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같은 것들의 도시"
도시에는 그늘이 있다.
여기에서 그늘이라고 하는 것은 어둡고, 나쁘고, 위력적으로 보이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늘은 병들게 한다. 그것은 오직 병든 것에 대한 얘기다.
도시에는 더욱 그늘을 찾아다니는 이들도 있다. 상당히 많다.
너무나 도시적인 일 중의 하나로 우리는 심리상담을 꼽을 수 있다. 이 심리상담이라는 것도 오늘날의 그늘 중 하나다.
어떤 이들은 심리상담을 받으러 다니거나, 정신과에서 약을 처방받는 일을 어떤 특별한 훈장처럼 여기기도 한다. 그런 이들이 있으며, 상당히 많다. 심리상담이라는 것이 어떤 액세서리가 되어있는 것이다. 무슨 숨겨진 천재적 재능을 가진 다크한 문학소녀의 애용품 같은.
이러한 이들은 명품가방을 사는 대신에 같은 비용으로 몇년간 심리상담을 받으러 다닌다. 문제를 해결하러 다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를 만들려고 다닌다. 이들은 심리상담사가 얘기를 듣다가 자신은 생각지도 못했던 자기 어린 시절의 문제를 발견해주면 너무 반가워한다.
어디 저 아득한 기억의 귀퉁이에 있었던 듯한, 작은 외할아버지의 막내딸의 둘째 아들로부터 4살 때 "야, 이 멍청이똘추야!"라고 당했던 어떤 언어폭력에 대한 기억 같은 것이, 참으로 소중하다. 자기 안에 숨겨져 있던 보물을 찾게 된 것만 같다.
이들은 이러한 '상처찾기'를 하기 위해 심리상담사를 찾는다. 이들에게 동조하는 심리상담사들, 아니 상처브로커들도 있다. 상당히 많다. 이 상처브로커들은 자신을 찾아온 거룩한 상처의 탐구자를 위해 맞춤형 서비스를 설계한다. 어떤 정신병이 그에게 어울릴지를 논의하고, 또 그가 그런 정신병을 정당하게 가져도 된다는 그 자격을 위해 상처의 기억들을 편찬해준다.
이러한 일이 대체 무슨 쓸모가 있는지 이상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 수요가 있으니까 공급이 있는 법이다.
개성도 출중하고 능력도 있는 멋진 이들이 한 술자리에 모여 있다. 다들 오랜만에 만난 동창회일 수도 있고, 어떤 소셜모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자기는 남들만큼 내세울 개성과 능력이 없어서 조용히 자리만 지키고 있는 이에게, 한 번쯤은 관심의 차례가 돌아온다. 왜 그렇게 말을 안하고 있는지,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이 어떤지에 대한 질문이 던져진다.
바로 이 기회다. 그동안의 투자가 결실을 맺을 기회. 그러한 이는 말한다.
"아.... 죄송요. 너무 죄송해요.... 제가 실은.... 조울증과 공황이랑 관계불안이 있어서요... 어린 시절에 친척에게 좀 충격적인 일을 당했어서.... 죄송해요.. 아.. 이런 재미없는 얘기 너무 죄송해요..... 아.. 제가 또 모임 분위기를 망쳤나뵈요...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아... 너무 죄송해요..."
그는 순식간에 모임의 주역으로 발돋움한다. 그의 외모가 괜찮다면, 오늘의 왕자 또는 공주의 자리는 분명 그의 몫이다.
개성과 능력이 없던 이가, 누구보다 개성적이며 사람들을 다 휘어잡을 능력을 가진 이로 발돋움하게 만든 그 소재는 분명 병이었다. 이처럼 자신의 정신병이 자신의 개성과 능력이 되는 이 방식을 우리는 '패션정신병'이라고 불러볼 것이다.
오늘날의 도시에는 이 패션정신병이 상당히 많다. 아니 아주 많다.
개인의 개성과 능력이라는 것을 초라하게 만드는 이 거대한 군집의 시공간에서는 필연적인 일일지 모른다. 어지간한 개성과 능력으로는 돋보일 수 없다. 그러니 차라리 병든 모습이 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정신병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으면 그건 이제 다른 소재보다 조금은 더 희소하고 특별한 자신이 되게 해주는 것 같다.
이러한 기획은 백혈병에 걸린 들장미소녀가 나오는 옛날 순정만화나, 멘헤라, 지뢰계, 인간실격, 쿠로미 등과 같은 특정한 문화적 소재들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오늘날 이것은 훨씬 더 보편적인 실용론이다.
"약하면 선한[좋은] 것이다."
현대의 도시문명을 지배하는 이 슬로건 아래, 도시생활자라면 누구나 다 조금씩 갖고 있게 된 것이 이 패션정신병이다. 심지어 문명사회에서 살아가는 유아들도 이 일을 한다. 자기의 형제자매가 어떤 유능한 개성 내지 능력으로 부모의 관심을 얻고 있을 때 그러한 것이 없는 아동은 일부러 아픈 척을 한다. 그럼으로써 부모의 관심을 자기에게로 향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는, 오늘날 다양성에 목숨을 걸며 어떻게든 자신만의 특수한 다양성이라는 것을 아주 복잡하고도 피곤하게 구성하려는 이들은 실시간으로 신종의 정신병을 개발하려 하고 있는 것일까, 라는 생각마저도 든다. 이처럼 더 많은 이가 보다 적극적으로, 또 자발적으로 도시의 그늘을 찾아다니는 오늘날의 모습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꽃에게는 빛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늘로만 계속 향하고, 더욱 향하는 일은, 꽃이 그 자신으로 피어날 수 없게 만든다.
자신만의 개성, 자신만의 다양성, 또는 자신만의 어떤 놀라운 재능, 우리가 그늘을 향하면서 찾던 그것들은 실은 꽃의 핵심이 아니다. 우리 자신이 꽃으로 피어나는 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들이다.
꽃의 핵심은 그렇다면 무엇일까?
뜨거울 때 꽃이 핀다는 말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꽃은 따듯할 때 핀다.
꽃은 따듯한 빛을 받아, 그 따듯함을 내재하여, 그 자신도 따듯한 빛으로 피어난다. 우리가 꽃을 바라볼 때 우리의 가슴에서 느껴지는 것도 따듯함이다. 이것은 실증적이다. 꽃의 핵심은 따듯함이다.
그러니 우리는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우리가 다채롭고 아름다운 꽃같이 피어나려면 분명한 개성과 남다른 재능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없으니 차라리 우리는 병든 꽃이 되자고 한 것이다. 그늘에서 자라, 그 그늘을 내재하여, 자신도 그늘이 되어버린 병든 꽃.
꽃의 핵심이 따듯함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몰라, 우리는 자꾸 도시의 그늘로만 향했던 것이다.
그러나 따듯함이 핵심이다. 따듯함만이 꽃같은 일이다.
실은 누구나 다 안다.
도시의 삶이 매우 자주 병든 것들의 질병경연대회처럼 경험되기에 우리는 이러한 삶을 좆같다고 느낀다.
꽃같아야 하는데 왜 좆같아졌는가?
우리가 꽃의 핵심을 오해했기에.
우리가 우리 자신 안에 따듯함을 내재할 때 그것은 꽃같은 일이다.
따듯한 마음. 이렇게 불러도 될까.
정말 흥미롭게도, 우리는 따듯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볼 때, 그를 가장 개성과 능력을 가진 이로도 보게 된다. 그의 따듯함이 알아서 상황에 따라 개성과 능력으로 펼쳐지는 까닭일 것이다. 꽃이 그 자신의 따듯함으로 형형색색의 모습을 펼쳐내듯이.
따듯한 마음. 이것이 우리가 정말로 원하던 바로 그것이다.
도시의 삶 속에서 우리가 무척이나 그리워하던 것도 분명 그것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그 따듯함이라는 것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아니 어떻게 얻는 것일까?
꽃의 경우를 보자면, 꽃이 하는 일은 태양으로부터 그 존재방식을 배우는 일이다. 꽃은 태양빛을 향해 서서, 그 빛을 내재하여 자신의 것으로 삼으며, 이제 스스로 그 빛을 발산한다.
이처럼 따듯함은 스스로 빛을 향하는 자가, 그럼으로써 스스로 빛을 발하는 자가 갖는 특성이다.
존재의 빛, 그것이 곧 따듯함의 정체인 것이다.
이것은 당연히 따듯한 척하는 어떤 개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얀 색으로 자신을 색칠해서 밝고 환한척 하는 그런 화장의 능력을 뜻하지도 않는다.
일부러 나쁜 척하는 모습만큼이나 한껏 힘을 줘서 착한 척하는 모습도 병든 꽃이다. 똑같은 패션정신병이다.
병을 동경하지 않으면 그것이 건강성이다. 건강한 것은 강하다.
그리고 강한 것만이 따듯할 수 있다.
세상에서 제일 강한 것은 존재이기에, 존재는 자연스레 제일 따듯한 성질을 갖는다. 다른 여분의 어떤 것도 필요없이 그저 존재 그 자체만으로 따듯한 빛을 스스로 펼쳐낸다.
그러니 너무 멀리 그늘을 향할 필요가 애초부터 없었다.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이 도시의 빛이었던 것이다.
개성과 재능을 위해 어지간히도 착한 척하고 약한 척하던 그 모든 모습을 전부 다 기각하고 돌아보자.
그 모든 것이 다 거짓이었고, 그것들이 우리에게서 다 없어진다면, 우리에게는 무엇이 남을까?
따듯한 마음.
그것만 남는다.
우리가 정말로 따듯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따듯한 사람이었다는 그 장면들만이 이제 다가온다.
좀 신기하다. 우리 자신이 개성있기를 또 재능있기를 바라며, 곧 그것들로 말미암아 무엇인가 사랑받는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기를 바랐던 그 모든 헛짓거리를 다 기억에서 밀어내고 나니, 우리가 언제나 따듯한 사람이었다는 그 사실로만 남는 이 현상은.
이것은 우리가 존재하는 척하기 위한 일을 그만두니 바로 존재하게 된 것과도 같다.
액세서리의 작위적 빛을 치우면 거기에서는 우리 자신이 내던 본연의 빛이 발견된다.
살아있는 존재라면 누구나 다 갖고 있는 그 빛.
그 따듯한 마음이.
그래서 도시에는 그늘이 있지만, 꽃도 있다.
아니, 도시에서도 꽃이 있다. 어디에나 사람이라는 존재가 있는 곳이면 따듯한 마음이 있기에, 그 빛이 꽃을 피운다.
자신이 다만 이 따듯한 사람임을 알게 된 이가 있다면 그는 살아갈 것이다. 도시에서도 이 꽃같은 삶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