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주의를 극복하는 실존주의적 삶"
오늘날은 환상의 시대다. 환상으로 인간의 정신세계가 가득 차있는 시대. 그러니 환상을 이해하지 않고는 우리는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환상이 만연하게 된 데는, 외적으로는 미디어기술의 발달과, 내적으로는 포스트모던의 상대주의적 철학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실재하는 진리는 없고 각각의 해석만 있을 뿐이니, 누구나 자신의 언어를 적극적으로 유희함으로써 더 많은 환상을 만들어낼 수 있으며, 또 그러한 환상의 창조주체로서 사는 일은 권장받는다.
조금 얄궂은 투로 말하자면 현재의 세상은 판타지 소설가들이 지배하는 세상인 것이다. 누가 더 감각적인 음모론을 잘 써내는가가 문화전쟁에서의 승패를 결정한다. "정말로 무엇이 실재하는가?" 이러한 물음의 창발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더 매력적인 환상의 공급이 그 물음의 자리를 대체한지 오래다.
이것은 부유성의 조건이다. 인간은 하늘에 도달하기 위해 더는 땅에서부터 언어를 쌓아 바벨탑을 세우려 하지 않는다. 하늘에 직접 이미지를 띄운다. 뿌리[근거]가 없는 언어일수록 더 좋은 건축재료다. 흡사 결코 추락하지 않을 거대한 파도타기라도 하는 것처럼 파도와 파도 사이, 이미지[언어]와 이미지[언어] 사이를 건너가며 오늘날의 인간은 부유성을 유람한다.
누구도 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바로 환상의 내용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방식으로 지금 환상이 남용 내지 악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오용의 일은 환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환상에 대한 가장 단순한 묘사적 정의는 다음과 같이 이루어질 수 있다.
'사라질 것.'
어떤 환상도 이 정의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다. 환상은 반드시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환상이다.
사라진다는 것은, 그것이 있었다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존재했던 순간이 있다. 그 존재방식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우리는 이른바 '환상의 존재론'을 구성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사라질 것'의 대표적인 이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없었다가 문득 있게 된 것, 그리고 그렇게 잠시 있었다가 없어질 것, 그것은 무엇인가?
바로 삶이다.
삶이라는 것 자체가 환상이라는 이 관점은 매우 역사깊은 것이다. 가끔은 '꿈'으로도 비유된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잠시 인생이라는 꿈을 꾸는 것. 결국에는 흩어지고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 이제 두 방향성이 나뉜다. 하나는 허무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실존주의다.
전자는 무엇인가 있는 것 같지만 아무 것도 없다는 관점이고, 후자는 아무 것도 없는데 무엇인가 있다는 관점이다.
허무주의는 또한 두 표현양식을 갖는데 염세주의와 쾌락주의가 그것이다. 이 둘은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 교차되어 그 양상이 드러난다. 공통점은 염세주의든 쾌락주의든 언어에 매우 의존하려 한다는 점이다. 비극적 언어의 자학으로든, 유희적 언어의 도취로든, 아무 것도 없는 이 세상과 자기 자신을 덮어가며 취하게 하려는 것이다. 장례식의 관 위에 꽃잎들을 흩뿌리듯이.
그리고 언어적 환상들을 끝없이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이 방식들이다. 이것은 어찌보면 삶의 환상성을 회피하거나 또는 극복하기 위해 언어적 환상을 창조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흡사 불가피한 운명으로 찾아온 악몽을 스스로 만들어낸 자각몽으로 덧씌우기라도 하듯이, 또는 꿈속에서 또 한 번 꿈을 꾸면 이제 그 모든 꿈을 초월할 수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쉽게 말하면, 하나의 거대한 환상에 대한 대응책으로서 무수한 환상들이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 다양한 미시적 환상들이 서로 얽혀있는 거미줄 위에 올라탄 채 균형을 잡으며, 우리는 마치 우리 자신이 하늘에 떠있는 것처럼 경험해왔다. 때로는 엉킨 거미줄을 풀어내고, 또 환상들 간의 대립과 갈등을 중재하거나 통합하면서, 그 속에서 어떤 초월자가 되기라도 한 마냥 우리는 삶의 환상성을 망각할 이득을 꾀할 수 있던 것이다.
실존주의는 이러한 허무주의에 최대치로 반대하며 인간이 삶의 환상성과 친해지도록 하는 방향성을 견지했다. 무수한 언어적 환상들을 오히려 인간 자신의 삶의 환상성으로 극복하는 것이 실존주의적 적용의 일이 되었다.
결국에는 다 사라질 것이라는 이 삶의 환상성에 실존주의가 한길로 집중한 것은, 실존주의는 삶이라는 것이 갖는 역설적 특징을 포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환상의 역설'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실은 "아무 것도 없는데 무엇인가 존재한다."가 아니었다. "아무 것도 없는 만큼 (동일한 크기로) 무엇인가 존재한다."였다.
사라질 것을 사라질 것으로 정확하게 살아가는 만큼, 그 삶은 가장 생생해졌다. 가장 존재하게 된 어떤 충만한 온전감이 인간을 가득 채워갔다. 어떤 객관적인 가치로 이 모든 것이 다 공허하다고 해도 좋았다. 이제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인간은 그래도 의미로웠던 것이다. 그 자신의 삶만 있다면. 이처럼 삶의 환상성이 역으로 인간에게 의미의 지평을 열어주었다.
의미라는 것은 만남의 현상이다. 우리가 어떠한 것을 전적으로 만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 순간 의미롭다고 경험한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경험의 깊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만남은 경험을 깊이 향유하는 것이며, 의미는 그러한 '경험의 맛'이다.
생기, 살아있는 것으로 살아있음, 활력 등, 실존주의가 이러한 표현들을 쓰는 이유는 결국 이 의미라고 하는 경험의 맛을 묘사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것이 전부다. 만남이 전부며, 그 의미가 전부다. 우리는 시험관 속에 든 뇌일지도 모른다. 전기자극이 가해져 지금 사랑하는 이와 첫키스를 하게 된 그 경험의 느낌이 펼쳐지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절대적 주관성 속에서는 이것은 엄연한 우리 자신의 삶이다. 우리 자신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이 느낌, 이 의미만은 진짜다. 우리 자신은 진짜가 아닐 수도 있고, 우리를 둘러싼 그 모든 환경도 진짜가 아닐 수 있지만, 바로 이 주관성의 경험 그 자체만은, 이 만남의 순간만은 진짜라는 것이다.
아주 직접적인 예시로, 게임이 보다 순수한 환상으로 향유되던 시절을 떠올려보자.
파이어볼도 가짜이고, 성검도 가짜이며, 무대 자체도 다 가짜였지만, 그 속에서의 우리 자신의 삶은 진짜였다.
게임 속에서 알게 된 반가운 사람들과 함께 모험을 떠나고, 진지를 구축하고, 크고 작은 일상을 나누면서, 그러다가 하나둘 떠나가며 작별하게 된 그 순간까지도 우리는 진짜로 살았으며, 진짜를 살았다. 우리는 2D의 도트나 3D의 폴리곤의 표현 이상의 그 어떤 생생한 존재방식으로서 그 안에 분명 존재했던 것이다. 깊게 만나진 그 모든 반짝거림의 순간으로서.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이 가진 가장 놀라운 능력 때문이다.
가짜도 진짜로 살 수 있는 힘.
황무지에서도 꽃을 피울 수 있는 힘.
인간의 창조력과 상상력이 바로 그 일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니 이제 오늘날의 인간은 더는 무엇이 진짜인지 그 어떤 실체성을 쫓으려 하지 않는다. 그는 어느 조건으로든 그 자신이 진짜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곧, 실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의 환상성을 의미로운 존재의 사실로서, 곧 사라질 것을 생생한 것으로서, 역설적으로 다시 알고 사는 이것이 곧 실존주의적 삶인 것이다.
고로, 실존주의 자체가 이미 '환상의 존재론'이라고 말하는 일은 성립된다.
결국 실존주의가 환상을 문제로 삼을 때는 그것의 환상성 때문이 아니다. 환상을 통해 인간이 '더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 '덜 살게' 되는 바로 그 지점을 실존주의는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 자신의 지성을 모델로 해서 AI를 만들었듯이, 인간은 삶의 환상성에 대한 직관을 통해 그 무수한 언어적 환상들을 만들어냈는지 모른다.
그렇게 인간은 자기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싶었던 것이며, 자신의 삶 또한 더 생생히 살고 싶었던 것이다.
지성 그 자체를 이해하기 위해 더 많은 지성의 형태들이 출현하고, 존재 그 자체를 이해하기 위해 더 많은 존재방식들이 펼쳐지는 것처럼, 환상 그 자체를 이해하기 위해 더 많은 환상들이 출현해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유효한 방향성을 얻은 것이다.
삶은 꿈이라는 이 근원적 환상성을 끝내 우리는 이해하고 싶었다.
우리가 꿈속에 빠져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우리가 꿈꾸었던 것이다.
삶은 한번 살아보기를 꿈꾸었던 우리의 꿈.
삶이라는 것을 만나보고 싶었던 우리의 꿈.
사라지는 것은 또 만나기 위해서다.
우리의 삶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그 그리움의 의미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이다. 인간은 너무나 환상적이었던 이 삶을 향한 그리움의 의미로 살아가고 있다고, 바로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고, 환상의 존재론은 구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