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의 실패 #2

"좌절의 심리학적 의미"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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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좌절에 대한 심리학적 관점 중에 크게는 두 가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정신분석의 관점이고, 두 번째는 실존주의 심리학의 관점이다. 그 둘은 좌절의 문제를 유사한 방식으로 파악하나, 그 이해를 적용하는 방향성이 다르다. 이 둘을 비교해가며 함께 서술해보면 우리는 좌절의 심리학적 의미에 대한 매우 입체적인 그림을 얻을 수 있다.


우선적으로 정신분석에서 좌절은 아주 중요한 경험이다. 인간의 경험 중에 가장 중요한 경험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애초 정신분석이라는 접근 자체가 개인을 성공적으로 좌절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방법론이라는 사실 또한 자명하다.


틸리히가 '꿈꾸는 순진함'이라고 부르는 상태가 있다. 이것은 비유적으로 인간이 아직 지식의 열매를 먹지 않고 에덴동산에 거주하고 있는 모습과 같다. 정신분석적으로는 이는 아직 미분화되지 않은 아동의 상태를 가리킨다. 거기에는 경계가 없다. 모든 것이 몽롱하고 흐릿한 무경계적 혼돈 속에 존재한다.


그래서 아동은 곧잘 자신의 경계를 추상적인 차원에서 확장시키곤 한다. 자신을 무척 크고 힘이 있는 어떤 전능한 존재처럼 간주하는 것이다. 신의 품속에 있는 인간이 신의 권능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는 모습과도 유사할 것이다. 그는 자신만의 경계가 없기에, 아직 자신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실존주의 심리학의 관점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후에 생겨난다. 꿈에서 깨어나 대지에 발을 딛고 자신의 신체로 살아가야 하는 그 현실에 직면하여,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묻기 시작한다. 이런 것을 실존의식이라고 말할 것이다.


인간이 세운 문명이라는 것은 가상의 에덴동산과 같다. 그래서 문명에 편입되어 살아가는 인간은 이 실존의식이 흐려지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는 자신에 대해 묻기보다는 자신의 욕망에 대해 물으며, 또 그 욕망을 이루어줄 것 같은 대상에 대해 묻는다. 자기로부터는 점점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문명이라는 것이 이처럼 양가적으로 인간을 보호해주는 대신에 그 자신의 생생한 삶의 실감을 무디게 하는 가상현실의 장치로 드러나듯이, 실은 아이에게도 부모란 일종의 가상현실이다. 동시에 양가적인 대상물이다. 부모는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대상물로 기대되지만, 그 기대를 지속할수록 아이는 자신의 경계를 확보하지 못하게 된다.


오늘날, 몸만 크고 그 정신은 미숙한 이들이 많은 것은, 이 부모-사회라는 가상현실이 잘 작동하고 있는 까닭일 것이다. 그것은 계속해서 인간을 '꿈꾸는 순진함' 속에 있게 만든다. 더 쉽게는, 꿈속에서 살게 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 경우, 정신분석과 실존주의 심리학은 공통적으로 정신적 아동이 꿈에서 깨도록 돕는 일을 맡는다.


강제로 깨우는 것은 아니다. 개인이 그 안에 빠져있던 꿈이 악몽이 되어 그 개인에게 고통으로 작용할 때, 이 두 전통은 꿈으로부터의 탈출 내지 해방을 조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이 분명 좌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것이 된다.


현대정신분석에서 잘 알려진 예를 들어보자. 자기심리학의 코헛이 이를 묘사한다.


한 아동이 있다. 그는 아버지의 작업장에 따라가서 평소에 하던 방식대로 난장을 부리기 시작한다. 그는 이 세상에서 무서울 것이 없는 하나의 헤라클레스다. 그러다가 아동은 굉음을 내는 기계 앞에 서게 된다. 기계가 작동하며 갑자기 커다란 소리를 내자 아이는 멈칫한다. 그러더니 표정을 가다듬고는 자신도 커다란 소리를 질러 기계에 맞서려고 한다.


그러나 이 투쟁의 의지는 부질없게도, 지치지 않는 기계의 소리에 잠식되어 점차 아이의 패색이 짙어진다. 결국 아이는 그의 아버지가 서있는 쪽을 돌아본다. 울상인 얼굴로 무언가를 호소하듯이.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중요한 전환점이다.


아버지는 참아야 한다. 아무 행위도 하지 말아야 한다. 아이가 좌절되는 일을 묵묵히 지켜봐야 한다.


아이는 아버지가 자기를 구하러 달려오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는 것을 보고는, 이제 뒷걸음질로 기계에서 후퇴하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몸을 돌리고는 울면서 아버지쪽으로 달려온다. 발을 헛디뎌 넘어지게 됨으로써 울음은 더욱 커져간다. 그는 혼자다. 완전히 혼자다. 무력하다. 그 자신은 너무나 작다. 아마도 그런 감각들이 아이에게 느껴지고 있을 때, 아이는 문득 아버지의 손길도 함께 느낀다.


아버지가 아이를 가득 끌어안고 있다. 이제 아이는 거칠 것 없이 오열을 뿜어낸다. 아버지는 미소로 그를 품고 있었다.


코헛은 이것을 모범적인 사례로 얘기한다.


아이는 이 날 자신의 경계를 분명하게 확인한 것이다. 자신은 아주 작은 존재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을 수 있다는 그 경계의 의미도 명확해졌다.


그는 좌절하는 일에 성공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하나의 성숙을 이룬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상황이라면 차라리 이런 그림을 떠올리는 게 쉬울 수도 있다.


"거기 기계 좀 끄라구욧! 우리 아이 기죽게 뭐하는 짓이에욧! 애 트라우마 생기겠네, 심리학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들하곤 원."


아니면 이런 장면도 있을 것이다.


"괜찮아. 기계는 너를 싫어해서 그런 게 아니야. 기계가 열심히 일을 해야 네가 좋아하는 장난감도 만들어지는 거란다. 다 너를 위한 것들이야. 이 세상은 다 너를 위해 만들어져 있단다. 그러니 좌절금지. 울지 말고, 기계한테 가서 기계도 참 온전하구나, 라고 말해주렴. 친구야, 나를 괴롭히려고 그런 게 아니란 걸 알아, 그런 너도 괜찮은 존재라는 걸 나는 알아, 그렇게 말해주려무나. 너를 힘들게 하는 것들보다 더 큰 품으로 네가 다 품어주렴."


이런 것을 공감과 수용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우리가 성공적으로 좌절하는 일은 무척이나 멀리에 있다.


코헛이 정신분석의 전통에 인본주의적 수용이라는 개념을 아주 적극적으로 도입한 연구자라는 사실을 아는가?


수용은 좌절되지 않도록 수용하는 것이 아니다.


좌절을 수용하는 것이다.


정신분석은 이 좌절의 사건을 통해 개인을 보다 현실수용적인 사람이 되도록 안내한다. 그것은 사회를 이루는 규범 및 이념의 질서를 자신의 안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소위, 아버지의 로고스를 내사한다고도 표현한다.


곧, 좌절은 개인이 한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이념을 수용하고, 그 이념과 더욱 가까워지도록 구체적인 삶의 방향성을 설정해 살아가는 계기가 된다. 그럼으로써 개인은 사회성을 배양시키게 되고, 자신의 경계와 타인의 경계 사이에서의 유연한 줄다리기가 가능해진다. 소위 말해, 현실을 살아가는 실천적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정신분석의 입장에서는 자아에게 배당된 임무다.


그렇다면 실존주의 심리학은 이러한 좌절의 상황을 어떻게 이해할까?


실존주의의 선구자인 키르케고르가 실존주의의 명저인 『죽음에 이르는 병』을 쓰고 그 병명을 '절망'이라고 진단했을 때, 그것은 분명 좌절에 대한 얘기였다.


실존주의는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낙원으로부터) 던져진 존재로서의 자각에서 출발한다. 이 자각은 치명적이다. 어떤 부모의 품, 어떤 문명의 품이라도 뚫어내고서 번갯불처럼 반드시 찾아들고야 마는 자각이다.


한번 난 것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 그것은 외적인 관계로부터 온 한계가 아니라, 이미 내적으로 운명화된 한계다. 실존주의는 바로 이 인간의 필멸성이라는 내적 운명으로부터 경계를 발견한다. 우리의 존재는 외부의 대상에 의해 경계지어지기 이전에 먼저 우리 자신의 시간에 의해 경계지어진다. 하이데거의 초기의 사유는 이를 분명히 한다.


유한성, 이제 이것이 인간의 핵심적인 속성이 된 것이다.


이것은 대상적 관계에 의한 경계와는 달리 애초 줄다리기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자아가 아무리 고귀한 이념을 내사한다 해도, 이 세상의 그 어떤 이념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자아가 혼자 뭘 해보려는 시도나, 관계의 힘을 통해 뭘 해보려는 시도는 결코 성공적일 수 없으며, 바로 이 자리에서 자아는 무력화된다.


이처럼 정신분석이 자아의 세력을 강화하려는 실천적 방향성을 갖는다면, 실존주의 심리학은 오히려 자아의 세력을 더 내적으로 한계지으려는 실천적 방향성을 갖는다.


그럼으로써 실존주의 심리학이 의도하는 것은 초월이다. 자아의 확장이 아닌 자아의 초월이 그 지향점이다.


실존주의 심리학에서의 좌절의 의미는 분명하게 이 초월의 가능성으로 드러난다.


실존은 곧 초월이다. 허구의 것에서 죽은 것이, 진리의 것으로 태어난다. 무수한 종교적 비유들은 이 실존의 초월성에 대해 말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아의 좌절이란 참된 어떤 것의 탄생을 시사한다. 그 가능성을.


정신분석과 실존주의 심리학은 이와 같이 그 상이한 실천적 방향성에 의해 서로 대립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둘의 상호작용은 우리로 하여금 분명 어떤 입체적인 그림을 확보하게 해준다.


자아의 확장과 자아의 초월, 그것은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동시에 지향되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분명 그 두 차원을 동시에 살아가는 존재인 까닭이다. 키르케고르의 입장에서 자아란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의 경계이자, 그 복합물이다. 정신분석이 전자의 강화를 도모하는 방식으로 전자를 조금 더 강조한다면, 실존주의 심리학은 전자의 초월을 요청하는 방식으로 후자를 조금 더 강조한다.


정신분석은 역동적으로 드러나는 유한자 사이의 관계를 살아가는 문제를 다루는 '관계의 심리학'이고, 실존주의 심리학은 역설적으로 드러나는 유한자의 초월적 존재방식을 살아가는 문제를 다루는 '존재의 심리학'인 까닭일 것이다.


어느 쪽의 기획이든 간에, 우리가 좌절에 성공하는 일은 공통의 핵심적인 목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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