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무좀"
나는 왜 연애가 잘 안될까?
이 말은 이제 이렇게 바꾸어 이해해야 한다.
나는 왜 사람들과 친해지는 일이 힘들까?
자기 자신에 대한 열등감이 많고 자신감이 없어서라고, 뻔한 정답 같은 얘기를 반복해봤자 상황이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심지어 사람들이 나를 피하는 것처럼 경험되기까지 한다면 문제는 한층 더 분명하다.
무좀이 문제다.
무좀이 있어서 사람들이 나를 피하는 것이고, 고로 내가 사람들과 친해지는 일이 쉬이 성사될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의 무좀.
마음에도 무좀이 있다.
대체로 발톱이나 발뒤꿈치에 생기곤 하는 각화형 무좀이다.
이것은 어떻게 생기는가?
먼저 어떤 고집의 내용이 있고, 그 고집을 보호하고 지속하기 위해 그 주변으로 덕지덕지 언어들이 붙어가면서 결국에는 그 상태로 딱딱하게 굳어져 생겨난다.
각질이 생겨나는 이유와 같다.
고집은 마음의 각질이다.
어떠한 고집은 분명 당시에 취약한 어떤 마음을 보호하기 위해 생겨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거북이가 여린 속살을 단단한 껍질로 보호하듯이.
이와 같은 마음의 각질은 우리의 삶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튼튼해지면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가기도 하며, 또 심리치료나 수행 등을 통해 쉬이 벗겨낼 수도 있다.
그러나 고집의 주변으로 쌓인 딱딱한 언어들을 아무리 벗겨낸다 해도 금방 또 다시 각질층을 형성한다면, 그러한 마음은 현재 진균에 감염된 상태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취약한 부분을 보호하기 위해 생겨난 각질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각질은 진균 자신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런 즉, 이와 같은 종류의 고집을 지키고자 하는 이는, 자신을 좀먹고 있는 진균을 자신이 열렬하게 수호하고 있는 셈이다.
심지어 그뿐만이 아니다. 진균은 얼마나 전염성이 높은가. 진균을 지키고 있는 이는 진균을 널리 보급하겠다는 열의를 가진 이다. 자기 주변부터 시작해 이제 전세계로 진균을 퍼트리고자 하는 그 의지는 과연 자기 자신의 것일까, 아니면 진균의 것일까? 어느 쪽이든 간에, 그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잃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할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마음의 무좀이다.
무좀은 성공적인 연애에 매우 큰 장애물이며, 마음의 무좀도 정확하게 그러하다.
시인과 촌장의 잘 알려진 노래인 '가시나무'에서는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라고 노래하지만, 우리는 완벽하게 동일한 의미를 담아 다음과 같이 개사할 수 있다.
"내 속에 무좀균이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우리에게서 가장 고집되는 내용, 그러나 고집할수록 실은 우리 자신을 가장 잃게 되며, 결국 우리가 사랑하는 그 님마저도 잃게 되는 그 고집의 내용은 그렇다면 무엇일까? 곧, 마음의 무좀균의 정체란 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정체성이다.
사랑이 집착인 것이 아니라, 집착 때문에 우리는 사랑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
우리가 사랑 대신에 그토록 집착하며 붙잡고 있는 것은 정체성이다. 연애사의 모든 갈등과 또 이별의 이유가 다 이 정체성게임이다. 자기 정체성을 상대에게 받아들이라고 강요하고, 그렇게 서로간에 자신의 정체성을 전염시키려는 침략전쟁을 벌이다가, 끝내는 공허한 폐허로만 남게 되는 파국을 맞는다.
우리가 모든 사람과 벌이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정체성게임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마음의 진균들의 대전쟁.
세계무좀대전.
정체성이 지배하고 있는 곳에 연애의 시절은 멀리 가버리고 없다.
그러한 정체성의 대지는 삼독(三毒)이 들끓는 곳. 끝을 모르고 불타오르는 욕심과, 시기 및 질투로 인한 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보지 못하게 되는 어리석음이 넘치는 곳이다. 이것은 아주 실증적이다. 우리가 자신의 정체성을 고집할 때 우리의 상태가 정말로 이와 같다.
정체성을 무좀균이라고 한다면, 삼독은 무좀균이 일으키는 실질적인 증세인 것이다.
거듭해서 강조하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정체성은 실은 가장 우리 자신이 아닌 것이다. 차라리 우리 안에 침투되어 들어온 사회문화적 바이러스라고 이해하는 편이 낫다. 우리는 바이러스에게 잠식된 뒤, 그 바이러스가 우리 자신인 줄로만 착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러할 때, 우리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추면 그 모습도 일그러져 보일 것이다.
연애라는 것이 서로를 거울로 마주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이 상태에서는 건강한 연애라는 것이 불가능할 것임을 우리는 쉬이 짐작할 수 있다.
자신도 아닌 것을, 심지어 독에 의해 일그러진 그 모습을, 상대에게 다 받아달라고, 엄마처럼 품어달라고, 이런 나를 사랑해달라고 구걸하는 경우라면 더 말할 것이 있을까?
그것은 마치 무좀걸린 발을 상대의 얼굴에 들이미는 행위를 연애라고 믿고 있는 어떤 미친 일과도 같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사랑을 꿈꾸는 자라면 먼저 마음의 무좀을 치료해야 할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신체적 무좀을 치료할 때 유효한 그 방법론들은 그대로 적용된다. 몇 가지를 살펴보자.
마음을 습한 곳에 두지 말 것. 이것은 마음을 자기연민 속에 빠트리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연민은 정체성이 만들어내며, 동시에 정체성만을 더욱 강화해간다. 멈추어야 한다. 마음을 건조시켜야 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사건들에 대하여 정체성과 관련된 의미부여를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담백하게 경험해야 하는 것이다.
마음에 통풍이 잘 되게 할 것. 정체성은 고인 것. 정체성에 담긴 마음은 고여서 썩는다. 결국 독이 된다. 마음은 원래 흐르는 것이며, 고였다면 이제 바람처럼 흘러야 한다. 자신은 어떠어떠한 사람이라는 식의 정체성으로 마음을 가로막지 말고, 일어나는 마음이 일어나서 스스로 흐르게 해야 한다.
마음에 햇볕을 많이 쬐일 것. 마음에는 빛이 필요하다. 명징한 이해가 필요하다. 마음을 진실로 이해하고자 하는 그 관심의 햇빛이 필요하다. 자신에게 무관심한 이에게, 곧 자신을 곧잘 방치해두는 이에게 진균은 침투해온다. 이러한 맥락에서 무좀은 '무관심의 질병'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음의 무좀은 더욱 분명하다. 자신의 마음에 대한 무관심이 그것을 야기한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얼마나 우리 자신의 마음과 친해질 수 있는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이 스스로 일어나 펼쳐내는 그 작용들에 깊은 관심을 갖고, 그 운동이 방해받지 않고 실현되도록 우리 자신을 허용하며, 그럼으로써 마음이라는 것을 친밀하게 알아가게 되는 이 일들은, 실은 그대로 건강한 연애의 과정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건강하게 만들고자 움직이는 그 일이, 동시에 건강한 연애를 성립시키는 일로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치유가 곧 사랑이다.
이렇게 말하는 일은 조금 멋있을까.
우리가 『선불교 연애학』이라는 이름으로 묘사해보려는 것은 결국 이 조금 멋진 일들에 대해서다. 아무리 표면적으로 멋있어도 무좀을 달고 다니면 정말로 멋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리가 멋져질 수 있는 현실을 우리가 꿈꿔볼 수 있다면, 그것은 마음의 무좀이 치유되는 현실이며, 곧 동시적으로 우리에게서 사랑이 시작되는 현실이다. 그 현실은 그리 멀리에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