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심리학 #6

"자신을 배우는 이들의 도시"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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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는 볼 것이 정말 많지 않은가. 볼 것이 많다는 것은 배울 것이 많다는 얘기다.


마음의 작용들이 저마다 우뚝 서서 환히 불빛을 밝히고 있는 곳에서는, 배우고자 하는 이는 반드시 배우게 된다.


사람들이 도시로 모이는 것은 더 많은 새로운 것들을 보고 경험해가며 자신에게 중요한 어떤 것을 배우고 싶어서일 것이다.


배움이라는 것은 마치 외부의 어떤 대상을 배우는 것 같지만 실은 아니다. 그 어떤 외부의 소재로라도 우리는 실은 자기 자신에 대해 배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외부의 가치있어 보이는 소재들을 자기 안으로 통합해가며 우리가 어떤 궁극의 합체로봇으로 성장하게 된다는 식의 의미가 아니다. 외부의 것들이 마중물이 되어 우리가 정말로 어떠한 사람인지를 알아갈 수 있게 된다는 그 의미다. 그것이야말로 우리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어떤 것이기에.


그렇게 보자면 도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찾고 싶어 도시에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도시에서는 더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할 수 있기에, 자기 자신에 관해 더 효과적으로 배울 기회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모종의 직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시에는 함정도 있었다.


우리는 '에코챔버 효과(echo chamber effect)'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다. 이것은 주변에서 계속 비슷한 생각의 목소리만 메아리처럼 듣게 됨으로써, 그러한 자신의 생각이 확고한 진리처럼 신념화되는 현상을 가리킨다. 확증편향의 일종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유사한 표현으로 또 우리는 '필터버블(filter burble)'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들어보았다. 이것은 인터넷의 정보제공자들이 알고리즘을 통해 개인에게 맞추어진 정보만을 필터링해서 제공하는 일을 가리킨다. 이 경우에도 개인은 자신의 생각을 지지하는 정보만을 주변에서 보게 되며, 결국 그 생각은 독단적 진리화의 가능성에 쉽게 노출된다.


이러한 것들은 일종의 '디지털 간신배'처럼 작용하고 있는 것들이다. 우리의 비위를 잘 맞추어주지만 그 결과로 우리의 눈을 어둡게 만든다. 이것은 단지 온라인환경 속에서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오늘날의 도시는 이미 온오프의 성질이 뒤섞여 구성된 복합물과도 같다.


도시에는 많은 것들이 우뚝 솟아있기에, 메아리들도 더 가까이에서 잘 들려온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 관해 새롭게 배울 수도 있지만, 늘 자기가 진리라는 목소리만 반복하는 바보가 될 수도 있다. 이것은 도시의 양가성이다. 우리가 도시로 온 그 이유가, 우리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함정이 되기도 한다는 의미다.


실제적으로 드러나는 도시에서의 삶도 그러지 않은가. 누군가는 더 크게 열린 자신으로 살아가게도 되는 한편, 다른 누군가는 오히려 더 자폐적 양상으로 빠져든다.


우리가 다 함께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그 네트워크의 환경이, 오히려 개인의 주위로 다 똑같은 생각의 그림만이 걸려 있게 되는 자폐의 독방을 만들어내는 현실은 아이러니하다. 그렇다면 오히려 가능성은 그 반대에 있을 것이다. 더 많은 연결에 집착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만 오롯이 집중하며 사는 이가 있다면, 그러한 이는 더 크게 열린 그 자신으로 드러나게 된다.


당연하다. 그는 자신이 도시에 온 이유를 잊지 않았으며, 정확하게 그 이유를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의 기준이다.


우리는 이 도시에 어떤 좋은 외적 대상물을 얻으러 온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얻으러 온 것이라는 것.


정보를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는 오직 자기 자신을 배우기 위해 도시를 살고 있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자신에 관해 배우려 하지 않는 이들이 외적 대상물로서의 정보를 끌어모은다. 그렇게 수집된 정보들이란 다 기존의 자신을 지지하고 옹호하는 자기동일성의 반복을 위한 소재들일 뿐. 어떤 새로운 것을 보더라도, 그는 그 안에서 똑같은 자신을 보려 한다. 어떻게든 반드시 그것만을 찾아내어 보고야 만다. 그럼으로써 세상 모든 정보가 다 "당신이 참으로 옳습니다. 위대한 지혜자이자 올바르게 선한 군주여."라며 자기를 왕처럼 떠받들어주고 있는 것 같은 상태를 경험하는 것이다.


도시에 와서 그는 엄마의 요람을 찾고 있다. 디지털 간신배들이 그 일을 돕는다. 세상 모든 것이 흡사 자기를 위해 맞춤형으로 기능하는 엄마처럼 경험되며, 또 그래야만 한다는 당위적 생각이 형성된다. 이런 이들이 이제 어떤 음식점이나 상담소 같은 곳을 찾게 된다면, 그 서비스주체들이 자기를 위해 다 받아주는 엄마역할을 제공해야 한다는 소위 '당당한 자신의 권리'라는 것을 행사하려고 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관해 배우고자 한 것은, 이러한 유아적 미숙함이 낳은 정신병적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며, 이렇게는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곧, 우리는 참된 자기 자신으로 새롭게 살고 싶어서 도시를 찾았다.


도시에 가득히 피어있는 저 환한 불빛들처럼, 우리도 빛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빛들은 서로를 비교하지 않는다. 경쟁하지도 않는다.


자신이 얼마나 남들과 다른지, 또 같은지는 빛의 관심여부가 아니다. 그러니 굳이 남들과 다르려고도, 또 같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거기에 있는 작용의 원리는 단 하나다.


얼마나 자신다운지에 대한 것, 그것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고정된 것이 아니다. 도시는 이 사실을 무엇보다 분명하게 가르쳐준다. 도시에서는 시간의 흐름을 우리는 더욱 분명하게 자각하게 된다. 있던 것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다시 또 새로운 것이 생겨난다. 그렇게 생멸생멸하며 지속하는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 또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들은 이처럼 시간으로 존재하며, 가장 그 존재답다는 것은 결국 가장 변화무쌍하게 흐른다는 것이다.


가장 자기 자신다운 것, 그것은 계속 새롭게 알려지는 자신의 모습이다.


어떻게 그 일이 가능할까?


배움으로써.


우리가 자기 자신에 관해 배운다는 것은 바로 이 일을 의미한다. 더 많은 새로운 것을 알아보는 그 시선은, 우리 자신을 향해서도 새로운 것으로서의 자신을 개방한다. 어떤 작은 생각들에 갇혀 있지 않고, 늘 더 크게 열려가는 자유로운 우리 자신을 꿈꿀 수 있다면, 그것은 배움에의 꿈이다.


그리고 이 도시에서 가장 볼 만한 것이 있다면 바로 그것일 것이다.


이 도시의 명물.


가장 보기에 아름답고 근사한 것.


끝없이 자기 자신을 배워가며, 그 자기 자신으로 사는 인간의 모습이다.


이것이 도시의 무수한 불빛들 중에서도 가장 빛나고 있는 그 불빛이다.


도시에는 볼 것이 참 많다지만, 이것을 보지 못하면 다들 후회한다. 다 봤어도 이것을 보지 못했다면, 아직 본 것이 아니다. 나아가 도시에 왔음에도 이것만은 어떻게든 보지 않으려고 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바보다. 누구나 이것을 보기 위해서만 도시에 온 것이기에.


도시는 분명하게도 우리가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배워 볼 아주 좋은 기회다. 자신을 빛내 볼 기회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빛은, 배우는 이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올 것이다. 이것은 배움의 특권. 가장 아름답고 근사한 것을 가장 앞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그 일에 가장 기뻐할 수 있다. 자기가 자기 자신인 일이 무엇보다 우리를 가장 기쁘게 한다는 것을, 우리는 또 배운 것이다. 그 기쁨에도 이제 끝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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