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꼭두각시"
자신의 힘으로 운명을 만들어가겠다고 하는 일은 실존주의인가?
그렇게 자주 오해된다. 프랑스의 유명한 소설가들이 이러한 입장을 실존주의라고 말했던 까닭에 이 오해는 더 심화되기도 하였다.
"규정된 본질이 없다."라는 실존의 의미가 "그래, 그렇다면 이제 내가 자유롭게 나를 만들어가겠어!"라는 언술로 이어지는 것은 그다지 자연스럽지 않다. 오히려 여기에는 어떤 억지스러운 치기어림이 느껴진다.
그것은 자신이 집행하는 펜의 힘에 도취된 어떤 예술병적인 그 무엇에 가까울 수 있다.
흡사 소설을 써내려가듯이, 마음에 안드는 이야기는 자신이 펜으로 다시 집필해서 새로운 운명을 만들겠다고 하는 이 작가의 유형은 최소 실존주의자로 분류되지 않을 것임은 분명하다.
오히려 그것은 운명의 세 여신의 모습을 더욱 닮아있을 것이다.
한 여신은 실을 뽑아내고, 두 번째의 여신은 실의 길이를 재단하며, 세 번째의 여신은 실을 끊는다.
이것은 글의 구상과 집필 그리고 편집에 대한 비유로 읽을 수 있다.
인간이 철이 없던 시절, 자신의 글로 세상을 바꾸겠다고 하던, 심지어 그런 생각을 진지하게 믿던 작가들은 얼마나 많았을까. 자신이 쓴 글로 인해 혁명이 일어나고, 민주주의가 펼쳐졌으며, 낡은 구조가 전복되었다고 믿어 의심치않던 이들은 오늘날 유행하는 이세계 판타지물의 선배들이다.
자신이 세상의 흐름을 결정하고 인간의 운명을 원고지 위에서 조작할 수 있다고 믿던 이들, 그들이 되고자 꿈꾸던 것이 운명의 세 여신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었겠는가?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미디어(mythia)의 작가들의 실체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겠는가?
글 하나로 세상을 호령하고 천지를 개벽하게 만든다는 조선의 문인 판타지와, 글을 통해 인간의 이성을 깨우고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운명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게 만든다는 서구근대의 계몽 판타지가 결합해, 한국의 미디어 작가론을 형성했다. 작가라는 이유로 자기가 중요한 시대적 인물이라도 되는 줄 착각하는 유형들도 많아졌을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자신에게 운명을 관장할 힘이 있다고 믿는 착각이며, 동시에 언어를 통해 바로 그러한 힘이 담보된다고 믿는 착각이다.
이러한 착각을 근거로 이루어지는 활동을 우리는 주술이라고 부른다.
주술은 음침하고 괴상한 비합리적 언어의 소재가 아니라, 무척이나 밝고 단정한 합리적 언어의 소재다.
근대의 관점에서 인간에게 매우 어두운 시절이었다고 비판하는 중세가 주술의 시대였던 것이 아니라, 실은 이성적 언어의 빛으로 가득차 있던 근대야말로 주술의 시대였다.
그렇다면 탈근대는 비이성적인 것을 복권시켰으니 좀 다른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것은 그저 하나의 언어에서 다원주의적 언어로의 전환이었을 뿐이다. 하나의 빛이 아니라 다양한 스펙트럼의 광선들 사이로 숨어들어간 언어는 더욱 복잡다단해졌고, 이에 따라 언어의 거미줄 또한 한층 더 촘촘해졌다. 그러니 오늘날의 탈근대사회는 더욱 주술사회의 면모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이 세상을 밝히는 언어로 괴력난신을 물리치고 다스린다고 하던 조선 선비들의 착각처럼, 언어와 주술은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언어가 주술보다 우월한 어떤 선함과 권능의 기제인 것이 아니라, 언어 자체가 주술이다. 우리가 언어로 자신과 이 세상의 운명을 생각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주술적인 것이다.
그리고 주술은 그것이 향하는 대상을 묶는 동시에 그 시전자를 함께 묶는다.
운명의 세 여신들은 자신들이 다루고 있는 운명의 실에 그녀들 자신이 가장 먼저 묶여있는 존재들이다.
자신이 다른 이들을 음모론의 언어로 조종하고자 하는 이는, 그 자신이 음모론의 피해망상 속에 가장 먼저 사로잡혀 있다.
미디어(mythia)가 만들어낸 신과 그 신도인 대중의 관계가 늘 이러하다.
대중의 신은 자기가 대중들을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말만 하면 다들 동조하고 지지하며 자기를 따르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이다. 자신을 어떤 상위의 지도자 같은 것으로 경험하기도 할 것이다. 사람들 앞에 서서 그들을 바른 길로 이끌고 있는 어떤 선구자적인 인물로.
이러한 입장은 선량한 아이들을 저 지상낙원으로 데려가고자 하는 신성한 엄마의 모습으로 묘사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신성한 엄마가 자신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이들을 그녀의 꼭두각시 인형으로 만들어야 한다. 실로 그들을 묶어 조종하지 않고서는, 인간이란 원래 다 제각각 흩어지려는 본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미디어의 신에게는 인간을 인형으로 만들기 위한 전략이 먼저 궁구된다. 그것은 욕망을 자극하는 것이다. 그것도 대상적 지향을 가진 방식으로 욕망을 이룰 수 있다는 아주 유치하고 말초적인 방식으로.
인간은 언제 가장 인형처럼 단순해지는가?
대상에 집착하게 될 때다.
자신의 화를 풀려면 대상에게 복수를 해야 한다, 식의 말을 하는 이들이 있다. 이것이 인간을 바보인형으로 만드는 주술이다. 대상을 자기 생각대로 다루게 되면 자기의 욕망이 실현될 것이라고 믿는 일은 쉽다. 또한 이 대상적 욕망을 자극하여 사람들을 선동하는 일도 쉽다.
저 놈이 나쁜 놈이다, 저 놈만 없애면 다들 돈도 잘 벌고 잘 살게 될 것이다, 이러한 말들은 얼마나 알기 쉬운가? 또 이 말들이 얼마나 우리를 흡사 바보가 된 것처럼 폭력적이고 야만적으로 움직이게 만드는가?
더욱 중요한 물음은 이것이다.
우리가 신성한 엄마의 꼭두각시 인형이 되어 대상에 대한 모종의 행위를 집행하고 난 그 끝에, 정말로 우리의 욕망은 실현된 적이 있는가?
그렇게 해서 우리가 이룬 것은, 우리를 조종하던 그 미디어의 신의 권위를 한층 더 강화시켜준 그 일뿐이다.
우리의 생각대로 대상을 다루게 되면 우리가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던 이 방식은, 결국 우리가 미디어의 생각대로 다루어지는 대상이 되어 미디어의 신이 힘을 얻게 만드는 그 일을 성취시켰다.
이것이 대상화의 문제다. 대상화를 시도하는 이는 그 자신이 대상화되며, 곧 착취된다.
물론 이것은 미디어(mythia)가 만들어낸 신들에게도 적용되는 얘기다. 자기가 신성한 엄마가 되고자 하는 욕망을 위해 사람들을 아이처럼 대상화해서 스스로를 신성한 엄마로서 입지화하던 그 미디어의 신들은 결국 힘을 얻어 무슨 일을 하는가?
자기가 착취한 이들의 잠정적인 분노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다시 또 사람들을 만족시킬 거짓말과 사기를 만들어내는 일에 그 힘을 동원한다. 즉, 또 다른 거짓의 악역을 만들어 대상화한 뒤, 바로 저것 때문에 사람들의 행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새로운 선동을 끊임없이 시도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음모론이다. 양치기소년의 문제와 같다. 음모론을 한 번 시작한 이는 계속 음모론을 만들어내야 하며, 늘 자기가 속인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행위해야 한다.
그러니 미디어의 신은 실은 그 신도들에 대한 어떤 상위의 입장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만든 유치한 대상화의 문법에 따라 사람들 또한 유치한 인형의 수준으로 만든 만큼, 그 자신도 그 유치한 인형에게 비위를 맞추어야 하는 동일한 유치함의 수준으로 전락한다.
상호구속. 꼭두각시 인형을 조종하는 이가 역으로 그 자신도 꼭두각시 인형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현실과도 같다. 흡사 어떤 괴기담의 내용처럼.
왜 이러한 일이 생겼는지는 분명하다.
언어로 운명을 다룰 수 있다는 주술에 빠졌기 때문이다. 이것을 다시 표현해서 '대상화의 주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원래 모든 주술은 사물과 현상의 대상화를 전제한다. 대상화라는 것은 상대적인 언어로 지시될 수 있다는 것, 곧 언어화다. 그렇게 대상적 언어화가 가능해야 비로소 주술이라는 것이 시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운명이라는 것을 대상화해서, 운명을 우리 자신의 꼭두각시로 만들고자 했기에, 우리 자신이 정확하게 운명의 꼭두각시가 된 것이다.
이를테면, 자신의 운명을 대상화해 조종함으로써 자기가 대단한 존재가 되려는 욕망을 이루고자 했던 이가 미디어(mythia) 주술을 집행해서 미디어의 신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제 사람들의 운명 또한 대상화해 조종함으로써 자기가 그 모든 운명을 더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보다 전능한 신이 되기를 꿈꾸었다.
엄마가 아이를 조종할 때 쓰는 당근과 채찍을 교차하는 그 방식으로 사람들만 더 잘 조종하면 자신의 욕망이 이루어질 것이라며, 미디어의 신은 이제 그의 신도들에게 더욱 대상적으로 집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는 마찬가지로 자신의 운명을 대상화함으로써 자신이 대단한 존재가 되려는 욕망을 이루려던 사람들이 미디어의 신을 섬김으로써 그 욕망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디어의 신이 반드시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자신있게 선동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람들의 안에서만 맴돌고 있던 그 유치하고 말초적인 욕망의 언어를 미디어의 신이 대신 말해주니, 사람들은 편리한 자판기를 얻은 것만 같았다.
아이가 엄마를 조종할 때 쓰는 순종과 반항을 교차하는 그 방식으로 미디어의 신만 잘 조종하면 자신들의 욕망이 이루어질 것이라며, 신도들은 이제 그들의 미디어의 신에게 더욱 대상적으로 집착하게 되었다.
이로써, 이 모두는 다 서로의 꼭두각시이자, 관계의 꼭두각시이며, 가장 큰 차원에서 운명의 꼭두각시가 된 것이다.
미디어(mythia)는 이처럼 우리 모두를 운명의 꼭두각시로 만든다.
미디어의 핵심기제인 스토리텔링이란 결국 무엇인가? 그것이 곧 대상화다. 대상화의 기제를 통해서만 미디어는 미디어의 효과를 창출하여 미디어로 작동할 수 있다. 그러니 미디어의 힘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이는 반드시 미디어에 의해 보다 운명에 종속되는 귀결을 맞는다.
자신이 스토리텔링을 통해 자신의 운명에서 벗어나 새로운 운명을 만들 수 있다고 시도하던 이가, 이제는 언어로 만들어진 그 가짜운명의 거미줄에까지 걸려 더욱더 부자유하게 구속되는 셈이다.
그래서 대상화의 주술은 언제나 스스로 묶이게 되는 자승자박의 일이다.
떠올려보면 모든 음모론의 귀결이라는 것이 그러하다. 음모론을 만들어낸 자기 자신의 논리가 결국에는 스스로를 공박하게 된다.
불교라면 이러한 대상화의 문제에 대해 더욱 간명하게 핵심을 전한다.
대상화는 완전한 착각이다. 대상에게 하는 일은 다 자신에게 하는 일이다. 반드시 자신에게 돌아온다. 남을 조종하고자 하는 이는 그 자신이 조종되고, 남을 몰락시키려는 이는 그 자신이 몰락되며, 남을 착취하는 이는 그 자신이 착취된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는 스토리텔링이 성립되지 않는다. 정치와 같다. 적이 있고, 상대가 있어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 스토리라는 것이다. 적이 없다면 갈등이 출현하지 않을 것이며, 갈등이 없으면 스토리라는 것이 창출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미디어는 일부러 대상화의 기제를 통해 임의의 적을 만들어 선동하는 것이다. 스토리텔링이 계속 이루어져야 미디어 자신이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적이 있고 갈등이 있어야 미디어는 돈을 번다. 평화롭고 안온한 현실을 가장 원하지 않는 것은 미디어다. 미디어의 음모론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세상은 온전한 세상이다. 그러한 세상에서는 자기는 여지없는 사기꾼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기에.
그러니 미디어는 늘 갈등 중인 세상의 그림을 음모론적 가상으로 펼쳐내며, 이것이 고된 인간의 운명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 정치의 진영논리까지 개입되면 지옥도가 완성된다.
한쪽에서는 늑대인간의 모습을 한 북한군들이 똘이장군의 시체를 탱크로 짓밟으며 막 서울로 쳐들어오고 있는 중이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어떤 개기름 흐르는 얼굴의 돼지독재자가 광장에 모인 민주시민들을 기관총으로 난사해 학살하고 있는 중이다. 미원 안에 들어간 수입소고기 분말을 먹은 사람들은 광우병 좀비가 되어 이미 한국의 인구수는 반토막이 났고, 나머지 절반은 강남 지하에 세워진 거대한 대형교회의 아편굴 속에서 마약에 취해있는 중이다.
이 모든 사태가 벌어진 것은 다 렙틸리언인 트럼프에게 사주된 검사들 때문이며, 지구를 지키라는 특명을 받은 은하함대 아쉬타 사령관이 이를 막기 위해 수많은 정의의 인권변호사들을 한국에 내려보내고 마이클 잭슨 내한공연도 추진했으나, 부라보콘이 2500원이 되는 일은 결국 막을 수 없었다. 검사들 때문에 서민경제는 끝장이 났다. 엄마들은 이제 캣맘이 되는 대신에 자신의 아이를 먹이기 위해 고양이급식소에서 사료를 훔치러 다녀야 하며, 아빠들은 죄다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가 중국에 바칠 비브라늄 광석을 채굴해야 한다.
아무튼 뭔가 대단히 나쁜 대상이 있다. 그 대상 때문에 자신의 삶이 불만족스럽고 엉망이 되었다. 그러니 그러한 대상이 꼭 있어야 한다. 그것만 해치우면 자신의 인생이 바로 행복해질 수 있는 그런 마법같은 소재가.
거듭 말하지만 이것이 대상화의 주술이다.
대상을 바꿈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이 기획은 현대의 심리치료론들을 통해 철저히 기각되기 이전에, 이미 실존주의에 의해 기각당한다.
운명을 대상화하면 오히려 운명에 종속되는 이 원리를 일찌감치 눈치채고는, 우리가 운명의 꼭두각시가 되는 일로부터 정말로 해방되는 길을 마련하고자 했던 것이 실존주의다. 심지어 그 자신이 더는 실존주의자이기를 거부한 카뮈조차도 운명에 대한 실존주의적 방식에 대해서는 아주 명료하게 얘기했다.
붓다에게서도, 니체에게서도, 키르케고르에게서도, 베르쟈예프에게서도 분명하게 말해지는 이 길은 무엇일까?
자신의 삶이 오롯하게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전형적으로 오해되는 바, 모든 것이 다 우리 자신의 잘못이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항상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있어야 한다는 전제 속에서, 잘못된 것을 찾으려 하지 말고, 자신의 삶에만 집중하라는 것이다.
자신의 삶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의 총체다.
누군가는 무인도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통해 오두막집을 짓고, 물을 마련하며, 사냥을 하게 되는 반면,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자신을 이러한 상황에 빠지게 만든 것 같은 신자유주의와 리먼 브라더스 사태를 원망하다가 굶어죽어간다.
우리에게 운명이란 정말로 무엇인지를 기억해보자.
우리에게 운명이란 언제나 우리 자신의 삶이다. 우리는 어떻든 이미 이 삶에 태어난 운명이고, 이 삶을 살게 된 운명이며, 언젠가 이 삶이 떠나갈 운명이다. 삶에 관한 본질적인 그 무엇 하나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우리는 삶에 대해 불가항력이다. 우리의 삶이야말로 우리에게는 운명 그 자체인 것이다.
그렇다면 실존주의는 이제 이렇게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불가피한 운명이라면, 그 운명을 우리 자신의 편으로 삼으라고. 그것과 가장 가까워지고 친밀해지라고.
여기에서 니체의 저 유명한 표현이 나온다.
아모르 파티(amor fati), 단어 뜻 그대로 '운명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이 늘 공정하고 올바른 것이니, 자신을 꾹 눌러참고 한번 받아들여보라는 뜻이 절대로 아니다.
세상에, 즉 미디어(mythia)가 주술로 만든 그 모든 가상현실에 낚이지 말라는 것이다. 미디어에 의해 만들어진 세상은 어그로로 가득 차있다. 어떻게든 우리를 '운명의 실'로 낚아 함께 지옥도 속으로 끌고 들어가려고 한다. 때릴수록 더 성가시게 커지는 사과에 대한 얘기를 우리는 이솝우화에서 들어보았다. 미디어가 조장하는 일이 정확하게 그것과 같다. 개입하면 할수록, 뭔가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는 복잡한 거미줄 속에 더욱 묶이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더욱 무력해질 것이다. 자신이 무력한 존재로 경험되니 관계를 절실히 요청하게 되고, 이제 소환된 관계들은 우리 주변으로 더욱 밀집된 거미줄의 포위망을 형성할 것이다. 사방으로 쳐진 줄에 꽁꽁 묶여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된 마리오네트를 떠올려본다면, 이제 우리가 그것이다.
잘못되고 틀린 세상을 바꾼다고, 우리 자신의 운명이 바뀌지는 않는다.
곧, 세계를 해체하거나 재구성한다고, 우리 자신의 삶이 바뀌지는 않는다.
이것이 언어에 경도된 관점이다. 자신의 삶을 언어로 조직해서 만들어낸 가상의 그림이 세계라고 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상이다. 삶 그 자체가 아니다. 한순간의 풍경을 찍은 스냅사진이 실제의 풍경이 아닌 것과 같다.
그렇게 만들어진 사진은 어떤 아름다움의 영역에 속한다. 우리가 어떤 사진이 잘못되었느니, 또는 어떤 사진이 더 진정한 정의로움을 담고 있느니 하는 말들은, 실은 도덕의 영역이 아니라 미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계를 아름답게 만들고 싶으며, 그러한 노력으로 세계라는 것을 관리해나간다. 우리가 의도했던 것과 다르게 세계가 더럽혀지거나 찢어지면 무척 화가 날 것이다. 누구라도 그러하다. 자신이 정성을 기울인 어떤 작품이 훼손되면 속상하고 아프다.
그러나 우리가 미학적으로 그려본 그 그림이 우리의 삶 자체는 아니다.
하늘을 빨간색으로 칠하고, 불을 파란색으로 칠한다고, 우리의 삶이 끝장나는 일은 없다.
우리가 어떤 그림을 그린다고, 우리 자신의 삶이 바뀌지는 않는다. 지옥을 그린다고 우리의 삶이 지옥이 되고, 천국을 그린다고 우리의 삶이 천국이 되는 일은 없다. 물론 미디어는 그러한 가상현실의 착시효과를 유발한다.
그러나 미디어가 만드는 착시효과는 우리가 동의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그것이 가상인 것을 이미 알고, 잠깐 그 가상의 효과가 우리에게 작동하도록 우리가 영화관에 들어가서 스크린 앞에 앉았기에 착시효과는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것이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었다면, 우리는 결코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직하게 돌이켜보자.
우리가 집청소를 하던 중에 잠깐 청소기를 놓고는 포탈사이트의 기사를 보게 되었다. 거기에서는 또 한 정치인이 어떤 망언을 했다는 기사가 흘러나온다. 그리고 우리는 곧바로 가상현실 속으로 빠져든다. 스토리가 작동한다. 그 정치인 때문에 지금 우리가 이렇게 좁고 더러운 집에 살게 되었으며, 이 황금같은 주말에 청소나 해야 하는 비루한 처지로 전락했고, 그렇게 해당의 정치인으로 인해 우리의 인생이 쫄딱 망한 것 같은 그 분노를 경험한다.
그러한 한 편의 영화를 본 것이다.
그 결과, 해당의 정치인에게로 우리 자신의 힘만 또 투입되어 그 정치인을 더욱 중요한 존재인 것처럼 만들어주었고, 이와 같은 류의 스토리들을 상연하는 미디어의 권위만이 한층 더 신장되었다.
그리고 우리 앞에는 여전히 우리의 운명이 변함없는 모습으로 남아 있다.
청소를 해야 한다. 그러나 이미 미디어의 가상현실을 소비하느라 힘을 많이 쓴 관계로 이 운명은 뭔가 절망스러워진다. 운명을 바꾸고 싶다. 해당의 정치인의 반대편을 지지하면 이 운명이 바뀌지 않을까. 그렇게 한참을 소진된 자신의 에너지를 탈탈 털어 미디어에 또 다시 투입한다. 흡사 도박중독 같은 일. 투여한 것이 다시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으로 꼭두각시의 신세를 스스로 공고화한다.
오늘날 인간의 보편적인 현실일 것이다.
미디어의 가상현실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동의했기에 그로 인해 고통받게 된 자승자박의 현실.
만약 이러한 이가 그저 자신의 운명에 묵묵히 응답했다면, 그는 그 자신을 위해 몹시도 쾌적해진 방 안에서 창문을 열고 저녁의 불빛들을 즐기며 맥주 한 캔을 들이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자신의 운명이 자신의 것일 때, 그것은 그를 위해 가장 좋은 현실을 만들어낸다.
실존주의는 우리가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에 대해 한결같이 말해온 바 있다.
운명 속으로 뛰어드는 일. 그 운명을 관통해내는 일.
곧, 자신의 삶을 다른 누구에게 그 책임이 기인해있는 것이 아닌 오롯한 자신의 삶으로서 살아내는 일.
그러면 자유가 찾아든다.
가장 운명 속으로 뛰어든 이가 가장 자유로워지는 이것이 곧 운명과 자유의 역설이다.
지금 이 운명이 아닌 새로운 운명이라는 것을 꿈꾸며, 미디어의 작법에 의거한 자신의 작가적 능력으로 그 새로운 운명을 디자인하고 스토리텔링해서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은 운명의 실에 묶인 꼭두각시가 되며, 그 역으로 오히려 운명을 적극적으로 살아내려는 이만이 자유를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만약 이 자유라는 것을 새로운 운명이라고 말한다면, 그것도 좋다.
그렇다면, 새로운 운명은 지금 이 운명이 아닌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운명 속에 있다.
이 새로운 운명을 열어가는 기제를 힘이라고 말한다면, 그것 또한 좋다.
그러나 언어적 힘이 아니다. 이것은 사랑의 역량이다. 자신의 운명을 사랑할 수 있는 그 역량.
대상화라는 것은 조건에 매여있다는 것이다. 조건들에 집착해서 조건들만 계속 바꾸려고 하는 동안 우리에게서는 역량이 실종된다. 지금 이 조건으로도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좋은 것들을 이룰 수 있을 때, 그것이 우리의 역량이다. 그것은 사랑이 낳은 역량이다. 그 자신의 삶을 사랑해보고자 하는 이에게는 반드시 출현하게 되는 그 힘이다.
우리는 이것을 '존재의 힘'이라고 명명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차라리 이렇게 불러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것은 '운명의 힘'이라고.
인간이 인간 자신으로 태어난 거룩한 운명을 통해, 인간 그 자신에게만 내재되고 귀속되는 그 운명적 힘.
그러니 대상의 문제가 정말로 아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곧 우리가 우리 자신인 운명을 살아가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일 뿐이다.
이것은 실존주의적 책임의 의미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책임지기로 했다는 것.
자신을 책임지기로 한 이에게 이제 운명은 그의 편이 되어 힘을 준다.
혹자는 실존을 '실 없이 존재하기'라고도 말한다. 바로 이 내적인 운명의 힘으로 인간은 실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의 본원적인 존재방식이자 그 운명이다. 처음부터 인간은 운명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애초 꼭두각시일 수가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운명을 만들어간다는 표현도 정말로 타당치 않다. 이제 실존주의는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내가 나의 운명이다."
이것이 아주 잘 정의된 자유의 의미다. 우리는 지금 막 운명의 세 여신들을 향해, 또 그녀들이 자아내는 그 모든 거미줄의 신화들을 향해 선언한 것이다. 우리 자신은 진정으로 자유롭다고. 이 자유의 운명을 우리는 진심으로 사랑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