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기억

"실존상담자가 인간의 안녕을 신뢰하는 방식"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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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제에 관해 실은 잘 쓸 자신이 없다. 상담실 안에서 실존상담의 구체적인 실제가 대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 작동원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얘기만큼이나, 이러한 주제는 언어로 묘사하기에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이것은 마치 첫키스를 할 때 그 효과와 메카니즘에 대해 설명해보라고 요구받는 것과 비슷하다. 무엇인가를 말할 수야 있겠지만, 말해놓고 나면 이미 그 경험이 아닐 것이다. 언어 안에 담김으로써 우리의 모든 위대한 경험들은 생생하게 빛나던 그 의미를 잃고야 만다.


다행스러운 첫 번째 점은, 모든 실존상담자는 다 이러한 한계를 체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교과서를 집필하면서도 실존상담이 도저히 특정한 언어적 구조에 포섭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글을 쓴다. 좌표를 지정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글을 쓰는 이유는 그래도 그곳이 동쪽인지 또는 서쪽인지에 대한 방향성은 암시할 수 있어서다.


두 번째로 더욱 다행인 점은, 해당의 주제와 관련하여 오늘날 우리는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분명하게 확보해가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이 과거에서부터 시작해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흘러가는 모종의 선형적 줄기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훨씬 더 동의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히려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가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억이라는 것 또한 과거에 국한된 소재로 남을 수는 없다. 과거, 현재, 미래가 전부 다 기억작용 속에 포괄된다. 그럼으로써 중요해지는 것은 단연 현재다. 우리가 어떤 것을 기억한다는 것은 바로 이 현재에 기억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기억하는 그 순간이 우리에게서 현재라는 이름으로 포착된다. 이럴 때 우리는 의식하고 있는 것이며, 현재란 바야흐로 의식이라는 것이 우리에게서 출현한 순간이다.


고로 의식은 현재에만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의식과 기억은 거의 동일한 말이며, 그것은 '경험의 자각' 내지 '운동의 자각' 또는 가장 일상적인 표현으로 '삶의 자각'을 뜻한다. 그렇게 현재란 곧 자각의 장인 것이며, 이 자각은 무엇보다 먼저 현재라고 하는 그 장 자체에 적용된다. 현재의 자각으로 말미암아 현재의 이 모든 것이 완전히 새로운 색조와 향기로서 우리에게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멍하니 졸린 상태로 있다가 눈이 번쩍 뜨여 세상을 보게 되는 그 경험과도 같다.


그러니 기억의 작용이라는 것은 결국 이처럼 전부 다 바로 이 현재의 생생한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활동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과거도 또 미래도 지금 이 현재를 위해서만 있는 것이다. 현재를 빛내기 위해 지금 이 현재로 수렴되고 있는 것이다. 먼 시공간을 넘어 우리의 눈동자 안으로 돌입해오는 저 별빛들처럼.


실은 이것이 실존주의적 시간관이다. '존재의 시간'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현재에만 존재한다. 그래서 '현존'이라고도 부른다. '실존'과 '현존'은 경우에 따라 유사한 의미로도 쓰이고, 또 어떤 때는 실존의 입장에서 현존의 특정한 적용방식이 비판될 때도 있지만, 어떻든 실존은 그 안에 반드시 현존을 포함한다.


존재의 시간을 시계로 비유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벤자민 버튼의 시계는 거꾸로 가지만, 실존주의의 시계는 가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모든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시할 것이 실은 없다. 선불교에서 빈 족자에 점 하나를 찍는 일과도 유사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것을 지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 움직이는 것은 시계바늘이 아니라 우리의 시선이다. 우리의 관심이 숫자판으로 이동한다.


이 '관심'은 의식작용의 핵심 중의 핵심이다. 현상학의 주창자인 훗설은 '의식의 지향성'이라는 말을 쓴다. 의식은 어딘가를 지향하는 속에서 의식으로 드러난다는 의미다. 그러니 의식은 언제나 동시적으로 양방향성을 갖는다. 어딘가로 지향해가면서 동시에 그 자신을 의식한다. 외계에 대한 의식은 곧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인 것이다. '몸'을 중심으로 현상학적 구조를 묘사하는 신체현상학에서는 이 이해가 더욱 분명하다. 몸의 경험이라는 것은 언제나 외적 현상에 대한 경험인 동시에 자신의 몸 자체를 경험하는 일이다.


내담자의 존재상태에 깊은 관심을 갖는 상담자가 상담자 자신을 더욱 잘 이해하게 되는 경험들은 아주 빈번하게 출현하는데, 이것이 그 이유다. 또 이는 반대의 방향성으로도 성립된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잘 이해하게 된 상담자는 이제 자신의 앞에 현상으로 펼쳐져있는 내담자의 존재상태 또한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멋들어지게 말하자면 결국 이런 것이다.


"관심은 우리 모두를 동시에 구원한다."


이것은 아주 따듯한 햇살 아래 어둡고 축축한 늪에 빠져있던 두 사람이 함께 볕을 쬐고 있는 상황과도 같다. 누가 누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구원의 빛이 그 둘을 함께 비추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빛이란 대체 무엇일까, 또 어디에서 온 것일까?


앞서 말했듯이, 이를 묘사하기 위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며, 잘 쓸 자신은 여전히 없다. 그럼에도 비유적으로 어떻게든 다가가보자.


1000년을 사는 한 나무가 있다. 또 100년을 사는 한 인간이 있다.


16세가 된 소년은 나무에게 와서 묻는다.


"부모님이 원하지 않는 진로를 내가 택해도 괜찮을까?"


나무는 산들산들 가지를 흔들어 화답하는 것처럼 보인다. 괜찮다고, 괜찮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울상이었던 소년의 얼굴은 개운해진다. 용기가 난다. 그의 부모와 이 문제에 대해 마음을 터놓고 진솔하게 대화를 나누어볼 그 용기가.


22세가 된 청년은 짧게 자른 머리를 하고 나무 앞에 선다.


"나 내일 군대 가. 모든 게 다 끝나는 것 같아 너무 두려워. 나만 빼고 다 멀리 가버리면 어쩌지?"


나무는 겨우내 황량했던 가지에 이제 막 돋아난 작은 새싹들을 보여주며 기지개를 편다. 청년은 왠지 모르게 알 것만 같다. 아무 것도 끝나지 않음을, 언제나 모든 것은 더 멋지게 다시 시작될 수 있다는 그 사실을. 경쾌히 손을 흔들며 소년은 잠시 떠나간다.


34세가 된 청년은 작은 보석함을 들고와 묻는다.


"내일 그녀에게 프로포즈를 하려고 해. 정말로 잘 될 수 있을까. 내 인생에서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그녀인데, 정말 잘 되었으면 좋겠어."


그러한 청년의 머리 위로 꽃잎들을 흩뿌리며 나무는 춤을 춘다. 청년은 그곳에서 자신의 결혼식 장면을 미리 보았다.


46세가 된 중년의 그가 나무 앞에 엎드려 눈물을 흘린다.


"우리 딸아이가 너무 아파. 이렇게 어린 나이인데도 중한 병에 걸려 큰 수술을 해야 한대. 대체 뭐가 잘못 되었기에 우리 딸이 이렇게 고통받아야 하는 걸까. 제발 누가 좀 도와줘. 우리 딸을 지켜줘. 제발 살려줘."


나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지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이 그의 작고 위축된 몸을 더 잘 감싸도록 조용히 그 자리에서 머물 뿐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것을 향한 배려. 살아있는 것이 더욱 살아있게 하겠다는 어떤 다짐. 그러한 약속이었을 것이다.


72세가 된 노년의 그는 나무를 더욱 자주 찾는다. 올 때마다 늘 다른 사진들을 가지고 온다.


"봐봐. 우리 손녀가 그린 내 얼굴이라네, 허허. 딸애는 애가 집안 여기저기 낙서만 해서 골칫덩이라고 하는데 그게 다 이쁜 짓인 걸 몰라 그렇지. 얼마 전 내가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폐가 좀 안좋다네. 별 일 없겠지만서도. 그래도 내가 손녀딸 학교 들어가는 모습은 보고 싶은데 참 말이지. 내가 가방도 사주고 용돈도 주고, 그러면 너무 좋겠네."


산들산들 나무는 여전히도 가지들을 흔들고만 있을 따름이다. 변함없이도. 선하게도. 선한 인간의 소망을 위해 그 자리에 서있기라도 하다는 듯이 변함이 없다. 괜찮다고, 괜찮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1000년을 사는 나무는 안다. 반드시 목격했다.


일생을 정직하고 충실하게 살아온 그가 손녀의 결혼식까지 지켜보게 된 후에 이듬해 95세의 나이로 평온하게 삶을 마무리하게 된다는 것을, 다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1000년을 사는 나무는 100년을 사는 인간의 모든 인생을 기억하고 있기에, 인간이 묻는 어느 때라도 그에게 화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정말로 문제가 없다는 그 사실을.


나무의 그 기억은 미래로부터 온 것이다.


100년을 사는 인간은 볼 수 없는 것이, 1000년을 사는 것으로부터 보아져 대답된다. 그 미래로부터 응답된다.


그럴 수 있는 것은 나무 안에 과거, 현재, 미래라는 그 1000년의 시간이 다 존재하고 있기에. 그리고 인간의 100년의 시간이 그 1000년 안에 다 담길 수 있기에.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말미암아.


1000년치의 관심이 인간 100년을 다 담지 못할쏜가?


하물며 이것이 1000년 정도가 아니라 아예 영원이라면 어떻겠는가? 1000년을 사는 나무가 가진 미래의 기억에 인간의 100년을 비추어보듯이, 영원에 인간을 비추어본다면 어떠한 일이 생길까?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이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우주적으로 방대한 어떤 내용을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이 어마어마한 사태의 의미를 왠지 모르게도 그냥 이해하게 될 것이다.


영원이 늘 우리를 지켜보고 있으며, 그렇게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래서 우리가 단 한 순간도 영원으로부터 잃어진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며, 그 사실로 말미암아 구원될 것이다. 스스로를 정말로 온전한 것으로서, 아무 걱정할 필요없는 것으로서 다시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미래의 기억.


미래의 기억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다.


관심이란 결국 이 힘이다. 우리가 어떤 것에 깊이 관심을 가질 때,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져왔는가의 과거는 물론이거니와, 저도 모르게 그것의 미래까지도 자연스레 그려보게 된다. 이처럼 관심은 존재의 모든 시간에 대한 관심이다.


그리고 더욱 깊어진 관심은 결국 영원에까지 이른다. 이런 것을 '궁극적 관심'이라고 부를 것이다. 인간이라는 유한자의 모든 관심은 실은 다 궁극적 관심을 내포한다. 종교성이란 바로 이 사실을 지각함으로써 성립되는 것이다. 그것은 영원에 비추어 현재의 것을 드러내려는 일. 다시 말해, 미래의 기억을 통해 현재를 생생하게 밝혀보려는 일이다.


관심이 동시적인 양뱡향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해보자.


인간이 나무에 관심을 갖기에, 동시에 나무에게서도 인간에게 관심이 향해진다. 나무에 관심을 갖는 인간의 시선으로 말미암아 나무의 1000년이 인간의 100년을 비추어낸다.


동일하게, 인간이 영원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인간은 영원에 비치게 된다.


그렇게 영원에 우리가 비침으로써 우리는 아직 경험하지도 않은, 어쩌면 영영 모를 수도 있던 그 미래의 기억이 상기되는 것이다.


그것은 영원이 한 조각도 빠트리지 않고 우리를 지켜보던 기억.


우리의 키를 표시하던 눈금들이 커다란 나무에 새겨있듯이, 우리의 전순간을 그 자신에게 다 새겨놓고 있던 영원의 기억이다.


그 영원한 미래의 기억이 말한다.


당신은 괜찮을 거라고.


정말로 다 괜찮을 거라고.


실존상담은 잠시 이 미래의 기억을 빌어 그 시선으로 내담자를 만나는 일이다. 그러니 그것은 단지 상담자가 내담자에게 관심을 가지는 일 정도가 아니다. 관심의 빛이 상담자와 내담자 둘을 동시에 비추고 있는 것이다. 미래의 기억을 통해 내담자가 정말로 괜찮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 상담자는 그 자신 역시도 괜찮다는 사실을 동시에 이해하며, 지금 이 현재에 영원이 돌입해 와있음을 직감한다. 존재가 영원의 빛으로 밝혀져 있음을.


존재의 영원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아직 섣부르다. 그보다는 존재가 귀향하고자 하는 것이 영원이라고만 해두자. 그렇기에 존재를 향한 깊은 관심은 필연적으로 영원을 향한 궁극적 관심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실존주의의 존속가능한 발달모델이 언제나 심층적 종교성에의 지향이라는 점도 동일한 맥락 속에 있다.


존재에게는 존재가 어떤 방식으로도 존재할 수 있는, 존재의 모든 시간이 필요하다. 그것은 존재의 터전이다. 바로 그러한 존재방식으로도 존재가능했다는 미래의 기억은, 존재가 현재 그 든든한 존재의 터전 위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실증이 될 것이며, 이러할 때 존재는 영원을 노래하고 있는 나무다.


그러니 정말로 다 괜찮을 것이다. 이에 관해 잘 쓸 자신은 없지만, 우리가 노래할 수 있다는 사실만큼은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현재 깊은 관심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 미래의 기억 속에 위치해있다는 것이며, 우리의 안녕은 바로 이 자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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