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느낌"
물질적이라는 의미는 감각한다는 의미다.
몸이 있는 것은 감각한다.
뒤집어 말하면, 감각하고 싶어서 몸이 있다.
인간의 몸은 더욱 감각하고 싶은 이 소망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몸이 있어서 우리는 욕망 때문에 시름한다고 통속적으로 말하고들 하지만, 실은 그 반대일 것이다. 몸이 욕망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소망하던 것이 곧 몸이었다.
삶이라는 것은 언제나 몸의 일이다. 우리는 몸으로 사는 것이지, 그 외의 다른 어떤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며, 그럴 수도 없다.
잘 산다는 의미도 더욱 분명하다. 그것은 잘 몸이라는 것, 그래서 잘 감각한다는 것, 바로 잘 느낀다는 것이다.
느낌이라는 것에 대해 우리는 오해도 많이 해왔고, 다시 새롭게 발견하기도 해왔다.
오늘날에는 적어도 이 느낌이라는 것을 단순한 하위의 정신기능으로 간주하지는 않고 있다. 관점들에 따라서는 오히려 최상위의 소재다. AI와 인간이 결국 변별될 수밖에 없는 그 핵심으로서 우리는 이제 느낌을 말하곤 한다. 즉, 느낌은 가장 인간다운 특성인 것이며, 나아가 인간조건인 것이다.
일본의 스즈키 선사는 선불교가 무엇인지에 대해 묻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한 바 있다.
"선은 느낌이다. 느끼는 일에 다름아니다."
선이 이처럼 느끼는 일이라면, 선은 결국 인간인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인간으로서 발견하게 되는 일일 것이다. 또 다른 말로 선은 인간성의 회복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있는 그대로 온전하게 태어난 이 몸의 존재로서의 인간.
느낌을 통해 우리는 그 인간이라는 존재방식이 얼마나 존귀한 것인지를 발견하고 또 회복한다. 이를 통틀어서 자각이라고 부를 것이다.
느낌이 최상위의 소재인 이유는, 모든 느낌 안에는 반드시 이 자각의 성분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힘은 어떤 교육이나 이념, 윤리 같은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자각이다.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자각할 때 우리는 오롯이 인간이다.
우리는 왜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자주 수치스럽거나 죄스럽게 여기는 것일까?
아직 자신을 인간으로 자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대체 얼마만큼의 존재인지를 현재 몰라서 그렇다.
자각이 곧 치유라는 말은 현대심리치료의 황금률이지만, 그 기원은 더욱 오래되었다. 선불교는 분명 그 기원 중 하나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온전한 존재로 알고 싶어할 때, 그것은 우리가 인간임을 자각하고 싶다는 말이다. 알고 싶다. 정말로 알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가 정말로 이 세상에 태어나 마음놓고 숨쉬며 살아도 되는 자유로운 그 인간이 맞는지를.
그리고 알고 싶었다.
우리 앞에 서있는, 우리가 무척 좋아하는 그 상대도 자신이 바로 그 인간이라는 사실을 몹시도 알고 싶어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연애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더욱 잘 느끼도록 진화된 이 인간의 몸으로, 그 눈을 마주하고,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 손길로 부드럽게 머릿결을 쓰다듬고, 너무나 사랑하고 있다고 다정하게 입을 맞추며, 그렇게 상대를 더욱 잘 느끼고자 우리는 연애를 시작했던 것이다.
상대를 인간으로 발견하기 위해.
상대가 인간으로 회복되는 그 일을 돕기 위해.
서로에게서 인간을 깨우고자, 그리고 그 인간을 서로의 눈앞에서 기쁨으로 만나고자, 바로 그렇게 우리는 연애를 시작했던 것이리라.
우리는 연애라는 활동 속에서 얼마나 서로에게 접촉하는 일을 좋아하는가?
접촉해서 느껴지는 그 느낌이 너무나 좋다. 완벽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순간일 것이다.
우리가 태어나길 정말로 잘했다고 경험하는 때도 이런 순간들이다.
느낌을 중요한 소재로 탐구하는 신체현상학자들은 이에 대해 분명한 언술을 한다.
우리가 어떤 것을 느끼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느끼는 동시에 실은 우리 자신을 느끼고 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분명 우리는 연인을 포옹하던 그 순간에, 우리 자신을 제법 좋은 것으로 느낄 수 있었던 셈이다.
그때 우리 둘은 함께 인간이었고, 그 사실이 무척이나 좋았다.
그렇다면 느낌이라는 것이 대체 어떠한 작용을 하는지도 한층 더 심화되어 이해가능해진다.
그것은 실증적인 긍정의 작용이다.
존재의 긍정. 존재하는 것들을 향한 전적인 긍정.
우리가 어떤 것을 느낀다는 것은, 우리가 느끼고 있는 그것을 전적으로 긍정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느끼고 있는 우리 자신도 전적으로 긍정하는 것이다.
몸으로 사는 삶이라는 것이 이 느낌의 일이라면, 결국 이것은 우리 삶에서 펼쳐지는 모든 것에 대한 긍정의 일이 된다.
뒤집어 말하면 이럴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며 만나는 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다 긍정하고 싶어서, 이 느낌의 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붓다는 명징한 그 본이 아닐 것인가.
그래서 우리는 붓다를 이렇게 다시 기억할 수 있다.
그는 모든 것과 연애했던 연애의 대가라고.
그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의 이름을 다시 찾을 수 있도록 그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며, 또 그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존재할 자기의 자리에 다시 앉을 수 있도록 그 손길을 상냥하게 마주잡은 이.
그것은 이 우주에서 가장 긍정된 하나의 완전한 느낌이었다.
상대에서 인간으로, 인간에서 존재로, 존재에서 하나의 완전한 느낌으로.
이것은 연애가 완성되어가는 그 과정의 묘사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반드시 도달한다.
이런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인, 이 삶이라는 것이 정말이지 엄청나게 좋은 것이라는 사실에.
"좋다, 좋다."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은, 정말로 너무 좋기 때문이다. 말이 안된다. 말도 안되는 것이 너무 좋기만 하다.
무엇이?
연애가.
내가 존재하고, 상대가 존재해서, 이 모든 것이 함께 존재하는 이 완벽한 일들이, 그 하나의 느낌이.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또 어떻게 내가 이 말도 안되는 것을 꽉 끌어안고 있을 수 있을까?'
연애의 어떤 순간에 우리는 분명 지금 이것이 기적이라는 사실에 당도한다.
그렇다.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기적이다.
그 인간을 지금 이 순간 온몸으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기적의 선물이다.
우리 앞에 지금 존재하고 있는 그 물질적인 것, 그 물건은 바로 그러한 것이다.
인간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으며, 부를 때는 '내 사랑'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모든 느낌은 실은 다 이 사랑으로 충만해있다. 그래서 모든 느낌은 결국 다 연애의 느낌이다. 잘 느끼는 것이 잘 연애하는 것. 인간은 바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연애의 물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