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마음이 자라서 된 게 나야"
돌아보면 신기하다.
엄마들이 저렇게 살면 안된다고 하던 그 모습이 지금 내가 되어 있다.
원래는 일찍 결혼도 하고, 경제적으로도 안정되고,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도 있는 삶을, 엄마들이 좋아할 그러한 삶을 살고 싶었는데 어쩌다보니 이렇게 되었다.
일단 돈이 없다. 내가 돈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집과 차와 적금, 그리고 벽장 안의 금두꺼비 같은 것을 다 빼놓고 가용할 여분의 재산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 다 없다는 얘기다. 지금 내가 죽는다면 다 털어서 한 100만 원 조금 안되게 남겨질까? 화장비용은 될 것 같아 다행일지도.
돈이 없다는 말은 돈을 벌 능력이 없다는 말을 함축할 것이다. 그 말대로다. 나는 돈을 어떻게 창출해내는지 정말 모른다. 마케팅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나에게 가장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내가 옷 입는 것을 좋아하는 일과는 확실히 다른 것 같다. 옷은 차라리 나에게 글이나 강의와 비슷하다. 끌리고 반한 것을 표현해보는 즐거움이다. 새로운 것을 배워보는 기쁨이다. 세상에는 바로 그런 일을 하면 그 자체가 매력적인 마케팅이 되는 이들도 있는 것 같으나, 내가 하면 어떤 경계심을 먼저 자극시키는 듯하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생겨나는 어떤 기운이 사람들이 근거해있는 모종의 안정성을 위협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뭔가를 할 능력은 어느 정도 가졌는지 모른다. 이를테면 쓸데없는 글들을 숨쉬듯이는 쓸 수 있다. 그런 것이라도 엮어 책이라도 많이 내면 되지 않냐고 할 수도 있지만, 책을 만들기 위해 다시 그 글들을 정리하고 편집해야 하는 작업들에 도저히 의욕이 나지 않는다. 아니 관심이 잘 가지 않는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한 이틀 전에 쓴 글도 실은 무슨 내용을 썼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는 분명 울면서 쓴 것 같은데 지금은 까마득하다. 나에게는 이미 완결된 것이라서다. 잘 타고 건너온 사다리와도 같다. 용도가 이미 끝났다.
내가 글을 쓰는 그 과정이란 이렇다. 일상에서 어떤 것이 관심을 자극할 때, 또는 갑자기 어떤 이미지가 확 떠오를 때, 나는 지금 내가 그것에 반했음을 안다. 그리고 반한 그것에 다가가기 위해 어떻게든 낱말을 엮어간다. 흡사 자문자답을 하듯이 풀어간다. 내 가슴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대답은 지워가며, 계속해서 문답을 시도한다. 계속 낱말들 속에서 헤맬 때는 글 자체를 다 날리고 다시 시작한다. 더 정직한 질문으로 탐구를 반복한다. 그럼으로써 마침내는 그것이 드러내던 어떤 핵심과 접촉할 수 있게 될 때, 나는 감동받는다. 그렇게 배움에 성공한다.
그러니까 글이라는 것은 내가 내 자신을 가르치는 매개 같은 것이다. 어떤 정보전달을 위해 아는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몰랐던 것에 대해 쓰면서 실시간으로 내 자신이 배워간다. 나에게는 강의도 똑같다. 10년 넘게 강의를 해오면서 한 번도 커리큘럼대로 진행해본 적이 없다. 그 시간에 가장 떠올라있는 주제를 교재의 어떤 지점과 연관시켜 즉흥적으로 탐구해나간다. 그 과정이 강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 이 순간 다 살고 죽자, 의 태도에 무한히 가깝다.
모르거나 막히는 것이 있으면 다음 시간으로 넘기지 않고 지금 이 시간에 다 완결시키고 싶다.
내 글들의 속성은 분명 이러하다. 하나의 글 내에서 다 보여주고 다 완결시킨다. 연작글이라 하더라도 하나하나가 다 독립적인 구조를 가지게 된다. 그래서 실은 연작글이 쓰기 힘들다. 첫 몇 글에서 이미 다 말한 것 같아 동력이 떨어진다. 이러한 상황은 점점 더 가속화되는 듯 싶다.
스토리, 그래 어떤 스토리를 구성하는 일이 나에게는 무척 어려운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흡입시킬 그 구조가 부재하다.
스토리는 내일을 기약하며 계속 이어가자는 것이다. 그러한 약속이다.
나는 오늘 여기서 다 완결짓자고 산다. 내일이라는 것이 있다면, 내일의 것은 내일 완결시켜야 할 새로운 것이다. 이것은 약속이 아니다. 어떤 것이 일어날지 모르겠다는 그 기대와 설렘에 가깝다. 어떻든 불확실한 것이다.
불확실함, 이 표현이 맞을 것이다.
나는 분명 어떤 불확실성의 감각을 자극하고 있는지 모른다.
불안이라고 부르는 그것을.
말한 것처럼 가진 것도 없고, 무엇인가 안정적인 스토리 구조를 만들어낼 역량도 없으며, 그때그때 즉흥으로 움직이는 경향이 강하다. 게다가 그러한 방식으로 한번 '꽂힌' 것은 자원을 다 써서라도 반드시 완결지으려고 한다.
엄마들이 저렇게 살면 안된다고 하던 그 불안해보이는 삶을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떠올려보면, 어떤 구조적 안정성에 대한 것들에 나는 늘 의욕이 없고 동력이 생기지 않았다. 정규직이 되어본 적이 없고, 그게 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을 갖추는 일에도 열성적이지 않았다. 이를테면, 대학의 정규직 노선이나 학회의 전문가자격증을 취득하는 일 같은 것. 그뿐만이 아니라 내가 하는 어떤 사설강의 등에 대해서도 나는 늘 일정한 구조를 스스로 깨곤 했다. 방송에 나가서도 내가 어떤 통속적 전문가 같은 연극을 해야 하는 상황이면 판을 엉망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 성공적인 조건들로부터 스스로를 도태시키고 나니, 거주하는 집의 월세를 내야 하는 날이 며칠 안남았는데도 수중에 돈이 하나도 없다거나 하는 현실을 무척이나 많이 경험해왔다. 안정적인 소득으로 잡히는 것이 없어 대출도 안나오고, 건강보험료나 전화요금이 체납될 때도 많았으며, 심지어 가스는 여러 번 끊겨봤다.
그런데도 돌아보면 신기한 것은 어떻게든 그때그때를 잘 넘어오며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것이다.
가게도 하나 운영하고 있다. 여차저차 인건비와 월세를 내는 선에서 지속되고 있는 일도 신기하다. 아니, 가게 자체가 생길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먼저 신기하다.
너무나 감사한 분들의 도움으로 이 모든 것은 이루어졌다. 그 힘으로 지속되어 나간다.
불안, 내가 주되게 알리고 있는 것이 불안이라는 것이라면, 이것은 불안도 이 세상에 기꺼이 존재해도 된다는 어떤 말없는 지지와 허락이었을까?
가끔 나는 내가 허클베리 핀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런 것에 분명 매력을 느꼈다. 불안한 것들. 외로워서 자유로워보이는 것들에.
그건 내가 고아로 살아온 경험과도 관련있을 것이다. 관련있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그 반대의 방향성도 함께 연루된다. 허클베리 핀이, 운이 좋아서, 자라나면 그의 마을 같은 것을 만들고 싶었을지 모른다. 그것은 함께하는 꿈. 외로워서 자유로워보이는 것들이, 외로워서 자유롭게 함께 살고 있는 곳에 대한.
유기묘들을 길에서 데리고 오다보니 7마리가 되었다. 10년 넘게 함께 뒹굴며 자고 있는 이곳이 그 마을이다. 고양이들과 함께하면서 결혼에 대한 생각이 없어졌다. 나는 내가 죽을 때 내 임종을 지켜봐줄 누군가보다는, 고양이들이 고양이별로 향하는 로켓에 타는 모습을 따듯한 미소로 전송할 수 있는 나를 원했던 것이다.
고양이들과 내가 사는 집은 가상의 숲이다. 통짜로 된 공간을 얻어, 높은 조화나무들과 목재 이층침대들을 많이 배치해 흡사 숲속의 아지트처럼 꾸몄다. 외로워서 자유로운 것들이 살다 갈 곳. 나는 내가 죽기에 좋은 곳을 만든 것이다. 그렇기에 정말로 마음놓고 살 만한 곳을.
고양이들에게도 그랬으면 좋겠다.
나는 외로워서 자유로운 것들에게 무엇이든 해주고 싶다. 다 주고 싶다. 내 자신에게 해주는 일일 것이다.
나를 도와주신 많은 분들도, 실은 그들 자신 또한 외로워서 자유로운 이들이기에, 그렇게 다 해주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정말로 사랑을 많이 받고 있다고 매우 자주 느끼곤 한다.
그러니 나는 신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은 실은 외로워서 자유로운 것들을 아주 많이 사랑한다는 사실을.
그렇게 인간은 불안이라고 하는 그 자신의 운명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자기 자신에게 이해시키고자 하는 어떤 지성적 언술로 표현하면, 그것은 이제 실존주의라고 불린다. 그래서 나는 실존주의를 좋아하는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삶을 예쁘게 말해주기 때문이다.
실존주의는 결국 어떻게 '나'로 되어가는가, 또는 '나'로 살아가는가에 대한 것이다.
돌아보면 가장 신기한 것은 그것이다.
나는 내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은 단 하나도 되지 못했다. 헌책방주인도, 음양사도, 마스터 키튼이나 인디아나 존스 같은 고고학자도 되지 못했다.
나는 그저 내가 되었다.
아주 외로웠고 그래서 자유롭던 그 마음이 자라나서 지금 내가 된 것이다.
외로워서 자유로운 것에 대한 그 사랑의 이름이.
외로워서 자유로운 것이 가장 만나고 싶어했던 바로 그것이.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나는 나에 대한 응답이었다고.
아주 오랫동안 기다리던 그 햇살.
나는 나를 향해 따듯하게 지어진 그 미소였다.
이것이 실존주의의 '어떻게'일 것이다. 자신을 이해해가는 일. 아직 말이 되지 못한, 또는 말이 될 수 없던 자신의 마음이 햇볕을 쬐게 하는 일. 외로워서 자유로운 그 모든 것이 이제 따듯한 볕 아래 자라나 내가 된다. 아니, 그 햇볕이 바로 나였음을 깨닫는다.
나는 나에 대한 영원한 관심.
외로워서 자유로운 그 인간을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는, 영원의 햇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