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든 것들의 도시"
포유류들이 많은 곳에는 자연스럽게 정이 넘치게 된다.
그러니 도시는 실은 무정한 곳이 아니며, 무정한 곳일 수도 없다.
그렇게 보이는 것은 단지 도시에는 정을 쏟을 곳이 너무도 많아, 일부러 정의 발현을 무시하거나 차단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무시나 차단이라는 극단적인 처방을 하지 않고서는 그만큼 넘쳐나는 정을 도저히 처리할 수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도시는 그 시작부터가 그러했다.
다정(多情)한 사람들이 도시를 만들었다.
도시라는 성벽 안에서 더 많은 이들이 안전하게 보호받아 평온하게 천수를 누릴 수 있는 그 안위를 생각하던 이들, 누구보다 포유류였으며, 누구보다 정이 많던 이들이 도시의 개척자들이었다.
그래서 도시는 무책임해진 것이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정이 많다는 것이 왜 무책임과 연결된단 말인가?
죽음이라는 것을 가져와보면 이 모든 것은 분명해진다.
춥고 고되며 위협도 많이 도사리고 있던 시절, 포유류들은 죽음으로부터 자신을 방비하기 위해 서로 더 가까이 몸을 붙여 체온을 나누었다. 그렇게 서로의 존재에 의존함으로써 유기체적 항상성을 유지하는 일이 가능했고 더 오래 연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포유류의 성공적인 생존전략이다.
이 살갗의 유대가 바로 정의 원형이다. 이것이 추상적인 개념으로 발전해 연대라는 것이 되었고, 연대를 성립시키기 위한 기술적인 구조로 관계라는 것이 발명되었다.
우리는 다양한 학제에 따라 도시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여러 방식으로 정의해볼 수 있겠지만, 어떤 정의에서든 관계라고 하는 성분은 필수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서울은 무엇인가? 서울이라는 것을 구성하는 무수한 관계들의 총칭이다. 이런 것을 세계라고 부르며, 결국 서울은 하나의 세계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말할 수 있다.
세계는 다정한 사람들이 만든 것이라고.
다정한 사람들이, 죽음으로부터 더 많은 이들을 지키고자 아주 많은 정을 불어넣어 만든 그것이 세계다.
그래서 원래 세계는 본질적으로는 정이 넘치는 곳이며, 동시에 그렇기에 세계는 무책임하다.
이 의미를 함축적으로 이렇게 표현해보면 어떨까.
세계는 모든 것의 탄생을 가장 오래 기억하지만, 단 하나의 죽음으로부터는 가장 빨리 돌아서는 곳이라고.
왜냐하면, 세계는 죽음에 대해 근본적으로 무력하기 때문이다.
정이 많을수록 죽음에 대한 이 무력성은 분명하게 심화된다. 자신이 가득 정을 쏟은 것들이 세계에서 사라지는 모습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서다. 어떻게든 강건한 유대의 성벽을 세워 도시를 만들고, 세계를 만들었는데도, 자신이 정을 준 그것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은 자신이 쏟은 정의 크기에 비례해서 무력감이 된다.
그러니 도시는 차라리 죽음에 대해 빨리 잊기로 한 것이다.
죽음을 가장 빨리 잊는 방법은 죽음을 기념물로 만드는 것이다. 죽음의 추상적 상징화다. 서울에는 그러한 기념물들이 무척이나 많이 전시되어 있다. 그 기념물들을 통해 사람들이 보는 것은 실제의 죽음이 아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교훈이다. 그 죽음을 딛고 우리가 또 얼마나 전진해올 수 있었는가에 대한.
그렇게 죽음을 윤리로 뒤바꿈으로써 도시는 죽음의 실제를 망각하려고 해왔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무책임함이다.
다정한 도시의 캣맘들을 예로 들어보자. 그들은 자신들이 소중한 생명을 살리고 있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들이 많은 정을 쏟아 지금 생명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성벽처럼, 하나의 세계처럼.
그러나 왜 그 생명의 끝까지 지켜보지는 않는가?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왜 그 끝을 함께하려고 하지는 않는 것인가?
책임의 의미를 떠올려보자.
어떤 것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함께할 때, 우리는 그것을 책임이라고 말한다. 더 특정적으로는, 그 끝을 함께하는 이를 우리는 책임지는 자라고 부른다.
종교적 비유로는 예수님이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리의 옆을 함께 걷는다고 하는 그 표현, 또 우리가 나서 죽어가는 그 모든 순간을 지장보살이 다 지켜보고 있다는 그 표현이 바로 책임의 참된 의미다.
그래서 책임은 어려운 것이다.
타자를 책임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마 책임질 수 있다면 다행이고, 최선이며, 어쩌면 그것만이 우리가 다할 수 있는 책임의 전부일지 모른다.
기도나 명상 등의 종교적 활동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고자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다. 그 모든 활동에는 공통적으로 '바라봄(behold)'의 원리가 있다. 이 원리를 증득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의 그 끝까지 바라보며, 또 그 끝을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는 바로 그 힘이 곧 우리가 우리 자신을 책임질 수 있는 힘이다.
우리가 정을 쏟은 것의 그 끝을 바라보는 일은, 그것의 끝까지 진심으로 그것과 함께하고자 하는 일이다.
그래서 behold다. 존재(be)를 붙잡는(hold) 일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그것의 존재함을 기억하는 일, 이 우주에 정말로 가장 귀한 것이 존재했다는 그 사실을 생생히 체험해 우리의 몸으로 새기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이다.
'바라봄'은 원리인 동시에 본성이다.
책임질수록 우리는 인간이 되어간다, 등과 같은 표현은 이러한 차원에서 성립되는 것이다. 그것은 정을 많이 쏟는 윤리적 행위가 인간을 만들어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한 존재의 시작과 그 끝에서, 곧 하나의 삶에서 도망가지 않고 그 삶을 끝까지 바라보는 이가 자기 자신을 인간으로서 발견하게 된다는 의미다.
도시에서는 우리가 충분한 시간을 갖고 어떤 것을 바라볼 기회가 많지 않은 것처럼 경험된다. 그것은 도시가 죽음을 회피하고 망각하려는 기제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도시는 새로 태어난 것들을 끊임없이 우리 앞에 들이대며 그것들의 탄생을 축하하자고 청한다. 그렇게 우리가 정을 쏟을 새로운 포유류적 소재에 끌려가는 동안, 정작 우리는 우리 자신의 끝조차도 망각하기 일쑤다.
분명하다. 우리는 정에 끌려 산다. 도시는 온통 우리를 잡아 끄는 것 투성이다. 정이 넘친다. 그리고 정에 끌려다닌 결과, 우리는 무책임함으로 드러나게 된다. 우리뿐이 아니다. 도시의 모든 것이 무책임하게 경험된다. 아무도 제대로 책임지는 이가 없는 것 같다. 종종 서울하늘에 울려퍼지곤 하는 노성들은 그러한 한탄과 성토의 소리들이 아니었던가?
이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본성을 아직 발견하지 못해서, 또 그 본성으로 살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다.
본성이라고도, 성품이라고도, 또 더 짧게 그냥 성(性)이라고도 쓰는 이것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정을 따라 드러난다.
우리를 잡아 끄는 정(情)의 운동을 따라가며 그 끝까지 바라보는 것이 곧 성(性)이다.
그러니 핵심은 '바라봄'이다.
그리고 이 바라봄의 참된 의미는 '함께함'이다. 멀리서 냉담하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에서 그것의 나서 죽는 일을 바라보는 그 방식으로 진정 함께하는 것이다.
당연히도 이러한 함께함은 포유류적 연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정만 있는 일이다. 무책임하다. 정으로만 사는 이들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간이고 쓸개이고 다 퍼줄 것처럼 굴면서, 그렇게 자신이 가장 순수하고 착한 척은 다 하면서, 어떤 끝의 상황에서는 그 모습이 온데간데가 없다. 아마도 가장 먼저 도망쳤을 것이다.
생명이 발산하는 정은 생명의 것이기에 죽음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력하다. 아무리 정과 정이 많이 뭉쳐 연대하고 끈적한 관계를 이루어도 죽음 앞에서는 다 모래성일 뿐이다. 정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성이다. 생명에게 필요한 것은 그 생명과 끝까지 함께할 자다. 생명의 끝까지 함께할 자다.
그리고 인간이 바로 이러한 존재라고, 실존주의자들은 말한 바있다. 하이데거는 왜 그토록 죽음을 강조했는가. 우리를 괜히 무섭게 해서 자기가 권위를 얻으려던 괴팍한 변태 할아범이라서인가? 그렇지 않다. 정말로 그것이 우리 자신을 인간으로 자각하는 일에 필수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성자각은 곧 유한성자각이다. 인간은 자신이 끝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이 모든 것에도 끝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존재다. 바로 그러한 끝을 아는 시선으로 인간은 이 모든 존재하는 것을 바라보며, 그렇게 이 모든 것과 함께하는 존재다. 표현 그대로, 인간은 존재의 동반자다.
인간이 이러한 자신의 면모를 망각해서 도시는 무책임해진 것이다. 정만이 남발된다. 이에 따라 도시가 차가워진 것도 당연하다. 정이 넘쳐난다는 것은 결국 나서 죽을 생명이 많다는 것. 죽음이 많아진 만큼 정은 더욱 무력해지며, 차라리 그 무력함을 잊고자 자신을 냉정하게 닫아 걸게 되기 때문이다.
정의 남용.
이것이 여느 도시만큼이나 서울의 문제일 것이다.
'정(情)의 남용'은 거의 반드시 '정의(正義) 남용'이 되곤 하는데, 정을 올바른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어서다. 그러나 정은 올바른 것도 아니고 그른 것도 아니다. 생명현상이 옳고 그른 그 윤리적 프레임 위에 위치해 있지 않은 것과 같다.
'정'을 '정의'로 만들고자 하는 이유는 역시 무력감 때문이다. 정의라는 뭔가 막강한 힘을 가진 것 같은 이름을 얻으면, 죽음으로부터의 성공적인 방비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서울하늘에 자주 울려퍼지곤 하는 정의의 외침들이 그리도 무책임한 소리들로만 들리게 되는 것이다.
죽음으로부터 존재를 지킨다는 모든 '정의의 말'은 거짓말이다. 어떤 성벽으로도 죽음을 막을 수는 없다. 어떤 다정한 도시도 죽음을 방비할 수는 없다.
죽음은 불가피성이다.
우리는 결국 무엇 때문에 무력한 것인가? 무엇 때문에 무책임한 것인가?
바로 죽음이 불가피한 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받아들인다, 또는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식의 이런 표현도 실은 성립이 안된다. 여기에는 마치 어떤 선택이 있는 것 같은 착시효과가 있다. 그러나 죽음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다. 우리가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그것은 찾아온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지켜준다는 온갖 거짓말들이 아니라, 우리의 죽음까지도 함께할 어떤 실재다.
살아있기에 정든 그것의 끝까지 바라보며 함께할 바로 그 본성. 그 인간의 시선. 그렇게 인간으로 드러나게 된 우리 자신의 참면목.
이런 것을 대체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아주 통속적인 것에서부터 아주 신성한 것에까지 공통적으로 붙는 그 이름.
사랑이다.
정의 뒤를 성이 그 끝까지 함께 따라 동행하며 그 작용을 시작부터 끝까지 다 알아 구원하는 이 일을 혹자는 깨달음이라고도 말한다. 필멸할 존재가 존재의 본성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구원되는 이 일,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를 것이다. 여느 도시에나, 그러니까 서울에도 지금 필요한 것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책임이다.
관계의 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그 규약들을 지켜나가야 한다는 그런 윤리적 책임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런 것은 책임이 아니라 노비문서일 뿐이다.
사랑은 죽어갈 것을 사랑하기에 오직 그 이유로 책임인 것이다.
어떤 정든 것의 죽음을 받아들기로 했으면, 우리는 지금 사랑하고 있는 것이며, 책임지고 있는 것이다.
그 죽음을 모종의 추상재로서가 아니라, 또 우리 자신의 발전과 진보를 위한 기념물로서가 아니라, 정든 그 미소로만 기억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이 떠난 속에서도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것이며, 곧 영원히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책임의 일이 이로써 완성된다. 우리의 본성이 가장 온전하게 빛나고 있다.
인간은 왜 아름다운가?
한번 세상에 나서 죽게 될 그것을 영원히 사랑할 수 있기에. 그것에게 영원을 선물할 수 있기에.
이것이 인간이 가진 사랑의 힘이며,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난 이유다.
가장 사랑하고 싶은 이들이 인간으로 태어나며, 이 도시에 태어난다.
이 도시에서 나고 질 많은 것들을 바라보겠다고 태어난 것이다. 바라만 보겠다고 온 것이다. 그 모든 정든 것의 영원만을 바라보겠다고, 지금 이렇게 이 도시를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가장 온전한 책임, 그리고 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