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심리학 #7

"1인 부족들의 도시"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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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산다는 것은 서울어를 쓴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서울어라는 표현으로 의미하려는 것은 표준한국어가 아니다. 그런 객관적 형식에 대한 것이 아니라 주관적 내용에 대한 것이다.


서울의 인구수가 900만 명이라면, 서울어의 수도 900만 개다.


삶의 수만큼 있는 이것은 곧 '삶의 언어'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삶의 언어가 있으며, 또 있을 수밖에 없다. 아니, 있어야 할 것이다. 왜 그런가?


어느 누구라도 자신의 삶이 처음부터 다 납득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 이해를 위해 언어는 생겨나서 따라붙는다. 쫄래쫄래 삶을 뒤쫓아가며 언어는 삶의 자취를 묘사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언어는 자라나는 것이다. 그렇게 자라난 언어를 통해 우리는 역으로 거기에 어떠한 삶의 향기가 농축되어 있는지 후각을 더듬어볼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인류학적 탐구에서 이것은 한 부족의 생활상에 다가가는 방식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분명 하나의 부족[어족]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의 언어를 쓰는 1인 부족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에 대한 인류학적 탐구자다.


애초에 우리가 아니라면, 이 1인 부족에 대해서는 대체로 누구도 관심이 없다. 인류사에 한 획을 그은 중요한 역사적 인물도 아니고, 현재 사회를 위해 행사할 수 있는 커다란 영향력을 갖고 있지도 않으며, 그저 자신만의 삶을 살고 있다는 점 말고는 아무런 객관적 가치도 없는 1인 부족이기에, 이 어족에 관심을 가질 이도 우리 자신이 아니라면 거의 전무하다.


뒤집어 말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의 언어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이 우주에서 영원한 안개 속에 있게 된다는 얘기와도 같다. 언제 사라졌는지도 모르게 사라져갈 우주의 먼지처럼, 이 1인 부족은 가장 소외된 채 망각되어 갈 그 운명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자신의 삶의 언어라는 것이 꼭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있을 수밖에 없던 것이며, 분명하게 있던 것을 말한다. 우리 자신이 이 우주에서 덧없이 잊혀갈 티끌이 아니라, 정말로 이 도시에서 부정될 수 없는 엄연한 존재로 살아있었다는 그 사실을 말한다.


물론 남들은 모를 수도 있다. 바로 옆집에서 고독사가 일어나도 모르는데, 어찌 남들이 이 1인 부족을 알아주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 자신만큼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자신이 어떤 것을 좋아하고, 또 어떤 것을 싫어했는지, 그리고 대체 어떤 것을 그리도 간절히 그리워하며 살다 갔는지, 정말로 우리 자신만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도시의 한 노숙자가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도시에서는 흔한 광경이다.


무슨 말인지도 알 수 없는 말로, 끝없이 혼잣말을 하며 지나간다.


표준한국어도 아니며, 지방의 사투리도 아닌, 아니 말이라고 하기에는 언어의 형식 자체를 벗어난 듯한, 차라리 종교적 방언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을 어떠한 소리를 쉴새없이 낸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낸다.


그는 지금 지키고 있는 것이다.


부족 최후의 생존자로서, 자신의 부족이 이 세상에 분명하게 존재했다는 그 사실을. 그 존엄성을.


누구도 그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것은 분명 언어였다. 1인 부족이 그 자신을 고결히 지키고 있던 언어.


그 자신이 무엇보다 가장 그 사실을 알고 싶어서 그는 말한다. 자신의 삶을 알리는 그 언어를.


그리고 그 자신이 알고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 모든 것이 충분하다. 자신의 삶은 자신에게만 이해되면 된다. 어떤 수를 써도, 아무리 고급의 언어를 쓴다 해도,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삶을 이해시키는 일은 불가능하다. 스토리를 이해시킬 수는 있다. 그러나 정말로 어떻게 전하겠는가.


여름밤에 괜히 걸어본 강둑의 길을. 그 외로움과 환희를. 빌딩 사이로 내리던 빗방울이 아스팔트에 부딪혀 내던 그 오색의 화음과 설움을, 그러나 기도를. 너에 관한 생각들과, 잠시 잡아본 온기와, 동이 트기 전 새벽의 냄새. 그러한 것들이 정말로 자신에게 어떠한 경험들이었는지를 대체 어떻게 전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들을 말하는 언어는 다 자신에게 들려지기 위한 것. 언어를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언어를 촉매로, 자신의 삶이 얼마나 충실하게 채워져 있었는지의 그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그럼으로써 이 1인 부족이 작디 작은 단 1인으로서도 가장 온전한 위상으로 이 우주에 분명하게 존재했다는 그 사실을 실감하기 위해서.


그러니 서울어는 서울에서 살다가 서울에 매몰되어 사라질 것들의 언어가 아니다. 자신이 서울을 살았다는 그 일을 잊지 않기 위한 언어다. 서울이라는 것으로도, 자신의 삶을 살았다고 말하기 위한 언어다. 이 거대한 도시 속에서 아무도 모르는 1인 부족이었지만, 자신만큼은 자신이 괜찮은 삶을 살았다고 그렇게 정확히 알고자 하는 언어다.


최소 900만 개 이상이 있지만, 그 모든 서울어는 하나같이 다 정확한 자리를 가리킨다.


자신의 삶의 온전성이라고 하는 그 지점을.


우리 자신의 삶에서 언제나 우리 자신은 괜찮은 존재였다. 900만분의 1이 아니라, 900만은 언제나 각각의 유일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는 사실을 지키고 있는 것은 저 부족 최후의 생존자. 그의 이름이 진근이라면 그는 진근족 최후의 생존자. 그의 이름이 다슬이라면 그는 다슬족 최후의 생존자. 우리 모두는 다 그러하다. 이 삶을 살아가는 자신의 존재가 온전하다는 그 최후의 증언으로서, 궁극의 증언으로서, 우리 자신은 지금 이렇게 이 도시에 서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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