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과 의미

"새로운 실존주의의 작동방식"

by 깨닫는마음씨




물질과 정신, 육체와 영혼, 몸과 마음, 이런 것들은 아주 오래된 역사를 가진 이원론의 개념들이다.


각각의 대조군을 이루는 항목들은 서로 대립적이거나, 상보적이거나, 그러다가 결국에는 변증적이다. 다 통합을 위한 밑작업인 셈이다.


이원론은 언제나 통합을 꿈꾼다. 통합되기 위해서 분열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통합은 지난한 수고를 통해 그래도 무엇인가 보람찬 것이 새롭게 생겨난 척하기 위한 언어게임일 것이다. 진보에의 집요한 도착증. 이것은 무의미성을 망각하거나, 더 핵심적으로는 극복하기 위해 이루어진다.


우리의 입장을 가장 정직하게 자각해보자면, 실은 우리는 이 모든 것에 대해 알지 못하며, 다만 아는 척만 하고 있을 뿐이다. 또 그렇게 아는 척만 하고 있는 동안 결국 우리는 없어지게 될 것이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이와 같이 이 '없음'과 '모름'이라는 우리 삶의 근원적인 요소를 통해 우리가 떠올리게 되는 것이 바로 무의미성이다. 우리를 허무주의에 빠지게 하는 그것.


어쩌면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는 이 무의미성에의 두려움이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은 소유의 소재들을 끌어모으게 한다. 통합은 가장 많은 소유다. 통합의 가장 실제적인 사례는 무엇인가? 그것은 정체성이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 삶의 경험들을 소유하려 하며, 또한 바로 그 기억들을 더 많이 통합함으로써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을 만들어낸다.


정체성은 곧 자신의 무의미성에 대한 필사의 저항이 만든 결과물인 것이다.


이러한 저항의 의지 속에서 모든 정체성이 근거하고 있는 기억이라는 것의 중요성은 더욱 심화될 수밖에는 없다. 더 많이 기억해야 하고, 더 잘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 기억으로 든든하게 방비되는 정체성의 성채에 무의미성이 침입해올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것(nobody)이 아니라, 기억으로 증거되는 그 누군가(somebody)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억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A와 B의 구조를 만들어서, A가 B를 기억해주고 동시에 B가 A를 기억해주면, 그 기억의 효과는 증대될 것이다.


이것이 이원론이 만들어진 이유다.


무의미성을 극복하기 위한 기제로 기억을 강화하기 위해 최초의 관계도식인 이원론은 펼쳐졌다.


이를테면, 존재를 물질과 정신으로 나눈 뒤 그 둘이 필연적으로 갈등하고 대립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어낸다. 우리는 다 잊어도, 우리와 싸운 상대만은 결코 잊지 않는다. 투쟁은 상대를 기억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고로, 이제 물질은 정신을 기억해주고, 정신은 물질을 기억해주는 원리가 형성된다. 서로가 서로를 기억해주면, 서로가 '없음'과 '모름'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고 안정적으로 지속될 수 있으리라 믿으며.


그런 망상이 있었던 것이다.


관계의 힘으로, 언어의 힘으로, 기억의 힘으로, 인간은 인간 앞에 놓인 모든 난제를 극복하게 되리라는 망상이.


그것은 마치 0과 1의 이진법으로 세상의 모든 문제를 풀어낼 수 있다는 인공지능의 방식과도 같았다. 인공지능이 출현하기 훨씬 이전부터 인간은 이러한 지성주의의 신화를 무척이나 진지하게 소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망상을 진지하게 소비하면 코미디가 된다. 이 코미디의 실체는 보통 음모론이라고 불린다. 자신이 똑똑한 척하며, 늘 이원론적 도식에 따른 적을 만들어, 그 적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소설을 쓰는 이들은 음모론자들이다. 이들은 자기가 만든 이원론의 음모론적 소설이 사실인 줄 믿고 산다. 자기최면이다.


실은 음모론자들은 다 허무주의자들이다. 이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허무주의에 너무나 깊이 빠져있다. 그러니 소설을 써서 자기최면을 걸지 않고는 견디지를 못하는 것이다.


오늘날 음모론자들이 창궐하는 것은 허무주의가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니체가 예언한 현대병의 증세들은 더욱 확연하다. 이것들은 다 존재질환들이다.


실존주의자들은 누구나 다 이 존재질환에 대해 말한다. 우리 자신의 존재가 정말로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무시하거나 망각하면 존재질환이 생겨난다. 허무주의는 존재질환의 대표적인 증세다. 이것은 존재가 '없음'과 '모름'에 근거해있기 때문에 발병한 것이 아니다. 그 반대다. 존재가 엄연히 '없음'과 '모름'에 근거해있다는 그 사실을 무시하고 또 망각하기 때문에, 나아가 그것을 회피하고 기만하려 하기 때문에 발병한 것이다.


우리의 정신건강은 우리가 얼마나 '없음' 및 '모름'과 친하게 지낼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비단 실존주의 상담자들에게서만 발화되는 주장이 아니다. 모든 심리치료는 애초 우리가 불확실한 삶과 어떻게 화해하는가의 문제를 다룬다. 불확실성, 그것이야말로 정확하게 '없음' 및 '모름'과 관련된 모든 것이다.


'없음'과 '모름'이라는 것을 나락으로 착각했기 때문에, 우리는 실제적인 나락으로 떨어졌다. 기억이라고 하는 자의적 편집의 결과물을 흡사 성검처럼 치켜들고는 우주를 평정하겠다는 우를 범했다. 도처에 적을 만드는 이원론의 소설로 세상을 뒤덮고, 관계의 감옥에 서로를 구속시켰다. 그 감옥 안에서 언어라는 주술로 서로의 자유를 빼앗고, 서로를 감시하며 처벌하게 되었다.


그렇게 '없음'과 '모름'을 어떻게든 무시하고 회피하기 위해 만들어낸 현실은,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고, 모르는 게 오히려 약인 현실이었을 것이다.


살아도 실은 살아있지 않은 현실. 근본적으로 공허한 현실. 그러니 음모론의 소설구조로 만들어낸 가상의 적과 싸울 때만 뇌속 화학물질들의 자극을 통해 자신이 겨우 살아있는 것처럼 위장할 수 있는 현실.


우리는 이러한 가상현실에 우리 자신을 위치시키게 되었고, 우리의 존재와 가장 빠르게 멀어져갔다. 존재와 멀어진 그 자리에서 어떻게든 존재의 부재감을 지우기 위해 필사적으로 정체성이나 외쳐대고 있었다. 존재의 대체품조차도 될 수 없는 지푸라기 같은 그 비루한 것을 손아귀에 꽉 쥔 채, 자신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어떤 일을 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허무한 연극만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허무하니까 정체성이라도 쥐어야 했던 것이 아니다. 정체성을 쥐고 있어서 인간은 허무해진 것이다.


'없음'의 자리를 가장 있는 것 같은 정체성으로, 또 '모름'의 자리를 다 아는 것 같은 정체성으로 채우고 있어서, 인간에게는 허무주의가 찾아오게 된 것이다.


허무주의는 실은 비워져 있는 것이 아니라, 허무로 채워져 있는 것이다. 정체성이라는 가공의 허무한 것으로 채워져 있을 때 허무주의의 도래는 필연일 것이다.


그리고 원래는 비워져 있어야 할 그 자리가 그렇게 거짓의 것으로 채워져 있게 되니, 이것은 일종의 봉쇄를 위한 마개가 된다. 분명하게 정체성은 막고 있다. 우리의 존재가 터져나오는 그 입구를 철저하게 가로막고 있다. 단지 막는 정도가 아니다. 짓누르고 있다. 억압하고 있다. 참된 우리의 존재를 틀어막고는 자기가 대신 존재하는 척을 한다. 그러면서 자기가 무의미성의 위협으로부터 이 모든 것을 지켜내고 있다는 비극적 영웅 같은 탄식을 토해내곤 하는 것이 정체성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삶에서의 '없음'과 '모름'을 직관하여 떠올렸던 그 무의미성이란 실은 무의미성이 아니다. 아니, 그 표현이 무의미성이 맞다 해도 그것은 허무주의와 연루될 성질의 것이 전혀 아니다.


불교라면 차라리 공(空; sunyata)이라고 표현할 것이다. 그것은 부풀어오른 것. 모든 것을 잉태하는 자궁의 공간이다. 그렇기에 공은 허무주의와 가장 거리가 먼 개념이다. 공은 허무로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으로 비워져 있다. 절대적으로 비워져 있다. 누군가는 이러한 공의 개념에서 '없이 계신 신성'을 유추하기도 한다. 이처럼 절대적으로 비어있는 것은, 절대적으로 존재의 자리를 내어주기 위함이다.


존재가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이 절대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 절대적 비어있음에 의해 성립가능한 것이다. 그러니 이 비어있음은 존재의 근거다. 존재의 고향이며, 존재의 시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우리의 존재가 터져나온다. 두 가지의 양상이다.


바로 '느낌'과 '의미'로 우리의 존재는 웅대하게 스스로를 알린다.


'없음'은 '느낌'을 견인하고, '모름'은 '의미'를 촉발한다.


가장 있는 척하는 정체성이 기각되고 우리가 '없음'의 사실 위에 안착하게 되면, 그 즉시 우리에게 있게 되는 것이 '느낌'이다.


다 아는 척하는 정체성이 기각되고 우리가 '모름'의 사실 위에 안착하게 되면, 그 즉시 우리에게 알려지는 것이 '의미'다.


그래서 '느낌'은 '없음'에 근거한 '참된 있음'이고, '의미'는 '모름'에 근거한 '참된 앎'일 것이다.


불교적으로 말한다면, 전자는 자비로 유비될 수 있고, 후자는 지혜로 유비될 수 있다.


우리 존재의 두 축이다. 동시에 이것은 새로운 실존주의 내지 실존주의 상담의 핵심적인 두 차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가상의 이원적론 게임을 통해 투쟁과 갈등의 도파민이나 길어올리며 사는, 그렇게 실은 만성적인 허무주의에 빠져 있는 오늘날의 상황 속에서 가장 회복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바로 이 '느낌'과 '의미'다. 이것들을 회복한다는 것은 인간존재를 회복한다는 것이며, 곧 우리 자신을 회복한다는 것이다.


'느낌과 의미'라고 쓰면, 이는 '물질과 정신' 또는 '육체와 영혼'이나 '몸과 마음'이라는 표현들만큼이나 이원론적인 표현으로 보일 수 있다. 그 맥락들도 왠지 서로 연결되는 것 같다. 느낌-물질-육체-몸이 상통하는 듯이 보이고, 의미-정신-영혼-마음이 상통하는 듯이 보인다.


다분히 의도한 것이다. 그 표현은 흡사 이원론적이지만, 이처럼 이원론으로 묘사되던 것들이 실은 하나였음을 드러내기 위해 제안된 표현인 셈이다.


'물질과 정신'이라고 쓸 때보다 '느낌과 의미'라고 쓰면, 그 함의는 훨씬 더 일원성을 암시하게 된다. 심지어 '느낌'과 '의미'는 조금도 대립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실제적인 차원에서도 그렇다. 그것은 동일한 현상의 두 가지 표현일 뿐이다.


느낌은 애초에 의미를 담고 있다. 어떠한 의도가 있어서 살아있는 존재에게는 느낌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 느낌을 통해 의도가 충만히 이루어졌을 때 그것은 의미로서 존재 자신에게 알려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느낌있는 것은 의미있는 것이며, 의미있는 것은 느낌있는 것이다.


이런 것이 존재현상이다. 존재는 스스로를 이 '의미느낌' 또는 '느낌의미'로 개시한다. 이것은 아주 정확한 존재질환의 치유책이다. 존재가 상실되었기에 생겨난 질환이, 존재가 가장 드러나는 순간 회복되는 일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우리가 이 '느낌'과 '의미'로 살아갈 때, 우리는 점점 더 정체성으로 살지 않게 된다. 즉, 과거의 기억에 의존해 살기보다는, 소위 말하는 지금-여기(here & now)의 실존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느낌'과 '의미'는 '지금'과 '여기'에 있는 것이지, 다른 시공에 있지 않다.


이렇게 살 때의 이득은 무엇보다 크다.


우리는 어느 조건이든 간에, 이제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서 안심할 수 있는 지평을 얻은 것이다. 정체성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늘 흔들린다. 매순간 새롭게 변화되고 있는 삶의 지표에서 특정하게 고정된 자신의 모습을 지속하려 하면 멀미가 생겨난다. 대지가 춤춘다면 우리도 그 느낌을 따라 같이 춤출 때, 그렇게 대지와 조화될 때, 대지는 언제나 우리의 아래에서 가장 안정된 반석이 되어준다.


그와 같은 반석을 얻으면 이제 우리에게 가능해지는 것은 활공의 역사다. 활주로가 안정되어야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다. 자유, 이제 우리는 안심과 함께 동시에 자유를 얻은 것이다. 우리가 지금 어떠한 느낌이 펼쳐낸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 얼마든지 존재해도 된다는 안심은 동시에 우리가 그러한 우리 자신으로 마음껏 존재해도 된다는 자유다.


존재질환의 결정적인 차원, 바로 '존재의 죄책감'이 이 자리에서 모두 사라질 것이다.


"태어나서 죄송합니다."라는 말은 유치한 중2병 데카당스 소설가들이나 읊조리는 유아적 자아도취의 대사로 들리게 될 것이다. 그러한 말은 비극성을 담지한 고급언어들로 자신을 치장하면 흡사 자신이 수준높은 인물인 것처럼 보일 것이라고 기대하는 정체성의 기획에 의해 발화되는 말이다.


정체성은 분명 자기 자신이 찬란한 태양처럼 뜨지 못한다면 차라리 저주받기를 희망하는데, 축복만큼이나 저주도 특별한 액세서리라서다. 존재의 죄책감은 자기 자신을 특별하게 보이게 하려는 정체성이 편히 얻을 수 있는 먹이다. 그것은 자기 몸을 뜯어먹는 방식의 자해공갈이기에, 시도하면 할수록 실은 자신을 잃어가게 된다. 끝내는 공허해진다. 전술했듯이, 정체성이 허무를 낳는 것이다.


존재의 죄책감이 사라지면 그에 따른 정체성도 함께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특별해지지 못하게 되는 것인가?


오히려 그 반대다. 자해공갈을 해야만 특별함이라는 것을 겨우 얻을 수 있는 것처럼 경험했다면, 이제는 상시로 특별함을 누리게 된다. '느낌'과 '의미'가 이 우주에서 대체불가능한 절대적 특별함의 존재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실감시켜준다.


이처럼 정체성이 힘겹게 시도해오며 그 성과는 미약하기만 하던 것들을, 존재는 훨씬 쉽게 하며 그 성과는 더욱 창대하게 이룬다. 우리의 오랜 고집이 아니라면, 즉 자기가 다 알고 가장 있는 척하려는 그 고집만 아니라면, 모든 일은 우리에게 너무나 수월해진다.


고집은 언제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그 집착의 의지로 일어나며, 동시에 정체성이 결국에는 반드시 해체되고야 마는 매우 자연스러운 이유인 '없음'과 '모름'을 적대하여 일어난다. 이러한 정체성의 고집이 흡사 어떤 소신이나 다양성을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터무니없는 착각이다. 고집은 언제나 무능함을 뜻할 뿐이다. 무능하기에 우리는 고집스러워진다. 정체성은 근본적으로 무능해서 고집스러운 것이다. 무능하니 자신이 다 아는 척을 하고 가장 있는 척을 한다.


당연하다. 존재의 근거인 '없음'과 '모름'을 소외시키면, 존재의 발현인 '느낌'과 '의미'가 소외되어 존재는 무능해질 수밖에는 없다. 우리에게서 '느낌'과 '의미'가 회복되어야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신뢰로운 존재로 경험할 수 있으며, 현실적으로도 잘 기능하는 사람이 된다.


지금 우리는 대단히 실제적인 것들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정말로 우리 모두는 '없음'과 '모름'이라는 터전 위에 놓여 있다는 것, 그렇게 자기가 근거해있는 분명한 사실에 발붙이고 살아야 '느낌'과 '의미'라는 매우 사실적인 힘이 우리의 현실에서 작동하기 시작한다는 것.


실존주의는 어떠한 이념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실제적인 건강성에 대한 것이다. 만성적인 존재질환에 시달리며 병약해진 이는 자신의 힘을 전력으로 발휘할 수 없다. 우리 자신의 존재가 병으로부터 회복될 때 우리는 막강한 역량들을 펼치며 살 수 있게 된다. 인간이 이 모든 위대한 것들을 이룩해온 그 힘이 이제 인간이라는 존재방식을 온전히 회복한 우리 자신의 것이다.


존재의 회복, 이것은 고전적인 실존주의에서부터 새로운 실존주의의 동향들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겨낭하던 과녁이다. 실현이니, 창조니, 변혁이니 등의 것들은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다. 존재만 회복되면, 존재가 알아서 그것들을 한다. 바로 '느낌'과 '의미'가 우리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들을 스스로 이루어 나간다.


존재에 대해 가장 망각하고 있는, 아니 존재를 가장 적대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가 왜 '느낌'과 '의미'를 그토록 중대한 것으로 말하고 있었는지의 그 이유일 것이다. 새로운 실존주의는 바로 이 '느낌'과 '의미'를 통해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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