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힘들 때를 위한 실존주의의 원칙들

by 깨닫는마음씨





1. 당신이 옳다.


당신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사실을 당신만은 알아야 한다.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른다. 당신조차도 그 사실을 믿지 못해서 당신이 힘들어진 것이다.


당신이 옳다는 사실을 당신이 모를 때, 당신은 당신의 생각이 맞다고 고집을 부린다. 당신의 견해가 중요하고, 당신의 감정이 소중하다며 온갖 억지만을 부린다. 그래서 당신이 더욱 힘든 상황 속으로 빠져들게 된 것이다.


당신의 생각도, 당신의 감정도, 심지어 당신의 선한 의지마저도 옳지 않을 것이다. 유일하게 옳은 것은 당신의 존재다. 그것만이 절대적으로 옳다.


'내가 지금의 이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이것도 옳은 방식이다. 이러한 모습의 나도 옳은 존재다.'


이 작은 한 생각이 출발점이다. 이 생각을 주문처럼 붙잡으라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출발점으로 삼으라는 얘기다. 그러면 전환이 시작된다. 당신이 경험하던 힘든 상황에 대해 어떻게든 당신 자신을 변호하고 정당화하려다가 끝내는 당신을 더 어려운 상태에 빠지게 한 그 몸짓이 멎고, 이제 탐구의 시야가 열릴 준비를 한다.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며, 그것들은 분명 당신의 존재를 지지하는 것들로 드러나게 된다. 힘이 들어, 힘이 필요했던 당신에게 다시 찾아와준 기초적인 힘의 근거들이다. 당신의 존재가 옳다는 사실을 향해 당신이 탐구하려 하면, 언제나 당신은 이 자리로 올 수 있게 된다. 당신의 인생이 시작했던 그 자리이자, 계속될 그 자리로.


이 자리가 당신의 중심이다. 힘들다고 경험될 때 일단 먼저 이 중심으로 돌아와라. 중심을 잡아라.




2. 무대 밖으로 나가 앉아라.


당신이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역할이라는 것이 작동하며, 역할에는 관성이 붙는다. 예비군훈련에 가면 왜 말쑥하고 예의바르던 이도 다 그 모양이 되는가? 그들은 그러한 역할을 하라고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떠밀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의 모든 것은 다 연극이다. 언어적 내러티브로 만들어진 역할극이다.


우리는 자신으로 인해 이 연극이 망쳐지는 일을 가장 피하려 한다. 그래서 그 자리에 눌러 앉아 어떻게든 자신의 역할을 다하겠다며 버티고 또 버틴다. 이 일이 힘든 것은 심지어 우리 자신이 어떤 연극 속에 있는지도 모른 채 단지 버티는 행위만을 지속해야 하는 까닭이다.


안에서는 연극의 내러티브가 보이지 않는다. 밖에서만 보인다. 안에 있을 때는 그저 보이지 않는 그 내러티브의 힘에 지배되어 이리저리 흔들리는 마리오네트의 운명만이 우리에게 부여될 뿐이다.


밖으로 나와야 한다. 힘들다면 잠깐 그 자리에서 나와라. 흐름에 휩쓸리지 말고 흐름 밖으로 잠시 나와라.


우리는 내러티브의 흐름을 잘 따라가야, 또 적극적으로 그 흐름의 중심에 들어가야, 자신이 옳은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도록 학습되어왔다. 그러나 그것은 연극무대의 중심이지, 당신의 중심이 아니다.


당신의 중심은 무대 밖으로 나와 있는 그 자리다. 당신이 앉아 있는 그곳이 당신의 중심이 된다.


이것은 배우에서 관객으로 자리를 이동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면 주도권도 함께 넘어 온다. 특히나 힘든 연극 앞에서 관객은 언제라도 극장 밖으로 영영 나갈 그 핵심적인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다. 극장은 관객을 구속할 수 없다. 관객이 된다는 것은 자유가 이제 당신의 것이라는 뜻이다.


떠올려보면 무대 위에서 역할연기를 하는 동안 당신이 그리도 힘들었던 큰 이유 중 하나는 아무도 그러한 당신의 열연을 알아주는 이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힘든 상황이 펼쳐지던 이 극장은 애초부터 관객이 없는 극장이었다. 그러다가 이제 관객석으로 이동한 당신으로 말미암아 소중한 관객이 한 명 생긴 것이다.


나아가 그 유일한 관객이 심지어 자신의 자유를 참으로 존귀하게도 연극을 조금 더 지켜보는 일에 쓴다면? 그런 당신은 이미 극장의 VIP다. 무대의 중심에서도 얻지 못한 이 귀한 자리를, 당신은 무대 밖 당신이 앉아 있는 그 자리에서 바로 얻는 것이다.




3. 들어라, 온몸으로.


상황이 잘 풀리지 않고 무엇인가 막힌 것 같을 때, 요는 당신은 길을 발견해야 할 것이다. 인생이 힘든 상황에서 길을 찾으려면 일단 유튜브와 나무위키를 꺼야 한다. 그것들은 순수한 정보의 제공자들처럼 보이지만, 실은 내러티브의 주동자들이다. 내러티브는 정보들을 특정한 방향성의 흐름으로 구성한 것. 그래서 내러티브는 근본적으로 권력적이다.


당신은 물론 당신이 기존에 봉사하던 내러티브에서 더 좋아보이는 다른 내러티브로 건너가는 일을 할 수 있다. 그럴 때 당신은 좋은 정보를 얻었다고 경험할 것이다. 그렇게 경험하는 일도 좋다. 그리고 이제 그 정보들이 이제 당신의 앞길을 열어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이것이 착각이다.


내러티브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 아니라, 연극무대 위의 동선만을 지시할 뿐이다. 어느 동선이나 다 무대 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거기에 열린 길이란 없다. 이미 정해져서 닫힌 것들만 있다.


당신이 정말로 길을 발견하려면 관객처럼 잘 들어야 한다.


당신의 귀뿐만이 아니라, 오감을 다 써서, 온몸을 다 써서 들을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선입견 없이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마치 그것들을 처음 경험하는 입장처럼 새롭게 한번 들어봐야 한다. 온몸으로 듣는다는 것은 이러한 일을 의미한다.


순수경험,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의 아주 큰 유익은, 당신이 당신의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신이 힘들 때 하는 생각은 대부분이 당신을 더 힘들게 하는 생각이다. 그런 상태에서 수집하는 정보들은 기존의 그 생각을 더 강화시키며, 동일한 방향을 향한 가속만을 만들어낸다. 곧, 당신은 이미 길이 막혀서 힘들어진 것인데, 그 길없는 곳으로 더 액셀을 밟게 되는 일이 생긴다는 것이다.


힘들다면, 어차피 힘들 때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생각을 잠시 멈추고, 이제 한번 들어봐라. 정말로 여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순수하게 관찰해보라. 몸이 느끼고 있는 감각들을 섬세하게 경험해보고, 그것들이 무엇을 말해주는지를 이해해보라.


감각이 열리면, 길도 열린다. 신뢰해봐도 좋을 것이다.




4. 숨을 쉬어야 한다.


힘들어서 어떤 생각에 빠져있을 때, 백이면 백 우리는 다 그 생각 중에 호흡을 멈추고 있다. 그것은 삶이 멈춘 것이며, 우리가 생명이기를 그만둔 것이다. 아주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행위다.


자신이 지금 숨을 멈추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면, 다시 숨이 돌아온다. 아무리 힘든 상황 속에서도 호흡할 수 있게 되며, 그 호흡은 점차 자연스러워진다. 이 또한 아주 상징적인 것이다.


어떤 힘겨움 속에서도 우리는 반드시 우리가 숨쉴 수 있는 지평을 개척한 것이며, 그렇게 생명은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로 한 것이다. 이 힘든 상황이 결코 우리의 삶을 멈추게 할 수 없다는 증명을 우리는 스스로 이룬 것이다.


자신의 길의 개척자. 우리는 이제 그것이다. 호흡을 회복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위상도 회복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호흡의 회복을 통해 중요하게 드러나는 사실은 또한 이러하다.


호흡은 언제나 들숨과 날숨으로 이루어진다. 계속 숨을 내뱉기만 한다고 그것이 호흡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길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그럴 것이다.


당신은 어쩌면 주장하고, 들이밀며, 펼쳐내기만 하다가 힘들어진 것은 아닐까?


숨을 쉰다는 것은 당신 주위에 펼쳐진 환경을 먼저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받아들인 그것을 통해 당신 자신이 표현된다. 호흡이라는 것은 흡사 하나의 대화와도 같다.


이것은 소통의 의미. 소통되지 않는 불통으로 인해 언제나 우리는 힘들어진다. 당신이 힘들다면 당신은 개척해야 할 것이다. 소통의 지평을.



5. 자신의 고통에 관심을 가져라.


힘들다는 것은 지금 자신이 고통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통이 없으면 가장 좋은 일이다. 그러나 불가피하게 지금 고통을 경험하게 되었다면, 당신이 할 일은 그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다.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은 고통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아낸다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대상이 당신을 고통스럽게 했으며, 그 대상만 없어지면 당신이 고통스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결국 당신을 더 무력하게 만들 뿐이다. 왜? 그러한 대상은 당신이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신은 고통스러운데다가, 고통에 대해 무력한 존재로까지 전락한다.


지금 고통스러운 것은 자신이다. 당신의 외부가 아니라 당신의 내부가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러니 탐구되어야 할 것도 내부의 것이다. 당신의 어떤 내적 소재가 외부의 자극과 연합되어 고통을 만들어내는지를 이해해봐야 할 때다. 그럼으로써 당신이 어떠한 사람인지가 더 분명해진다.


자신의 고통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일은 이처럼 결국 자신에 대해 참되게 관심을 갖는 일과도 같다.


고통은 이 경우 분명한 계기로 작용한다.


자신을 더 분명히 이해하는 일이 가능해지고, 어쩌면 자신에 관해 몰랐던 핵심적인 사실들 또한 이 탐구의 기회를 통해 알려지게 된다.


우리는 시쳇말로 길은 자기 안에 있다는 표현을 쓰곤 한다. 더는 시체가 아니게끔 이 말을 부활시킨다면, 그 전에는 몰랐던 자신이 드러나게 될 때, 그 전에는 몰랐던 길도 함께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당신의 고통은 지금 당신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주는가?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고통은 시작되었거나, 또는 끝나지 않는다. 고통을 계기로 바로 그 어떤 사람의 모습이 보이게 되었다면, 그 사람이 어떻게 하면 배려될 수 있을지의 그림 또한 함께 보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길인 것이다.




6. 자신의 행복에 관심을 가져라.


장담한다. 당신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에 있더라도, 거기에는 분명히 당신이 행복하게 느끼는 요소가 있다. 아주 미약할지라도 반드시 있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그 작은 요소을 더 키우는 것이다. 물과 빛과 정성을 주어서 그것을 소중히 돌보는 것이다. 힘든 불행의 벽들만이 주위에 가득 서있는데, 이런 작고 비루한 것에 신경쓰는 일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에 대해 의심하지 말라. 그 벽들도 당신이 키운 것이다.


당신이라는 인간이 가진 아주 놀라운 능력은, 당신이 가진 관심의 힘으로 당신이 경험하는 어떤 것을 크게 키울 수 있다는 것이다. 떠올려보라. 아무도 없는 골목길을 공포영화로 만든 것은 당신의 상상력이다. 당신이 어두운 골목길에 대한 당신의 두려운 느낌에 관심을 주었기에 그것이 크게 자란 것이다.


작아도 상관없다. 작게나마 반드시 있으니 상관없다. 당신이 만족스럽게 경험하는 것이 있다면 더욱 그것에 관심을 기울여라. 당신이 그것과 함께 실은 얼마나 행복한지 그러한 자신을 더욱 실감해봐라.


그러면 당신은 당신을 둘러싼 그 무수한 불행의 벽의 압박들 속에서도 여유를 회복할 수 있다.


당신이 있는 공간은 더는 지치고 힘들며 불행의 압박에 쫓겨 늘 날카롭고 차가운 공간이 아니다. 이제 거기에는 온기가 감돌게 된다. 당신 자신이 살기 쾌적하며, 다른 이들도 그렇게 느끼게 될 따듯하고 여유로운 공간이 된다.


당신이 당신 자신을 위한 행복의 공간을 창조한 것이다.


행복에 대해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행복은 보편적인 가치가 절대 아니다. 특정한 어떤 사회적 기준을 만족하고, 남들에게도 그렇게 인정받아야 당신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지금 행복하게 경험하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이 당신의 행복의 기준이다.


누구에게 그러한 것은 반드시 있다. 그 작은 것을 관심의 힘으로 키워가는가, 아니면 그대로 말라 죽도록 방치한 채 다른 행복의 보편적 기준이라는 것을 쫓고 있는가, 행복에 관해서라면 다 이 문제일 뿐이다.


남들이 비웃을까봐 걱정되는가? 사회적으로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한 그 남들의 시선이 신경쓰이는가?


그런 것은 없다. 또한 있다고 치더라도 아무 상관이 없다.


당신이 남들의 기준을 달성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그래서 그 실제가 무척 미천하게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있는 공간에서 어떤 여유로움의 온기가 피어나고 있다면, 잘 자라난 행복의 향기가 풍기고 있다면, 사람들이 당신에게 보내고 있던 그 시선은 갈 곳이 없어지고, 그 결과 이제 그들 자신에게로 돌아가게 된다. 당신이 아니라 자기 자신들을 불행한 존재로 보게 될 것이다.


신경쓰지 마라. 당신은 그저 당신 자신의 행복에만 관심을 가지고, 그것만을 키워가면 된다. 그렇게 당신 주위를 둘러싼 그 무수한 불행들 속에서도 피어난 한 송이 행복이 되어라.




7.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해라.


죽을 때까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해야 한다. 그것만 하고 살아야 한다.


힘들 때는, 더더욱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해야 한다. 더더욱 그것만 하고 살아야 한다.


그러다가 굶어 죽으면 어쩌지, 라는 걱정이 생긴다면 떠올려보라.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을 때도 당신은 당신이 미래에 혹여나 굶어 죽지 않을까를 걱정하고 있었다. 어차피 그렇게 다 굶어 죽게 될 것이라면, 좋아하는 일만 하다가 그 운명을 맞아라. 잘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고 하지 않는가. 좋아하는 일만 원없이 하다가 도착하게 되는 그곳도 좋아하는 일로만 가득한 곳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좋아하는 일이라는 것은 당신의 어떤 숨겨진 재능, 능력, 적성 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진짜 좋아하는 일은 뭘까?'라며 우리는 질문이 아닌 질문을 하곤 한다. 그것은 단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하는 소리에 불과하다. 도피를 위한 무의미한 발화일 뿐이다.


진짜 좋아하는 일 같은 것을 찾지 말고, 그냥 좋아하는 일을 해라.


그것은 비유하자면 집밥 같은 것이다.


집밥은 왜 집밥인가? 많이 먹으니까 집밥이다. 좋아하니까 그만큼 많이 먹게 된다.


우리는 대부분 자신이 많이 좋아하는 집밥을 놓아두고는,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음식을 찾겠다며 온갖 맛집이라고 불리는 곳들을 순례하곤 한다. 그러다보면 이제 맛이라는 것이 헷갈려지기 시작하는 때가 온다. 자신의 내적 경험이 오히려 외부의 대상적 소재에 의해 휘둘리게 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럴 때 우리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를 잊지 않고 있다면, 우리는 다시 우리의 내적 경험이 존중되고 있는 그 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 이 또한 중심의 의미다. 외부의 상황들에 휘둘려서 힘들어졌을 때 우리가 중심을 회복하는 그 방법.


베이스캠프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높은 정상을 향하려다가 길을 잃고 힘들어지면 다시 베이스캠프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면 거기에서 다시 한 번 길이라는 것이 모색된다.


실은 좋아하는 것만을 하고 있다보면 우리는 길이라는 것을 찾을 필요도 없이 자연스레 정확한 길로 가곤 한다. 좋아하는 것을 향하는 그 궤적이 길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우리가 길을 잃게 된 것은 우리가 좋아하는 것에 자신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대개 남들의 호응이 없어서, 남들도 자기만큼 그것을 좋아해주지 않는 것 같아 이 일이 일어난다. 그러다가 우리는 결국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향해 가는 자신의 길 대신 남의 길을 엿보고 또 탐내게 된다. 그 결과 어디로 가야할지를 몰라 영원히 헤매게 된 미아로 남고야 만다.


베이스캠프로 돌아와라. 당신이 일상에서 제일 많이 하는 것, 그래서 어쩌면 그것을 좋아한다는 감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당신의 호흡이 되어 있는 것, 바로 그것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만을 이제 하는 것이다.


그것을 좋아하는 인간이 아무도 없다고 해도 괜찮다. 당신이라는 인간이 그것을 좋아하니 정말로 괜찮다. 그것은 괜찮은 것이며, 그것으로 만들어지는 궤적도 괜찮은 것이 된다. 당신이 새롭게 다시 걷기에 괜찮은 길은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8. 당신만 힘든 것이 아니다.


당신이 너무 힘들다면, 특히 어떠한 대상의 문제로 인해 특히 힘들다면 꼭 기억해야 한다.


당신만 힘든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세상 모두가 다 각자의 힘겨움 속에 있다는 피상적인 위로의 말이 아니다. 아주 기술적인 차원의 말이다.


당신이 그것과 엮여 힘들어졌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 그 대상은 당신과 똑같은 양상으로 힘들어하고 있는 중이다. 당신은 돈이 없어 힘들고, 그 대상은 돈이 많아 여유로워 보이는데, 어떻게 똑같은 양상으로 힘들 수 있는지를 묻고 있다면, 당신은 이것이 돈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당신은 언제나 당신의 힘든 이유를 오해하고 착각한다.


상기한 하나의 예라면, 당신은 자존심 싸움을 하고 있어서 힘든 것일 수 있다. 당신은 돈이 없는 중에도 자존심을 위해 싸우고 있어서 힘들고, 상대는 돈을 써가며 자존심을 위해 싸우고 있어서 힘들다. 당신이 상대가 돈이 많아 여유롭다고 보는 것처럼, 상대는 당신이 돈이 없는데도 여유로워보이는 그 표정을 보고 있을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자존심 싸움을 상대가 먼저 걸었을 수 있다. 상대는 돈이 있는 이가 권위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또 그만큼 돈이 있는 자신이 높은 권위로 대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돈의 권위 따위와 관계없이 사는 당신의 모습이 상대에게는 무척 거슬렸을 수도 있다.


그러니 당신이 이러한 힘겨움에 휘말려야 할 이유는 더욱 없는 셈이다.


대상의 문제가 걸려 힘들다면 누가 먼저 그 문제를 촉발했는가와 상관없이 양쪽에서는 동일한 힘겨움을 경험하게 된다. 이럴 때는 먼저 빠져나가는 쪽이 승자다.


당신만 힘든 것이 아니다.


그 사실을 알고는, 그러니 당신만 빠져나가도록 하라.


당신이 기억하면 좋은 것은 이러한 대상적 사고로 살고 있는 대부분의 이들은 좀 못된 애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세계관을 진리라고 고집하며, 그 세계관의 규칙으로 타인에게 당연하게 폭력을 행사하려 한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그러고 있는 줄을 모르기에, 또는 모른 척하며 시치미를 떼기에 이것은 아주 악질적이다.


이를테면, 돈이 없는 사람은 불행하다는 세계관을 갖고 있는 이는, 돈이 없는 당신이 행복한 표정을 짓는 모습을 결코 용납할 수가 없다. 그러니 어떻게든 당신을 불행하게 만들기 위해 온갖 억까를 시도한다. 그럼으로써 돈이 없는 사람은 불행하다는 자신의 세계관이 불변의 진리로서 옳다는 증명을 이루려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돈이 없는 불행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당신을 대신 추락시키려는 의도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돈이 없으면 자신의 모든 것이 무너질 것 같은 엄청난 공포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며, 그래서 당신에게 돈이 없어 무력해지는 그 공포를 대신 경험하게 하려는 것이다.


당신은 인간이라는 것을 너무 선하게 보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물론 인간은 선하다. 그러나 자신의 세계관을 강박적으로 고집하며 언어를 진리화하고 있는 이들, 곧 그 자신이 인간을 스스로 포기하고 하나의 언어적 대상이 되어있는 이들은 결코 선하지 않다. 이러한 이들에게서는 당신 혼자 빨리 빠져나오는 것이 진정 지혜로운 일이다. 탈출의 효과적인 방법으로는 6번과 7번 항목을 다시 참조해보라.




9. 기다릴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는 많은 필요가 있으며, 기다림이라는 것도 분명한 필요다.


힘든 시절은 지나간다고 말들 하지만, 그것을 버티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당신은 버티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는 것이다.


그 둘의 차이는 이러하다. 버틸 때는 당신은 긴장으로 온몸이 경직된다. 그러나 기다림은 당신에게 어떠한 설렘을 가져다준다. 그것은 당신의 가슴속에 먼저 찾아온 봄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는가? 설렘은 당신이 기다리던 그 현실을 먼저 당신의 마음에 만들어준다는 뜻이다.


당신이 기다린다면 그렇게 기다리는 것이다.


당신의 마음에 당신이 살고 싶어하는 그 현실의 그림을 그리며 기다리는 것이다.


그동안 아주 오래 기다려왔는데 언제까지 더 기다려야 하는 것인지를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언제까지일까?


죽을 때까지다.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니 이런 잔인한 말이 어디 있겠냐고 한다면, 당신은 아직 기다림이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기다림은 설렘.


죽을 때까지라는 표현은, 당신은 죽을 때까지 설레면서 살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그 생생함으로. 누구보다 살아있는 것으로서.


당신이 살아있는 그 모든 순간이 이러한 설렘으로 가득차게 된다면, 당신은 지금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기다림의 필요를 정확하게 채우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설레이고 있을 때, 거기에는 반드시 신비라는 것이 있다. 설렘은 신비에 대한 본능적인 우리의 반응이다.


기다림이라고 하는 것은 이 신비를 당신의 삶에 개방하는 방식이다.


실존주의는 당신에게 정해진 본질 같은 것이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실존주의의 인간조건이다. 그러니 자신의 세계관이나 생각 등을 불변의 고정된 진리처럼 삼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은 실존주의의 입장에서는 인간을 그만둔 이들이다. 인간 대신에 AI나 마리오네트 인형 같은 것이 되려고 하는 이들의 모습이다.


당신에게 규정된 어떤 본질이 없다면 당신은 무엇일까?


자유 그 자체, 바로 그것이지 않을까.


그런 당신에게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으며, 당신의 삶은 그야말로 미지의 가능성으로 빛나게 된다.


신비, 이제 당신은 그것을 조우하며, 당신이 바로 그것인 것이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신비로 바로 찾기 위해 기다리는 것이다. 그것이 당신의 아주 근원적인 필요다.


사방으로 막혀서 다 힘들었던 당신을 무한한 가능성으로 해방해줄 바로 그것이 신비임에 틀림없기에.


다시 한 번 말할 수 있다.


"자유가 치유한다."


실존주의 심리학의 슬로건은 이것에 다름아니다.


당신이 자유 그 자체라는 사실이 바로 신비이며, 그것이 당신의 삶이다. 그래서 삶은 스스로 치유하는 것이며, 당신은 조금 기다리면 된다.




10. 완전함을 기억하라.


당신은 완전하다.


당신과 함께하는 이 모든 것은 완전하다.


당신의 지금 이 순간은 완전하다.


그렇게 당신이 지금 경험하는 이 모든 것이 완전하다고, 아주 가끔씩만 떠올려보자.


그리고 가슴속에서 돌연히 북받쳐오르는 어떤 느낌을 기뻐해보라.


당신이 옳다는 것이다.


그렇게 떠올릴 수 있었던 당신이 진정 옳다는 것이다.


어떤 힘든 상황이라도, 당신이 완전하다는 사실을 절대로 무너뜨리거나 망칠 수 없다.


너무 힘들 때면, 언제든 잠깐 앉아 다시 떠올려보라.


당신이 불완전하다고 말하던 그 모든 것으로 당신은 완전함을 기억해보라.


당신이 그 모든 것으로도 정말로 괜찮은 존재임을.


당신이 실존한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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