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불교 연애학 #5

"꿈도 희망도 없는 연애"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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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연애에는 꿈도 희망도 없다.


꿈과 희망을 대신해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엄마와 아빠다.


자신이 연애에 대해 사회적으로 잘 기능하는 척하는 이들일수록 실은 더욱 엄마와 아빠를 찾고 있고, 서로에게 열렬히 엄마와 아빠가 되어주려 한다. 서로를 캥거루와 코알라처럼 자신의 자아주머니 안에 넣은 채 우쭈쭈 평생 양육하려 한다. 그렇게 상대를 자기의 자아를 쏙 닮은, 자기가 믿는 이상적인 아동의 모습으로 조각해가며.


아동,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아동들이 서로에게 소꿉놀이처럼 이 엄마아빠의 일만을 해가는 것을 우리는 연애라고 잘못 알아왔다. 그러니 이러한 연애에는 꿈과 희망이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아동에게는 자신의 유일한 꿈과 희망이 아빠와 엄마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미 꿈과 희망의 자리가 정답처럼 채워져 있으니, 그것들은 영영 찾아올 수 없게 된다.


됐다. 아동이 무슨 연애인가. 야동이나 봐라. 요람에 누워 엄마아빠가 떠먹여주는 자극이나 소비해라.


꿈과 희망은 자신이 직접 자신의 두 팔과 두 다리를 쭉 뻗어 현실의 경계면을 실감할 때야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현실을 넘어서려는 것이 곧 꿈과 희망이다. 그러려면 역설적으로 현실에 안착해야만 한다. 분명하게 자신의 현실을 사는 이만이 꿈과 희망을 가질 수 있으며 현실을 초월할 수 있다.


그러니 연애는 무엇보다 현실적인 지평에서야 시작될 수 있다.


상대의 저축액이나 연봉, 사는 집의 크기 등을 묻는 일이 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바로 그런 것이야말로 엄마아빠를 찾는 전형적인 일들이다.


현실은 언제나 나의 현실이다.


상대 없이도 내가 스스로 살아갈 수 있다는 그 사실만이 아주 고유하면서도 근원적인 나의 현실이다.


상대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구는 이는, 이 인간의 고유한 근원의 현실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는 백날 돈 얘기나 시사 얘기 같은 것을 하더라도 비현실적인 인물일 수밖에 없다. 자신의 가장 기초적인 현실을 제대로 밟고 있지 않으니 그 위에 쌓여있는 것은 다 언어의 모래성일 뿐이다. 자신을 수식하기 위해 꾸며낸 언어들로 성숙하고 노력한 척해보지만, 그 본질은 그저 엄마아빠가 없으면 살 수 없다고 믿는 아동이다.


아동들은 거의 반드시 연애라는 미명으로 다른 누군가를 자상한 부모처럼 돌보는 척하거나, 친절한 교사처럼 이끄는 척하거나, 나아가 낭만적인 연인처럼 진심으로 사랑하는 척을 하곤 한다. 다 쇼다. 소꿉놀이. 아동이면 그냥 야동이나 보는 게 낫다. 야동을 보며 자신의 두 팔과 두 다리가 어디에 달려 있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해하면서 자신의 몸과 친해지는 편이 정말로 한 2억배 유익하다.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이가 연애도 잘하게 된다는 통속적인 말은 완전한 참말은 아니다.


상대없이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아동과 같은 이는 애초 연애 자체가 불가능하다. 우리는 이제 이렇게 더욱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사회구성원의 재생산을 위해 만들어진 제도적 문법의 소꿉놀이를 우리가 연애라고 착각하고 있는 한, 우리는 늘 아동으로만 남게 될 것이며, 우리의 연애에는 늘 꿈도 희망도 없게 될 것이다. 단지 다음 세대의 노예를 만들기 위해서만 태어난 번식도구의 신세와 다를 바가 없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출생률이 매우 낮아진 상황은 이러한 차원에서 무척 고무적인 일이다.


적어도 우리는 더는 우리와 같은 노예의 운명을 더는 만들고 싶지 않다는 것이며, 이 전적인 노예의 재생산에 관한 일로부터 연애의 실제를 분리하고 싶다는 것이다.


더 쉽게 요약해보자.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이루어주고 지켜주겠다고 하는 친절한 엄마아빠들이 넘쳐나는 곳에서는, 또 누구나 자신을 그런 존재인 것처럼 연출하고 자임하고 있는 곳에서는, 연애라는 것이 도무지 불가능하다.


"힘내, 민철아! 조금 더 아래야, 옳지옳지, 그래그래, 잘했다 내 새끼. 그리고 이제 물개가 공놀이를 하듯이 앞뒤로 슥슥 미끄러지면서, 그래그래, 어쩜, 장한 내 새끼!"


이처럼 엄마아빠가 따듯한 눈길로 지켜보며 응원하는 가운데 연인과 섹스를 하는 장면을 떠올려보면, 이것이 바로 그것이다.


토나오는 이 그림 속에는 진실로 꿈도 희망도 없다.


아동들이여, 제발 연인과의 침소에 엄마아빠를 데려오지 말고, 부디 야동이나 봐라.


역으로 상상해보자.


우리가 그토록 꿈꾸고 희망하던 연인과의 동침을 위해 샤워를 하고 막 침대 위에 올라갔더니, 거기에는 연인 대신에, 우리의 꿈과 희망 대신에, 연인의 엄마아빠가 알몸으로 나란히 누워 우리를 향해 씨익 다정하게 미소짓고 있다.


공포영화다.


그동안 우리는 이런 미친 일을 연애라고 믿어왔던 것이다.


그러니 발기부전 등 다양한 성기능의 장애들도 생겨나고, 권태기도 빠르게 찾아온다. 그러한 위기를 극복해보겠다고 초대남도 부르고 NTR도 시도하는 등 갈수록 복잡해지고 일그러진다. 연애와 관련된 모든 것이 우리를 더 자유롭고 가볍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더욱 무겁고 힘겹게 만드는 셈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노예가 된 상태다. 우리 자신이 무겁고 힘든 상황에 구조적으로 묶여 있다면 우리는 지금 노예의 상태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처럼 힘들 때 우리에게는 연애라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다.


우리가 무겁고 힘든 순간에 꿈꾸는 것은 연애가 아니라 엄마아빠다. 인간을 퇴행시키는 가장 빠른 방법은 그에게 한계 이상의 고통을 지속적으로 가하는 것이다. 그러면 엄마아빠의 품속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퇴행의 소망이 자동적으로 출현한다.


그렇게 사회 속에서 고통받던 이는 결국 자신의 엄마아빠가 되어줄 것 같은 상대를 찾게 되며, 그를 자신의 모든 현실에 대한 구원책으로 간주하게 된다. 바로 이 방식으로, 사회를 위한 미래의 노예를 재생산할 번식의 임무를 맡은 '새로운 엄마아빠'는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동일한 고통 또한 반복될 것이다.


이것은 사회가 왜 끊임없이 인간에게 과업을 부여하여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드는지에 대한 이유다. 그래야만 인간을 아동의 상태로 퇴행시킬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엄마아빠라는 것이 지고한 가치로 계속 추구될 수 있고, 결국 그 엄마아빠가 생산한 사회적 노동력들에 의해 사회구조의 지속이라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노골적인 왕의 이름만 없을 뿐이지, 이것은 왕권의 유지를 위해 평생을 봉사해야 하는 세습노예의 상황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바로 이러한 노예의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 아니었던가?


그것이 우리의 꿈과 희망이 아니었나?


자신의 현실을 살아가는 이의 모습을 살펴보자. 그는 엄마아빠라고 하는 것을 핵심의 기제로 놓고 작동하고 있는 이 사회의 문법에 편승하면 할수록 자신이 노예가 된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그런 방식으로 상대를 찾아 상대도 노예화하며 자신들의 자식까지도 미래의 노예가 될 그 운명으로부터 그는 벗어나고자 한다.


그러니 그는 이제 아주 단순하게, 엄마아빠를 추구하지 않는다. 이것은 독립의 의미가 아니다. 그보다 더 심원한 것. 존재의 본성을 이해하는 일에 대한 것이다. 존재는 원래 엄마아빠가 없이 스스로 존재한다는 사실 위에 자신을 세우는 것이다. 인간이 바로 그러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한 이는 굳이 사회와 싸우려는 것도 아니다. 사회의 명령이 환상이라는 사실을 알아갈 뿐이다. 그러니 그 명령들이 점점 더 그에게 영향력을 갖지 못하게 된다. 사회적 가치를 재창출할 '새로운 엄마아빠'를 지향하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소외된 어리석은 이가 될 것이라는, 사회의 은밀한 협박과 공갈이 그에게는 완전한 허구로 경험된다.


엄마아빠를 바라지 않기에, 그는 엄마아빠의 역할을 해줄 그러한 상대도 바라지 않는다. 그는 상대없이 스스로 살아가며, 그 일 자체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오히려 상대를 추구하며 상대에 집착해서 살 때보다 훨씬 충만하고 행복하게 그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그는 지금 자유로운 것이다


현실적이라는 말은 언제나, 지금 자신의 그 현실 속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동시에 자유란, 거듭되는 자유의 초월을 가리킨다. 자유란 한번 도달해서 얻는 어떤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계속해서 초월하고자 하는 그 운동의 경향성을 가리킨다.


곧, 자유란 언제나 초자유이며, 이에 따라 현실적이라는 말 또한 언제나 초현실적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게 된다.


하나의 자유는 그 자유를 뛰어넘기를 바라며, 하나의 현실은 그 현실을 뛰어넘기를 바란다. 그럼으로써 하나의 자유는 더욱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하나의 현실은 더욱 든든한 우리의 현실이 된다.


상대 없이도 살 수 있는 이가, 상대와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것.


이것은 연애가 어떻게 이러한 초월의 일인지를 함축하는 표현이다.


그러니 연애를 하고 있는 이들은 이러한 초월사업의 동업자라고 말하는 것이 좋다. 서로 이미 자유로운 그들은 더 거대한 자유를 위해 함께 일하고 있는 것이며, 서로 이미 현실에서 충만한 그들은 더 가득한 아름다움의 현실을 위해 함께 일하고 있는 것이다.


곧, 연애 중인 이들은 엄마아빠에 대한 결핍을 채우기 위해 서로를 찾고 있지 않다.


그들을 연애로 끌어들이는 것은 그러한 아동의 결핍이 아니라, 바로 꿈과 희망이다. 부족해서가 아니라 충만해서 그들은 움직인다. 우리가 강변의 산책로를 향하게 되는 그 이유와 같다. 우리는 결핍되어서가 아니라 어떤 충만한 존재의 기쁨을 따라 들꽃을 만나기 위해 그 길로 기쁘게 나선다.


그래서 이러한 연애를 하고 있는 연인들에게서는 어떤 한정없는 자유의 기운이 피어오르는 것이며, 또 어떤 초현실의 공기가 그들을 에워싸고 있는 것이다.


붓다가 꽃을 든다. 어떤 대상이 필요없이 스스로 가장 온전한 존재가, 스스로 가장 온전한 존재를 만났다. 지금 만나고 있다. 그 사이에서 은은하게 퍼져가는 어떠한 초현실의 향기. 결코 언어가 될 수 없는 자유로운 존재의 노래. 그러나 분명한 미소로 명징하게 알려지고 있는 그것. 우리는 그것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는가?


꿈과 희망이라고 말한다.


우리 자신과 같이 온전한 것을 만나고 싶어한 일,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꿈과 희망이었다.


연애란 자기 자신을 상대에게서 보며 기쁘게 그것을 만나가는 일이다.


그것이 너무 사랑스러워, 그것이 있는 그대로 온전할 자유를 더욱 그릴 수밖에는 없게 되는 일이다.


그러니 연애 또한 언제나 초연애다.


이제 상대에게서 자신을 보지 않는다. 자신도 없고 상대도 없다. 다만 온전함만을 보며, 그 온전함만이 커져간다. 그 존재 자체만이 가장 귀하게 깊이를 더해간다. 커진 것은 사랑, 처음부터 완벽했던 것도 사랑, 이 사랑으로 세상은 가득 차있었고, 연인들은 서로의 눈에 그 사실을 생생히 새긴다. 태어나길 잘했다. 감동이다. 그렇게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서로를 안은 품속에서 이 거대한 우주를,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 그 참된 원소를.


이러한 멋진 사랑을 우리가 해볼 수 있다는 것, 그러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 이것이 우리의 꿈과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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