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을 말씀드립니다(2025)

익명성의 신들이 지배한다

by 깨닫는마음씨


Iwilltellyouthetruth.jpg?type=w1600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진상 같은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신이 되기만을 바란다.


가장 신이 되기를 바라는 이들이 모여 그 이름을 대중이라고 한다.


그래서 대중의 앞에는 늘 미디어의 제단이 차려지고 어린 양들이 봉헌된다. 자신에게 바쳐진 양들을 보면서 대중은 '보시기에 좋았다'며 흡족해하기도 하고, 양들의 의지를 지지해 그 소망을 들어주기도 하며, 또 잘못된 양이 있으면 심판과 처벌로 엄히 다스리기도 한다.


다 신의 일인 셈이며, 미디어를 통해 이 일들을 할 기회를 얻음으로써 대중은 스스로를 신으로 자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미디어가 왜 늘 대중과 야합하고 있는가의 이유일 것이다. 대중 자신이 신이 된 것 같은 짜릿함을 더 많이 경험할 수 있도록 조력하는 방향으로 미디어는 발달해왔다.


인터넷이라는 미디어는 현재 이 대중의 자기신격화의 일을 인류사의 어느 때보다도 수월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인터넷이 담보해주는 익명성은 신의 첫 번째 조건이다.


고전적으로 신이라고 추상되었던 개념과 인간이 맺던 관계는 언제나 일방통행이었다. 신은 인간에게 위력을 가할 수 있지만, 그 반대로 인간이 신에게 무엇인가를 하는 일은 봉쇄되어 있다. 이러한 일방통행의 원리로 인해 신에게는 권력이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이며, 오늘날 인터넷의 익명성은 바로 이 일방통행의 권력을 대중에게 쥐어준다.


익명성이라는 것은 단지 이름이 은폐되어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실은 존재의 은폐에 대한 표현이다. 자신의 존재는 가리면서 그 존재의 영향력만을 개시하려 하는 이 일은 흡사 '숨은 신'에 대한 비유를 떠올리게 한다. 그 정도로 철저하게 신성이라는 것은 모방되고 있는 것이며, 무척이나 일그러진 방식으로 그 일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을 자유롭게 살게 하기 위해 그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비존재의 영역을 향한 어떤 신성의 거룩한 의미와는 달리, 이 존재은폐의 방식은 외견만 유사할 뿐 그 본질은 단지 비겁한 관음증일 뿐이다. 마치 수렴청정을 하는 늙은 여왕이 자식의 침소에 구멍을 뚫고는 침을 흘리며 아들과 며느리의 밤일을 관람하는 그림과도 유사하다. 신이라는 것은 이 경우 음험한 욕망의 표상이 되어 있을 뿐이다.


신은 바로 이렇게 죽었다. 대중이 신의 자리에 대신 앉으려고 신의 자리 자체를 아래로 끌어내렸다. 대중의 시대가 되면서, 신은 가장 그 의미가 몰락되어 죽고 만 것이다. 그러나 대중이 죽인 것은 신만이 아니다. 끝내는 제단의 양들도 다 죽게 될 것이며, 결정적으로 가장 부정되는 것은 익명성의 존재은폐를 통해 권력을 얻으려던 자기 자신이다. 존재를 가리려고 하니, 자기 자신의 존재가 가장 먼저 망각되고 상실된다.


언제나 인간의 문제는 자신이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자신이 하고 있는 그 일이 바로 자신에게 똑같이 다가오게 된다는 그 사실을 차마 상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존재에 엿을 먹이면, 자기 자신의 존재가 엿을 먹는다.


그렇게 자신의 존재에 치명적인 타격이 가해지니, 이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와 자신감이 사라지게 되는 일도 당연하다. 자신은 무능력하고 형편없는 존재인 것 같다. 자신이 존재라는 것을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저주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저주해서 잃게 된 이들이 필연적으로 경험하는 것은 극심한 불안과 두려움이다. 자신이 서있는 바닥이 요동친다. 어딘가 의지할 곳이 필요하다. 자신을 괜찮다고 말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럴 때 가상공간에서 얻게 된 '좋아요'의 별점은 흡사 사막에서의 단비와 같이 경험될 것이다. 이런 자신도 긍정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니, 인터넷은 위대하다, SNS는 기적이다, 자신을 인정해준 이 대중의 세력은 그야말로 신이다.


이로써, 우리는 대중의 자기신격화만이 강화되는 피드백에 완벽하게 빠져들게 되는 셈이다. 인터넷을 통해 신적인 권력의 획득을 꿈꿀수록 우리는 더 무능력한 상태로 화하며, 그러한 만큼 다시 더 권력에 의존적으로 집착하게 되는 그 악순환이 생겨난다.


우리는 왜 못나고 부족한 존재처럼 되었는가?


신이 되기를 획책했기 때문이다.


일방통행의 불공정성을 얻으려 했기 때문에 그 결과 정확하게 우리가 얻은 것이 불공정한 현실이다. 우리만 억울한 피해자인 것 같고, 우리만 무력한 희생자인 것 같은 그 현실. 이러한 이들이 이제 스피커가 되어 무슨 힙합전사들처럼 그 모든 아픔에도 자신이 또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그 진상은 이러하다며 다시 한 번 신적인 권력을 얻어내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이제는 지겹기 짝이 없는 그 무수한 내러티브로서의 진상 같은 것을 말하고자 하는 영화가 아니다. 바로 그러한 진상의 진상을 말하고자 하는 영화다. 다들 신이 되겠다고 얼마나 진상 같은 일을 하고 있는지의 그 진상을. 곧, 이 인터넷 미디어의 시대에 우리의 고통은 정말로 어디에서 오게 되었는지의 그 내막을.


자신이 익명성의 신의 자리를 잃어야 한다면, 차라리 다른 인간이 죽는 편이 낫다.


신의 이름을 위해 인간을 죽이던 중세보다 더 암울한 것은, 그 죽음의 집행자들이 오히려 자신을 선량한 소시민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그러니 그러한 자신에게 신이 되는 보상이 당연하게 주어져야 한다고도 믿게 되며, 타인을 죽이는 그 신의 권능을 집행하는 데도 망설임이 없다. 미디어가 이 "많이 아프고 고생했던 당신, 이제 신이 되어라."의 성공신화를 끝없이 조장하며, 대중은 그러한 미디어를 도구로 자기신격화를 정당화한다.


미디어의 화려한 빛만큼이나, 인류의 정신문화사에서 가장 어두웠던 시절로 기억될 현재를 우리는 지금 경험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신이 하나일 때보다도 이제는 다들 신이라서 어둠은 더욱 짙고 가득하다. 자기가 신으로서 대접받아야 한다고 믿는 진상들이 이처럼 지배적인 시대라는 것, 신이 되기를 바랐기에 결국에는 우리 모두가 진상으로 남고야 말았다는 이것이, 이 영화가 말하고 있던 이 모든 것의 진상이다. 영화는 약속대로 누가 진상인지를 말해준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선불교 연애학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