틸리히는 문화와 종교의 관계성을 "문화가 묻고 종교가 대답한다."로 말한다. 이것은 상대적인 것과 절대적인 것, 또는 범속과 탈속의 경계를 다시 한 번 새롭게 설정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탈속적인 것은 범속을 떠나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범속에 응답함으로써 탈속으로서의 자기초월을 이루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선(禪)에서는 잘 알려진 표현으로 '번뇌즉보리'라는 말을 쓰곤 한다. 번뇌를 벗어나는 것이 깨달음이 아니라, 번뇌로 말미암아 번뇌를 향한 응답으로 출현하는 것이 깨달음이라는 의미다.
종교체험이라는 현상을 아주 심도있게 탐구한 윌리엄 제임스는 이러한 구조를 심리학적으로 부연한다. 개인이 자기의 심리적 취약성을 제거하는 일에 성공할 때 종교체험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심리적 취약성에 대한 응답으로 종교체험이 생겨난다는 사실을 그는 종교심리학적 작업을 통해 분명히 한다.
이와 같은 선구적 견해들에 힘입어 오늘날의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도를 설정해볼 수 있다.
"문화가 묻고 마음이 대답한다."
이것은 오늘날의 현실을 이루는 범속과 탈속의 요소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함으로써, 그 둘 사이의 건강한 관계성을 되살리고자 하는 시도다. 특히나 종교가 정치화 내지 윤리화됨으로써 거의 종교로 기능하지 못하게 된 이 시대에는, 더는 종교라는 이름은 탈속성을 담보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새로운 탈속성의 지시어가 필요하며, 제안될 수 있는 유용한 언어가 곧 '마음'이다.
떠올려보면 마음이라는 표현은 아주 넓은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 그것은 가장 일상적인 차원에서부터 가장 심원한 종교적 경지에 이르기까지의 무수한 상태들을 다 포괄한다. 또한 마음이 실은 종교적인 것의 핵심이라는 사실은 비단 불교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심리학적 탐구들이 주요하게 동의하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가 이러한 탈속성의 소재로 마음을 말하게 될 때의 이득은, 적어도 마음이라는 것이 마치 우리 안에 살고 있는 작은 생각이나 감정의 소인(小人)들처럼 간주되는 일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인식은 사실 문화가 마음을 묘사하고자 하는 집요한 방식이다. 문화는 마음을 더욱더 작고 힘없는 것처럼 말하려는 경향성을 갖는다. 그래야 마음에 대한 문화 자신의 우월성을 확보할 수 있어서다. 이러한 점만 보더라도 '문화'의 반대편에 '마음'을 위치시키는 일은 매우 적절할 것이다.
분명히 해야 할 지점은, 그러나 이것은 결코 현학적인 도취나 추상적인 논리게임을 위한 구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새로운 관계성을 정립하고자 하는 이유는 거기에 고통이 있어서다. 그냥 있는 정도가 아니라 그 고통의 양상이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구조적 성격을 띨 때, 우리가 구조의 해체를 요청하는 일은 자연스럽다. 이 경우, 우리는 분명 문화라고 하는 것의 문제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삶이 고통스러워질 때는 언제나 그 인간이 속한 문화의 한계가 함께 드러나 있다. 곧, 하나의 문화가 한계에 부딪혀있을 때, 그러한 문화는 인간의 삶에 고통을 야기하는 구조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화는 언제 한계에 부딪히는가?
틸리히라면, 문화가 종교를 소외시키고, 오히려 문화 자신이 절대적인 탈속인 척 자기우상화에 빠지게 되었을 때 그 일이 일어난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오늘날의 우리는 이렇게 말해보자.
문화가 마음을 잃었을 때 인간은 고통스러워진다고.
문화라는 것이 어떻게 생겨나서 번성하게 되었는지를 떠올려보자.
거기에는 필요의 문제가 있었다.
인간은 이 지구의 다양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며, 자신의 생명을 지속하기 위한 여러 필요들을 경험해왔다. 그 필요는 무엇보다 인간 자신의 몸으로 경험되었는데, 그런 것을 바로 '느낌'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의 가장 실제적인 형태다.
인간이 이처럼 자신의 느낌을 느껴가는 일은 또한 자각이라고 불리며, 자각은 언제나 현재의 실제적인 필요를 자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자각된 느낌은 이제 순수한 필요를 이루기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이 과정은 흔히 '실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곤 한다.
느낌이 실현된다는 것은, 마음이 온전하게 작동한다는 것이며, 곧 인간이 스스로의 생명을 위한 고귀한 필요를 채우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인간이 필요를 느끼는 것이 지금 이 자리에 없다면, 마음은 어떠한 일을 할까?
그것을 만들어낸다. 필요를 채울 수 있는 것을 이곳으로 끌어와 지금 이 자리에서 실현시킨다.
이것이 바로 '창조'라고 불리는 그 위대한 힘이다.
문화라는 것이 이 창조의 결과라는 엄연한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내기란 조금도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이를 보다 단순하게 말하면, 모든 문화를 만들어낸 것은 결국 마음이라는 얘기다.
마음은 문화의 근거다.
우리는 당연하게도 이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마음이 문화를 창조했으며, 마음이 아니라면 문화 같은 것은 이루어질 수도 없었다. 인간에게 마음이라는 것이 있기에, 인간을 아름답게 그 향기로 감싸는 문화라는 꽃도 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 모든 것에서 마음이라는 것이 실종된다면 대체 어떠한 일이 일어나게 될까?
문화는 그 자신을 문화로 지속하게 하는 생명력을 잃는다. 그러한 문화는 인간의 필요가 정확하게 채워지는 오아시스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결코 채워지지 않는 갈증 속에서 더욱 헤매게 만드는 황무지가 된다.
오늘날의 신경증들의 양상을 살펴보자.
실제적인 필요와 관련하여 생겨나는 일들이 없다. 오히려 추상적인 세계 속에서 만들어진 가상의 정체성들끼리 서로 비교하며 경쟁하다가 생겨난 열등감과 박탈감 또 피해의식이 주된 증세를 형성한다.
마음을 잃은 문화는 생명력을 얻을 수 있는 근거가 없기 때문에, 이처럼 인간을 상대적인 대립과 갈등의 상황 속으로 끝없이 몰아세움으로써 거기에서 생겨나는 투쟁의 에너지를 대신 동력으로 삼는다. 곧, 마음을 잃은 문화는 인간의 생명력을 착취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문화 자신이 지속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의 필요를 이루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 역으로 자신의 필요를 위해 인간을 착취하게 된 이 현실은 정확한 주객전도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쉽게는 인간소외의 현상이라고 불린다. 문화가 마음을 상실했기에 펼쳐진 인간의 암흑기인 셈이다. 유독한 저주의 꽃들이 만개해있는 늪의 현실과도 같다.
그렇다면 문화는 어떻게 마음을 잃게 되었는가? 우리에게는 이제 이 질문이 중요할 것이다. 질문하는 법을 잃으면 대답은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니 필요가 채워지지 않는 불만족의 상태만이 지속될 것이다. 불만족이 낳는 화와 우울의 정서만이 지배적으로 만연해진다.
문화는 바로 이러한 식으로 마음을 잃게 된 것이다. 질문하지 않음으로써.
질문하지 않는 주체는 자신이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주체다.
곧, 문화는 자신이 대답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이 착각에는 우리 또한 큰 몫으로 일조했다. 우리의 삶에서 출현한 물음들을 우리는 마음에게 묻는 대신에, 문화에서 답을 구하고자 했다. 유튜브를 검색하고, 나무위키를 뒤지듯이, 문화에 우리 삶의 모든 답이 있다고 우리는 심대하게 오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문화는 답이 아니라 마음이 낳은 결과일 뿐이다.
하나의 문화가 한계에 부딪혔을 때, 그럼으로써 우리가 고통을 경험하게 되었을 때, 그 상황이 야기한 물음에 대한 명확한 대답으로서 늘 스스로를 알리고 있던 것은 마음이었다. 우리가 그 마음의 대답을 따라 움직일 때 자연스럽게 기존의 한계를 극복한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졌고, 우리는 다시 스스로를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가시적으로 보이는 것은 (새로운) 문화뿐이기에, 우리는 문화를 실제적으로 작동시키고 있는 마음이라는 것을 쉬이 망각하게 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문화 자신도 문화를 향하는 그 열광에 취해 스스로가 어떤 초월적인 위상을 가진 것처럼 착각하게 되었을 수 있다.
오늘날을 가리켜 '문화전쟁의 시대'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아주 좋은 표현이다.
고중세에는 종교전쟁이 펼쳐졌고, 근대에는 이념전쟁이 펼쳐졌으며, 이제 오늘날에는 문화전쟁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각기 다른 성격의 전쟁들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다 동일한 전쟁이다. 우상들의 전쟁. 종교라는 이름의 우상이, 이념이라는 우상이, 또 문화라는 우상이 저마다 자기가 제일 위대한 우상이라고 헤게모니를 얻고자 벌이는 그 전쟁이다.
상대적인 범속의 것은 언제나 다른 상대적인 것에게 승리하면 자기가 탈속적인 것이 되리라는 착각을 해왔다. 마치 애벌레들끼리 싸워 최종적으로 이긴 애벌레만이 나비가 되기라도 한다는 듯이.
그렇게 해서 이루어지는 문화전쟁이란 실은 창조성들의 경연이 아니다. 모방품들의 경쟁이다.
마음을 잃어 자기우상화된 문화는 창조의 근거를 잃은 것이기에 더는 새로운 것들을 펼쳐낼 수 없다. 그러니 계속 자기복제만을 거듭하며 열화된 모방품들만을 생산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 모방품들끼리 서로를 또 모방하며 싸운다. 상대를 모방해 자기라는 것을 구성하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상대보다 우월한 권위를 집행할 수 있는 어떤 오리지널리티를 가진 스피커인 척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의 문화가 한계에 부딪힌 그 대표적인 징후다.
도처에 다 똑같은 몰개성한 모방품들만이 창궐함으로써 전체의 장은 활기를 잃고 침체된다. 모든 것이 그저 뻔하게 경험되고 만성적인 권태가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뻔한 것들 속에만 위치하고, 뻔한 것들만을 반복적으로 경험하고 있다 보니, 이제는 자기가 이 우주의 섭리를 다 아는 존재인 것 같은 착각이 사람들에게 뿌리내린다. 실은 아무 것도 모르면서 자기의 좁은 경험을 절대화함으로써 다 아는 척하는 자기우상화의 현상이 만연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개인들의 모습은 정확하게 그 개인들이 속한 문화의 모습을 닮아 있다. 새로운 것을 향해 묻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이 정답을 들고 있는 척하는, 아니 그 자신이 정답인 척하는 중2병적 오만성만이 지배적인 태도로 드러난다. 그러면서도 정작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곧 자신에게 사건들로 다가오는 느낌[마음]에 대해서는 한없이 무력하기만 한 모순적 아동의 미숙한 모습은 바로 이렇게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분명하게도, 그 수명이 가장 한계에 달해 퇴락한 문화는 가장 유치한 속성으로 알려진다. 인간의 모습과 같다. 자기의 때가 지나갔음에도 그것에 고집스럽게 집착하고 있는 이의 심리적 본질은 유치한 아동이다. 이러한 상동성으로 말미암아, 유치한 문화는 유치한 개인을 조장하고, 유치한 개인은 다시금 유치한 문화가 지속되도록 하는 일에 일조한다.
이것은 결국 인간이 얼마나 더 조악하고 작은 존재로 추락할 수 있는가에 대한 악순환의 문제다.
종교전쟁이 그러했고, 이념전쟁이 그러했듯이, 오늘날의 문화전쟁 또한 이처럼 인간이 더 작고 유치한 상태로 퇴행하게 되는 결과를 알리고 있다.
그러니 이러한 퇴락의 운명 속에서 인간은 답답함을 경험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답답하다는 것은, 그 실상은 무척이나 더 큰 것이 몹시도 작은 것 안에 갇혀있을 때 경험되는 느낌이다.
좋은 문화란 그로 인해 인간의 필요가 온전히 실현됨으로써, 인간 자신이 스스로를 더 크고 괜찮은 존재로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 문화다. 그 반대로 나쁜 문화란 인간이 자신의 필요로부터 소외된 채 다만 망상의 고집으로만 남아 보다 조악하고 쩨쩨한 것이 되도록 몰아가는 문화다.
답답함의 느낌은 인간이 나쁜 문화 속에 있을 때 필연적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나쁜 문화는 자신이 몰락해갈 때 인간 또한 함께 몰락하게 하려는 동반자살을 꿈꾼다. 거기에는 반드시 인간의 죽음이 있다. 나아가 자신이 경험하는 답답함의 느낌을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 모르는 이들은 이 인간의 죽음이 야기되는 현실을 더욱 적극적으로 키우는 일에 동참하기도 한다.
로마가 망할 때를 떠올려보자. 만성적인 권태에 젖어 답답함을 느끼던 이들은 그 해방구를 타인의 죽음에서 찾았다. 그 시절의 콜로세움은 오늘날 미디어의 현실과 동일하다. 광장에서 더 많은 투쟁의 불꽃을 피워올리고, 남들이 죽어라 싸우는 그 불구경의 장면을 지켜보며 자신의 답답함을 대리해소하려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도 직접 검투사가 된다. 정치적 올바름과 윤리라는 살인면허를 손에 그러쥔 이들이 희생양을 찾아 집단포화를 가한다. 그 포격의 불길과 작열음이 늦여름의 불꽃놀이처럼 자신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기를 바라며.
이러한 21세기 콜로세움의 현실은 실은 거대한 감옥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감옥 안에서는 원래 서로 싸운다. 옆에 있는 다른 인간이 자신을 답답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며, 그 원인을 해소하기 위해 투쟁을 벌이는 것이다. 그러나 감옥 안의 이들이 답답한 이유는 감옥에, 곧 나쁜 문화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나쁜 문화라고 부르는 것은 분명 어떤 한 시절에는 좋은 문화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영광의 시절에 고착됨으로써, 또 그러한 거짓의 자기권위를 항구적으로 지속하려 함으로써 그것은 나쁜 문화로 변질되었다.
이 나쁜 문화가 만들어지는 방식은 개인의 내면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난다. 우리가 정체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대표적인 내적 문화다. 한때는 유용한 정체성이었겠지만, 그 정체성이 자기우상화됨으로써 그것은 이제 우리의 삶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나쁜 정체성으로 전락하곤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우리를 가두고 있는 21세기 콜로세움, 그 감옥이란 결국 우리 자신의 정체성인 셈이다.
우리는 우상화된 우리 자신의 정체성 안에 갇혀 있다. 그래서 답답하고, 삶이 괴로운 것이다.
실은 우리 자신의 존재성은 그 어떤 우리 자신의 정체성보다도 한참을 큰 것이기에.
인간은 마음을 가진 존재라는 표현을 다시 기억해보자. 그렇다면 마음이란 곧 인간의 존재방식이자, 인간의 존재성 그 자체다.
고로, 인간이 마음을 잃었다는 것은, 인간 자신의 거대한 존재성을 상실했다는 말과 같다.
동일한 이해로, 문화는 마음을 잃었기에, 나쁜 문화가 되어 인간 자신의 거대한 존재성을 계속 소외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탈속이라고 부르는 것은 결국 존재의 깊이다. 인간이 거대한 존재성을 자각하게 되는 그 일에 심화되는 방향성 및 원리를 우리는 탈속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경우 범속은 존재의 망각이다. 다른 표현으로는, 느낌의 실종이며, 마음의 상실이다. 바로 그러한 한계를 정직하게 드러내는 것이 곧 범속인 것이다. 이를 유한성의 고백이라고도 부를 것이다. 범속이 범속으로 하는 가장 고귀한 일이다. 한계에 부딪혀 있음을 고백함으로써 초월성을 부르는 일.
잃은 것이 있는 것에게 그것을 어떻게 다시 찾냐고 묻는 것이다. 그렇게 범속이 탈속에게 묻는 것이며, 문화가 마음에게 묻는 것이다. 범속이 범속 자신을 초월하기 위해, 문화가 문화 자신을 초월하기 위해, 그럼으로써 새롭게 이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고, 또 지속해나가기 위해.
이러한 것이 바로 질문의 의미다.
질문은 모르는 것에 대해 묻는 것. 곧, 지금 아는 척하고 있는 그 한계 너머를 향해 묻는 것이다. 때문에 제대로 된 질문은 언제나 초월적인 성격을 갖는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에게는 질문을 통해 비로소 초월성이라는 요소가 개입되기 시작한다.
가장 일상적인 차원에서 이 초월성의 작업을 묘사해보자.
이 모든 것이 콜로세움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화전쟁의 일들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결과는 그저 고통에 다름아닐 뿐이라고 자신의 몸이 전하고 있는 그 느낌에 정직해질 수 있다면, 우리는 이제 물을 것이다.
자신의 마음은 정말로 어떤지를 물을 것이다.
이 세상 누구도 관심갖지 않고, 또 묻지도 않는 자신의 마음이라는 것에 대해 이제 처음으로 물음이 던져졌다.
그 어떤 위대한 문화적 권위 및 평가들과 아무 상관없이, 또 자신이 문화적으로 어떻게 보여야 한다는 정체성의 압박과도 아무 상관없이, 정작 자신의 마음은 진실로 어떻게 느끼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물었다.
그러면 느낌은 한층 더 명징하게 스스로를 드러낼 것이고, 더 분명하게 우리의 몸으로 경험될 것이며, 바로 그렇게 느낌을 경험하고 있는 우리 자신이라고 하는 그 존재성을 아주 선연하게 우리 자신에게 알려내고야 말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답이다.
현재의 어떤 한계 속에서도, 우리는 느낌으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의 존재를 바로 찾을 수 있으며, 이것이 언제나 대답이다. 자신의 존재를 잃어 고통받는 인간이 마음에게 물을 때, 마음은 반드시 존재의 자리를 다시 찾을 수 있도록 인간을 인도하는 대답이 되는 것이다.
분명하다. 인간은 물음을 통해 자신의 마음[느낌]을 다시 발견함으로써, 인간 그 자신의 존재를 다시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마음의 회복이 곧 존재의 회복이 되는 것이며, 이 우주에 범속만 있을 때의 유한성의 고통이 이제 탈속과의 건강한 관계성을 회복함으로써 치유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은 문화를 창조하고, 또 치유하며, 인간의 문화가 계속 아름답게 꽃피어날 수 있도록 작용하고 있는 문화 자체의, 곧 오늘날 펼쳐지고 있는 인간 삶의 모든 근거다. 이제 우리가 정당하게 호명할 수 있는 대표적인 탈속성의 이름일 것이다.
이러한 마음이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일찌감치 눈치채고, 모든 개인에게서 마음의 회복을 꿈꾸던 전통이 있었으니 이를 실존주의라고 부른다. 그것은 마음을 잃은 문화에게 다시 마음을 되돌리고자 하는 운동. 원래부터 '마음의 문화'였던 문화가 자신 안에 있던 마음을 회복함으로써 이제 '문화의 마음'으로 인간에게 다가올 현실을 기획한다. 그래서 '마음의 문화'가 묻고 '문화의 마음'이 대답한다.
인간은 언제나, 묻고 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가장 온전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