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의 거울

"실존주의 꿈분석"

by 깨닫는마음씨




거울은 전통적으로 마음에 대한 비유로 자주 쓰여온 소재다. 마음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비친다. 혹은 떠오른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잔잔한 수면이 다양한 형상의 파도로 일어나듯이.


그래서 자신이 지금 어떠한 존재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는지를 알고자 하는 이는, 곧 자기 자신이 궁금한 이는 마음 앞에 서곤 한다. 마음은 아주 정직하게 지금 자신이 무엇인지를 비추어주기 때문에.


물론 그 마음의 상이 개인에게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는 많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좋아하는 이는 드물다. 나아가 거울에 비치는 상은 무엇인가 이해하기 어려운 형상으로 드러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냥 봐서는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으며, 우리가 일상적으로 준거하여 살아가던 어떤 논리법칙과 상식을 벗어난 장면들을 우리는 거울 안에서 자주 목격하게 된다.


이런 것을 '꿈'이라고 말한다. 쉽게 말해, 개인의 마음속에서 펼쳐지는 판타지다.


이 판타지가 우리에게 대체 무엇을 말해주려고 하는가, 또는 우리가 판타지의 이해를 통해 어떤 유익한 것을 얻을 수도 있는가, 라는 궁금증을 갖게 된 이들이 이제 꿈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또 그 탐구의 방법론을 구성하게 되었다. 이것이 꿈분석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어떠한 이들은 꿈을 상징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꿈이 드러내는 이미지는 이미지 그 자체보다 더 심원한 모종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라고 가정한 것이다. 그것이 어떤 차원의 것인지는 연구자들마다 조금씩 상이하지만, 어떻든 꿈이 담고 있는 이 심층적 의미를 파악해보려는 작업은 공통적으로 구성될 수 있었다.


이를테면, 프로이트에게 있어 꿈은 욕망의 구조를 암시하는 상징으로 드러나는 것이었다. 그는 개인의 꿈을 분석함으로써 그 개인이 은폐하고 있는 욕망을 이해하고 욕망을 낳는 무의식의 구조에 다가갈 수 있다고 믿었다. 만약 신들이 만들어낸 어떤 운명적 구조에 자신이 사로잡혀 있는지를 이해하게 된 이라면, 그는 그 자신을 옭아매던 운명의 무거움으로부터 한결 자유롭게 자신의 현실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즉, 프로이트의 거울에는 자신이 모르는 자신이 비치고 있던 것이며, 그것은 거울을 보고 있는 의식적 자기를 벗어나 늘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려고 하는 제법 성가신 것이었다. 프로이트는 그 제멋대로의 동작이 함축하고 있는 어떤 구조적 이유를 파악하면, 이제 개인이 그 동작에 덜 휘둘리며 자신의 통제권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기획을 '무의식의 의식화'라고 말하며, 이것은 자기가 모르는 자기를 언어화함으로써 앎의 영토에 귀속시키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상징의 의의는 여기에서 출현한다. 꿈을 상징으로 다루어야만 언어화는 가능해지고 무의식의 통제 역시도 가능해지는 까닭이다.


융도 이러한 방향성을 공유한다. 그러나 몇 걸음 더 나아간다. 진보의 의미가 아니다. 표현 그대로, 조금 더 갔다는 것뿐이다. 그 앞이 낭떠러지이든 대평원이든 간에.


융에게 있어 꿈의 상징성은 더욱 확장되고 핵심화되는데, 그에게 있어 상징이란 인간에게 초월적 힘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즉, 개인이 그에게 다가오는 무수한 상징들을 경험함에 따라, 그럼으로써 그것들을 언어화시킬 수 있게 됨에 따라, 인간은 자신이 몰랐던 미지의 힘을 얻게 된다고 융은 믿었다.


자기가 모르는 자기라는 것이 프로이트의 입장에서는 조금 더 성가신 것이었다면, 융에게는 자기가 모르는 자기야말로 더욱 진정한 자기로서의 실현가능성을 감추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 위상과 힘은 개방되어야 할 것이다. 은폐된 것이 펼쳐진다는 상징의 의미 그 자체로서.


이것은 거울 속 무의식의 시련들을 통해 하나의 영웅이 태어나는, 또는 한 개인이 영웅으로 거듭나게 되는 그 과정을 묘사하는 영웅신화의 조직이었으며, 융에게 있어 꿈분석이란 영웅을 탄생시키는 어떤 초월적 힘의 교류이자 그 포섭의 장이었다.


이처럼 프로이트와 융을 핵심적으로 변별짓는 것은 개인무의식이니 집단무의식이니 같은 것들보다는, 그들이 조금 더 신중했는가 아니면 과감하게 조금 더 갔는가, 하는 그 발걸음이 풍기는 색조의 차이다.


잘 알려진 바대로, 스타워즈나 어벤져스 같은 현대의 영웅신화들은 노골적으로 융의 영향력하에서 만들어진 작품들이다. 자신의 삶에서 거울을 자주 보면, 자신 역시도 제다이의 기사나 아이언맨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일은 분명 과감하게 조금 더 가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프로이트가 아무리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지라도.


그렇다면 이제 실존주의 꿈분석이라는 것은 어떠할까?


우리는 프로이트에게서 신중한 현실주의의 모습을 보았고, 융에게서는 낭만적 이상주의의 모습을 보았다.


실존주의는 이 둘 다 아니다.


실존주의는 존재론이다. 또는 실재론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요는 리얼리즘이다.


이것은 거울에 비치는 모든 것을 존재현상으로 보려는 방식이다. 그러니 가장 많이 존재를 보려는 방식, 최대치의 존재를 보려는 방식이라고 말해보면 어떨까.


뒤집어 말하면 이런 것이다.


거울에 비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다. 아무리 말이 되지 않더라도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드래곤 같은 것이 비친다면, 오, 우리는 드래곤은 존재한다고 말해야 한다.


거울 속에서.


마음 안에서.


드래곤이라는 존재의 의미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존재의 의미를 스스로 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체적이다. 그러니 존재는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한 대상물이 아니며, 대상물이 될 수도 없다.


드래곤은 우리 안에 숨겨진 어떤 욕망의 구조를 밝히기 위해 신중하게 접근되어야 할 대상물이 아니며, 우리를 영웅으로 만들어줄 낭만적인 대상물 또한 아니다.


우리는 차라리 이렇게 말해야 한다.


거울에 지금 비치고 있는 내 존재는 드래곤이라고.


곧, 내 마음은 드래곤이다.


이것은 왠지 모르게 익숙한 문장이 아닌가. "내 마음은 호수다."라는 표현을 통해 우리가 '은유'라는 것을 배울 때 자주 봤던 그 문장의 형식이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함께 연결지어지는 방식. 연결되지 못할 것 같은 존재와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최대치가 될 수 있는 그 방식.


실존주의 꿈분석은 이 은유의 방식이다.


'은유의 거울'에는 여러 존재방식이 비친다. 엄연히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자신을 개방중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러한 존재를 이해하는 일이다.


이것은 상징을 다루는 방식처럼, 내 마음은 왜 드래곤일지 그 드래곤의 의미를 궁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일까?


드래곤의 의미를 아는 이는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이다.


드래곤만이 자신이 드래곤으로 존재하는 그 의미를 안다.


그러니 드래곤에게 묻는다.


왜 드래곤으로 존재하게 되었냐고.


그러면 이제 드래곤이 대답할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왜 자신은 자신인지를.


존재에게 묻는 자가 출현함으로써, 존재가 스스로를 펼쳐내게 된 것이다.


우리가 꿈에서 보는 모든 것은 다 존재현상이다. 그 안에 어떤 심층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그대로의 존재현상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파인애플이라는 과일을 보았다고 해보자. 그 안에는 어떤 숨겨진 인간의 욕망이라든가, 영웅의 엑스칼리버 같은 것이 감추어져 있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그것은 그냥 파인애플이며, 우리는 다만 파인애플이라고 하는 그 존재현상이 낯설 뿐이다.


실존주의 꿈분석의 아주 독창적인 부분은 바로 이 지점이기도 한데, 실존주의 꿈분석은 우리가 잠잘 때 꾸는 꿈뿐만이 아니라 눈을 뜨고 생활하는 일상의 현실에서도 바로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본다. 있는 그대로 드러나있는 존재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하지 않고, 그 안에 숨겨진 어떤 것들을 찾아내려고 본다. 그렇게 존재에게 직접 묻지 않고 우리가 가상의 소설을 쓰려고 한다.


우리는 깨어있으면서도 꿈꾸고 있는 것과 같은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니 실존주의 꿈분석은 단지 꿈이라고 하는 특정한 소재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생활의 전반에 적용될 수 있다.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다채로운 존재사건들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의 방법론이 되어준다. 무엇보다 인간이라고 하는 우리 자신의 존재가 가장 아름답고 멋진 것으로 실감되는 이득이 생겨날 것이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 그 이상으로 모든 존재방식을 다 비추고 있는 거울이라니, 그 모든 것을 다 담고 있는 거울이라니, 그것은 흡사 존재의 근거라고 불려야 하지 않겠는가. 존재 그 자체라는 표현도 합당할 것이다. 아주 거대한 창조와 생명의 바다 같은 것. 그런 것이 우리 안에 있어서, 우리가 인간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인간은 마음으로 사는 존재, 자기 안에 있는 그 거대한 거울로 사는 존재다.


그러한 인간으로 말미암아, 거울 안에 비치는 모든 것은 그 존재함이 긍정된다. 실존주의 꿈분석은 이 존재긍정의 일이다. 끝없는 존재의 긍정, 긍정, 그리고 또 긍정이다.


마녀의 꿈을 꾼 어떤 이가 있다. 여기에서 마녀라고 하는 것은 어떤 상징인가? 은폐된 어떤 욕망을 함축하는가? 또는 그의 안에 있는 아니마나 아니무스의 현현인가? 이러한 관점들과 아무 상관없이, 우리는 있는 그대로 보이는 마녀에 대해 물을 수 있다.


"마녀룰 보면 어떤 느낌이 들어요?"


"무서워요."


마녀라고 하는 존재는 지금 무서움의 감각으로 펼쳐나있다. 그 존재가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존재 자신의 감각이다.


그럼 이제 우리는 마녀에게 직접 물을 수 있다.


"마녀는 왜 무서워해요?"


"사람들이 해칠까봐 무서워서요. 아무 잘못도 안했는데 다 혼내는 것 같고, 착하게 살고 싶은데 다 잘못했다고 하고, 너무 무서워요."


"그렇게 무서워하는 마녀를 보면 어떤 느낌이 들어요?"


"너무 슬프고 속상해요." [울음]


그는 지금 마녀의 진실, 그 의미에 접촉한 것이다. 마녀라고 하는 존재가 무엇인지를 이해한 것이다.


누구에게 이해받지 못한 그 슬픔이 이제야 긍정되었다. 슬픔의 존재방식이 긍정되었다. 인간이 슬픔으로 존재해도 된다는 현실이 긍정되었다. 그는 이제 마음놓고 울 것이며, 그것은 소외된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자신이 슬퍼할 수도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다시 회복하게 된 긍정의 눈물이다. 인간을 씻겨주어 새롭게 인간의 의미를 드러내는 그 눈물이다.


상담이라는 것은 대화를 통해 존재의 회복을 목적하는 그 일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실존주의 꿈분석은 그 자체로 그러한 목적에 가장 정확히 부합하는 일이다.


우리는 존재를 긍정함으로써 그 존재의 회복을 돕기 위해 일한다.


거울에 대한 우리의 신뢰가 이 일을 가능하게 한다.


실존주의와 친밀한 전통인 선(禪)에서는 거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애초 더렵혀질 수도 없고, 깨질 수도 없으며, 일그러질 수도 없는 것이라고.


거울은 그 자리에서 다만 긍정하고 있을 뿐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며 비추어내고 있다.


그 거울의 힘을 빌려 우리는 작업하는 것이다.


드래곤도, 마녀도, 용기사도, 트롤도, 다 거울에 그대로 비추어지기만 하면, 곧 존재하는 것이 그 존재를 부정당하지 않고 지금 존재하는 그 모습 그대로 드러나기만 하면, 그것은 거울의 힘으로, 바로 존재 자체의 힘으로 회복된다.


거울이 온전하니, 거울 안에 있는 모든 것도 온전한 것이다.


거울이 온전함을 결코 잃을 수 없으니, 거울 안에 있는 모든 것도 영영 온전한 것이다.


"내 마음은 드래곤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온전한지에 대한 그 은유였다. '은유의 거울'이 한결같이 비추고 있던 그 존재의 사실이었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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