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듯한 혼돈"
누구에게나 있던 경험들. 누구나 좋아했던 시간들.
나에게도 그러했을 것이다.
중학교 때 청소당번의 일을 마치고 교실에 혼자 있던 시간을 좋아했다.
저녁으로 향하던 햇살이 창가로 들어오던 시간을.
학교 옆에는 산이 있었고, 나뭇잎들이 흔들렸다.
세계가 다 따듯한 주황빛으로 물들어가고, 길어지는 그림자의 교실에 홀로 앉아있을 때, 나는 외롭다고 느낀 적이 없다.
완벽하다고 느꼈다.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완벽하고 아름답다고.
그러나 그것은 혼자라는 이름의 어떤 고립의 시간이 아니었다.
저 멀리 운동장에서 축구하는 아이들의 소리, 계단에 울리는 선생님의 구두소리, 화장실의 물소리, 그리고 풀벌레들과 나무의 소리.
그런 것들이 함께하고 있어 나는 더 아름답게 혼자일 수 있었던 것이다. 함께하고 있는 것들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로 내 눈에 비쳤던 것이다.
그것은 저녁의 햇살 속에 이루어진 마법.
혼자여서 나는 세계와 하나였다.
그런 것들을 미치도록 완벽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누구에게나 있던 경험들. 누구나 좋아했던 시간들.
그리고 자신이 그것을 정말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자각하는 만큼, 그것은 반드시 내 자신을 변화시킨다.
이런 것이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주관성이다. 경험의 대상은 객관적일 수 있겠지만, 경험 자체는 객관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한 주관적 깊이 속에 있다. 같은 것을 경험하더라도 누군가는 더 깊이 경험하며, 그 깊이가 그 자신을 바꾼다.
주관성으로 깊이 경험한다는 것은, 그저 자신에게 사랑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자각한다는 것. 자신이 그 경험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자신에게 알려주는 그 일.
그러면 사랑이 그 자신을 되게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그 모습으로.
내가 정말로 그 교실에서 좋아했던 것은 혼돈이었다.
언어로 정돈될 수 없는 혼돈.
그러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가장 아름답게 정돈해주고 있던, 그 따듯한 혼돈.
혼자인 것이 함께인 것이었고, 어느 것과 반대된다고 생각한 것이 그 어느 것 자체였다. 나는 그때 세상의 어떤 핵심적 구조를 엿본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이렇게 말로 형용하고 있는 그 이상이었다. 언어화될 수 있는 구조도 실은 아니다.
어떤 영원한 진실이라고 해야 할까.
구차한 말로 혼돈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뿐이다.
모든 것을 다 물들이면서도, 동시에 하나하나가 그 자신의 모습으로 가장 온전하게 드러나게 하던 그 주황색의 빛은, 절대적 시간이었으며, 실존주의에서 "신은 주관성 속에 있다."라고 말할 때의 그 신적인 것이었고, 아, 그것은 분명 사랑이었으리라. 그 따듯한 혼돈은.
내가 했던 경험은 자연주의적 신비체험이라고 불리는 신비체험의 한 종류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것은 내 최초의 신비체험도 아니었고, 마지막의 것도 아니었지만, 분명하게 첫키스 같은 것이었다. 방과 후의 교실에서 이루어진 첫키스. 따듯한 혼돈의 품에 안겨 나누던 입맞춤의 마법이었다. 나는 순식간에 그 마법에 빠졌고, 그런 내가 결국 무엇이 되었겠는가.
이상한 사람이 되었다.
언어로 이미 그 패턴이 설정된 알고리즘 같은 대화를 하는 일이 매우 어려워졌으며, 관계는 더욱 통속적인 연극처럼만 경험되었고, 그렇게 살라고 종용되고 있는 것 같은 내 자신의 모습이 마치 자동응답로봇처럼 생각되어 무척이나 자괴감이 느껴졌다. 그러한 일들에 의욕이 생기지 않으니 점점 더 사회적 상황에 무능력해졌으며, 나는 결국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만 것이다.
특별하고 멋있다는 의미에서의 이상함이 아니라, 어떤 부적격 및 비사회적인 것을 지시하는 의미로서의 그 이상한 것이.
나는 내가 너무 이상한 사람 같아 오랜 시간 정말 힘들었다.
남들은 쉽게 다 하는 사회적인 행동양식들이 너무 낯설고 어려워서 늘 긴장되고 숨이 막혔다. 그런 내 모습이 늘 내 자신을 비난하는 이유가 되곤 했다.
내가 다시 기억해내기 전까지는 인생은 지옥이었다.
나는 혼돈을 너무 사랑했으며, 그래서 혼돈이 전한 입맞춤의 축복으로 내가 바로 혼돈이 된 것이라는 그 사실을 기억해내기 전까지는.
나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내가 사랑한 그것이었다.
그 사랑이 나를 회복시켰다.
그리고 이제 그 사랑이 나를 더욱더 나답게 빚어갔다. 결국에는 나를 깨닫도록 이끌었다.
이후의 체험들은 이전의 체험들을 뒤엎어 더 큰 혼돈으로 몰아갔으나, 그것은 오히려 정돈이었다. 아무 모순도 없었으며, 다만 깊이를 더해가는 일들일 뿐이었다. 정말 얼마나 좋아하는지의 그 '얼마나'의 증진. 내가 그렇게 더 많이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감으로써 나는 나를 향해 깊어졌다.
나는 정말로 내 자신을 꽤나 좋아하게 된 것이다.
사실 엄청 좋다.
아무랑도 안바꿀 것이다. 나는 나로 태어난 일이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
누구에게나 있던 경험들. 누구나 좋아했던 시간들.
이 세상에 내 자신으로 태어나 있다는 바로 그 일이 누구에게나 그렇지 않을 것인가?
그러나 그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자신이 진실하게 자각할 때만이, 그 경험은 깊이로 접근된다. 주관성의 신비로, 자신을 향한 그 깊은 사랑으로.
신비체험의 특정한 소재는 따로 있지 않다. 모든 경험이 다 신비체험의 소재다. 아무리 말이 안되는 경험이라 하더라도, 내가 실은 그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이해하면 그 경험은 신비체험이 된다. 내가 좋아하는 그것과 하나가 되는 경험, 내가 좋아하는 것이 곧 내 자신으로 알려지는 일이 일어난다.
그리고 처음부터 그것이 내 자신이었다.
나는 평생 나의 깊이만을 경험해가는 것이며, 그것만이 신비다.
나는 이제 이렇게 애기할 수 있다.
나는 평생 나를 향한 사랑만을 배워온 것이며, 계속 영원히 배우고 싶다고.
그림자가 길어진 황혼의 교실에 스며들던 그 빛은 그러한 의미였을 것이다.
삶은 내 자신을 좋아할 수 있는 시간이었으며, 그것은 따듯한 혼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