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의 실패 #3

"자신의 삶을 선택할 기회"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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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하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선택할 수만 있다면 누구든 좌절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의미로는, 살아간다는 것은 좌절을 쌓아가는 시간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삶이란 우리의 생각이나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우리에게 닥쳐오는 것이다. 설령 삶이 선택이라고 해도 그것은 우리가 음식점에 가서 메뉴를 주문하는 그런 의미와는 다를 것이다. 이에 대한 좋은 심리학적 격언이 있다.


"우리는 사건을 선택할 수 없다. 사건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한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삶에서 우리를 좌절시키는 무수한 사건들을 경험하곤 한다. 이 좌절의 일은 불가피한 필연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우리는 좌절에 대해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이 응답이 이제 우리의 건강성과 성숙도, 그리고 행복의 질을 결정한다.


비가 아주 많이 오는 어떤 날에 우산도 아무 소용없이 우리는 비에 쫄딱 젖고 말았다. 이를테면, 이것이 하나의 좌절의 상황이다. 우리는 우리가 비를 맞았다는 사실을, 또 나아가 비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것인가? 좌절에 실패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자책도 좌절에 성공적으로 응답하는 일은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가장 아닌 일이다.


자책은 애초 자신의 능력 및 역량을 과대평가하는 오만성에서 비롯한다.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착각하기에 자책이 생겨난다. 그러나 비가 압도적으로 내리는 현실에 대해 그는 대체 뭘 할 수 있는가? 자신의 초능력으로 기상을 조종해서 비를 소멸시켰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실수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게 되어서 죄송하다는 말인가?


자신이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는 대단한 존재라고 오해할 때, 거기에서는 십중팔구 우리에게서는 다 자책의 반응만이 생겨날 뿐이다. 우리는 분명 그 반응을 선택한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계속 대단한 존재처럼 지속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말한 것처럼 선택에 대한 착각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건을 선택할 수 있다고 착각한 것이다. 그 사건이란 우리가 대단한 존재가 되는 사건이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의 사건도 아닌 가상의 사건이다. 마치 게임캐릭터를 고르듯이, 우리는 가상으로 꾸며진 대단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선택하려 했으며, 이에 따라 그 대단한 존재로서의 합당한 반응이라도 된다는 듯이 자책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자기 자신에 대한 과대망상이 자책을 만들어내며, 자책은 그 과대망상의 유지를 위해 기능한다. 그러나 좌절은 개인이 갖고 있는 그 자신에 대한 과대망상을 깨는 것이다. 그렇기에 좌절과 자책은 서로 반대의 방향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좌절은 자기 앞에 계속 더 커다란 것을 보기 위해 가는 길이고, 자책은 자기 앞에 계속 더 작은 것을 보기 위해 가는 길이다.


삶이 일으키는 사건들 앞에 성공적으로 좌절한 이가 있다면 그는 분명 삶이라는 것을 아주 큰 것으로 보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한 이는 삶이 가진 그 거대한 힘에 매료되며, 삶을 겸허히 스승으로 삼아 동반의 여행길을 나서게 된다. 일종의 출가의 의미다. 그것은 삶이라고 하는 아주 위대한 스승의 도움을 받아 그 자신도 위대하게 거듭나기 위한 여행일 것이다.


반면, 삶이 일으키는 사건들 앞에 자책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어떠한가? 그는 삶이 자신보다 크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좌절 대신에 자책을 선택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로서의 자신의 가상적 위상을 유지하려고 한다. 자책은 이내 자신이 지키지 못한 이 세상 모든 것을 안쓰러워하며 마음의 빚을 경험하는 국면으로 확장될 것이다. 그렇게 자신은 골방 안 옥좌에 도사리고 앉아 왕 놀이만을 지속한다. 자신이 삶보다 크다는 과대망상으로 가장 삶을 무시한 채.


그러니 삶이라는 것을 좌절을 쌓아가는 시간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여기에서 한층 명확해진다.


우리는 좌절을 통해 삶이라는 것의 그 크기와 힘을 이해하며 점점 삶에 대해 알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을 당연하게도 친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좌절은 이처럼 삶과 친해지는 경험이다. 그리고 자신의 삶과 친해지고 싶은 그 몸짓이야말로 좌절에 대한 가장 성공적인 응답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어떠한 삶의 사건이 일어나라고 사건을 선택할 수는 없지만, 그 사건과 친해질 수는 있다. 그러한 응답을 선택할 수는 있다. 이와 같이 사는 이는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게 할 수는 없지만, 이제 비와 친해져서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게 된다. 이것은 공존의 의미다.


친교는 공존의 현실을 이끈다.


한번 생각해보자. 당신을 좌절시키던 그 이유와도 당신이 이제는 아주 편안하게 공존할 수 있게 된다면? 그러한 당신은 무적이지 않을 것인가?


삶을 그의 앞에 있는 커다란 것으로 보며 그 삶을 따르려는 이는, 자신의 삶과 친교하려는 것이며, 자신의 삶과 공존하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삶은 이제 가장 친밀한 그의 동반자다. 자신보다 한참을 큰 그 대단한 삶이라는 것이 무엇보다 든든한 자신의 아군이 된 것이다.


심지어 우리가 우리 앞에서 계속 이 삶이라고 하는 거대한 것을 보고자 한다면, 그것은 마침내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과 하나가 되는 현실을 이룰 것이다. 인류사의 모든 것 속에서 이것은 언제나 지고의 경지로 묘사되던 것이다. 살아있는 것이 자신의 살아있음을 최대치로 긍정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궁극이다.


좌절하는 일에 실패하고자 하는 이들이 자신의 삶이라고 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볼 수 있다.


우리도 그러했다.


그래서 좌절이 찾아왔던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처음부터 좋아할 수는 없었기에, 우리는 좌절이라는 사건을 통해 배울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연인관계나 부부관계 속에서 오랜 동반자 생활을 해온 이라면 이러한 말들이 더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자기 앞에 있는 하나의 삶을 실은 순수하게 삶으로만 본 적이 없다. 거기에 자신들의 망상을 씌워서 보았다. 그리고 점차 그 삶이 드러내는 실제적인 모습과 자신의 망상 사이의 괴리가 너무 커지면서, 이들은 자신들의 삶에 계속 좌절해갔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은 척 그 좌절을 회피하기 위해 했던 것은 언제나 자책이다. 자신이 조금 더 품어주었더라면, 조금 더 능력이 있었더라면의 그 내용들. 이들의 대다수는 어떻게든 자기의 앞에 있는 삶보다 자신이 더 크고 대단한 것처럼 굴기 위해 계속 필사적이었고, 그래서 그 관계의 양상은 결국 필사로 임하는 전쟁이 되었을 것이다.


전쟁을 끝낼 수 있던 운좋은 이들도 있었다. 아니 그것은 사실 운이 아니라 이들의 힘이었으며 지혜로운 역량이었다.


이들은 항복했다. 설령 자신이 전쟁에서 이긴다고 해도 그 끝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 중 누구도 좌절을 회피하기 위한 관계게임의 승자가 되지는 않았는데, 이들은 서로가 동시에 항복했기 때문이다. 상대에게 항복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삶에 항복한 것이다. 그렇게 이들은 자기 앞에 있는 그 자신의 삶에 함께 항복했으며, 자기가 결코 자기 생각대로 삶을 통제할 수 없다는 그 좌절의 일에 마침내 성공했다.


그럼으로써 열린 것은 친교의 길. 자신의 삶과 진정으로 친해질 수 있는 이만이, 타인과도 진정으로 친해질 수 있다는 것은 심리학의 황금률이다.


이들은 좌절에 성공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아주 친밀한 것으로 다시 찾을 수 있었으며, 관계의 상대와도 깊은 친밀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자신의 삶을 가장 큰 것으로서 새롭게 알아가는 그 일이, 마치 상대를 처음으로 새롭게 배워가는 그 일이 된 것이며, 그것은 아름다운 동반의 의미 그 자체였다.


아니, 그것이야말로 삶의 의미였다.


삶의 의미는 삶 그 자체다.


삶을 우리의 앞에 다가온 거대한 미지로 보며 살아감으로써, 삶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또 우리가 살아있다는 그 사실이 대체 무엇인지를 정말로 이해하고 그것과 친해지는 일이 곧 삶의 의미다.


빅터 프랭클은 니체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자신의 삶의 의미를 알게 된 이는 어떠한 고통도 이겨낼 수 있다."


자책을 통해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이들이 있다. 누군가를 위해 자책할 수 있는 그 모습이야말로 삶의 의미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삶의 의미를 마치 자신의 과대망상적 자아를 지속하기 위해 버티는 그 인내의 의미라고 여기는 것이다. 최악의 사기꾼들이다.


삶의 의미는 과대망상이 낳은 자책 속에는 결코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정직한 좌절을 통해 발견되곤 하는 것이다. 빅터 프랭클은 유태인수용소 속에서 얼마나 무수한 좌절의 순간들을 경험했겠는가. 삶이 가져온 그 좌절의 사건들에 대해 삶과 친교하려는 응답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그는 살아남았다. 이제는 가장 최고의 아군이 된 삶이 그를 살린 것이다. (그 자신이 그렇게 보고한다.)


삶과 친해질수록 이처럼 삶이 자신을 더욱 살려가고, 자신을 더욱 자신답게 피어나게 해주며, 결국 삶이라는 것과 친해지고 동행할 수 있는 이 인간으로 자신이 태어난 일을 엄청난 행복으로 바로 알게 되는 그 궁극의 지평으로 안내해주는 것이 삶이라는 사실을 점점 더 실감하게 된 이라면, 그러한 이는 자신의 삶을 좋아할 수밖에 없게 되지 않을까?


바로 그러고 싶어서 우리에게는 좌절이라는 것이 다가왔던 것이다.


자신의 삶이 너무 미웠지만, 그래도 정말로 가능할 수 있다면 한번 사랑해보고 싶었기에, 우리는 좌절이라는 형태로 그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우리가 아직 삶과 친하지 않으며 삶을 미워하던 와중에는 그것은 좌절의 형태로밖에는 다가올 수 없었기에.


이처럼 삶의 거대한 품에 안겨 사랑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놓고도, 자아도취적 자책에 빠져들어 세상의 안쓰러운 것들을 자신이 다 품어주겠다고 하고 있는 모습은 지독한 교만, 그리고 가장 심대한 어리석음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있어 가장 큰 고통의 이유다.


자신은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자신이 대단한 존재로 보이지 못할까봐, 어떤 것을 시도조차 않음으로써 좌절을 원천적으로 회피하고자 하는 일이 오늘날 만연한 모습이라고 할 때, 이로써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끝나지 않는 고통의 현실일 뿐이다. 대단한 존재로서의 자기망상을 지속하는 일은 가장 큰 고통을 지속하는 일이다.


좌절이 우리를 영영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좌절의 실패가 우리를 끝나지 않는 고통 속에 빠트린다. 우리는 분명 선택할 수 있다. 우리 앞에 삶이 가장 큰 것으로 놓여 있는 사실을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우리 자신이 삶보다 큰 척하는 거짓말을 계속할 것인지. 그럼으로써 삶의 동반자가 될 것인지, 아니면 고통의 가상현실을 지속할 것인지. 좌절은 이 위대한 선택의 기회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선택할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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