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MYTHIA) #7

"자아의 신화"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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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대표적인 징후란 타자에 대한 양가적 태도에 있다.


다양성이니 다원주의의 윤리니 따위를 들먹이며, 다들 자신들이 남[타자]에 대해 가장 잘 하는 사람인 척들을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무슨 일을 하는가?


다 남탓만 한다.


어딜 가나 다 남탓이다. 이 모든 것이 잘못된 것은 사회 때문이고, 환경 때문이며, 부모 때문이고, 정권 때문이며, 대통령 때문이고, 검사 때문이며, 계급구조 때문이고, 자본주의 때문이며,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제외한 그 모든 것 때문이다.


'남'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이 양가적인 태도는 그러나 놀랍게도 모순이 아닐 것이다.


이것은 고도로 잘 짜여진 논리적 전략이다.


남을 가장 존중하고 남이 가장 먼저 배려되는 현실을 먼저 만들어놓아야, 이제 모든 책임을 남에게로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이 남에 대한 왕의 입장 같은 것을 자처한다고 해보자. 그러면 이제 그러한 이는 남에 대한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짊어져야 할 것이다. 그렇게 근대의 시절에 왕과 왕비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현대는 그래서 이러한 위험성을 원천적으로 회피하려고 한다. 남을 중요한 존재처럼 치켜세우면 이제 책임져야 할 인물은 남이 될 것이다. 이처럼 남에 대한 과잉된 중대성의 부여는 결국 남탓을 하기 위한 장치다.


그렇다면 이러한 전략을 대체 누가 기획했던 것일까?


자아다.


자아가 평생 하는 일은 남탓을 하는 그 일이다. 그 일을 더 많이, 그리고 더 안전하게 할 수 있게끔 자아는 온갖 장치들을 궁리한다. 남을 엿먹이고 등쳐먹으면서도, 남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모든 사회적 소재는 자아의 발명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아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이러한 일을 하는 것을 정당하게 경험할 수 있다.


이것은 흡사 부모에 대한 아동의 입장과 유사하다.


"나를 태어나게 했으면 제대로 책임져야 할 거 아냐?"


그러나 노골적인 이 태도로만 있으면 아동은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부모를 통해 효과적으로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아동은 예의와 존중이라는 태도를 발달시킨다. 부모를 더 상위의 존재로 두고 공경함으로써 부모가 아동 자신에 대한 책임을 다하게끔 통제하는 법을 개발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대로 타자를 대하는 자아의 사회적 태도가 된다.


최대치의 책임은 타인에게 돌리면서, 최대치의 이득은 자신이 획득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어떤 '관계술'이 전략화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그 관계술이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 이르면 이제 자아는 예의바름의 가면을 벗고 노골적인 본색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전술한 남탓, 남탓, 남탓의 모습이다.


자아가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사실을 한번 기억해보자.


자아는 최초의 사회인 가정 내에서 형성되어, 또래집단과 학교, 직장 등의 외부사회를 거치면서 확장되어 나간다.


이러한 사회적 환경이 없다면 자아도 없다. 사회가 자아를 태어나게 한 것이다. 사회가 개인에게 부여한 이미지를 개인이 내사한 뒤 그 이미지와 자신을 동일시해서 만들어진 것이 자아다. 그런데 이 이미지란 결국 사회의 이념, 규범, 도덕 등의 그 사회를 이루는 핵심적인 원칙들이 반영되어 생성된 것이다. 즉, 자아는 유전자가 계승되듯이 애초 그 자아가 속한 사회를 그대로 닮도록 설계되었다. 엄연하게도, 하나의 자아는 하나의 사회의 축소판이다.


그러니 자아의 입장에서라면 정말로 모든 것이 순전히 사회탓이고 부모탓이라고, 다 남탓이라고 말하는 일이 정당할 수 있다.


자신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은, 이러한 유전자를 물려준 부모[사회] 때문이고, 자신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 자아의 항변은 언제나 이러하다.


그리고 오늘날 이 항변에 넘치도록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이 단연코 미디어(mythia)다.


부모를 까고, 보호자를 까고, 자영업자를 까고, 그렇게 어떤 사회의 생산자적 입장 내지 유사부모의 입장을 혹독히 비판하는 소재의 콘텐츠들은 얼마나 인기있었는가?


그리고 그러한 콘텐츠들 속에서 비판의 주체로 기능하던 이들은 그 모든 '가짜 부모' 대신에 그 자신을 얼마나 선량하고 진정한 '진짜 부모'의 모습으로 연출하고 있었는가?


이것이 딱 자아가 바라던 그 그림이다.


자신이 못나고 그 인생이 불행해지게 된 것은 다 못난 '가짜 부모' 때문이니, 그 가짜 부모들을 혼내주고 자신을 구원해줄 '진짜 부모'가 나타나면 그로 인해 자신이 만족스럽게 변화될 수 있을 것이라는 그 자아의 꿈, 또는 자아의 신화.


우리가 몹시 유치했던 시절, 우리를 혼내는 나쁜 부모의 집에서 벗어나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 친절하고 돈많은 진짜 부모를 찾을 수 있기를 갈망했던 그 백일몽의 내용일 것이다.


오늘날의 미디어는 이 유치한 자아의 신화를 끝없이 조장한다. 그럼으로써 자아가 계속 유치한 상태로 지속될 수 있게끔 전면적으로 조력한다. 그래야 자아들이 자신의 판타지를 충족시켜주는 미디어를 신으로 섬길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미디어(mythia)는 이처럼 자아들의 신이다. 성공적인 자아의 신화를 제공해줌으로써 자아의 신앙을 이끌어내는 일이 미디어의 주된 활동이다. 그 목적을 위해 봉사하는 사제들도 있다. 사이비선동가들 또는 거짓메시아들이라고 불릴 미디어의 콘텐츠 생산주체들이 그들이다. 그러니 이것은 '허구의 신-사이비교주-정신적 아동인 신도'로 구성된 전형적인 컬트종교의 구조다.


누구나 자유롭게 미디어가 될 수 있다는 말은, 누구나 자유롭게 컬트종교를 창시하는 사이비교주가 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그 믿음의 근저에는 단지 허구의 신만이 놓여 있을지라도 오늘날에는 아무 상관이 없다. 정신적으로 미발달된 아동들이 좋아할 말만 떠먹여주어서 인기를 얻기만 하면 그것은 작동하는 것이다. 하나의 진리라는 것은 없으니 저마다 자신의 진리를 자유롭게 떠드는 미디어가 될 수 있다는 말이 근거하고 있는 바로 그 원리의 끝, 즉 상대주의의 끝은 원래 포퓰리즘이다.


그리고 이 지점이 대단히 노골적으로 자아가 권력화되는 지점이다.


자아의 욕망은 언제나 대상을 바꾸려는 대상화의 성격을 갖는다.


그러한 자아가 갖는 최고의 욕망은 결국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자신이 만들어진 그 기원을 바꾸겠다는 것. 곧, 자신을 태어나게 한 부모를 바꾸겠다는 것이 자아 최고의 욕망이다.


이를테면, 돈이 없는 자신이 많은 돈을 얻으려는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가난한 부모를 부자인 부모로 바꾸면 된다. 그러면 그 부모에 의해 만들어지게 되는 자신 또한 부자인 자신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자아는 진지하게 이런 생각을 한다. 이것이 자아 자신의 성공을 위한 황금의 공식이며, 이 공식에 따라 자신이 황금의 영웅이 되는 것이 곧 자아의 신화의 완성이다.


이러한 자아의 신화를 대표하는 것이 미디어의 주요고객인 연예인들 내지 인플루언서들이다.


그들은 팬이라고 하는 것을 유사부모로 삼는다. 미디어를 통해 자신이 얼마나 예쁘고 착하며 귀여운 재롱둥이인지를 호소함으로써 더 많은 유사부모의 세력을 자신에게로 끌어들이려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들은 부모[세계]를 갈아치우는 것이다. 더 능력있는 부모로 갈아탐으로써 그 힘을 통해 자기 자신을 화려하게 재구성할 수 있게 되는 이 과정은 신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받아 영웅으로 등극하게 되는 신화의 전형적인 작법과도 같다.


오늘날에는 대개 이 작법에 한 조항이 더 추가된다.


"그러니까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나와 같이 될 수 있습니다. 나도 당신과 같았습니다. 당신도 한번 해보십시오."


어떠한 장에 더 많은 이들을 끌어들이는 방법은, 그 장에 참여하면 자신에게도 커다란 몫이 분배될 수 있으리라는 환상을 품게 하는 것이다. 로또의 환상, 코인의 환상, 주식의 환상과 같다. 물린 이들에 대해서는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혼자 죽지 않으려고 오히려 다른 이들을 그 장에 끌어들이는 일에 더욱 열정적이다.


그렇게 해서 모인 이들이 이제 전원 다 유사부모의 세력에 합류하게 되는 것이다. 교주를 지지하는 신도처럼, 자아의 신화가 더 성대히 이루어지는 일에 봉사하는 입장이 된다. 자아만 신이 났다. 도취가 절정이다. 자신을 응원하고 지켜주는 '진짜 부모들'이 이렇게 많아서 자기는 우주대장이다.


남의 힘을 취해 등극하게 된 이 우주대장으로서 그 지위를 공고화하기 위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신화의 작법서 맨 아래에 아주 작은 글씨로 다음과 같은 참고사항을 기술하는 것이다.


"당신이 저와 같이 되는 일을 한번 해보기로 하셨으면, 책임은 이제 당신의 것입니다, 고객님."


말했잖은가. 남을 엿먹이고 등쳐먹으면서도, 남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모든 사회적 소재는 다 자아의 발명품이라고.


호스트바를 다니며 자신이 지명한 호스트가 가게의 1위가 될 수 있도록 전재산을 바친 이가 있다고 해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스트라는 대상을 통해 욕망했던 어떤 현실을 자신이 조금도 얻지 못했음을 토로하는 그녀에게 호스트는 무엇이라고 말할까? 자신이 파는 것은 환상이며, 그 환상을 잘 즐겼으면 됐지, 환상이 끝난 현실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당신의 몫이라고, 그렇게 전형적으로 얘기하지 않을까?


호스트는 분명 그녀를 이 세상에서 귀하게 존중받아 마땅한 '타자'로서 지극정성을 다해 환대했을 것이다. 아주 예의바르고 섬세한 배려와 이해들도 제공되었을 것이다. 결국에는 그 모든 것을 '타자의 책임'으로 돌리기 위해 이 일들은 무척 정교한 전략적 의도로 집행되었다.


미디어(mythia)가 만드는 자아의 신화와 관련된 일들이 다 이와 같다.


미디어가 그동안 소외되었던 특정계층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이제 그 특정계층에게 뜯어먹을 것이 많아졌다는 뜻이다. 미디어가 벨라루스 공화국의 신비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벨라루스 공화국에 갈취해먹을 돈이 좀 생겼다는 것이다. 미디어가 타자에게 겸허한 존중의 몸짓으로 건네는 마이크 줄은 자아의 흡혈을 위한 인공혈관이다.


이처럼 자아를 비대하게 만드는 그 일을 위해 미디어가 기능하는 이유는 분명할 것이다.


자아가 자부심을 가질 만큼 가장 완성도 있게 잘 만든 자아의 발명품이 바로 미디어인 까닭이다.


자아의 확장, 자아의 포장, 자아의 복제, 자아의 스토리텔링, 자아의 세력화, 자아의 권력증진, 그리고 결정적으로 남탓까지, 자아가 꿈꾸는 모든 욕망의 실제가 미디어 하나에 다 집약되어 있다. 미디어는 거의 자아의 최종병기인 셈이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자아는 미디어라고 하는 자신의 신을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이 또한 '남탓'을 성립시키기 위한 그 의도를 담고 있다.


스스로 만들어낸 것을 신으로 섬김으로써, 자아는 자신의 유치함을 지속하는 행위를 신에 의해 불가피하게 생겨난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여지를 창출한다. 실은 자기가 의도하고 있는 것이면서, 미디어의 사악한 손아귀에 걸려 자기도 모르게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며, 흑흑, 순결한 피해자의 입장으로 도주할 수 있는 이득이 만들어진다.


자기를 제외한 이 모든 것에는 빅엿을 선사하면서 자기만은 빠져나갈 수 있는 장치라니, 그야말로 자아에게는 궁극의 발명품이 아닐 수 없다.


미디어는 자아가 스스로 만들어낸 최고의 신, 곧 최고의 우상이다.


그러니 미디어(mythia)는 진실로 종교현상인 것이다.


자아의 신화에 근거해 만들어진 자아의 종교.


자아는 사회적 구성물이기에, 그렇다면 미디어는 곧 세속종교인 것이다.


세속종교는 표현 그대로, 세속의 것이 종교화된 것이다. 상대적인 욕망만을 위해 기능하는 것이 절대성의 권위로 위장해 있는 것이다. 그러니 거기에는 절대성이 실종되어 있으며, 절대성을 향해 움직이는 인간의 본성인 종교성이 없다.


이처럼 종교성이 부재한 종교에 대한 이름을 우리는 익히 잘 알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이비종교다.


미디어(mythia)는 분명한 사이비종교의 현상이다.


자아는 왜 '가짜 부모'를 '진짜 부모'로 갈아치우려고 할까?


자아 자신이 제일 가짜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짜라는 자신의 태생을 어떻게든 세탁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자신이 세상[부모]을 바꿀 수 있는 영웅이 되면, 모두가 자기를 진짜로 보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언제나 자아의 신화 속에는 담겨 있다.


그러나 사이비가 그 어떤 위대한 성취를 이룬다 해도 진짜가 되는 일은 없다.


단순하게 사이비를 그만두어야 진짜가 된다.


자아는 자아 자신이기를 포기할 수 있는가?


이것은 실존주의적 물음이다. 실존주의는 이에 대해, 그 일이야말로 우리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본래적 성질이라고까지 말한다.


실존주의가 '진짜로 사는 법'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진짜는 노력을 통해 완성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진짜다. 그러나 가짜의 포장지들로 자신을 꽁꽁 결박해두고 있어서, 우리가 진짜라는 그 사실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 포장지들 중의 으뜸은 자아다. 우리는 진짜의 자신을 가장 가리고 있는 포장지를 우리 자신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과도 같다.


자아는 왜 그토록 복제와 자기증식을 거듭하며, 끝없이 자기동일성만을 전염시키는 방식으로 확장을 꿈꾸는가? 다시 말해, 자아는 왜 그리도 강박적으로 타자를 추방하려고 하는가?


한 번 시작한 거짓말은 더 많은 거짓말을 계속 누적해야만 하는 까닭이다. 바로 이 방식으로 우리에게 포장지는 덕지덕지 붙게 된 것이다.


그러나 타자는 우리의 그 모든 거짓말을 한 눈에 꿰뚫어본다. 아무리 우리가 화려한 포장지로 자신을 감싸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타자 앞에서 바로 알몸이 노출되는 듯한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타자의 시선은 자아인 우리가 가짜라는 사실을 조용히 폭로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래서 자아는 타자를 무너뜨리기 위해 그렇게 혈안이 된 것이다. 어떻게든 타자를 자아의 신화 속으로 끌어들여, 자신과 동질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갖은 전략을 다 동원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진짜인 우리 자신을 부정하고 있는 바로 그 일이다.


이 포장지로 덮인 모습이 가짜임을 직시하고 있는 타자의 시선, 그것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의 내면에서 온다.


자아가 가릴래야 가릴 수 없는 그 내면의 빛으로부터.


우리에게 있어 가장 가까이 있는 타자는 누구인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진짜로 존재하는 우리 자신.


우리가 자아로 살 때, 그러한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존재는 완전한 타자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자신이기에 우리에게서 가장 가까운 것일 수밖에 없으며, 즉 우리 자신의 존재는 가장 가까운 타자로 드러난다.


우리는 이 가장 가까운 타자인 우리 자신의 존재를 필연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기에, 그 느낌이 그대로 하나의 시선으로 경험되고야 마는 것이다. 지금 자아로 살고 있는 자신의 이 상태가 가짜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리고 있는, 아니 스스로 알 수밖에 없는 타자의 시선으로서.


우리의 존재라고 하는 이 타자적인 것은 사회적 구성물인가? 또는 관계의 산물인가? 아니면 신화의 결과물인가?


아니다. 그것은 우주의 신비다.


우리가 세상이라고 하는 것을 가장 큰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거대한 것이 존재다. 그것은 영원한 우주의 신비다.


이러한 관점으로 우리 자신의 존재를 이해하는 일이 바로 실존주의다.


그렇다면 실존주의도 하나의 종교현상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당연히 자아의 종교가 아니다. 상대적인 욕망이 아닌 절대적인 신비를 향해 있는 것이다. 곧, 자아가 결코 다가갈 수 없는 것, 미지의 타자를 향해 있다. 그러니 자아의 종교가 아니라, 차라리 타자의 종교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타자를 향해 가는 일이, 곧 우리 자신의 존재를 향해 가는 일과 일치한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이것은 더는 상대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다. 다만 절대적인 신비를 향해서만 가는 정확한 종교성의 운동이다. 곧, 진짜를 향한 어떤 몸짓이다.


이러한 몸짓에, 바로 이러한 삶에, 남탓이라는 일은 있을 수 있는가?


우리는 이 자리에서 그 모든 남탓을 멈추게 된다.


남탓을 멈추면 자아가 멈춘다.


내 자신의 인생이 결코 남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바로 나와만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비로소 이해한 것이다. 그동안 가장 남으로 대해졌던 그 '나'라는 것을 향해 이제 우리는 운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결국 '나'에게로, 우리 자신의 존재로 돌아오게 된다.


자아의 신화가 타자의 실재로 멈추게 된 그 자리에서, 우리는 그저 우리 자신이다. 그 어느 구성물이 아닌, 그저 이 온통의 존재 그 자체.


신화가 끝난 대지에서 우리는 발견한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온전함을. 그리고 우리 자신이 바로 그 인간임을.


우리가 인간인 것은 그 어떤 남의 실수나 잘못인가?


아니다. 그것은 우주의 신비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다시 한 번 이렇게 진짜로 이해해보기로 했다면, 그것은 실존주의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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