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수가 있는 거리"
나는 확실히 나무를 좋아한다.
지금 살고 있는 집도, 하고 있는 가게도 같은 거리에 있다. 작은 2차선 도로의 양쪽으로 커다란 가로수들이 늘어서있는 거리. 처음 이 거리를 보았을 때부터 여기에서 살고 싶다고 느꼈다.
낮에 가로수들 아래 서서 멍하니 있는 것도 좋아하고, 아무도 없는 새벽에 담배를 물고 가로수들을 올려다보는 것도 좋아한다.
도시의 건물들 사이를 이동해야 할 때면 내 시선은 대개 나무를 향해 있다. 인파가 많은 곳을 통과할 때면 거의 생존전략이다.
이것은 내가 굳이 자연친화적이라거나 생태주의적인 관점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다.
가로수를 보고 있으면 내 안의 어떤 깊은 시선이 선명해진다.
가로수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은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겠다. 가로수를 보고 있을 때의 내 감각은 그저 이곳에 무엇인가 엄청난 것이 있다는 그 느낌에 가깝다.
'와, 대단하다.'
볼 때마다 이러한 감탄사가 내면에서 울려퍼진다. 그 전까지의 내 자신이 누구였는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으며, 내가 무슨 생각이나 심상에 빠져있었는지도 전혀 중요하지 않다.
나무를 바라보는 일은 나를 완전히 새롭게 환기시키며, 어쩌면 나는 이 자리에서 새롭게 태어난 것일지도 모른다. 기억은 이어받았지만 실은 다른 존재로서.
그러니 사람들이 많고, 그 의식작용들도 많아서, 또 그에 따라 사방으로 정신없이 움직이는 욕망들의 세력도 왕성해서, 걷기만 해도 힘이 쓰이고 지치게 되는 곳에서는 정말로 나무가 구원이다. 그것은 마치 세이렌의 노래에 침식당하던 이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 다시 정신차리게 해주는 손길 같다고 해야 할까.
이렇듯 나는 나무를 친근한 무엇인가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내가 나무를 통해 보고 있는 현실은 사르트르가 『구토』에서 묘사한 그 현실에 가까울 것이다. 나무라고 내가 내 자신의 일상에 편입시켜놓은 그 어떤 질서의 사물로서가 아니라, 나는 그것을 대단히 낯선 것으로 보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인 로캉탱은 그동안 당연했던 것이 더는 당연하지 않게 드러나게 된 그 기이한 풍모에 구토했지만, 내가 구토 대신에 감탄사를 토하게 되는 것은 대략 100년의 시간차 때문이라고 해둘까. 아니면 나무와 훨씬 더 많이 교류했던 하이데거와 그 질감이 더 통하고 있는 까닭일 것이다.
나무를 보면 나는 존재가 정말로 언어 너머에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보면 볼수록 그것에 대한 언어를 잃어가며, 정말로 그것이 무엇인지 점점 더 모르게 된다.
그러나 너무 기분이 환희롭다.
완벽하게 자유롭고, 완벽하게 살아있다.
어떻게 이런 것이 이 우주에 존재하고 있는지, 어마어마한 신비 그 자체다.
내가 보고 있는 가로수의 풍경 속에는 이렇게 엄청나고 대단한 것들이 가득하게 펼쳐져 있다. 이것은 그 자체로 삶의 희망이다. 내 자신의 삶도 동질의 감각으로 다시 살아난다. 너도 얼마든지 살아도 된다고 그러한 말을 듣는 것만 같다.
아니 그 이상이다.
내 자신도 바로 이러한 어마어마한 신비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
나무들은 나에게 일관되게 그 사실을 전하고 있다.
나는 나의 이름을 잊고, 내가 뭘 해왔고 또 뭘 하는 사람인지를 잊으며, 어디로 가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잊는다.
그 모든 언어가, 또 언어에 근거해 만들어진 나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존재 앞에서 싹 다 날아가게 되며, 그때 비로소 나는 존재한다.
존재가 존재를 부른 것이며, 존재가 존재를 깨운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늘 가로수 밑으로 나가는 것은, 이를테면 소꿉친구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는 일인 것이다.
"존재야, 놀자."라는 그 말을 냉큼 알아듣고, 나는 씨익 미소짓는다.
존재한다는 이 사실이 얼마나 엄청나고 대단한 것인지에 감동한 그 미소가 자연스레 흘러나온다. 바로 그 사실을 알아본 그 존재의 눈빛 앞에서, 그리고 그 눈빛이 이제 나의 눈빛이 되어, 우리는 하나로 미소짓는다.
어떤 완벽함이 이 거리에 찾아든다.
그것은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일.
가로수가 있는 거리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