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불교 연애학 #3

"나는 너의 자유를 꿈꾼다"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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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상대를 놓고 하는 사랑이 연애라고 한다면, 연애란 곧 상대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사랑한다던 소설 같은 말들은 그렇게 멋드러지게들 늘어놓으면서 왜 상대를 자유롭게 하지는 않는가? 그 말들은 말들이 생겨난 이유 그대로 그저 묶기 위한 말들이었나?


자신이 너무 외롭고 쓸쓸하니 상대를 자신의 옆에 묶어두기 위해서만 발화되는 말들, 그와 같은 주문의 노래들. 그러한 것들을 연애라고 알고 있으니 우리에게 연애란 애초 쉬운 팔자가 아니었다.


새장 밖으로 날아가는 마음의 모습을 그릴 수 있다면, 그것이 이제 우리가 새롭게 기억해야 하는 연애의 그림이다.


맨날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살아야 한다, 온갖 올바름의 명령과 똑똑함의 지시로 가득찬 이 갑갑한 세상으로부터 마음은 해방을 꿈꾼다.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새장이다.


그러나 새장 속의 새가 나가지 못하는 것은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라서다. 어디로 가도 세상을 벗어날 수 없이 다 똑같을 것만 같아서 마음은 세상 안에 주저앉는다.


그래서 그러한 상대 앞에 내가 나타난 것이 아니겠는가.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른다면, 이제 이 가슴속으로 오라고.


가장 거대하게 열려있는 이 가슴속으로. 영원한 이 푸른 하늘로.


그렇게 마침내 자신이 가야 할 곳을 알게 된 마음이, 세상이라는 이름의 작은 새장을 벗어나 우리 자신의 넓은 가슴속을 향해 날아가게 될 때, 그것이 그림의 완성이다. 마음은 자신이 있는 그대로 온전하게 존재할 수 있는 푸른 하늘을 얻은 것이며, 곧 자유를 얻은 것이다.


연애는 우리 자신의 안에 이 자유의 처소를 마련하는 일이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던 마음이, 비로소 우리의 가슴속을 향해 날아가 완전한 자유를 얻는다. 처음으로 자유를 얻는다. 자신이 가장 꿈꾸어오던 그 모습을 얻으며, 얼마든지 그것을 얻어도 된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자신이 그렇게 자유로이 살아도 되는 존재임을 더욱 분명하게 확인한다.


이처럼 사랑을 할수록 더 자유로워지는 일이 생겨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런 것을 뭐하러 하고 있는가? 경제공동체로서의 이득 때문에? 사회적 체면 때문에? 부모의 눈치 때문에? 또는 단지 성욕의 해소를 위해서? 자위보다는 상대가 있는 것이 덜 자괴감이 드니까?


이것들은 다 마음이 세상이라는 새장 속에 갇혀 있게 되었던 그 방식들일 뿐이다.


이제는 피곤해서 사랑이나 연애 같은 것은 하고 싶지 않다고 우리가 말하게 될 때, 우리는 실은 바로 이런 방식들에 지쳤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하다. 유일하게 자유를 얻게 해줄 것이라고 기대한 것에 좌절하게 되면 더욱 지친다. 그러니 그 기대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애초 기대할 수 없는 곳에 기대했던 것이 문제였을 뿐이다.


감옥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이가 감옥에 기대하고 있는 동안 자유는 요원하다. 그 감옥에 사랑이나 연애 등의 팻말이 붙어있다 해도 그것은 똑같은 감옥에 불과하다.


사랑은 아주 전통적으로 초월을 향한 소망이었다.


세상이라는 감옥을 초월하고 싶은 이들이 사랑을 희구했다. 그것은 정확한 직감이었으리라. 사랑만이 진실로 우리를 낡고 갑갑한 세상으로부터 초월하게 해준다.


외적 세상으로부터의 초월이니 이것은 내적 초월의 방향성을 갖는다. 그윽해지는 것이며, 성숙해지는 것이다. 사랑하고 있는 연인들의 눈동자가 점점 깊어지는 이유일 것이다.


사랑을 통해 인간이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 자신의 무한한 내적 공간이며, 자신이 그토록 큰 존재였다는 사실이다. 사랑은 이처럼 인간이 세상 따위보다 더 거대한 존재라는 사실을, 그렇게 결코 세상이라는 새장에 갇힐 수 없는 인간 자신의 초월적 사실을 자각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칼릴 지브란이 노래한 것처럼, 가끔 사랑의 일이 아프다면, 그것은 사랑이 우리를 회복시키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에 맞추어 살기 위해 우리 자신을 딱 세상만큼의 무척이나 작고 쪼잔한 크기로 축소해놓았고, 사랑을 시작함으로써 다시 원래의 크기를 회복하기로 한 것이다. 비유하자면, 자신의 몸을 완전히 찌그러트려놓고 있던 이가 기지개를 펴고 일어나려 할 때 경험되는 그 근육통이 곧 사랑의 아픔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을 함으로써 우리는 또한 그 전까지는 경험하지 못했던 여러 마음들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꽃이 나비들을 부르듯이, 이제 우리 안에 활짝 열린 하늘이 새들을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더 많은 새들이 자유롭게 활공하는 그 내적 현실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의 크기를 실감하게 된다. 새들의 자유만큼 하늘도 더욱 자유롭다. 그렇게 확인된다.


이렇듯 사랑이 우리를 함께 자유롭게 하는 현실을 우리가 경험하고 있다면, 우리는 연애 중인 것이다.


우리가 상대의 자유를 꿈꿀 수 있다면, 좁은 새장 밖으로 날아가 우리의 광활한 가슴속을 향하는 그 모습을, 그렇게 상대가 영원히 자유로운 모습을 우리의 가슴속에 그리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도 함께 자유로운 중이다. 그림의 완성이며, 연애의 성립이다. 우리가 상대를 놓고서 사랑이라는 것을 배우기로 했다면, 지금 잘 배우고 있는 것이다.


잘 배울수록 불가능성은 점점 더 가능성으로 바뀌게 되고, 이처럼 잘 배우는 연인들 사이에서는 서로가 서로의 자유의 실현처가 된다. 세상이라는 작은 곳에서는 불가능했던 마음을 서로의 하늘에서 꽃피워볼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들이 출현한다. 너무나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했던 것을 서로가 함께 실현해가는 일, 그것은 분명 연애의 즐거움이자 연애의 아름다움일 것이다.


인간은 이 드넓은 하늘 아래서 바로 이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누리라고 태어난 것이 아니었던가?


하늘이 세상이라는 새장으로 가려져 있다면, 인간은 그 자신의 내적 하늘을 통해서라도 다시금 자신이 누려야 할 이 본래적 현실을 찾고야 만다. 기어이 그 자유의 현실을 꿈꾸고야 만다. 이것이 우리의 살아있는 연애사다. 새장을 떠난 새가 우리의 가슴속으로 날아드는, 즐겁고도 아름다운 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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