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의 실패 #1

"당신은 왜 좌절하지 않는가?"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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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것을 분명하게 있는 것으로 마주하지 않으면 모든 것은 흐릿해진다. 어딘가 생기를 잃고 말뿐인 말로만 남는다.


계속 겉도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헛바퀴만 돌리고 있는 것 같고, 무엇인가 중요한 것에 접촉되지 못한 채 허공에 붕떠있는 듯한 그 느낌.


안개숲을 헤매는 것 같기도, 또는 가도 가도 그 풍경이 변하지 않는 먼 지평선의 길 위에 던져진 것 같기도 한 그 심정은, 어느 날 갑자기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끊어진다. 추락하는 것이 아니다. 절단되는 것이다. 어떤 무거운 셔터가 지금 막 내려와 닫힌 것이며, 이것이 끝이라는 것을 우리 자신도 안다. 한강으로 가든, 번개탄을 사든, 사소한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어느 것도 중요하지 않으며, 미련도 사치다. 이것은 정말로 우리의 존재가 완전히 닫힌 상황. 존재의 마지막 영업일. 빠르게 마감을 준비하는 것은 내일을 위한 것이 아니라, 더는 내일에 아무 것도 주지 않기 위해서다.


무엇인가를 계속 주기만 하느라 텅비었다. 사는 것은 소모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돌아오는 것도 없고, 돌아보는 이도 없다. 어쩌면 나는 쳇바퀴를 돌리고 있던 것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내가 바로 쳇바퀴였다. 닳아서 멈출 때까지 하릴없이 돌기만 하던.


이런 상태를 대개 우울이라고 말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조금씩은 다 갖고 있는 상태라고도 말할 수 있고, 현재 세상에 전반적으로 깔려 있는 대기입자의 주된 성분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떠한 일에 좌절해서 우울해진 것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좌절하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에 우울해진 것이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좌절하는 대신에 우울해지기를 택했다고.


왜일까?


우울은 병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 자신이 잘못해서 생긴 것이 아니다. 좌절은 그 원인이 마치 나에게 있는 것 같지만, 우울의 원인은 병 그 자체다. 병이 문제이지 내가 문제인 것은 아닌 것이다.


결국 우리는 끝까지 어떻게든 좌절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우울증 환자가 된 것이다. 시험을 못볼 것 같아 배가 아프게 되는 아이의 모습과도 같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안해보았는가?


당신의 좌절도 실은 당신이 원인인 것이 아니라고.


당신은 보다 적극적으로 격하게 배가 아프고 싶었다. 당신의 패배를 이미 확증짓고 있었다. 당신도 나름대로 열심히 시험준비를 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게임도 좀 하고, 만화책도 보며, 라면에 밥도 말아먹었지만, 어떻든 그것이 당신의 최선이었고, 당신은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아무리 당신이 최선을 다하면 뭐하나. 아무도 그 최선을 평가해주지 않는데.


평가되는 것은 당신 빼고는 전원 다 100점을 맞은 아이들이다. 그들이 역사의 승리자다.


당신은 어차피 학교에 가봤자 당신 혼자 비참하게 될 그 미래를 직감하고, 또 확증하고 있었기에 격렬하게 배가 아프고 싶었을 것이다. 아니, 꼭 배가 진심으로 너무 아파야만 했을 것이다. 그래야 그 핑계로 눈물도 흘려볼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 눈물은 무엇을 향한 것이었을까?


돈으로 시험점수를 조작해주던 부자 아빠에 대한? 또는 교장선생님과 같은 정치적 커넥션이라 시험문제를 미리 얻을 수 있었던 권력있는 아빠에 대한? 또는 시험문제를 대신 풀어주던 동일과목 교사엄마에 대한? 아니면 시험을 아무리 못보았더라도 특별장학코스로 무조건 학교에서 100점을 받을 수 있게 날조해주던 당신 가문의 사회적 위세에 대한?


그렇다면 그것은 정확히 흐르고 있던 눈물이다.


좋은 부모도, 재산도, 가문의 후광도, 당신을 지원하는 정치세력도, 이름있는 유튜버와 SNS 친구들도, 심지어 외모와 건강마저도 갖지 못한 당신이 100점을 받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사기칠 아무런 능력이 없는 당신이 100점을 맞지 못하는 일은 오늘날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있는 것을 분명하게 있는 것으로 마주하지 않으면 모든 것은 흐릿해진다.


당신의 눈을 흐리지 마라. 눈물은 당신의 눈을 닦아주려고 흐르는 것이다. 분명하게 보라.


사기꾼들만이 고평가를 받으며 잘난 척을 하고 있는 사회다.


그렇게 되게끔 사기꾼들의 부모들이 판을 이미 다 짜놓았다. 자기처럼만 살면 자식사기꾼도 성공할 것이라며 부모사기꾼은 사기컨설턴트처럼 메뉴얼을 제공했고, 자식사기꾼이 그대로 해서 100점을 맞았다. 그리고 이제 부모사기꾼들로 이루어진 사회적 승인의 기득권집단은 이것이 노력과 재능으로 얻은 올바른 100점이 확실하다며 사기의 결과를 공인해주었다.


이러한 일이 있다. 아주 많이 있다. 지배적으로 있다. 있는 것을 정말로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


그래야 당신이 좌절하는 일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누구라도 이러한 상황에서는 좌절할 수밖에 없다. 당신의 문제가 아니다. 사기꾼들의 세상에서는 모두가 다 이 좌절을 경험한다.


그러니 당신도 좌절한 것이다.


있는 것을 있는 것으로 보라. 좌절을 회피하기 위해 우울로 바꾸지 말고, 당신이 실은 좌절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아니, 차라리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당신은 이제 좌절하는 일에 성공해야 한다고.


그래야 그 눈이 맑아진다. 환상을 걷고 똑바로 볼 수 있게 된다.


당신의 불운은 당신의 부모님이 사기꾼이 아니었다는 것뿐이며, 또 당신도 사기꾼이 아니었다는 것뿐이다.


그러니 평생 당신의 인생에서 다른 사기치던 애들처럼 100점 한번 맞아보지 못한 것이며, 어떤 성취를 거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당신은 정말로 좌절에 성공한 이의 눈으로 봐야 한다. 그것은 이미 무대 밖으로 밀려난 입장. 그러니 무대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가 대단히 잘 보이게 된다.


사기꾼들의 세상이며, 애초 사기를 잘 쳐야 이 연극의 중심인물이 되어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는 그러한 무대였다.


당신은 착각했다. 순진하게 교과서를 믿었다. 그것만 보더라도 당신이 정직하고 성실한 학생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할 것이다. 당신은 교과서에 나온 것처럼, 세상은 공정한 것이라고 믿었다. 최소 사람들은 공정성을 이루기 위해 함께 노력해가고 있는 중이라고도 믿었다.


아니, 공정성이라고 하는 그것은 지구에 가장 없는 것이다. 현자의 돌보다 더 귀한 희귀원소 중의 희귀원소다. 심지어 동아시아의 이 반도국가에서는 역사상 단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는 원소다.


그렇기에 사기꾼들에게는 이 공정성이라는 것도 아주 좋은 사기의 소재다. 아무도 그것을 본 적이 없으니, 자기가 사기치고 있는 그 일에 공정성이라는 이름을 마구 붙일 수 있다. 그러면 동료사기꾼들도 반가워한다. 공정성이라는 이름으로 이제 더 노골적으로 사기를 칠 수 있으니, 이 프레임을 생각해낸 사기공학자를 리더로 반길 것이다.


이처럼 사기꾼들이 사기꾼들을 지지하는 방식으로 사기꾼들의 세상은 더 권위있는 것으로서 공고화된다. SNS에서도 자주 보이는 그 모습이다. 사기꾼들이 SNS의 방식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허구를 더 많은 허구로 지지하면 마치 그것이 진짜 같은 권위를 갖는다는 이 사기꾼들의 문법으로 SNS가 작동하게 된 것이다.


사기를 가장 쉽게 정의하면 곧 '언어로 삶을 속이는 일'이다.


우리는 제주도에서 남서쪽으로 15km 떨어진 위치에 존재하는 아르켈리오스라는 섬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그 섬에서는 마르크스와 김구 선생이 정자 아래에서 막걸리 한 잔을 걸치며 장기를 두고 있고, 해안가에서는 마이클 잭슨과 신해철이 합동공연을 하고 있다.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하루에 3시간씩만 공동작업장에서 평등한 노동을 한 후에, 남는 여가시간에는 저마다 자신만의 놀라운 재능을 뽐내는 예술가로 살고 있다. 유엔에서 지구특구로 지정한 이곳에서는 세계 최고의 문화시설과 첨단의 의료복지시스템, 또 아이들을 글로벌한 창의적 인재로 키울 교육제도들이 갖추어져 있기도 하다. 지구 최초의 낙원이라는 애칭을 갖고 있는 섬이며, 당당하게도 이 섬은 대한민국의 영토로 귀속되어 있다.


누구도 이런 섬이 정말로 있다고 믿는 이는 없을 것이다. 아직은 말이 약하다.


그러나 지구상의 절반이 이 말을 믿게 된다면? 이에 대한 법률을 정해 이 섬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불이익을 준다면? 나아가 이 섬을 민주화운동의 성지 같은 것으로 지정해 죄책감으로 교묘하게 협박한다면? 혹은 "아르켈리오스에는 사람이 있다." 같은 슬로건으로 이 섬을 정치적 담론으로 만든다면? 아니면 미디어에서 계속 이 섬의 가상풍경과 이미지를 내보내 우리의 인식에 각인되게 한다면?


그래도 인간은 그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기에, 누구도 결코 이 섬을 믿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그러면 이것보다 더 유치한 제3제국은 왜 믿었나? 당시의 독일인들은 다 바보들뿐이었을까?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오늘날의 한국사회는 왜 주술사회인가? 무당에게 왜 회사경영에 대한 것을 진지하게 묻고, 정치인들에게는 왜 단골역술집이 있으며, 아예 노골적으로 미디어에서는 왜 주술적 음모론자들이 날뛰는가?


인간이 과거의 신을 죽이고 언어를 새로운 신으로 삼으며 숭배한 이래, 언어로 더욱 삶을 기만하며 사기치는 것이 성공의 황금공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언어는 관계로 구성되어 있고, 또 역으로도 관계를 구성한다. 이에 따라, 관계의 힘을 더욱 강하게 결집시키면, 언어에도 그만큼 힘이 생긴다. 거짓을 말해도 그것이 관계 내에서는 진짜처럼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그 관계 밖의 누군가가 그것은 거짓이라고 말한다면 관계의 힘으로 눌러버리면 그만이다. 장님들의 세상에서 두 눈을 뜬 이가 늘 좌절하게 되는 그 이유다.


사기꾼들이 언제나 사기를 치려고 할 때는 먼저 친밀한 관계를 맺는 일에 주력한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이것은 세뇌의 기초이기도 하다. 다정하고 친절하게 상대를 지켜줄 것 같은 든든한 모습을 연출하여 그 상대가 자발적으로 관계의 문을 열게 하면, 그 다음은 일사천리다. 어떤 거짓을 말해도, 상대는 관계의 친밀도에 따른 자기최면을 이루어 그 말을 알아서 최대한 참말로 해석하고자 하게 된다.


요즘엔 집단주의가 행사하는 관계망의 언어로 사람 하나 바보 만드는 일이 너무 쉽다는 것을 우리는 다 알고 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은 우리도 모르는 새 우리가 그런 바보가 되어 있다는 사실뿐이다.


사기꾼들이 하는 일이 늘 이 일이다.


멀쩡히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온 이들을 어떻게든 농락해서 바보를 만들어야 이들은 직성이 풀린다. 이는 사기꾼들이 갖는 아주 지독한 열등감 때문이지만, 이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다루기로 할 것이다. 여기에서는 다만 이렇게 말해보도록 하자.


좌절하는 일에 실패할 때, 우리는 열등감을 갖게 된다고.


사기꾼들은 좌절에 실패해서 열등감이 많은 상태가 된 것이며, 사기를 통해 우리에게 자신의 그 열등감을 전가한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지도 모른 채 사기꾼을 보며 씨익 웃고 있던 바보가 되었다.


우울은 실은 자기 자신에게 무척 화가 난 상태다. 그러나 그 화가 표현되지도 못하고 오히려 스스로를 누르고만 있는 상태가 곧 우울이다.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 자신이 너무 바보같아서일 것이다.


사이비교주에게 인생이 털려본 이는 그 후유증으로 만성적인 우울의 상태를 자주 앓는다. 자신이 그렇게 바보처럼 당했다는 사실을 용서할 수 없는 것이며, 그런 자신에게 너무나 화가 난 것이다. 그래서 모든 감정을 다 억압해버린다. 다 잊고 싶은 것이며, 없던 일처럼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거듭 말하듯이, 있는 것을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 있는 것을 있게 하는 그 일이 치유다. 우울이라는 병에는 치유가 필요하다. 곧, 좌절이 필요하다.


우리는 분명히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성공적으로 좌절하는 일은 곧 치유의 성공이다."


또는 이렇게도 말해보자.


"좌절한 이만 치유될 수 있다."


원래 작정하고 사기치려는 이들에게 당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그들은 아주 집요하며 필사적이다.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전부 다 사기를 성공시키려는 그 목적에 동원한다. 애시당초 사기를 치며 살아온 적이 없어서 사기에 친숙하지 않은 이가 이러한 사기의 의지를 방어하기란 쉽지 않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자신이 바보처럼 왜 당했을까를 자책하며 우울에 빠지게 되었다면, 그것은 이렇게 말하는 것과도 같다.


"아, 나도 영리하게 사기치며 살았어야 했는데. 사기와 친했다면 사기에 안당했을텐데."


자기계발 분야의 사기꾼들 중에는 이러한 이들이 많다. 오랜 시간 극심한 우울의 상태에 빠져 있다가, 갑자기 자신이 인생의 무슨 진리라도 깨달은 양 이제 성공하는 법을 알았다고 사람들 앞에 나선다. 그들은 뭘 알았는가? 성공하려면 자신이 당한 그 방식으로 자신도 똑같이 사기를 쳐야 한다는 것을 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기가 아닌 것처럼 언어를 굴려 선량해보이는 포장지를 씌운다. 그 또한 자신이 당했던 바로 그 방식이다.


어떻게든 좌절하지 않기 위해, 우울로 도피했다가, 이제는 그 자신이 사기꾼이 되는 셀프구원의 메카니즘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아무 것도 구원된 것은 없다.


구원이라는 것은 애초 좌절한 이에게만 다가오는 것이다.


아주 통속적인 표현으로, 착하게 살면 구원받고, 악하게 살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을 하곤 한다. 당연히 틀린 말이다. 이 말은 차라리 이렇게 뒤집어 해석되어야 한다.


구원은 어떤 것이 진짜이고, 또 가짜인지를 알아볼 수 있는 그 눈을 뜨는 일이라고.


좌절하는 일에 성공한다는 것은, 이 순수한 눈을 뜨는 일에 성공한다는 것이다.


가짜를 진짜라고 믿었던 것이 그 모든 사기의 실제였다. 그것은 아직 우리가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눈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눈으로 볼 줄 아는 그 힘이 없어서, 우리는 언어를 의존했던 것이며, 바로 그 언어의 의존 때문에 사기를 당하게 된 것이다.


자신이 좌절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면, 그렇게 성공적으로 좌절하게 되면, 이제 그 눈이 뜨인다.


어떤 껍질이 벗겨지는 것이며, 눈꺼풀이 열리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이제 진짜를 향해 갈 수 있게 된다.


이 미친 사기의 세상 속에서도 아직 살아있는 진짜를 알아볼 수 있게 된 까닭이다.


세상에는 진짜와 가짜라는 것이 있다. 다양성이니, 시뮬라크르니, 비이원이니, 각종 고급언어들로 아무리 속이려고 해도 진짜와 가짜는 있으며, 우리는 그것들을 구분할 수 있다. 아니 적어도 우리는 어떤 것들이 언어로 만들어진 가짜인지는 분명하게 경험할 수 있다. 그것들은 반드시 우리를 좌절하게 만들 것이기에.


이처럼 사기꾼들의 세상에서 필연적으로 우리가 좌절할 일이 많아진 것은, 어쩌면 그것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너무나 가짜들이 판을 치고, 가짜들끼리 모여 서로를 지지하며 가짜를 진짜처럼 만드는 거짓권위를 행사하고 있으니, 그 거짓의 세상에서 당신이 질식해 죽지 않도록 당신의 좌절은 당신의 필요로 다가온 것이다.


좌절을 통해 눈을 떠서, 이제 진짜를 알아보고, 그 진짜를 바랄 수 있도록.


당신이 진짜로 살지 않으면 이 삶이라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일 것인가?


당신이 있는 것을 있는 것으로 사는 일, 곧 당신이 성공적으로 좌절하는 일은, 당신이 진짜로 사는 삶을 개방한다. 당신이 안심하고 좌절해도 되는 이유다. 가짜에서 좌절하고 진짜에서 살아난다, 이것은 인류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간들에게 일어났던 공통적인 그 일이며, 이제 당신에게도 일어날 준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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