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라는 말도 생소할 수 있는데 신실존주의라니. 그러나 생소하기에 오히려 시도되어야 하는 것이다. 낡은 문법들에 익숙해지기 전에 아예 교과서를 바꿔버리는 편이 낫다.
신실존주의라는 표현도 여기저기서 이미 꽤 발화된 적이 있는 표현이다. 마르쿠스 가브리엘 같은 이는 neo-existentialism이라는 표현으로 신실존주의를 말하고, 레비나스의 실천적 적용으로서 post-existentialism을 말하는 이도 있으며, meta나 hyper 같은 접두어들도 가끔 붙는다.
이러한 운동은 개인이 무의미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구성해나간다고 하는 어떤 폐쇄적 자구책으로서의 '정신적 소확행' 같은 실존주의에 대한 짙은 선입견과 오해로부터 실존주의를 방어하기 위해 시도되곤 한다. 그것은 동시에 실존주의가 여전히 가능할 수 있는 현대적 영토를 모색하기 위한 일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러한 운동의 결과물들은 오늘날 너무나도 식상하게 널려 있는 탈근대적인 것들과 이제 그다지 큰 변별을 보이지 않게 되는 경우가 많다. 실존주의가 그런 것이 되기를 꿈꾼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탈근대적인 것이 획일적인 패션처럼 지배적으로 작동하게 된 세상에서, 탈근대적인 것을 비판적으로 다루려다보니 필연적으로 그것과 닮아가게 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
그래서 나오는 것들이 결국 또 다양성이고, 다원주의이며, 윤리이고, 그것들을 가능하게 해줄 정치 내지 건강한 다(多)의 공동체성을 구성하는 관계라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것이 실존주의의 종말이다.
사르트르와 카뮈 같은 프랑스사회주의자들이 실존주의를 몰락하게 만든 방식이 이 방식이다.
다양성 얘기 나오고, 관계나 공동체 얘기 나오고 하면 실존주의는 이미 거기에서 끝이다. 다 좋은 얘기들일 수 있지만 더는 그것이 실존주의라고 불려야 할 이유는 없다. 실존주의의 반대편에 있는 것들을 열심히 상대하는 동안 실존주의는 자신의 핵심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절대니 사실이니 진리니 하는 말들을 오늘날 우리는 쓰기에 자못 부담스러워한다. 그런 말을 쓰는 이는 어떤 폭력이나 독재의 주체처럼 보일 것 같다는, 아니면 최소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두는 냉담한 개인주의자처럼 보일 것 같다는 선입견이 작동하는 것이다. 또 이것은 잠정적인 비판의 목소리다.
이러한 맥락에서 실존주의는 다각도로 공격을 받을 수 있다. 정직한 계급투쟁의 배신자이고, 공동체주의의 검은 양이며, 모든 것이 다 환상이기에 누구나 자기의 환상을 누릴 수 있는 상대주의의 열린 현실 속에서 자기만 진리라고 주장하는 어떤 무뢰배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기 일쑤다.
아니 왜 아닌가?
그렇다고 하자.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은 없기에 상황과 입장에 따라 생성된 각자의 진리가 있을 뿐이라는 상대주의적 진리관을 실존주의는 놀랍도록 혐오한다. 실존주의가 기존의 절대적 진리로 불리던 하나의 꿈을 무너뜨리려는 이유는, 꿈에서 깨서 사실을 접하기 위함이지, 모든 꿈은 진리라고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계급투쟁? 공동체주의? 그런 것도 하나의 꿈이 아닌가? 또 각자의 꿈의 수평적인 연대라고 말한다면, 꿈꾸고 있다는 사실이 달라지는가?
단순하게 말해야 한다.
실존주의는 차라리 "정말 이렇게 쉽게 말하는 게 맞아?"라는 그 단순성으로 인해 욕을 먹으면 먹었지, 애초 담론게임으로 들어가면 너무나 무능력해지며 특유의 그 생명력을 소실하고 마는 것이 실존주의다.
실존주의는 꿈에서 깨서 사실을 보려는 전통이다.
여기에서 사실이라는 것은 존재의 절대적 사실이며, 본다는 것은 접촉한다는 것을 동시에 의미한다. 체험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실존주의는 단지 진리의 묘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체험하고자 하는 전통이다. 그것도 절대성이라고 불릴 만한 그 어떤 존재의 진리성을 직접.
그러니 실존주의는 태생적으로 언어를 조직하는 일에 약하다. 잘 묘사도 할 수 없을 뿐더러, 오히려 언어로 진리를 잘 묘사할 수 있다는 것은 실존주의의 입장에선 매우 의심스러운 것이다. 언어적 기술로는 실존주의는 모순으로 가득차 있다. 여기에서는 이 얘기, 저기에서는 저 얘기를 한다. 어떤 통합적 구조라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며, 그게 바로 실존주의가 갖는 핵심적 태도다.
그렇다고 여기에서는 이 얘기, 저기에서는 저 얘기를 할 때 어떤 언어유희의 의도를 갖고 그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진리라는 것은 없고 다 언어적 해석일 뿐이니까, 자유롭게 그 언어를 즐길 뿐이라는 프랑스 예술병적인 모습은 실존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독일적이라는 의미도 아니다.)
언어로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뭔가를 말하거나 사유하려면 언어를 쓸 수밖에 없다. 실존주의는 불가피한 이 모순 속에서 말한다. 그러니 엄밀할 수가 없으며, 철학이 엄밀하게 언어를 쓰는 작업이라고 한다면 실존주의는 심지어 철학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무엇인가?
차라리 실존주의의 작업방식은 다분히 심리학적이다.
실존주의는 심리학이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선언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회과학으로서의 심리학이라기보다는, 올더스 헉슬리의 저서 이름을 살짝 변주해서 그것은 '영원의 심리학'에 가까운 것이다.
종교심리학, 이렇게 쓰면 조금 더 의례적이고 형식적이지만, 설명하기는 쉽다.
실존주의의 선구자인 키르케고르에게 있어서 실존이라는 것은 분명 종교심리학적 현상이었다. 실존주의는 그 성립부터 종교성을 향한 탐구를 핵심적으로 내포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아무리 오늘날이 정치철학의 시대이지만, 그래서 실존주의도 시대에 적응하거나 또는 시대에 반동하는 형태로 변모할 수 있다지만, 정치철학적 실천 및 적용을 위해 기능하게 된 실존주의라면 그것은 최저의 타락방식이다. 거의 실존주의에 대한 모욕에 가깝다. 종교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으로 전락할 때 그것이 가장 심대한 전락인 것과 같다.
절대성을 향한 지향이 상대성에 대한 추구로 귀결되는 것은 변질이 아니라 몰락이다. 세상에는 원래 절대적인 것이 없으니, 상대적인 것들의 다양성을 서로 존중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말은 기만이다. 그가 어떤 종교 및 정신적 전통에 있든 간에, 종교체험자들은 이 말에 아무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실존주의의 기획이 선(禪)과 유사하다고 종종 말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두 전통이 공통적으로, 자기가 자기를 구성하고 실현해서 자력구원을 이루는 전통이라는 그 착각된 의미에서가 결코 아니다. 애초에 실존주의도 선도 그런 중2병의 자위활동이 아니며, 자력구원의 체계가 아니다.
이것은 자기가 자기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실존적 삶이라는 사르트르 식의 기획이 실존주의의 보편적 내용인 것처럼 오해되어서 생겨난 착각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실존주의는 실은 타력구원이니, 혹은 대화를 통한 상호관계적 구원이니 등의 억지의 언술을 더해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또 핵심을 잃을 위기에 봉착한다.
차라리 실존주의는 신비주의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좋다.
그것은 절대성을 직접 체험하고자 하는 존재의 전통이라고.
지금 이러한 질감으로 실존주의에 대해 말해오며, 또 실존주의가 사상사 속에서는 한 번 멸종된 전통이나 다시 그 본래의 면목을 찾아 더 왕성하게 살아날 것이라고 새로운 실존주의의 출현을 예고했던 이가 있다.
콜린 윌슨에게 실존주의는 분명 '영원의 전통'이었으며, 그가 주창한 '신실존주의(new existentialism)'는 상기한 의의를 담고 있었다.
우리가 '신실존주의'를 말하고자 한다면 바로 이 방식을 택할 수 있다.
키르케고르는 신비주의자인가? 마르셀은 신비주의자인가? 하이데거는 신비주의자인가? 또 베르쟈예프도 신비주의자인가? 최초의 실존주의자로부터 마지막 실존주의자에 이르기까지, 이들에게 걸려 있는 혐의는 짙다. 그렇다면 왜 이것을 혐의로만 두고 있는가.
그렇다고 하자.
그들은 다 신비주의자들이었고, 이것은 하나의 계보라고.
그리하여 더는 이 신비주의자들의 애먼 소리를 철학에서 다루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 나오게 된다면, 그러자고 하자.
이로써 신실존주의는 실존주의를 철학이라는 언어적 형식 밖으로 나오게 하려는 그 시도가 될 것이다. 선(禪)이 어떤 철학이 아니듯이 실존주의 또한 더는 어떤 철학이 아니다. 그렇다고 종교도 아니다. 영성이라는 표현은 가장 비선호된다. 존재의 절대성을 향하는 종교심리학적 탐구라고 길게 말하고, '존재의 심리학'이라고 줄여 쓸 수도 있겠지만 이 또한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우리는 그 모든 것이 아닌 것으로서 '신실존주의'를 요청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특이한 것을 좋아하는 호사가적인 언어유희에 대한 열망으로 요청하는 것이 아니다.
이 허구가 지배하는 시대, 꿈이 사실보다 더 권위있는 진리성의 소재로 평가되는 시대의 필요가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무수한 언어게임들, 그 허구의 쓰나미에 휩쓸리다보니, 자신이 누구인지 도저히 정신을 못차리게 된 이 인간의 운명이 신실존주의를 요청한 것이다.
실존주의의 핵심을 다시 기억해보자.
꿈에서 깨어나 존재의 사실과 접촉한다는 그 뜻이 지극히 함축하고 있는 것은 바로 '나'라는 것이다.
실존주의는 존재를 어떤 객관적인 대상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나'로 다시 이해한다.
우리에게서 꽤나 멀었던 존재라는 표현은 이제 가장 밀착된 우리 자신의 사건이 된 것이다.
그러니 존재를 탐구한다는 것은 나를 탐구한다는 것이며, 존재를 향해 간다는 것은 나를 향해 간다는 것이다.
철학이 긴 시간 동안 '나에 관한 탐구'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차마 믿을 수 없다. 처음에는 분명 그러했을텐데, 철학이 왜 세계를 말하고, 정치를 조직하고, 텍스트놀이를 하게 된 것일까. 그런 것들이 나를 구성해주거나 설명해준다고 믿게 되었던 까닭일 것이다. 나를 말하려면 내 앞에 깔려 있던 구조나, 나를 이루는 관계 같은 것을 말해야 한다고 착각해서였음이 분명하다.
'나'라는 것을 존재의 자각이 아니라 언어적 정체성으로 이해해서 이 사태가 벌어졌다.
존재의 자각은 보편적 다수에게 어려운 일이니, 또는 애초 그런 것은 이 세상에 없으니, 무의식이니, 계급이니, 역사니 하는 허구의 소재들에 근거해 언어적 정체성을 만들어내서 그것을 '나'라고 하자는 식의 기만적인 일이 철학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종교체험의 대단히 보편적인 양상은 한 개인이 어떠한 정체성을 만들어왔든 간에, 또 나아가 그것이 아무리 가변적이고 유동적이며 다원주의적인 정체성이든 간에, 정체성과 관련된 그 모든 것이 단번에 벗겨지는 경험을 한다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존재가 훅 들어온다. 압도적이다. 어떤 내용에 대해서가 아니다. 거기에는 어떤 특징이나 속성을 가진 내용이 없다. 그저 그 자체가 나라는 것을 안다. "아, 나다." 이러한 발화 또는 선포가 자연스레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제 어마어마하게 명징한 기쁨이 찾아든다. 아니 그게 고작 기쁨정도일까. 비유하자면 신을 직접 영접한 인간의 심정 같은 것이다. 그것도 절대적으로 우호적인 신을.
여기에서는 지금 인간이 실은 신이라거나, 존재자각의 방편을 통해 인간이 신처럼 될 수 있다는 식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말했듯이, 어떤 영지주의적인 것, 또는 인본주의적 영성은 실존주의의 입장에서 가장 빨리 기각되는 것이다. 그것은 '이쪽'에서 주장하고 펼쳐내는 것이다. 그러나 실존주의가 말하는 것은 그 반대다. '저쪽'에서 찾아오는 것이며 돌입해오는 것이다.
더 쉽게 말해보자.
이 상대성의 세계에서 가장 다양성으로 특성화된 것을 더 열심히 주장하면 '나'라는 것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하는 그 모든 허구의 방식에 대해 실존주의는 동의하지 않는다. 키르케고르 때부터 이 지점은 변하지 않았고, 이것이 실존주의가 실존주의인 이유다. '나'는 저쪽편의 절대성으로부터 이쪽편의 상대성의 세계로 오는 것이다.
이것이 어떤 초자연적 실체를 의미하거나, 불변하는 관념적 자아를 말하는 것이 아님도 분명하다.
이것은 정말로 존재하는 일에 대한 것, 즉 실재에 대한 것이고, 그 실재를 나로서 직접 경험하는 일에 대한 것이다.
말했잖는가. 실존주의는 신비주의라고.
그리고 신실존주의는 더욱 그래야 할 것이라고.
신실존주의는 실존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시도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그 한계란 실존주의가 실존주의성을 잃어 생겨난 한계다. 그러니 이것은 다시 한 번 실존주의의 근본을 회복하기 위해 제안되는 기획이라고 말하는 편이 좋다.
이에 따라 우리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고 말한 사르트르에 동의하지 않는다. 동시에 우리는 이것이 기후위기와, 북극의 펭귄들과, 저 요정의 숲에 사는 유니콘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이렇게만 말할 것이다.
이 모든 것들 중에 가장 우리에게서 절실하게 회복될 필요가 있는 것은 바로 나라고.
그러니 신실존주의는 오직 나를 위한 것이라고.
나의 철학이자, 나의 심리학이며, 나의 탐구라고.
그러나 철학도 심리학도, 그 어느 학제의 분야가 아니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그래도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돌 것이며, 인간은 나라는 것을 향할 것이기에.
그 모든 허구 속에서도 바로 이 사실 중의 사실을 말하고자 한다면, 그럼으로써 허구가 낳은 무수한 존재의 질환들로부터의 회복을 꾀한다면, 그것은 이제 신실존주의라는 이름을 가질 것이다.
존재 자체가 치유한다. 우리는 그 원점을 다시 선명하게 기억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