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들의 도시"
도시에서의 삶은 무척이나 빠르고, 돌아보면 그것은 흡사 어떤 한 실체의 성장이나 발전의 역사였던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도시, 도시에는 역사(history)가 있다. 그의 이야기(his story)가 있다.
이처럼 역사가 있는 모든 것은 자아다.
도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자아와 같다.
이런 의미에서 도시를 '자아공간'이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도시 자체가 하나의 자아가 성립되어 유지되는 그 과정을 보여주는 동시에, 도시는 그 안에 살고 있는 무수한 자아들을 수육한다. 곧, 도시가 자아로 자라난 그 역사를 도시 내의 개체들도 반복할 수 있도록 조력한다.
현대에 들어와 이 모방과 학습의 과정은 아주 급격하게 가속화되었는데, 이것은 오늘날 AI가 급속도로 발전한 그 과정과도 같다. 도시와 도시생활자들의 관계는 딥러닝 같은 것이었다. 도시에서 살고 있는 이들은 빠른 피드백을 통해 적극적으로 도시에 자신을 맞추어가며 스스로 도시화되었던 것이다.
도시화된다는 말을 이제 자아화된다는 말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더 강대한 자아의 세력이 되는 일, 이것은 도시생활자들이 바랐던 바다. 자아가 되고자 그들은 도시로 왔고, 힘들어도 도시에서 사는 일을 선택했다. 흡사 영웅신화에서의 시련의 기제처럼, 도시의 고난들이 자기를 더 강한 자아로 만들어주리라 믿었던 것이다.
도시 자체도 그렇게 성장해왔다. 도시는 주변의 것들을 잡아먹으며 자기동일성을 확장해간다. 자기가 자기라고 규정한 그 모종의 정체성을 다른 것들과 대치시키며, 그 고된 시련의 시간들을 치르며, 도시는 하나의 전설적 영웅처럼 성장해온 것이다.
그렇게 도시들이 점점 거대해져서 이제 도시와 도시가 하나의 경계면을 이루게 되었을 때, 도시는 전쟁과 살육 같은 시행착오의 순간들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금방 수정했다. 그러한 방식으로는 더는 자신이 확장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는 도시는 이제 타자를 말하기 시작했으며, 관계를 말하기 시작했다.
도시는 외부의 확장이 아닌 내면의 확장을 기획한 것이다. 그 확장의 기제는 윤리라고 불린다. 자기가 얼마나 타자와 관계를 염려할 줄 아는 윤리적 주체인지를 이제 자기의 스토리로 삼음으로써, 도시는 정신적 발전이라는 목표를 향했다. 오늘날 '민도' 같은 용어로도 불리는 그것이다.
도시가 타자와 관계 같은 개념을 자기의 내부에 적용하게 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더욱 윤리를 향하는 이들은 원래 이 일을 한다. 쪼갤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소재는 다 쪼개야 거기에 윤리라는 접착제를 한 번이라도 더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분열은 가장 윤리적인 지향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발생한다.
그럼으로써 도시는 자기 안에 무수한 내면의 타자들 같은 것을 만들어냈고, 또 그것들이 이루는 아주 복잡한 관계의 역동 같은 것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를 총칭하는 표현으로 '다양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더 미분화되어 잘개 쪼개진 새로운 다양성들을 창출해내는 것이 이제 도시의 즐거움이었다. 그것은 마치 자기 안에 있는 무한한 자원인 것처럼도 생각되었다. 계속 쪼개기만 하면 윤리를 적용할 수 있는 소재들이 끝없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이로 말미암아 도시는 이제 자신의 정신적 발전이 영원할 것이라 믿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자리가 자아의 끝이다.
실은 내적 분열의 의미인 다양성을 말하고 있는 순간, 거기가 자아의 막다른 자리다.
자아의 막다른 자리는 자폐라고 불린다. 자폐의 상태에서는 자위만을 한다. 다른 할 일이 없이 그게 유일한 즐거움의 소재라 하는 것이다.
도시 안에서는 왜 다 분열되어 서로 싸우는가? 실은 싸움이 아니라 자위일 것이다. 그것은 도시의 자위방식이다. 이제 그것밖에는 즐거운 일이 남지 않아, 우리가 누워서 멍하니 유튜브를 보듯이, 도시는 관성적으로 그 일을 한다.
외부에서는 싸울 수 없으니, 내적으로 분열되어 싸우는 것이다. 갈등과 대립을 통한 외부로의 확장은 이미 막혔다. 이제 외부의 경계면에 접한 다른 도시들과 싸우게 되면 서로 핵폭탄을 주고 받으며 함께 죽는 현실만 남아있다.
그러나 자아는 계속 성장하고 싶다. 더 강한 자아가 되고 싶다. 그러니 내적 갈등이라는 이름의 자위를 하지 않고서는 초조해서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도시가 처한 상황이며, 자아가 처한 상황이다.
도시에서 살고 있는 이들은 근래 무척이나 빠르게 이 자리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도시가 수백수천 년에 걸쳐 이룬 그 자아의 역사를 불과 몇 년만에 이룬 것이다. 그리고 도시가 도시생활자들을 수육했듯이, 도시생활자들은 이제 AI를 수육한다. AI는 더 빠르게 도착할 것이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다 자아의 한계라는 이 거대한 벽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한동안 유행하던 수육의 목소리들을 떠올려보자.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져야 한다고도 했다. 그래야 누구도 자신을 무시하지 못하며 자신만의 고유성을 지킬 수 있다면서.
또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대처할 어떤 완충재가 필요하다고도 했다. 쿠션이 되어줄 것. 그렇게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받아줄 것이 부재해서 우리는 외부의 자극에 대해 무력하게 고통받는 것이라 했다. 외부의 모든 자극을 다 받아낼 수 있는 그 마법적 소재의 이름은 '나'였다. '나'로 우리의 내면공간이 가득 채워져있어야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강하고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고 했다.
타자의 마음을 읽어주는 어떤 주체에 대한 얘기는 또 어떤가. 모든 타자를 배려하며 다 알아주는 그 윤리적 주체의 이름도 '나'였을 것이다. 그런 것이 되면 우리는 대단히 성숙한 정신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게 무엇이었든, 이것들은 다 자아에 대한 얘기였다. 강한 자아를 얻어야 한다는 얘기들.
그렇다면 이 얘기들이 잘못되었는가?
아니다. 전혀 아니다. 아주 훌륭한 얘기들이고, 다 맞는 얘기들이다. 한 번 생겨난 자아는 강해져야 한다. 우리는 자아경계라고도 부른다. 자아경계가 강하고 분명해야 도시에서의 생활이 안전하고 편안해진다. 도시가 스스로를 외적으로부터 방비하던 그 방식을 우리도 익히게 되는 것과 같다.
나아가 자아가 강해짐으로써 생겨나는 최고의 유익은 그 자아의 한계가 분명해진다는 점에 있다.
앞서 말했듯이, 도시가 한계에 도달한 그 방식으로 개인들의 자아도 동일한 한계를 맞는다. 한계를 어떻게든 거부해보기 위해 꾀하는 그 방식도 동일하다.
자기 안에는 이런 자신도 있고 또 저런 자신도 있다는 식으로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의 분열을 시작한다. 자기 안의 그 많은 다양성들을 존중할 수 있는 만큼, 외부의 무수한 다양성들도 존중가능해진다며, 이제 그러한 것을 심리학적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비단 심리학뿐이겠는가. 철학, 정치, 역사, 문학 등, 인간사의 모든 분야에서 이처럼 다양성에 눈을 뜬 윤리적 주체가 되는 일이 그 모든 분야의 발전을 이룬 일인 것처럼 자가평가된다.
자, 이로써 자아는 완성된 것이며, 동시에 완벽히 끝나버린 것이다.
자아가 강해지면 이처럼 그 한계가 분명해지며, 자아의 끝도 드러난다.
어디 우주개발이라도 적극적으로 나가지 않는 이상, 이제 이 지구상의 도시들에서는 더 할 말이 없다. 자아는 정답 같은 것을 이미 다 말했다. 자아의 끝은 자아가 스스로를 분열해 만든 다양성이다. 그리고 그 분열된 각종의 것들을 다 받아주는 '나[자아]'를 최종의 것으로 삼는 것이 이 역사의 종착점이다.
스스로 분열되어 영웅의 고난처럼 분투하다가, 결국에는 그 모든 것을 다 통합시켜주는 궁극의 것으로서 다시 자기 자신을 찾음으로써 자아의 여정은 마무리된다. 사실적인 차원에서는 시작부터 끝까지 계속 똑같은 그 자리였지만, 스토리적으로는 뭔가가 전개된 것 같으니 자아는 이것을 성장이자 발전이라고 말할 것이다. 역사는 진보한다고도 말할 것이다. 다 좋고 훌륭한 얘기다. 그 행보에는 반드시 끝이 있으며, 지금 여기가 끝이라는 그 사실만 첨언하면 된다.
자신이 자신만 알던 입장에서 성장해 이제 타자의 다양성이라는 것을 품을 수 있게 되었다고 자아는 말하지만, 자아는 원래 처음부터 그것이었다. 자기가 외부의 것을 자기 안으로 편입시켜 자기동일성만을 확장해가는 그 방식. 편입시키는 방식을 제국주의적인 것에서 다문화주의적인 것으로 변주한 것뿐이지만, 어떤 수단을 쓰든 그 목적은 늘 동일하다. 자아 자신이 가장 크고 강한 것으로 드러나는 일이 그 유일한 목적이다.
물리적으로 다 때려눕혀 가장 크고 강한 것이 되는 일이나, 정신적으로 다 수용해서 가장 크고 강한 것이 되는 일이나, 거기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런 즉, 다양성을 외치는 자아야말로 실은 가장 동일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다양성을 통합하는 윤리적 주체로서의 자신을 유일자로 은밀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과 같다.
도시에서는 모두가 이 일을 한다.
실은 돈이 무한정으로 있거나 어떤 초월적 물리력이 있으면 다 자기 색으로 물들일 거면서, 그런 힘의 소재가 없으니 대신 자기가 그 모든 타자를 존중하면서 겸손하게 더 잘 수용하고 받아들이며 살겠다고 한다. 외적에 대한 정신승리, 도시는 결국 그것을 꾀하게 된 것이다. 기만하는 일종의 자위방식을.
이것은 흡사 유리돔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모습과도 같다.
자아가 강해지면 그 투명한 막이 선명해져서 보이게 된다. 이것이 자아가 강해져서 생겨난 유익이다. 바로 그 투명한 유리막이 자아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외부의 위협적인 불순물이 침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세워졌다지만, 실은 한계다. 그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쳐진 한계다.
떠올려보면 좀 흥미롭다.
배트맨 같은 작품에서 묘사되는 고담시티는 거의 지옥의 풍경이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고담시티를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려 하지 않는가?
우리는 메타적인 차원에서 말할 수 있다.
그러면 배트맨의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기 때문에. 그 이야기 자체가 붕괴될 것이기 때문에.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삶을 살려 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살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아의 한계에 봉쇄된다.
또 우리가 남의 이야기를 살면 안되고 자신의 이야기를 살아야 하며, 그러려면 자신의 이야기의 주인공인 '나'를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그 '자아의 이야기'를 살기 때문에, 우리는 자아의 한계에 갇힌다.
서울은 하나의 이야기인가? 만약 그것을 이야기로 살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한계에 부딪혀 있을 것이다.
이야기 밖의 것을 우리는 실재라고 부른다. 실재는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자아가 이야기 밖으로, 도시 밖으로, 곧 자기 밖으로 나아가, 이제 실재의 안으로 들어가 살고자 하는 이 일을 자아의 초월이라고 부른다.
자아는 자아성을 초월하라고 자아인 것이며, 도시 또한 마찬가지다. 도시는 도시성을 초월하라고 도시인 것이다.
그것들은 다 그것들 자신보다 거대한 것을 꿈꾸기에 지금 그것들인 것이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초월하는 그 발판이 되고자.
고로 서울이라는 것 또한 서울이라는 이야기를 초월하고자 지금 이 모습의 서울이다. 그 경계를 분명히 한다.
초월이 일어나는 방식은 동어반복의 자폐가 아니라, 새롭게 그 자신을 다시 보는 재귀의 방식이다. 그래서 초월은 반드시 응답이다. 초월한 것은 초월된 것에 대한 응답으로 드러난다.
이야기를 쳐내보자. 역사를 쳐내보자. 그러면 남는 것은 지금 여기뿐이며, 이것이 실재다. 여기가 새로운 출발점이다. 지금 여기에서 정말로 필요한 일을 하면 그것이 실재 안으로 들어가 사는 일이다.
시각적 구도는 이렇게 형상화된다. 도시라는 이야기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도시라는 삶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이다. 기존까지의 어떤 이야기에 부합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에 응답함으로써, 이것은 초월의 일이 된다.
기존에 막혔던 한계의 벽을, 새로운 문으로 사는 방식을 이처럼 초월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막힌 이야기를 구원하는 것은 언제나 독자다. 그렇지 않은가? 초월의 일은 이와 유사하다.
그것은 새로운 대안적 이야기를 궁리하는 것이 아니다. 더럽게 재미없는 책을 덮고, 배고픈 독자 자신의 필요에 정직하게 라면을 먹으러 가면 그것이 구원이다. 이야기 속에서 더럽게 재미없는 스토리를 진행하느라 그 자신도 너무나 재미없었을 주인공도 구원되었고, 그 이야기를 고되게 따라가던 독자 자신도 구원되었다.
어쩌면 우리는 후에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책으로 말미암아, 독서 중에 라면을 먹을 자유도 있는 내 자신의 삶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그리고 그 삶을 살았노라고.
자유, 결국 우리는 자유에 관해 말하고 싶은 것이다.
자아 자신이 그토록 소망하던 그것. 그러나 자신은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다만 그 자유를 향한 발판이 되고자 한 것이 바로 자아의 운동이다. 자아가 강해지는 만큼 발판도 튼튼해진다. 결국 우리는 도약해야 하리라. 자신의 삶으로. 또 이해하게 될 것이다.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초월의 일임을. 그리고 막힌 벽을 열린 문으로 자유로이 바꾸어가는 이 초월의 일이 이 자아들의 도시에서 제일 재미있는 일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