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어떠한 삶의 현상을 묘사하고 또 이해해보려고 하는 일에는 언어가 동원된다. 아무리 엄밀하게 언어를 쓰려고 해도, 언어로 구조화된 그것이 삶일 수는 없다. 근사한 듯하면서 역시나 근사하기만 할 뿐이다. 아무리 수렴해도 거기에 닿지 못하는 어떤 결여가 언어 안에는 운명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그래도 어떻든 언어로 무엇인가를 표현하는 일은 근사해보이니 계속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아름다움과 관련된 일이다. 일치되는 것은 하나다. 그러나 빗겨가는 것은 무수하다. 언어는 그래서 일부러 빗겨가는 운명으로 만들어진 것일지 모른다. 더 많은 아름다움을 창조해내기 위해.
이것은 분명 역설이다.
다가갈 수 없음을 이미 알면서 그럼에도 다가가보려고 한다. 또는 어떻게든 다가가 보려고 하면서 그럼에도 결코 일치하지 않으려고 한다. 언어에는 이 두 방향성이 동시에 존재하며, 동시에 작용한다. 그래서 언어에는 긴장이 있고, 긴장이 만들어내는 진동이 있으며, 그 울림이 우리의 가슴에 전달되는 아름다움이 된다.
이렇게 역설적인 속성으로 쓰이는 언어를 시적 언어라고 할 것이다.
시는 언어의 가장 근원일지도 모른다. 근원어. 태초의 언어. 신이 만약 이 세상을 언어로 창조했다면 그 언어는 시였을 것이다. 그러니 신이 언어로 창조했다면 그것은 동시에 언어로 창조한 것이 아니다.
시는 언어이면서 언어가 아니고자 하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언어일 수밖에 없는 언어다.
최후의 시어는 "아."라고 발화되는 탄식이자 감탄사가 아니리라고 누가 확언할 수 있을까?
붓다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에게는 차라리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것이 시였다. 그가 든 꽃 한 송이가 시였고, 그의 은은한 미소가 시였다.
그렇다면 나는 묻는다.
존재는 시인가?
존재는 결국 시가 될 것이라고, 이렇게 말하는 편이 정직할 것이며, 또 마음에 든다.
존재를 알아본 이가,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결코 말할 수 없는 탄식을 자아내든, 또는 경외의 감탄사를 자아내든, 그렇지 않다면 옆에 있는 코카콜라 캔이라도 그 손에 들 것이기 때문이다.
시는 존재를 향한 응답이다. 이런 말도 근사하다.
더 근사한 것은, 그의 언어능력과 아무 상관없이, 존재를 알아본 이가 자아내는 모든 표현은 시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는 존재를 알아본 이가 더욱더 존재에 다가가고자 내딛는 발걸음이다. 그는 단지 존재의 감상자가 아니라, 존재를 향해 적극적으로 몸짓하는 표현자다. 그의 몸짓을 통해 존재는 더욱 개방되고, 그렇게 그는 이제 존재의 동반자다. 존재가 스스로 드러나는 그 일을 도우며 함께 참여하고 있는 공동의 작업자다.
이런 것을 창조라고 부를 것이다.
시 또한 단지 창조된 것이 아니라, 이제 창조하려는 것이다. 시를 통해 우리는 존재의 창조의 일에 동참한다. 이것은 언어가 존재를 창조한다는 식의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가상의 실체를 만들어내는 언어적 주술효과의 착시다.
창조라는 것은 펼쳐지는 것이다. 어떤 잠재적인 것이 그 자신을 펼쳐내 현실적인 것으로 실현되면 그것이 창조다.
다시 말하면, 창조란 곧 가능성의 실현. 그 자신의 그 자신됨.
자신이 가장 자신으로 펼쳐지는 이 일을 우리는 또 무엇이라 부르는가?
자유다. 그게 바로 자유다.
우리가 시를 통해 존재의 창조의 일에 동참한다는 말의 의미는, 우리가 존재의 자유를 위한 일꾼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일꾼이 하는 일은 그 자신을 가장 먼저 자유롭게 하는 일이다. 자신의 존재가 자유로울 때야 그것은 자유인 까닭이다. 자신은 가장 속박된 상황에 있으면서 다른 이들을 자유롭게 하는 일에 힘쓴다고 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한 이들 중에는 어쩌면 타인들의 해방을 위해 자신은 시를 쓴다고 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 결과 전해지는 것은 결코 자유가 아니다. 자유는 남에게서 주어지는 방식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스스로 자유롭지 못한 이를 통해 촉발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이제 시가 아니라 주술이다.
주술은 무엇일까?
시가 '펼치는 것'이라면, 주술은 '묶는 것'이다.
주술 또한 언어의 용법이다. 주술은 존재하는 것들을 자신에게 속박시키기 위해 쓰는 언어다.
정체성은 대표적인 주술어다. 그것은 자신이라고 하는 것을 언어로 묶는다. 그럼으로써 자신을 자신에게 속박하고자 한다.
그러면 이제 자신이라는 것은 영구히 '소유된 것'이 된 것만 같다.
소유, 이것이 바로 주술의 목적이다. 존재를 소유하기 위해 쓰이는 언어를 우리는 주술이라고 부를 수 있다.
존재의 자유를 위해 일하는 언어를 시라고 한다면, 존재의 소유를 위해 일하는 언어가 주술인 것이다.
자유와 소유, 이것은 아주 고전적이면서도 영원한 대조다.
에리히 프롬은 이를 '존재양식'과 '소유양식'이라는 이름으로 묘사하곤 했으며, 마르틴 부버는 '나-너' 관계와 '나-그것' 관계를 말했다. 하이데거라면 '본래적인 것'과 '비본래적인 것'으로 구분하기도 할 것이며, 실존주의 심리학자인 어네스토 스피넬리는 이것을 'worlding'과 'worldview'라는 용어들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원론의 구도 역시도 무수하게 표현되어 왔는데, 이 또한 아름다움의 기획이었을 것이다.
인간사가 언어에 기초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한, 인간의 생활은 언제나 이 이원론 위에 있을 수밖에 없기에, 그에 대한 표현들도 다채로워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와 주술'이라는 표현 또한 그러한 것이다.
이 안에는 인간사가 다 담겨 있다. 언어로 살아가는 일이 불가피한 인간은 언제나 시적이거나 주술적이다. 그러나 더 임밀히는 이것은 인간이 처한 역설적 상황을 묘사한다. 자유롭고 싶어하면서도 소유되고 싶어하고, 소유하고 싶어하면서 그 소유한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하는 바로 그 모습을.
그러니 특정한 어떤 표현법이 시가 되는 것이거나 주술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당신을 사랑합니다."와 같은 표현은 어떤 때는 시로 쓰이고, 어떤 때는 주술로 쓰인다. 존재를 향한 의도가 그 용법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주술 또한 존재를 향한 응답이라고.
어떤 것을 자신에게로 묶어서 그것을 소유하려는 의도를 내고 있는 이는, 지금 그것이 무엇인가 아름답고 좋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존재가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가 존재를 소유하고자 하는 주술을 집행한다. 그러니 주술 역시도 존재를 향한 하나의 응답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가 모르는 것은 단 하나다. 언어로 묶어 자신의 곁에 소유하게 된 그것은, 자신이 좋은 것으로 보았던 그것이 더는 아니게 된다는 사실을 그는 모를 뿐이다.
자신에게로 묶은 것은 자신과 똑같은 것이 된다.
그는 어쩌면 자신을 넘어선 어떤 것을 보고는 그 특성에 반해서 가지려고 했을텐데, 그 소유의 결과 그는 그것을 자신과 동일한 것으로, 그러니 동일하게 지루하고 답답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게 된 셈이다.
이것은 너무나 실증적이지 않은가. 우리는 소유하게 된 것에 너무도 빨리 질린다. 그것을 소유하고 싶다고 경험할 때는 분명 그것만 있으면 자신의 인생이 가장 충만하게 다 완성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떤 결여의 순간은 무척이나 빠르게 찾아온다. 그것을 소유했는데도 자신이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것 같은 그 현실은 우리에게 결여의 크기만을 한층 더 크게 경험시켜줄 뿐이다.
주술로만 살아가는 세상, 주술사회에서는 이 공허함이 지독한 냄새로 도처에 퍼져있다.
주술사회의 다른 이름은 '정체성사회'다. 자신을 가장 먼저 자신에게 묶은 이만이 다른 것도 묶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체성사회에서는 그것이 자신이라고 규정한 그 언어의 내용을 수호하며, 그에 대한 투쟁도 불사한다. 거기에는 수성전의 쾌락이 있을 것이다.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자신의 힘으로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는 그 도취의 쾌감. 그러나 뒤집어 말하면, 이러한 쾌락이 있을 때 말고는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것은 영 재미없는 것이라는 방증이다. 자기도 자기의 정체성에 질려있다. 타인이랑 싸울 때 말고는 그 정체성이라는 것을 실은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우리는 매우 자주 투쟁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중요하게 지켜내는 일이 자유를 획득하는 길이라고 오해하곤 한다. 심지어 자유란 원래 정체성의 투쟁으로 쟁취하는 것이라고까지 생각하기도 한다. 엄연한 착각이다.
물론 투쟁을 통해 어떤 자유로운 감각과 비슷한 것이 경험되는 것은 사실이다. 서로 타격을 주고받으며 자신의 정체성이 일정부분 파괴됨으로써 가벼움을 경험하게 되는 까닭이다. 그러니 정체성의 수호로 자유를 얻는다는 말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며, 오히려 그 반대를 지지해주는 결과다.
정체성은 자신에게 가장 가깝게 또 많이 소유된 것이며, 그렇기에 가장 무거운 것이다. 소유하려고만 살아가는 이들은 소유의 무게로 무거워진다. 그러나 스스로는 그 짐들을 버릴 수 없다. 그러니 소유의 주체는 또 다른 소유의 주체와 투쟁을 벌이는 것이다. 그렇게 상대로 하여금 자신의 짐이 덜어져서 가벼워지는 효과를 서로에게 기대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제 호적수였던 상대에 대한 다소간의 감사를 통해 이렇게 말하곤 한다. 자신에게 반대하는 상대와 겨룬 덕분에, 자신의 정체성이 더욱 보완되고 통합되어 확장될 수 있었다고.
상대로 인해 잃어진 그 일정부분의 몫을 상대의 특성을 일부 가져와 바로 대체해버린 것이다. 그러니 총량은 그대로다. 아니 어쩌면 더 무거워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새로운 요소가 유입된 것 같기에, 당분간은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잠시간은 휴가를 떠나듯이 약간의 빈 곳을 만들어 가벼움도 경험했고, 빈 곳 없이 다시 곳간을 가득 채우는 일도 성공이다. 주술회전의 성공.
이러한 일이 몇 번 반복되다보면, 결국 자신이 처음에 수호한다고 하던 그 정체성의 모습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저것 서로 상이한 부분적 구성요소들을 끼워다붙인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같은 것만 남는다. 설령 그 형상이 원래의 것과 유사해보이더라도, 그것은 동일한 속성의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대체 지켜야 한다는 그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테세우스의 배'와 아주 같지는 않지만 유사한 문제다. 우리는 결국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주장하려면 그것의 속성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기억을 말해야 한다. 자신이 어떻게 살아온 사람인지 그 삶을 기억하고 있기에,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이고, 곧 지켜져야 할 것이라고.
그렇다면 정체성이라는 이름으로 지켜야 한다고 말한 그것의 실체는 기억이라는 뜻이다.
뇌가 다 기억할 수 없으니, 이제 이 의도는 우리에게 매체의 발전을 가져다주었다. 성공적인 기억들을 더 많이 저장함에 따라 우리는 성공적인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이른바, 과거의 자신이 미래의 자신을 만들어줄 것이라고 신앙된 것이다.
기억은 '소유된 삶'이다. 자신이 삶을 더 많이 소유하면 삶에 대한 어떤 성공적인 역량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 믿음은 그야말로 주술적이다. 그러면서 지극히 보편적이다. 이 사회는 바로 이러한 주술하에 성립되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돈을 많이 소유하면 돈에 대한 역량이 생기고, 지식을 많이 소유하면 지식에 대한 역량이 생기며, 인간관계를 많이 소유하면 인간관계에 대한 역량이 생긴다. 이것들은 사회적으로 당연한 믿음이다. 사회에서는 누구나 이 믿음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문제는 이 당연성에 대한 모순적 태도다.
돈을 많이 소유하면 돈에 대한 역량이 생긴다는 믿음을 당연하게 소비하고 있으면서도, 돈을 많이 소유한 이를 우리는 곧잘 조롱하고 싶어한다. 또 지식을 많이 소유하면 지식에 대한 역량이 생긴다는 믿음을 당연하게 소비하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AI보다 우리가 위에 있다고 생각하며, 인간관계를 많이 소유하면 인간관계에 대한 역량이 생긴다는 믿음을 당연하게 소비하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거미줄처럼 꽉 들어찬 인간관계 앞에서 자살한다.
이러한 모순은 왜 생기는가에 대한 답은 언제나 분명할 것이다.
언어가 고도로 발달한 그 끝은 원래 모순이기 때문이다.
모순은 언어를 붕괴시킨다. 언어가 더는 언어일 수 없게 만든다. 어쩌면 인간은 애초에 언어를 이러한 자기붕괴가 내재되는 방식으로 발명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인간이 언젠가는 반드시 시인이었기 때문에.
이처럼 언어의 끝이 언어의 붕괴이듯이, 소유의 끝에서 인간이 반드시 꿈꾸게 되는 것은 자유다.
그러니 소유를 관장하는 주술이 모든 것의 당연한 원리가 되어있는 세상에서는, 인간은 그 당연함을 깨기 위해 스스로 청개구리 같은 행동을 해버리는 것이다. 세상을 지배하는 '소유된 삶'에 대해, '자유된 삶'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증거하는 셈이다.
이러한 인간은 기억에 근거해 자신을 세우는 인간이 아니다. 그는 존재에 근거해 있다. 과거의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생생한 것으로 그 자신을 세운다.
주술이 가장 지배하는 속에서, 그는 시로 피어난 것이다.
그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리라. 절실하게도.
시와 주술 또한 역설의 관계성으로 드러나는 것이라면, 주술이 가장 번성하고자 하는 의도는, 시가 가장 번성하고자 하는 그 의도를 동시에 키운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존재는 주술이 하는 일을 통해서도, 결국 그 자신을 시가 되게 할 참이다.
주술은 자신이 가장 존재를 가졌다고 말하고, 시는 자신이 가장 존재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래서 존재는 시가 마음에 든다.
존재가 가장 아닌 것이고, 그렇게 존재가 가장 없는 곳이라, 그 안에 이제 존재가 자유로이 들어갈 수 있기에.
이것은 시가 존재를 영접하는 그 위대한 자기비움의 방식. 하이데거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고 말했던 그 이유.
분명하게도, 존재는 결국 시가 될 것이다.
시만큼 자기 자신이기를 다 포기하고 내주어 존재를 사랑하는 언어가 없었으므로.
존재가 결국 시가 되어, 이제 시는 존재로 채워진 자기 자신을 존재라고 부를 수밖에 없게 된다. 시도 결국 존재가 된 것이다. 기적처럼.
그러나 이 기적은 대체로 한참 뒤로 미루어지는데, 시는 조금 더 존재의 아름다움을 다채로운 곡조로 노래하고 싶기 때문이다. 일치하지 않고 빗겨가면서.
그래서 존재도 잠시 기다린다. 신부대기실의 문에 기대서 미소짓는다.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신부의 콧노래가 그를 영원히 기쁘게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