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는 메시아다"
메시아는 히브리어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뜻한다. 그 머리에 기름이 부어진다는 것은 왕으로 선택되었다는 뜻이다. 이처럼 메시아는 그 기원에 있어 '정치적 지도자'를 의미하는 표현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지도자에게는 목자의 역할이 함께 부여되곤 했다. 양에게는 어떤 정신적 중심이 필요하다. 양들을 돌본다는 것은 단지 물리적 생존의 문제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그들의 정신적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 곧, 목자라는 것은 '정신적 지도자'의 표현인 셈이다.
'정치적 지도자'와 '정신적 지도자'가 하나인 인물로 드러나는 모습을 제정일치라고 부른다. 고대사회는 이 제정일치의 사회였다. 쉽게 말해, 무당이 왕인 시절이었다. 그것도 그냥 왕이 아니라 선택받은 '왕 중의 왕' 또는 '왕 위의 왕'이다.
그러나 예수가 등장하면서 메시아의 의미는 바뀌게 되었다.
예수는 자신은 정치적 지도자가 아니라고 선을 그으며, 그러한 왕 따위의 것이 되려고 이 지상에 온 것이 아님을 천명했다. 그리고는 정신적 지도자인 목자의 역할만을 남겼다. 제정의 분리, 정치와 종교의 분리가 일어난 것이다. 종교는 비로소 정치적 권력의 의지에서 해방되어, 순수한 종교적 운동으로 펼쳐지게 될 수 있었다.
자신의 열등감을 보상하기 위해 정치적 권력을 추구하던 이들에게는 이는 몹시 달갑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제일 먼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그렇게 당사자의 입을 영영 봉한 뒤, 이제 그들이 한 일은 예수라는 인물을 날조해내는 일이었다.
예수는 왕 중의 왕이 되기도 했고, 또 왕들을 지켜주는 멀린 같은 수호의 성령이 되기도 했으며, 나아가 예수 자신이 무슨 진보정치의 지도자이자, 민주시민들을 양성하기 위해 힘쓰던 사회적 혁명가였다는 소설들도 쓰이게 되었다.
목자의 후예를 자처하던 이들은 또 무슨 일을 했는가? 누구보다 정치화되어 좌우로 분열된 뒤, 각각의 진영논리를 그것이 마치 예수의 메시지인 것처럼 설교하는 정치적 선동을 이루어나갔다. 흡사 주체사상교육을 하듯이, 이 일은 가엾고 무지한 어린 양들을 계몽시켜 사악한 세력의 손아귀로부터 지켜내겠다는 뜨거운 정치운동권의 열의 비슷한 것으로 집행되었다.
예수가 가장 부정한 것을 예수의 이름으로 파는 방식으로, 이 열등감이 가득한 정치세력들은 결국 예수를 가장 조롱하고 무시하는 일에 성공한 것이다.
고대사회에서 일어난 일이다.
서기 2025년도의 아주 먼 고대사회에서.
아주 멀리도 그렇게 고대로 퇴행해버린, 이 미디어(mythia)가 지배하는 오늘날의 세상에서.
고대에나 현대에나, 미디어가 지배를 위해, 즉 권력의 획득을 위해 하는 일은 동일하다.
미디어는 메시아를 날조해낸다.
신화의 스토리텔링 작법을 통해 누군가를 신화적 인물로 만드는 일이 미디어의 주된 활동의 내용이다.
실제의 메시아적 대상이 있다면 그러한 이를 최대한 오염시키고 굴절시켜서 미디어 자신의 정치적 입맞에 맞게 변형시키고, 그러한 대상이 없으면 이제 적절한 후보를 선정해 그에게 기름을 부어 메시아로 만들곤 한다. 물론 후자의 경우가 더 빈번하게 일어난다.
반짝반짝 빛이 나고 윤기가 흐르게 만드는 미디어의 이 '기름부음'은 메시아를 만드는 장치인 동시에, 메시아를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기제이기도 하다. 만약 미디어가 메시아로 신격화해준 이가 미디어의 통제에 따르지 않는 일이 일어난다면, 이제 거기에 불을 붙이면 된다. 대중들의 마녀사냥의 타겟이 되도록 여론몰이를 하면, 이미 기름이 부어져 있으니 활활 잘 타오를 것이다.
"미디어로 흥한 자, 미디어로 망하리라."
새로운 언약의 격언은 이제 이렇게 말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임을 우리는 오늘날 도처에서 목격한다. 새로운 별들이 떴다가 금방 지는 것은 자연의 섭리가 아닌, 이 세상의 신인 미디어의 의지가 작용한 결과다.
하나의 메시아의 필망의 운명조차도 미디어가 의도한 바인데, 그로 인해 미디어의 정치적 의도는 더 선명한 선전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까닭이다. "엄마 말 안들으면 너 저 아저씨처럼 되는 거야."라며 비루한 걸인의 모습을 전시해 아이에게 불어넣는 그 세뇌의 기능이다.
이러한 미디어는 사실 스스로를 가장 진정한 메시아로 자임하고 있는 중일 것이다.
미디어는 메시아 중의 메시아다. 그는 양들을 직접 키우기보다, 메시아들을 키움으로써 그 메시아들이 자신의 정치적 의지대로 양들을 조련하기를 획책한다. 그러다가 문제가 발생하면 그것은 그 해당의 메시아의 문제다. 메시아 중의 메시아로서의 미디어 자신의 위치는 결코 위협받지 않는다. 자신은 영원한 민중의 편이자, 친구이며, 그 눈이고, 그 양심이며, 그 영혼이다.
그러니 우리의 눈은 털려서 어두워지고, 우리의 양심은 털려서 척박해지며, 우리의 영혼은 털려서 공허해질 것이다.
거짓메시아를 섬기게 된 그 말로다.
정치적인 것이 종교적인 것을 참칭하는 이 일은 이 우주에서 가장 거짓된 성질의 것이다.
이것은 가장 상대적인 것이 가장 절대적인 것으로 위장하고 있는 그 모습이다.
절대성을 향한 인간의 본성인 종교심을 자극한 뒤, 그것을 상대적인 권력욕으로 바꾸어내서 자신이 갈취해먹기 위해 이러한 기만극은 시도된다.
오늘날 이것이 보편적인 인간착취의 현실이다. 미디어(mythia)의 핵심적인 문제는, 자신은 종교적인 어떤 것과 아무 관련이 없는 척하면서도, 실제로는 종교적 기능을 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즉, 여타의 모든 종교전통이 비판받는 그 기준에서 미디어 자신만이 자유롭다. 심지어는 자신이 종교적인 것의 비판자인 척하기까지 한다. 이처럼 그 자신에게도 적용될 비판으로부터는 안전하게 은폐되면서 그 권력만을 집행하는 이 비겁한 일은 미디어의 종족값이다.
미디어는 근본적으로 정치적이다, 이 말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 정치성이 종교성이라고 하는 인간의 가장 핵심적인 영역을 침범하며, 오히려 자신이 그러한 권위의 주체인 것처럼 사기를 치는 거짓메시아로 활동하니 문제가 되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정치무당'이 왜 그토록 많은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한국이 원래 무속의 나라이기 때문인 것도 아니다. 또는 사람들이 아직 전근대적인 상태로부터 충분히 계몽되지 않아서도 아니다. 단순하게 미디어(mythia)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미디어가 종교이자 정치인 시대. 다시 돌아온 제정일치의 시대인 것이다.
미디어의 주체가 권력을 쥐고서는 신과 같은 권위를 얻고 있으면서도, 또 그 권력 및 권위로 다른 모든 것을 자의적으로 재단하고 지배하는 그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원래 미디어의 건강하고 정의로운 비판의 기능이라며, 정작 미디어의 주체 자신은 어떤 투명한 공정성의 태도를 위장하여 자기만은 신성불가침의 성역으로 지켜지려 하는 그 위선과 기만이 이 거짓메시아의 시대에는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목자가 양들을 지키는 그림이 아니라, 양들이 양가죽을 뒤집어쓴 늑대를 지키고 있는 그림일 것이다.
우리 자신을 가장 착취하고 있는 것을 왜 우리는 가장 열렬히 수호하고 있는가?
이것은 영원한 심리상담의 주제다. 인지부조화라는 이름으로 그 설명이야 쉽지만, 그 용어가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 질척하고 음습한 어떤 맹목적 광기를 다 표현해줄 수는 없는 법이다.
미디어는 이 인간의 광기를 자극하고 공략한다. 어떤 원초성을. 미디어가 선정적이라고 말할 때는 19금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속성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뇌에 새겨진 집단주의적 추종의 역사와, 자기 엄마를 신으로 인식하던 그 개인사와, 또 한참 더 거슬러내려가 중심의 권력자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던 곤충 시절의 군집적 행동양식 등의 원초적인 감각을 자극해서 지금 현재에 재현하게 만드는 것이 미디어다.
이런 것을 흔히 퇴행이라고 부르는데, 미디어는 인간이 이 퇴행에 끌리게 하는 선정성을 본질적 속성으로 갖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보통 퇴행하게 될 때는 우리 자신에게 힘에 부치는 어려운 현실을 경험할 때다.
누구에게나 현실이 어렵고 힘든 시기일수록 사이비선동가들, 정치무당들, 거짓메시아들이 득세를 하는 이유다. 이들은 고민과 걱정이 없던 이상적인 낙원(대체로 엄마의 뱃속)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사람들의 퇴행욕을 자극하여, 자기에 대한 숭배를 이끌어내고, 그 힘을 갈취하며, 자기를 대단한 존재처럼 인식되게 하는 권위를 훔쳐내곤 한다.
힘든 사람들을 다 아동처럼 퇴행시킨 뒤, 자기가 이제 그 아동들을 지켜주겠다고 하는 신성한 엄마처럼 행세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또는 인간을 양으로 퇴행시킨 뒤에, 자기가 무력한 양들의 목자임을 자처하는 그 일이다.
제정일치는 바로 이 퇴행의 프레임을 전제함으로써 작동하는 것이다.
예수는 그렇다면 이 제정일치의 분리를 통해 어떤 것을 의도하려고 한 것일까? 순수한 정신적 지도자로서의 목자의 의미란 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의 본이다.
예수는 인간이라는 것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이기 위해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을 살았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예수는 양으로 퇴행해있는 이들 앞에서 인간이라는 것을 알림으로써, 그들이 양으로부터 다시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안내한 것이다.
퇴행이 아니라 순행이며, 그것도 초월적 순행이다.
퇴행의 역순을 밟는 정도가 아니라, 즉각적으로 인간으로 점프하는 일이다. 원래 그것이었던 것이 그것을 다시 찾는 일은 포탈을 통과하는 일처럼 극적인 법이다. 순식간에 바뀐다.
우리가 힘을 모아 조금씩 바꾸어나가는 것이다, 라는 아주 전형적인 거짓메시아들의 거짓말은 우리에게 이 극적인 현실이 찾아오지 않도록 방해하고자 하는 술책이었다. 우리가 불쌍한 어린 양이 아니라 온전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차마 믿기 어렵도록 만들려고 하던 세뇌, 바로 그것이었다.
미디어(mythia)는 최대치로 인간을 약하고 어린 존재로 집요하게 묘사하려 했으며, 예수는 최대치로 인간을 강하고 성숙한 존재로 다시 알리려 했다.
그래서 니체는 예수를 무척 좋아했던 것이다. 실존주의의 선구자인 키르케고르는 말할 것도 없다. 실존주의는 예수가 정말로 했던 그 일의 의의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실존주의가 우상파괴를 위한 망치로서의 주기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십자가에 못박는 자를 못박기 위해 그 망치는 준비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성립될 수 있는 신실존주의라면 어떨까?
그것은 아예 미디어(media)를 미디어(mythia)라고 정확히 인식한다. 그리고는, 낡은 권력의 신화로 인간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 아주 오래된 고대의 망집, 지배하는 엄마의 맹목적 광기와도 같은 그것들로부터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는 현실을 안내하기 위해 일한다.
과거의 실존주의는 부조리한 운명을 인간에게 부과한 신에게 반항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렸지만, 신실존주의는 동일한 의미로 미디어(mythia)에 반항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릴 것이다. 오늘날의 시지프는 그 자신이 새로운 신화가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신화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못을 빼내는 일.
그럼으로써 십자가에 못박힌 자를 자유롭게 하는 일.
이제 신실존주의는 망치이기보다는 노루발이 되어야 할지 모른다.
도덕주의, 정치적 올바름, 깨어있는 시민의 권리 및 의무, 정체성 추구, 성공의 신화 등과 같은, 미디어가 인간에게 부과한 그 모든 '형벌'로부터 인간을 빼내는 일이 신실존주의의 임무가 될 것이다.
예방의 차원은 더 중요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무수히 깔린 신화의 덫에 낚이지 않을 것인가? 그럼으로써 미디어의 거짓메시아들의 착취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신화의 작가인 거짓메시아들이 우리에게 부단히 요구하던 것은 무엇이었나를 먼저 떠올려보자. 그것은 무엇인가?
관심이다. 거짓메시아들은 지대한 관심을 바란다. 사기에 걸리게 하려면 먼저 사기의 소재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해야 한다. 말을 먼저 통하게 해야 논쟁에서 이길 수 있는 문제와도 같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갖지 않으면 거짓메시아에게는 사람들을 착취할 수 있는 통로 자체가 봉쇄된다. 그 출입을 허락받지 않으면 들어올 수 없는 흡혈귀의 생리처럼.
그래서 거짓메시아들은 자신들이 관심을 얻어야만 하는 이 일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교묘한 전략을 취한다. 그것은 역으로 자신이 사람들에게 지대한 관심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즉, 관심받고 싶어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자신이 먼저 관심을 주는 입장을 취해서 자신에게로 끌어온 뒤, 이제 통째로 포식하는 것이다. 자신이 먼저 투자했던 그 관심의 에너지까지도 물론 전부 다 회수된다.
그러니 우리는 단지 거짓메시아들에게 무관심해야 하는 문제만이 아니다.
우리 자신이 관심에 굶주려하는 상태에 있을 때, 이것은 포식하기 좋은 어린 양의 모습이다.
때문에 오늘날의 실존주의는 더욱더 심리학적인 방편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심리학은 결국 보이는 자기 자신뿐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자기 자신을 더 잘 알고 싶어서 출현한 전통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무지가 계속 쌓여간 것이 바로 존재의 허기다. 우리가 자기 자신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만큼, 우리는 그 존재의 허기를 이기지 못해 외부로 구걸활동을 벌이게 된다. 그것이 곧 관심을 구걸하는 행위다. 외부의 관심을 얻게 되면 공허했던 우리 자신의 존재가 충만해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심리학의 관점도 이 일의 효과성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러한 일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이 방식으로 존재의 허기를 채울 수 있다고 믿는 일은, 표현 그대로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 일과 같다. 아무리 해도 채워지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그 자원들은 다 거짓메시아들의 위장으로 흘러들어갈 것이다.
신실존주의는 신실존주의 심리학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잘 몰라 생겨난 존재의 허기를 공략하려는 거짓메시아들로 가득한 이 미디어(mythia)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를 자유롭게 뽑아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심리학이라는 노루발이며, 그것이 신실존주의의 실제적인 내용을 구성한다.
우리는 어떠한 대상에게 관심을 받아야 하거나, 관심을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그렇게 우리 자신으로 지금 드러나있는 인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인간을 이해해야, 인간을 바로 찾는다.
예수가 광야에서 보낸 시간은 엄연한 실존주의적 시간, 그것은 그 자신이 누구인지를 이해하기 위한 시간이었다. 예수는 자신이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실감했고, 그렇게 그는 인간과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하고 있던 인간의 목자였다.
우리가 정말로 의미하고 있는 목자는 이러한 인간으로의 안내자다.
인간을 이해해감으로써 인간이라는 것과 가까워지는 이가 바로 그 안내자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목자가 될 수 없을 것인가?
예수가 보여주었던 인간으로 사는 본이라는 것은 어쩌면 이것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었을 것인가?
그리고 신실존주의는 바로 이 해석을 계승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아감으로써 우리 자신의 목자가 될 때, 이제 어떠한 신화도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미디어(mythia)는 그저 아동들의 재롱잔치와 같은 여흥일 뿐이다. 누구도 그 안에서 신적인 것을 바라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우리에게 있으므로. 인간을 강하고 성숙한 인간 자신으로 만들어주는 그것이, 지금 인간과 함께하고 있으므로.
어린 양에서 목자로의 전환, 이것이 극적인 이유는 언제나 착각을 깨고 사실을 바로 찾는 일이 가장 감동적인 일인 까닭이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살고 있으며, 그 사실에는 '기름부음'이 필요하지 않다. 그런 것 없이도 우리는 처음부터 이 인간이라는 방식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그렇게 우리의 존재가 가장 강하고 귀한 것의 최대치로 무엇보다 우선하고 있었다는 사실 속에 있다면, 이것은 실존주의이며, 오늘날을 위한 신실존주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