중독이 발생하는 이유이자, 또한 도덕중독자들이 반드시 자아팽창되곤 하는 그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가 주술을 꾀하고, 도덕을 꾀하며, 결국 자신이 꾀한 그것에 스스로 묶여 중독되어 가는가?
또 누가 도덕뽕에 취해 그 도취의 기운으로 자신을 크고 강한 사람인 것처럼 만들려고 하는가?
허약한 아동.
미숙한 아동.
자신이 근본적으로 너무나 보잘 것 없고 하찮다고 경험하는 아동이 그러하다.
거듭 말하지만, 몸이 아무리 커지고, 언어활용이 아무리 능숙해지든 간에, 또 언어를 통해 얻은 지성의 수준이 얼마나 대단하든 간에, 자신의 마음을 자신이 스스로 처리할 수 없다면 그는 심리적으로 무척이나 미숙한 아동의 상태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아동들이 자신과 세상을 동시에 속이기 위해 주술을 시도하고, 도덕을 시도하며, 의도한 그대로의 중독에 빠지게 된다. 한껏 부풀어오르게 한 도덕의 거품을 통해 자아팽창을 이루게 된다.
자신의 좌절을 숨기기 위해 이 일은 시도된다.
모든 중독자에게는 반드시 좌절이 있다. 그 좌절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들은 중독재라는 우회책을 남용하게 된 것이다.
좌절이란 결국 무엇인가?
자신에게 일어난 어떠한 삶의 경험을 내적으로 소화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곧, 자신의 심리작용에 대해 무력했던 그 일이 좌절이다.
흥미롭게도, 중독자들의 가족력을 조사해보면 그들은 자신의 엄마를 무척이나 거대하게 경험했던 마마보이 내지 마마걸로 밝혀지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경우, 그들의 엄마가 생각이나 감정 같은 그들의 심리작용들을 대신 처리해주었을 가능성은 압도적으로 높다.
이를테면, 어떠한 이는 자신이 원하던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고 몇 번이나 낙방하는 일을 경험해왔을 때, 그래서 자기 안에 소화되지 않는 어떤 감정에 파묻혀 우울해하고 있을 때, 엄마가 그를 호되게 혼냄으로써 그 감정에서 자유로워진 경험을 하곤 한다. 이것은 엄마가 화라고 하는 그의 감정을 대신 소비해준 것이며, 대신 처리해준 것이다.
이것을 아름다운 미담으로 생각하던 것이 조선의 전통이다.
그러나 현대의 심리학은 말한다.
바로 이 방식이 인간을 무력한 정신적 아동으로 계속 지속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인간은 심리적으로 어떻게 성숙해지는가?
자신의 좌절을 정직하게 받아들임으로써만 성숙된다. 좌절은 이 경우 분명한 계기로 작동한다. 자신이 자신에게 일어나는 심리작용을 스스로 처리해낼 그 역량을 키울 수 있는 계기.
그러나 조선의 엄마들은 "좌절금지!"를 외치면서, 자신이 옆에 있고, 수많은 정의의 주술사들도 옆에 있으며, 또 조선의 위대한 도덕도 여기에 있는데 왜 좌절하냐며, 개인이 자신의 좌절과 온전하게 친해질 그 기회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곤 했다.
그러니 조선의 주술이 아직도 횡행하고 있는 이 서울에서는, 실은 전적으로 무력하기만 한 정신적 아동들이 그리도 많이 주술적 망령들처럼 거리를 배회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경험을 찾아, 새로운 중독재를 찾아, 그리고는 그 모든 소재를 다 도덕중독의 결과로 드러날 자아팽창의 현실을 강화하기 위해 소비하며.
자신의 마음을 자신이 소화할 수 없게 된 것.
이것이 어느 도시에서나 항상 핵심적인 문제이며, 서울 역시도 그러하다.
개인이 자신의 마음을 소화할 수 있어야, 그 마음이 양분이 되어 자신의 힘이 생겨난다.
이처럼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힘을 얻지 못해 결국 무력해진 아동들이 대신 소비하고자 하게 된 것이 바로 도덕이라고도 또한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모든 중독의 실제다.
자신의 마음이, 곧 자신의 내적 경험이 힘의 원천이 되어 있는 이는 중독에 빠지지 않는다. 자신의 마음에 대해 무력감을 경험하는 이가, 마음을 대신할 것을 찾아 그것에 의존하여 힘을 얻으려고 해서 생겨나는 것이 중독현상이다.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자신의 마음이 아닌 것에 의존해서 힘을 얻으려는 일은 언제나 그 이상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가 보통 최대치의 담보가 된다. 자신의 자유를 저당잡힌 그 결과 개인은 중독재의 노예가 되어, 그것으로부터 비루한 젖동냥을 하지 않고는 스스로의 삶을 영위하지 못하게 된 것과 같다.
자신이 자신의 거대한 자유를 헌납한 대가로 얻은 아주 미천한 힘을 통해, 그만큼 이제야 자신이 조금 더 자유로운 존재가 된 것이라고 믿는 이 일은 어처구니없는 코미디에 가깝다.
좌절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마음을 소화하는 역량을 키울 수 있는 기회. 이를 다시 말하면, 좌절은 우리가 자유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배울 기회라는 말과도 같다.
좌절을 통해 경험되는 어떤 심리작용들을 우리가 스스로 소화해보게 된다면, 그것들은 아주 정확하게 우리가 가야 할 방향성과 그 길에 동원할 수 있는 힘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곧, 좌절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자유로운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그 길과 힘이 그대로 알려진다.
좌절 속에서의 그 모든 심리작용은 바로 그래서 우리에게 경험되었던 것이다. 좌절에 대한 아주 명쾌하고 실제적인 응답으로서. 우리가 다시 또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는 그 자원과 동력으로서.
자신의 좌절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그 심리작용들을 소화해보게 되면, 이 모든 일은 우리에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이 또한 역량이기 때문에, 이처럼 우리에게 일어나는 그 모든 경험을 중독의 소재가 아니라, 소화의 소재로, 곧 배움의 소재이자 만남의 소재로 우리 자신이 살아가기 시작하면, 이제 우리는 이 심리학적 방식에 점점 더 능숙해진다. 우리 자신이 성숙하고 그 내적 힘이 충만한 존재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가 더욱 신뢰할 만한 사람으로 느껴지며, 그만큼 삶을 사는 기쁨도 증대된다.
그러면 늘 우리를 좌절시키곤 하는 이러한 서울에서도, 서울을 살아가는 일은 무척 재미있을 것이다. 일종의 모험 같을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가장 핵심적으로 도덕중독의 도시인 서울을 살아가는 그 자유의 방편으로서의 심리학, 서울의 심리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