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MYTHIA) #8

"신화와 몸"

by 깨닫는마음씨




인간의 몸과 친하지 않은 인간 자신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는 신화를 만들어내어, 그 신화를 대신 자기의 몸으로 삼으려 한다.


이념으로 살아가고, 정체성의 환상으로 살아가고, 윤리로 살아가고, 정치적 정의로 살아가고 하는 일들이 다 이와 같다. 이것들의 핵심적인 특징은 인간의 실제 몸을 편하게 하는 방향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인간의 몸이 더욱 괴롭게 되는 현실을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그렇게 인간의 몸을 괴롭힐 수 있는 영향력을 갖는 만큼, 이 가상의 몸을 소유한 주체들은 자신의 '몸'이 성장했다고, 이제는 강해졌다고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신화는 결국 실제의 몸에 대한 무시와 회피 또 억압의 기제인 셈이다.


미디어(mythia)의 신화를 생산하거나 소비하는 이들의 모습을 한번 살펴보자.


그들은 자신의 몸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자신이 그 실제의 몸으로 그저 존재하는 일을 무척이나 힘들어한다. 어떻게든 몸으로 존재하는 현실을 잊기 위해, 그들은 끊임없이 환상을 만들어내거나 다른 누가 만든 환상을 소비하려고 한다.


외로워서도 아니고 불안해서도 아니다. 그저 자신에게 몸이 있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심지어 자신에게 아무 일도 없다는 사실을, 곧 자신의 몸에 아무 일도 없이 고요하다는 사실을, 그렇게 자신이 아무 문제 없는 몸이라는 사실을 견디지 못한다.


그러니 더욱 환상적인 신화는 요청된다. 신화에서는 늘 무슨 일이 일어나며 문제가 발생한다. 또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열찬 움직임들도 있다. 신화를 생산하거나 소비하는 방식으로 그 움직임에 참여하면 자신은 효과적으로 몸과 멀어질 수 있을 것이다. 몸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흡사 소개팅에 나간 이가 정신없이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며 과장된 행동을 하고 있는 모습과도 같다. 그는 왜 그 지랄 중인가? 친하지 않은 이와 한 자리에 있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자리에 앉아있는 것은 어느 정도의 끌림이 있기 때문이다. 친해지고 싶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그러니 늘 하던 대로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하던 대로'의 그 방식이란 무엇일까?


통제와 지배다. 자기가 머리로 다 계획해서 이끌어가려는 그 주동적인 일이다.


마르틴 부버가 '나-그것 관계'라고 불렀고, 에리히 프롬은 '소유양식'이라고 불렀던 그것.


곧, 우리가 어떤 것을 도구처럼 대하는 그 방식이다.


우리의 마음에 드는 상대를 얻기 위해 그 상대를 도구처럼 대하게 되면 상대는 우리로부터 떠나간다. 이것은 연애의 초심자 정도가 아니라, 연애 고자들이 늘 연애에 실패하는 방식이다. 자신이 연애 고자인 이는 그래서 돈을 많이 벌거나, 학벌을 높이거나, 비싼 외제차를 사려고 한다. 상대를 도구적 대상으로 얻기 위해 다시 한 번 도구에 의존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자신의 몸에 대해 우리가 늘 신화를 도구로 이용하려는 그 이유일 것이다.


자신의 몸과 친하고 싶으나 그 방법을 모르겠는 이들이 이처럼 신화를 써서 그 신화의 힘 아래 억지로 몸을 복속시키려 한다.


이념에 자신의 몸을 복종시키고, 윤리적 원칙에 자신의 몸을 복종시키며, 어떤 정의라는 깃발 아래 자신의 몸을 복종시키는 이러한 일들을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많이 해왔는가. 또 그렇게 하면 우리의 몸이 우리를 떠나지 않고 늘 복종된 그 얌전한 상태로 머무를 것이라는 착각 또한 얼마나 많이 해왔나.


이런 것이 바로 권력욕이다. 몸이라는 것에 대해 실은 무력감을 경험하는 이들이, 정신적 신화로 몸을 복종시키려고 할 때 출현하게 되는 것이 권력욕이다. 신화화는 곧 권력화인 것이다.


이를테면, 성추행 등의 신체적 남용의 문제는 신화로 몸을 복속시키려는 이들에게서 대표적으로 일어나는 권력화의 현상이다. 자신이 그렇게 자신의 몸을 함부로 대하며 살고 있으니, 남의 몸도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굴절된 권력의 구조가 자리잡는 것이다.


이러한 권력욕은 결국 몸에 대한 더 노골적인 혐오의 형태로 이어진다.


삐쩍 마르거나, 키가 작고 왜소하거나, 얼굴이 특별히 못생겼거나, 아주 뚱뚱하고 그 몸에서 더러운 냄새가 날 것 같거나 하는 등의 모습들을 우리는 미디어(mythia)의 사이비선동가들에게서 자주 목격한다. 그들도 자신의 몸이 싫을지 모른다. 바로 이것이다.


자신의 몸을 혐오하는 이들이, 더욱 미디어에 빠진다. 미디어를 통해 인간의 몸을 더욱 부정하는 신화들을 널리 보급해간다.


그럼으로써 다른 이들 또한 그들 자신의 몸을 부정하고 혐오하게 되는 현실을 야기하려는 것이다.


자신의 실제 몸을 증오하여 그 대신에 가상현실에서의 자신의 몸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이 일을, 우리는 다시 한 번 신화라고 명명할 수 있다.


현실의 거리에서는 그저 추하고 못생긴 몸이지만, 미디어의 가상공간 속에서는 세상을 들었다 놓았다 할 수 있는 위대한 몸이다. 신화는 이러한 몸의 위상의 전환을 꿈꾸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신화는 결국 몸에 대한 열등감에서 생겨난다는 뜻이다. 어떤 것에 대한 열등감은 그것을 실은 매우 중요한 소재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곧, 몸이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이들이 몸에 대한 열등감을 갖게 되고, 그 열등감으로 인해 마침내는 몸을 증오하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혐오의 문제는 이와 같을 것이다.


여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이가, 여성과 친해지려는 그 일에 대해 절망하게 되었을 때, 그것은 이내 여성혐오를 출현시킨다.


이 혐오의 현실은 계속해서 부정적인 피드백을 이룬다. 혐오로 인해 의식은 더욱 그 대상에 집중되며, 그만큼 대상의 중요성은 더욱 커져가고, 그 대상에 다가가지 못하는 절망도 함께 커져간다. 그러니 혐오는 한층 더 짙어질 것이며, 이 모든 일은 멈추지 않는 악순환을 이룰 것이다.


열등감에 대한 가장 정확한 대처방안은 정직해지는 것이다. 우리의 정직성만이 부정적인 연쇄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


실존주의 심리학에서는 F는 S와 R 사이에 있다고 말한다. 자극(stimulus)에서 반응(response)으로 이어지는 자동고리를 중간에 끊는 것이 곧 자유(freedom)라는 뜻이다.


우리가 정직할 때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여기에서 우리가 정직하다고 하는 그 의미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잘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대체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싫어하며, 또 어떤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인지를 발견하고 확인해가는 일이 우리의 정직성의 표현이다.


여성과 친해지는 일이 자신에게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확인한 이라면, 이제 그 일을 정성스럽게 잘 해보려고 할 것이다. 어렵거나 낯설다고 해서 거칠고 투박하게 여성에 대한 도구적 방식을 시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와 같다. 몸에 대한 열등감은, 그 열등감을 경험하는 이에게 몸이라는 소재가 무척이나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그는 더는 몸을 무시하고 회피하기 위해 대신 신화를 생산하거나 소비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더욱 정직하게 몸을 지향할 것이다. 자신의 몸을 아끼고, 가꾸며, 소중히 하게 될 것이다.


가브리엘 마르셀과 같은 실존주의자는 이 몸이라는 것에 대한 아주 중요한 말을 우리에게 전한 바가 있다.


"나는 몸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바로 몸이다."


그는 '몸의 실존론'을 선언한다. 몸을 떠나 우리는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몸을 대신한 다른 소재로 자기 자신인 척할 수도 없다. SF영화에 종종 나오듯이, 다른 몸에 의식만 갈아끼우면 그 몸의 주인이 되곤 하는 일은 말 그대로 판타지일 뿐이다.


다른 몸에 지금의 이 의식을 이식한다면, 그것은 이미 '지금의 이 의식'이 아니다. 그 다른 몸에 의해 생겨난 '거기의 그 의식'이다. 우리가 의식이라는 것에 대해 어떤 실체론적 영혼의 환상 같은 것을 부여하고 있다보니 이러한 착각들도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의식도 몸의 작용이다. 지금 이 의식은 지금 이 몸의 작용이며, 이 몸이 없으면 이 의식도 없다.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 신화다.


신화는 몸을 벗어나려고 하는 이야기다. 고귀한 정신, 높은 인품, 지고한 도덕성 등의, 조선의 선비들이 예찬한 그 신화를 우리는 현대에도 여전히 동일한 방식으로 소비하고 있다. 이것은 몸보다 높은 정신, 나아가 몸으로부터 독립적인 정신을 가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은 그 몸이 고되기 때문이다. 이 또한 악순환이다.


자신이 자신의 몸을 어떤 정신적 이념으로 옥죄이며 힘들게 만든 뒤, 이제 그 괴로운 몸에서 벗어날 한층 더 높은 정신성을 갈망하는 것이며, 그로 인해 몸은 더욱 괴로워지게 되는 그 악순환의 고리다.


고대 그리스 신화만 보더라도 다 제정신들이 아니다. 허구헌날 고난과 비극으로 그 인생이 점철되어 있다. 그렇게 몸을 최대치로 학대하고 혹사해야만 어떤 보상처럼 저 하늘의 별자리가 될 기회가 주어진다. 몸을 얼마나 잘 괴롭혔는가가 곧 신화적 영웅의 조건인 셈이다. 나아가 신이 될 자격이다.


이러한 신화의 작법에 따라 정치판에서는 대개 어떤 일들을 하는가?


감옥에 다녀온 정치인을 영웅으로 만든다. 위대한 대의에 따라 그 몸을 더 괴롭게 만드는 일을 치렀으니 그가 조금 더 영웅의 자격을 갖추게 되기라도 한 것처럼. 단식쇼 같은 다양한 자기학대의 쇼들도 다 동일한 의도에 의해 추진되는 것이다. 자해공갈을 통해 신이 되려고 하는 제정신 아닌 일들이다.


몸을 벗어나려고 하는 정신은 이처럼 제정신이 아니다. 제정신일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몸을 벗어난 정신을 우리는 귀신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곤 한다. 이에 따라, 제정신이 아니게 살아가는 이들에 대해 뭔가에 씌인 것 같다는 표현도 쓰게 된다.


인간의 정신문화는 크게 두 갈래의 흐름을 갖고 있는데, 하나는 정신을 어떻게 몸으로 돌아오게 하는가의 문제를 다루고, 다른 하나는 정신을 어떻게 몸으로부터 떠나게 하는가의 문제를 다룬다.


전자는 철학, 종교, 의학 등 다양한 이름으로 드러나 있으며, 후자에는 하나의 이름이 있다. 그 이름이 바로 주술이다.


미디어(mythia)는 아주 전형적인 이 주술의 도구다. 인간이 더욱 자신의 몸을 망각하고 가상현실의 환상을 대신 붙잡게 하려는 주술적 의도를 집행한다.


그래서 미디어가 고도로 발달한 현대의 주술사회에서는 다들 조금씩은 제정신이 아니다.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이리저리 부유하는 허깨비들을 붙잡고 있으니 천지가 흔들리며 멀미가 난다. 어떤 것도 신뢰할 수가 없게 되며, 무엇보다 가장 신뢰할 수 없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자기 자신의 판단을 더는 믿을 수가 없다. 그러니 다시 또 미디어에 의존하는 일이 생겨난다. 자신이 삶을 사는 대신에, 미디어의 작법이 대신 자신의 삶을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삶의 실감이 사라지며, 모든 것은 만성적인 불감증 속으로 빠져든다. 가끔 하늘에서 떨어질 도파민이나 고대하면서.


이 모든 것은, 우리가 몸을 잃음으로써 우리 자신의 중심을 잃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중심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자주 착각해왔다.


정치적 신념, 윤리적 이념, 도덕성, 시대정신, 시민의식, 이런 모종의 고매한 정신적 관념들이 우리의 중심이 되어야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길을 잃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어왔다.


완벽한 착각이었다.


그것들로 인해 우리는 오히려 더 앞이 보이지 않는 미로 속으로 빠져들어가고야 만 것이다.


이것이 자신의 몸을 잃은 자의 운명이다. 자신의 몸이 중심이 되어 있지 못한 이의 비극적 귀결이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의 몸이 곧 우리 자신이다. 따라서 몸이 부정된다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이 부정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자신이 부정되고 있는 속에서는 어떤 길로 가든 그 길이 우리 자신의 길일 수가 없다. 우리 자신이라는 것이 없는데, 우리 자신의 길이라는 것이 대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그러니 어디를 향해 걷든 그 길은 주인없는 길, 실은 길이 아닌 길, 다만 영원히 길을 찾지 못할 미로일 뿐이다.


물론 미디어(mythia)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다시 거짓의 환상으로 선동하려고 할 것이다.


이제 긴 터널의 끝이 보인다는 둥, 다들 깨어있는 시민으로서 잘 하고 있다는 둥, 여러분이 해냈으니 이제 우리 민주주의 어벤져스가 할 차례라는 둥, 온갖 유치한 신화적 내러티브를 만들어내어, 어떻게든 지금 이 자리가 미로라는 그 엄연한 사실을 속이려 한다.


평생 미디어에 농락당한 채 환상 속에서 죽게 되는 일은 행복할까?


오늘날의 미디어는 분명 이러한 현실을 기획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속일 심산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때를 계속해서 뒤로 미루는 그 의도로, 사이비교주가 자신의 예언이 이루어질 때를 계속 수정해서 연기하는 그 의도로, 미디어의 신화도 일종의 종말론적 구조가 된다.


그래서 나오는 말이 "이 모든 것은 과정이다."와 같은 식의 말이다. 한 걸음 한 걸음 잘 쌓아가고 있으며, 진보에의 계단을 한 단 한 단 착실하게 오르고 있고, 우리가 아주 정확하게 각자 자신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잘 완수하고 있다는 그 '과정의 신화'다. 과거 운동권의 지도부가 대체 언제 유토피아가 찾아오는지에 대해 불만을 가진 조직원들을 어르고 달래서 다시 세뇌하던 그 방식.


그러나 몸은 이 '과정의 신화'로 성립되지 않는다. 그 반대편에 있는 것이 몸이다.


몸은 이미 '완성의 실재'다.


얼마나 기가 막히게 완성되어 있는 것인가, 이 인간의 몸이란.


아주 직접적인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마음에 드는 이성을 보게 되었을 때, 우리는 "저 몸은 과정일 뿐이야. 한 발 한 발 조금씩 나아가고 있어. 언젠가는 이루어질 거야."라는 식으로 말하는가?


우리는 우리의 눈앞에서, 흡사 이 우주에서 가장 완벽한 어떤 실재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작품.


이미 가장 완벽하게 완성되어 있는 작품이 바로 거기에 있었으며, 지금 여기에도 있다.


이 몸이.


이 몸으로 존재하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이것은 신화가 아니다. 어떤 이야기가 아니다.


눈앞의 실재다. 가장 존재하는 것이며, 가장 진짜인 것이다.


우리가 열등감을 갖게 된 것은 실은 그것에 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짜에 끌리고 있었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왜 진짜가 되지 못할 것인가?


진짜를 견디기 어려워하는 것은, 그 자리에 자꾸 허구의 신화들을 채워넣으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실은 얼마나 괜찮은 존재인지를 스스로 거절하려 하기 때문이다.


스스로에게 생겨난 이 거절의 방식은, 동시에 우리가 그동안 어떻게 거절되어 왔는가의 문제를 시사한다.


아주 긴 시간 동안 우리는 도구로 취급되었으며, 그렇게 우리 안에도 도구적 방식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존재를 도구화함으로써 추방하고 거절하는 그 방식이.


이념, 윤리, 도덕, 정치, 관계, 이런 것들은 다 도구들이다. 인간의 밑에 있어야 할 도구들. 그러나 이 도구들이 오히려 인간의 삶을 지배하려고 할 때,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우리 자신을 잃고, 인간의 삶 자체를 잃는다. 우리 자신도 그러한 도구로 전락한다. 모든 일은 바로 이와 같았던 것이다. 미디어(mythia)가 하는 일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우리가 우리로부터 우리 자신을 가장 빠르게 추방하고 거절하게 된 이 일로부터 우리는 돌이킬 수 있을까?


우리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몸으로 돌아오면 된다. 몸과의 소개팅을 성사시켜 보자. 우리가 도구적으로 몸을 이끌려고 하지 말고, 몸이 가는 길을 조용히 따라가보자.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그 미소에 함께 미소지으며, 함께 있는 이 시간이 정말로 좋다는 그 친밀한 마음을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해보자.


연애 고자들에게는 막 희망이 출현했다.


실존주의 연애교과서, 우리는 이제 그것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존재와 친해지는 법, 깊이 연애하는 법에 대하여.


결국에는 이 세상의 모든 탐구는 바로 그것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진심으로 얼마나 좋아할 수 있는가에 대한.


또 계속 반해갈 수 있는가에 대한.


실존주의는 이미 그러한 존재의 연애교과서였을 것이다. 미로 안의 그 모든 닫힌 절망의 벽들 앞에서, 그것은 언제나 우리 자신을 향해 열린 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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