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상담을 실존상담으로 특징짓는 것"
실존상담이 어려운 점, 또는 실존상담의 한계는 이 접근이 무척이나 정묘한 실존적 감수성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실존상담에 대해 아무리 많은 이론적 공부를 하거나 실천적 임상의 경험을 갖는다 해서 이 감수성이 키워지는 것은 아니기에 이는 난제가 된다.
실존상담의 목적은 내담자로 하여금, 내담자가 정말로 존재해도 된다는 명징하고 견고한 사실 위에 설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 사실을 참된 자신의 사실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우리가 왜 존재해도 되는지에 대한 그 탐구와 대답이 곧 실존상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실존상담은 '존재로 지향된 상담' 또는 '존재중심상담'이다.
가장 쉽게 말하자면, 실존상담의 성립은 이 모든 것이 존재의, 존재에 의한, 존재를 위한 우주적 사태라는 사실을 정말로 실감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실존적 감수성이며, 실존적 감수성이란 결국 '존재를 향한 감수성'이다.
실존주의는 실존적 존재론이다. 실존상담이 철학적인 상담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모종의 인지적인 작업을 우선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직 존재를 향해서만 그 탐구가 정향되어 있다는 점에서 실존상담은 철학적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여기에서 '철학적'이라고 말할 때의 그 표현은 동시에 '감성적'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게 된다. 당연하다. 실존주의 철학 자체가 애초에 다른 철학의 방법론들과는 매우 변별되는 '감수성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감수성이라는 표현은 반드시 '삶'이라는 표현과 직결된다. 살아있는 것만이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으며, 곧 느낄 수 있다. 바로 이 '느낄 수 있는 성질'이 감수성의 정확한 정의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한 번 감수성이라는 표현을 이제 '몸'이라는 표현과 연결짓는 일도 아주 수월하게 가능해진다. 우리는 몸의 존재이며, 우리 자신이 그처럼 몸이기에 우리는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감수성-삶-몸-느낌은 뗄래야 뗄 수 없는 하나의 실재와도 같다. 나아가 실존상담은 오늘날의 인지과학의 도움을 받아, 경험이라든가 의식과 같은 표현 또한 이 하나의 실재로서 말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우리가 의식한다는 것은 경험한다는 것이고, 경험한다는 것은 느낀다는 것이며, 느낀다는 것은 그것이 곧 몸이라는 것이고, 몸이라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이며, 그 삶의 생생한 체화가 바로 감수성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결국 무엇인가?
존재.
이것이 바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존재와의 만남은 비단 인간의 정신문화사에서 지향되어온 모든 실천론들이 궁구하던 최상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각종 종교나 영적 전통에서 묘사하던 가장 높은 수준의 신비체험들은 이 '존재체험'을 의미한다. 이러한 존재체험에는 어떠한 환상이 없다. 흡사 돌멩이를 손에 쥐고 그 견고함을 확인하듯이, 존재의 사실을 이 우주에서 가장 위대하고 확고한 영원성의 진리로서 바로 확보하게 되는 체험이다. 가장 쉬운 표현으로는 깨달음이라고 불릴 것이다.
우리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바로 그 정도로 엄청난 일이라는 것을 체험했을 때의 그 실감은 한 개인의 인생을 통째로 바꾸어놓으며, 그 영향력은 평생이다.
이것은 흡사 중력의 법칙과도 같이, 이 우주의 가장 근원적인 어떤 법칙을 이해하게 된 현실과도 같은데,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다. 무엇을 보든 거기에서 반드시 '존재의 법칙'을 포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상담현장에서도 당연히 이 일은 일어난다. 내담자의 말은 중요하지 않다. 특히 그가 자신에 대한 어떤 서사적 해석을 시도하는 언술일수록 거의 중요성이 없는 말들이다. 존재의 법칙을 체감하게 된 실존상담자에게는 존재가 어떤 일을 하고 있었는가가 언어를 넘어 더 핵심적인 차원에서 발견된다. 보통 선(禪)에서 불립문자라고 하며, 직지인심으로 연결짓는 그러한 현실이다.
언어를 통해 존재현상인 마음에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존재현상으로서 바로 접촉하는 것이다.
이 경우 중요한 소재가 앞서 말한 '느낌'이다. 느낌은 경험 그 자체라고 전술한 바 있다. 그런데 이 경험이라는 것을 한번 살펴보자. 몸에 대한 담론들, 특히 신체현상학은 몸에 대한 아주 유효한 통찰을 제공해준다. 우리가 어떤 것을 경험한다고 할 때, 실은 우리는 그것을 경험하고 있는 우리 자신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몸을 경험한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모든 경험은 우리 몸의 경험인 것이며, 다시 말하건대 모든 경험은 곧 몸의 자연스러운 작용인 느낌의 경험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느낌이야말로 오늘날 새로운 중대성을 부여받아, 의식, 영혼, 마음과 같은 어떤 정신적 실재를 더 정확하고도 섬세히 묘사하기 위해 채택되고 있는 표현이다.
그런 즉, 우리가 어떤 것을 경험한다는 것은 결국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마음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라고. 모든 경험은 다 마음의 경험이라고.
그러나 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몸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며, 오히려 하나의 작용이다. 그 하나의 작용에 우리가 붙인 이름이, 다시 한 번, 느낌이다.
때문에 실존상담자는 이 느낌을 통해 직접 존재현상과 접촉하는 일이 가능한 것이다. 물론 이렇게 쓰고는 있지만 실은 다 동어반복적인 표현이다. 느낌이 곧 존재현상이기에.
심지어 이 느낌이라고 하는 것에는 나와 남이 없다. 주체와 대상으로 분리되지도 않으며, 자기와 타자로 분리될 수도 없다.
선불교 연구자인 니시타니는 근대의 '주체'라는 개념과 탈근대의 '자기'라는 개념을 모두 기각한 뒤 '자체'라는 표현을 제안한 바 있다. 매우 적절한 제안이다. 느낌은 자체적인 것이다. 동시에 통째로 일어나는 것. 상호관계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와 '관계'라는 낡은 구조적 표현을 쓸 필요도 없이, 그저 '자체동시적인 것'이다.
자체동시성, 이런 표현을 쓰면 뭔가 인문학적인 고급언술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 실제다. 실존상담자는 원래 존재의 사실이라는 것이 이처럼 자체적으로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을 지각하고 있는 그 감수성으로 움직인다. 그렇게 보이고, 그렇게 들리며, 그렇게 경험된다. 느낌이 그 모든 일을 자연스럽게 실존상담자에게 이루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느낌의 일이 여타의 표층적 차원의 신비체험의 양상을 의미하듯이, 어떠한 보는 일에 대한 것은 아니다. 소위 주시자 체험이라고 말하는 것. 삼라만상은 실체없이 흘러가는 것이고, 그렇다는 것을 그저 여여하게 보고 있는 그러한 주체로서의 감각이 아니다.
실은 감수성이 아직 충분히 개화하지 않았고, 곧 존재의 힘이 약하고, 그렇기에 그 대신에 지성이라고 하는 앎의 힘을 추구해온 이들에게서 이와 같은 주시자 체험은 빈번하게 지향된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아트만적 체험이다. 이는 불교뿐만이 아니라 그와 유사한 실존주의적 관점으로부터도 가장 멀리 떨어진 것이다.
힌두교의 아트만적 사유가 불교처럼 착각되는 일은 매우 빈번하게 일어난다. 심지어 승려들도 오해하곤 한다. 초기불교적 명상전통이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으로서 소위 말하는 서구의 마음챙김 심리학의 물결을 타고 역수입되는 과정 속에서 이러한 불교의 힌두교화는 쉬이 야기되곤 했다.
쉽게 말해, 무실체성을 말한다고 그것이 꼭 불교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보는 그 어떤 주체에 방점을 두고 있는 한, 그것은 결국 '자체'가 아니라 '관계'다. 그리고 아트만적 사유는 아주 대표적인 이 관계의 전통이다. 관계들 사이의 상호성으로 이 모든 것이 펼쳐지고 있다는 형이상학적 우주관에 입각한.
이것은 시대마다 조금씩 이름과 그 구도만 달리해왔을 뿐, 근본적으로는 아주 뿌리깊은 서구의 이원론적 전통이다. 앞서 말한 주체와 대상, 자기와 타자 등도 이러한 이원론의 표현이다. 이것을 조금 더 넓게 펴면 오늘날의 다양성에 대한 관점이 된다. 둘이니까 셋도 되고 백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다(多)의 원리가 결국 귀결되는 자리는 상호구성이다. 더 엄밀하게는 '상호구성적 구조'다. A가 B를 구성하고, 또 그러한 B에 의해 A가 구성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실존주의는 처참하게 끝나버린다. 실존주의가 가장 설 수 없는 지평이 바로 이 상호구성적 구조다. 애초에 '실존'과 가장 반대되는 개념이 '구조'다. 더 정확히는 개념간의 충돌이라기보다는, 엄연한 존재의 사실을 무시하거나 회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이 바로 구조인 것이다.
즉, 존재의 사실을 지성으로 통제하고 관리해보기 위해 발명한 앎의 소재가 구조라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적인 차원에서 구조가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언술해보면 이 이해는 분명해진다. 구조는 결국 무엇인가?
언어다. 언어가 바로 구조다.
언어를 통해 앎의 세력은 증진되며, 그렇기에 존재의 힘이 아직 약한 이들은 언어를 추구해온 것이다. 언어를 통해 모든 것을 구조화함으로써 이제 그것들로부터 위협받지 않고 어떤 유능한 통제감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그 위대한 장치로서 언어의 힘을 키워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로써 확연하게 드러나는 어떤 대립의 양상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존재의 힘' 대 '언어의 힘'이다. 실존주의 내지 실존상담은 전적으로 전자에 의해 이루어지는 활동이다. 후자는 필요에 따른 임의적인 방편일 뿐이다. 선불교의 입장과도 유사하다.
그러니 구조가 강조되는 자리, 곧 '언어의 힘'을 추구하는 자리에서는 실존주의적 입장이 발을 붙일 수 없다. 나아가 상호구성적 구조라는 것은, 구조의 일원들이 블록체인처럼 서로를 더욱 결속함으로써 구조 자체를 더욱 강대하게 만드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까지 추구되는 구조는 실존주의에게는 거의 아우슈비츠다. 생명력의 절멸이다.
생명이 살 수 없는 곳에서는 실존주의도 살 수 없다.
언어로 생명이 살 수 있는가?
언어에 대한 모든 신격화된 착각은 이 단순한 사실 앞에서 무화된다.
모든 것을 다 알아차리는 어떤 앎의 시선을 추구하는 이들은 실은 이 언어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언어가 관계적이고, 상호구성적이며, 결국 구조를 꿈꾸어내는 언어라면, 그것은 결국 존재의 망각을 위한 것이다. 존재의 힘은 가장 축소되고 또 은폐되며, 그 결과로 생겨나는 것은 생명력의 저하다. 감수성은 필연적으로 무뎌진다.
조금 다른 얘기 같지만 실은 전적으로 동일한 얘기로서, 이는 깨닫지도 못하면서 단순히 알아차림의 명상만 오래 해온 이들에게서 자주 목격되곤 하는 상태다. 뭔가 자기는 다 보고 있고, 다 아는 척하지만, 그 기운이 무척이나 무겁고 졸리며 지루하다. 그 존재에 아무런 활기가 없다.
실존주의는 활달하다. 활기가 그 생명이다. 그럴 수 있는 것은 감수성이 실존주의를 이루는 전부이기 때문이다. 고급언어들은 다 뒤에 갖다 붙인 것일 뿐, 실존주의 내지 실존상담의 실제는 오직 활기로만 작동한다. 니체가 '즐거운 학문'이라고 말했을 때 이것은 그러한 실제에 대한 묘사였을 것이다.
왜 즐거운가?
느낌이 막히거나 닫혀 있지 않고 흐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자유가 있다.
자유는 즐거운 것이다. 무엇도 책임질 필요가 없기에 자유는 즐겁다. 무엇도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것, 그것이 진짜 자유다. 존재론적 자유란 그러한 것이다.
우리는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내지는 "자유는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등과 같은 거짓된 정치론적 자유를 자유라고 착각하며, 깊은 존재론적 전통인 실존주의에도 그러한 자유의 개념을 덧씌우기를 계속해왔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적 비유를 이 자리로 가져와보면 진짜 자유가 무엇인지는 한층 더 분명해진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왜 자유로운가?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맡겼기 때문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가장 거룩한 겸허함으로 다 맡겼기에, 그 선물로서 인간은 자유를 얻게 된다. 그리스도교적 구원의 의미란 그러한 것이다.
더 말해보자면, 불교라면 다를까?
실은 완전히 똑같다. 하나님이라는 은유적 상징만 없을 뿐, 귀의해서 엎드리고 내려놓는 일은 오히려 더욱 불교의 전매특허다.
하이데거는 이에 대해 무슨 얘기를 할까?
존재가 가는 길을 존재에게 다 맡긴 채 그 옆에서 감동받으며 그저 따라갈 뿐, 그것이 인간의 입장이다. 가장 빛나는 하이데거의 후기 저서들에서는 다 이런 얘기들만을 한다.
이러한 대답들은 다 아주 심원하고 유구한 '존재의 전통'에서 흘러나온 얘기들이라고 할 수 있다. 엄밀히는 그것은 얘기도 아니다. 존재의 몸짓이었을 따름이다.
실존상담자가 근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존재의 전통'이다. 존재, 존재, 존재, 실존상담자에게는 존재가 알파와 오메가다. 인간이 경험하는 이 모든 것의 시작과 끝, 그 전부다.
존재를 탐구하지 않는, 심지어는 존재를 언급하지 않는 실존상담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차마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실존상담이야말로 "존재 자체가 치유한다."라는 격언에 그 어느 것보다 어울리는 접근이기에.
실존상담자가 성공적으로 작업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상담에 관해 '존재의 힘'에 위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존재의 힘'이라는 표현을 우리는 이제 자연스럽게 '감수성'이라는 표현으로 연결지을 수 있을 것이다. 치환도 가능하다.
존재의 힘, 이라고 하면 조금 덜 촉촉한 것 같지만, 또 동세도 잘 안느껴질 수 있지만, 이것을 감수성이라고 바꿔 불러본다면 조금 더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상기해볼 수 있는 효과가 출현한다.
감수성이 잘 개화되어 있다는 것은, 존재의 힘이 강하다는 뜻이다.
자체동시적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며, 존재의 사실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찌보면 실존상담자들에게는 불우한 얘기일 수 있지만, 분명한 존재체험을 이루어 살아가는 이들은 특정한 상담훈련을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매우 능숙한 실존상담자로서 잘 기능하기도 하는 것이다. 실존상담은 전적인 감수성의 문제라, 감수성이 눈부시게 꽃피어나있는 이라면 그 일은 너무나 쉬운 일이 되는 까닭이다. 왜? 어차피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할 것이기 때문에. 가장 멋지고 아름답게도. 정말로 살아있는 그 활기로.
이 정도면 결국 실존상담자가 정말로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더욱 분명해졌을 것이다.
실존상담자는 자신의 존재로 존재의 힘을 증거하는 이. 그런 즉, 실존상담자는 다만 상담장면에서 꽃이 될 뿐이다. 건강한 활기와 그 생생함으로 피어나있는. 그럼으로써 증거한다. 내담자도 그것과 완전히 똑같은 바로 그 존재의 사실 위에 서있는 것이라고. 가장 위대한 존재의 일로부터 단 한 순간도 소외된 적이 없다고.
내담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바로 그 정도의 어마어마한 사실임을, 실존상담자는 매우 직접적으로 그 몸으로, 그 느낌으로 전할 뿐이다.
언어 너머로 그 마음과 직접 바로 만남으로써, 마음이 노래가 되고, 시가 되며, 또 더욱 핵심적으로 농담이 되어 흘러나오게끔, 그렇게 자유의 즐거움이 흐르게끔, 그래서 결국에는 지금 이순간 가장 존재의 축복에 휩싸인 그 마음이 성대한 감수성의 생명력으로 내담자에게서 분출되어 그 스스로를 적시게끔, 그 존재의 감동 자체를 사는 일이 실존상담자가 하는 전부이며, 최선이다.
실존상담을 분명하게 실존상담으로 특징짓는 이것을, 우리는 존재를 향한 감수성, 곧, 실존적 감수성이라고 부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