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상담은 어떻게 존재중심상담인가"
실존주의에 근거한 심리학적 관점을 갖고 있거나, 더 직접적으로 실존상담을 하는 이들은 내담자가 마땅한 그 무엇으로 존재해야 하는지(whatness)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그가 그 무엇으로든 지금 존재하고 있다는 그 사실(thatness)에 대해 말한다.
상담의 작업을 통해 내담자에게서 회복되어야 할 것 또한 바로 그 존재성이다. 존재성은 입장, 견해, 언어, 인종, 계급, 성역할, 역사, 민족, 관계 등의 그 모든 정체성과 관련된 요소들을 다 초월해서 존재한다. 아니 초월이란 거창한 표현을 쓸 필요도 없이 애초 존재성은 정체성과 아무 상관이 없다. 장미의 이름이 장미가 아니어도 그것은 존재하는 것과 같다.
대부분의 상담접근은 정체성의 회복이나 재구조화를 목표로 한다. 문제를 경험하는 현재의 정체성이 근거해있다고 가정되는 과거의 소재들을 새롭게 재해석함으로써 다시 한 번 건강한 정체성을 구성할 수 있도록 돕는 식이다. 정서나 감정, 느낌 등의, 이른바 존재현상의 작용들을 중요시 여기는 인간중심상담이나 게슈탈트치료 등의 경우에는 조금은 더 정체성의 문제 그 이상의 것을 다루고자 시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존상담만큼이나 매우 직접적으로 존재성의 문제를 다루는 상담방법론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전통적으로 '존재'라고 하는 탐구의 소재가 심리학의 영토가 아닌 철학의 영토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존재의 심리학' 등과 같은 표현을 쓰게 된지는 채 50년이 되지 않는다. 1980년대 미국의 인본-실존주의 심리학자들에 의해 그 용어는 제안되었고, 심리학과 영성을 통합적으로 다루는 자아초월 심리학(Transpersonal Psychology)의 발달과 함께 존재의 문제는 이제 유효한 심리학적 탐구의 소재로서 공공연한 정당성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존재라는 표현은 심리학에게는 조금 낯설다. 그렇다고 해서 미루어둘 수만은 없는 문제다. AI의 발전과 더불어 인간이 지금껏 펼쳐온 거의 모든 학문분야가 스스로를 새롭게 말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이 시대에, 심리학도 결국에는 말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존재성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심리학 자신의 대답을.
실존주의 심리학 또는 실존상담은 조금 더 빨리 그 대답을 시작한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차라리, 존재를 말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마음을 논하는 심리학이라는 것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반문하고 있던 전통일 것이다. 그래서 실존주의 심리학 및 실존상담은 어느 정도 심리학의 아웃사이더로 위치해올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는.
그리고 이제 존재가 새롭게 출발할 지금부터를 위해 실존상담은 물음을 던진다.
이 물음은 상담자로부터 내담자에게 물어지는 그 방향성만이 아니다. 상담자 자신도 스스로에게 묻는 것이며, 내담자 자신도 스스로에게 묻게 되는 것이다.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이것은 모든 존재하는 사태를 향하여 인간이 묻는 방식이다. 인간은 이렇게 묻는다.
"이 또한 존재해도 되는가?"
이것은 '존재의 물음'이다. 실존상담이 묻는 특유의 방식. 이것이 특유한 이유는 이 물음 자체가 그대로 대답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묻는 인간은 묻는 동시에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꼴도 보기 싫은 것이 있다. 저런 것은 왜 살아가고 있는지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 것이 있다. 우리는 그것에 의해 피해를 경험했을 수도 있고, 보는 일만으로 힘겹고 화가 날 수도 있다.
타자만 그럴 것인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너무나 형편없고 수치스럽게도, 왜 그런 실수와 잘못을 하고 만 것인지, 종국에는 대체 왜 태어난 것인지를 극심하게 회의하며 스스로를 증오하고 부정하게 되는 그런 상황들이 우리에게는 분명 있다.
그럴 때 인간은 묻는 것이다.
"이 또한 존재해도 되는가?"
놀랍게도 그 형식적 대답이 "예."인지 "아니오."인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이 물음을 통해 순간적으로 아주 심화된 존재에 관한 탐구를 전개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이미 존재해고 있던 것, 곧 정말로 존재하고 있던 것을 정말로 존재하고 있던 것으로서 이제 막 정직하게 인정하고 직면하게 된 것이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게 되며, 그렇게 '존재의 사실'을 100%의 사실로서 확인하게 되는 일이 지금 인간에게 일어났다. 인간이 정말로 존재성을 궁금히 여기며 묻고 있는 한, 그 어떤 대답으로도 이 확인의 작업은 성공적으로 완수된다.
이를테면, "NO! 이런 것은 절대로 존재해선 안돼!"라고 대답하던 이가 있다. 바퀴벌레를 그토록 강렬하게 부정하고 있는 이는, 실은 누구보다도 바퀴벌레의 존재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호불호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윤리나 정의 따위와도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것은 존재한다. 왜? 그것은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존재의 정당성이 된다. 이 우주의 그 어떤 위대한 힘도 그것이 지금 그렇게 존재하는 일을 가로막지 않은 것이며, 곧 그것은 우주적으로 허용되어 있는 것이다.
하물며, 경우에 따라서는, 또 유감스럽지만 매우 빈번하게도, 바퀴벌레보다 더 못나고 하찮게 경험되곤 하는 우리 자신에 관해 이러한 이해가 작용한다면 어떠할 것인가?
우리의 존재가 실은 무조건적으로 허용되어 있고, 승인되어 있으며, 이 우주에서 가장 정당하게 존재해도 되는 바로 그런 것이었다면, 우리는 대체 어떤 기쁨의 노래를 부르게 될까?
이것은 인간의 새로운 출발점이며, 인간이 스스로의 온전한 존재성을 바로 찾고야 만 지금이다. 그래서 지금부터 인간은 장대한 존재의 여정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부족하지 않은 자로서, 또 결여되지 않은 자로서, 그 자신의 존재를 최대치로 누리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거듭되는 존재의 물음을 통해, 존재하는 모든 것의 정당성을 감동으로 밝혀내는 존재의 모험을 떠나게 될 것이다.
이 '존재의 물음'의 일이 모종의 통속적인 '수용'이라든가 '담아주는 자' 또는 '알아주는 일' 등과 같은 개념들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것은 심적으로 불편한 것을 어떻게든 버티어내는 고행의 일이 아니고, 싫은 것도 부단한 노력을 통해 사랑하고야 말겠다는 억지의 일이 아니며, 아프게 가시에 찔려도 엄마처럼 다 품어주겠다는 식의 우상화된 모성의 일이 아니다.
이는 단지 동의의 일일 뿐이다. 사실에 대한 동의.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 우주 한편에 반드시 자신의 자리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그 사실에 대한 동의다.
존재의 물음은 이처럼 존재의 사실에 동의하고자 묻게 되는 것이며, 그 동의의 의도 자체가 곧 대답이다.
동의를 이루는 이 순간 인간은 지금까지의 그 자신을 초월하게 된다고 우리는 감히 말할 수 있다. 당연할 것이다. 인간은 지금 그의 정체성에 의해 야기되는 그 모든 작용을 넘어서, 곧 정체성을 넘어서 존재성에 닿은 것이다. 그의 작은 한계를 넘어서, 이 모든 것이여, 이 모든 것으로 다 존재하라고, 그는 가장 거대하게 외친 것이다.
우주의 모든 것을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그 모습들로 자유롭게 존재하라고 소망하고 있는 그는 대체 무엇일까?
그는 우주 자신이다.
존재 그 자체다.
그 거대한 이름들과 동격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의미다.
이 엄청나고도 엄청난 의미를 잃어서, 인간은 자신이 하찮은 존재인 줄 알고 시름에 젖는다. 마음의 병을 앓는다. 실존상담에서는 분명하게도 인간이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잃어서 마음의 장애를 경험한다고 본다. 실존상담의 입장에서 심리학적 문제란 곧 존재의 문제인 것이다.
존재가 문제라면, 존재를 향해 물어야 한다. 때문에 인간은 존재의 물음을 그 자신의 중심에 놓고 묻는 것이다.
"이 또한 존재해도 되는가?"
거듭 강조하지만, 존재를 통해 인간을 회복시키려는 접근이 실존상담이다. 그 최중심부에는 존재를 인간에게로 다시 개방해내는 '존재의 물음'이 있다. 그렇기에 실존상담은 존재중심상담(being-centered counselling)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