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성 성격장애"
운명은 성격 속에 있다.
그리고 성격은 한 개인이 그의 여백을 어떻게 향유하고 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즉, 우리가 자유를 어디에 쓰고 있는가가 우리의 주요한 성격을 구성한다.
그러니 운명은 성격 속에 있으며, 오늘날 성격은 유튜브 속에 있다. 유튜브의 성질이 그대로 우리의 성격이 된다.
보다 짧고, 빠르며, 강력하게, 그리고 "내가 이런 것도 다 경험했고, 이런 것도 다 안다."의 목소리만을 드높이며.
이것은 화의 운명이다. 오만이라는 지방을 태워 더 빠르게 산화되어가는 불의 운명. 결국에는 무의미하게 소모된 재로만 남을.
가장 뜨겁게 타고 있으면서도, 그러나 자신이 쉬고 있는 줄 착각하게 되기에, 그렇게 힘들었던 하루에 대한 어떤 짦은 여유의 보상물인 것처럼 위장되어 있기에, 우리의 운명은 찬물에서부터 끓여지는 개구리의 그것보다도 가혹하다.
여가시간에 편히 누워 유튜브를 즐긴다고 하는 일만큼 우리는 더 보편화된 현대의 자기고문법을 찾을 수가 없다. 뇌가 비명을 지른다. 단 한 순간도 쉬지를 못해서. 그것은 쉬는 것이 아니라, 바닥까지 긁어모아 더 세포를 태우고 있는 일이기에.
일주일만 담배를 끊어보았는데도 상태가 다르다, 또는 일주일만 탄산음료를 마시지 않아보았더니 몸이 아주 가볍다 등과 같은 보고는, 유튜브를 일주일만 멀리 해보면 더 극적으로 실감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디카페인 커피와 제로음료를 굳이 찾는 일이 우리의 생리적 건강성을 위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차피 유튜브를 보면서 마실 것들이라면.
우리의 일상을 떠올려보자.
한참 일을 하고 돌아와 우리는 이제 유튜브를 보며 쉰다고도 생각한다. 그러다가 잠들면, 자고 일어난 다음 날에도 쉬이 피로가 풀리지 않는다. 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을 하고 돌아온 후에도 쉬지 않고 뇌를 돌리는 일을 하고 있어서 몸이 계속 힘들다. 뇌는 에너지를 아주 많이 먹는 기관이라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간과되어 있다.
또 충분한 수면을 취하고 상쾌하게 일어난 날에도, 외출의 일정까지 남는 시간을 유튜브를 보며 때우고 있었다면, 우리가 이제 나가고 싶지 않아지는 일은 빈번하게 일어난다. 이유없이 피곤하다. 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시간을 때운 것이 아니라 유튜브를 보고 있는 시간 동안 우리의 뇌는 노동을 한 것이다. 그러나 또 외출로 인해 소비될 에너지의 여력이 없다. 몸은 무거워진다.
그래도 어떤 사회적 의무와 체면을 위해 몸을 일으켜 세워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나간다면, 우리에게는 대개 어떠한 일이 일어날까? 그날 하루 왜 그리도 짜증과 화가 나는지 견딜 수가 없다. 만나기로 한 이가, 또는 음식점의 점원이, 또는 옆차선의 주행자가 몹시도 성가시고 불쾌하게 경험될 것이다.
없는 에너지를 억지로 동원해야 할 때 우리는 화가 난다. 그렇게 유튜브에 에너지를 뽑아먹힌 다음, 정작 우리가 화를 내는 대상은 그렇게 우리의 애인, 가족, 친구, 가까운 이들, 또 사회적으로 자신의 일을 다할 뿐인 선량한 이들이다. 자신이 근본적으로 왜 화가 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지 못해서, 엉뚱한 대상들에게 그 화의 이유를 전가하는 것이다.
이런 것은 진실로 성격장애의 모습에 가깝다.
우리는 과감하게 이것을 '유튜브성 성격장애'라고 명명해보자. DSM에 등재된 공식적인 이름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정할 수 없이 오늘날 만연해있는 엄연한 실제에 대한 것이다.
사회에 혐오와 분열의 분위기가 짙어진 현실은 개인미디어의 발달과 연루되어 있다. 이것을 아직 엄밀한 인과관계로 설정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분명 상관성이 있다.
우리의 자아상이 미디어를 통해 과대하게 팽창되고, 또 다른 이들과의 비교 및 경쟁의 소재가 될 때, 그것은 분명하게 일이 된다. 우리가 더 나은 우리 자신을 만들어가야만 하는 어떤 과업. 매우 무겁고 힘겨운 일이다.
그러나 이처럼 치열하게 자기구성의 일을 한다 해도, 미디어가 만든 저 천상의 이미지에는 결코 도달할 수가 없다. 그러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도저히 실현할 수가 없다. 그러면 어떤 감각이 출현하는가?
열심히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당성의 보상받지 못했다는 그 감각. 박탈감, 원망, 열등의식이 이제 우리를 사로잡는다. 공정성의 문제도 불거지고, 자신이 받아야 할 보상을 대신 가로채고 있는 것만 같은 임의적 대상들에 대한 증오의 감정은 커져간다. 끝없는 혐오와 분열의 조건이 갖추어진 것이다.
미디어를 능숙하게 다루는 음모론자들은 사람들이 특정한 대상에게 증오를 쏟아부을 수 있도록 선동의 내러티브를 짬으로써 이 혐오와 분열의 현실을 더욱 공고화하기도 한다. 그들은 결국 증오장사꾼이다. 더 많은 마녀들을 색출해 자신의 지갑을 채우고 이름을 드높이는 중세의 심판관들과도 같다.
이 모든 것은 다 화, 인간을 더욱 화나게 하고, 그 산화작용이 더 가속화되게 만드는 일들의 총체다.
이것이 바로 '유튜브성 성격장애'의 핵심일 것이다. 만성적인 화의 상태에 지배되어 일상이 점점 더 불만스러워지기만 하는 어떤 역기능적 결핍의 성격이 형성된 것이다.
보상받지 못했다는 감각은 엄연한 결핍의 감각이며, 흡사 마약에 중독된 상태처럼 미디어의 화려한 이미지와 자기 자신의 초라한 일상은 더욱 극적인 대비를 이루며 이 결핍감을 심화해간다.
결국에는 살기 싫어질 것이다. 이 무의미한 잿빛의 무기물로만 경험되는 자신의 일상적 삶이란 너무나 숨막히는 것이 될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입고 있던 옷을 다 찢고 싶어지며, 뭔가 근육 전체가 다 경련을 일으키듯이 모든 것이 다 갑갑해서 도저히 견딜 수 없던 어떤 상태를 우리 다수는 경험한 적이 있다. 울고 싶은 것도, 화를 내고 싶은 것도 아닌, 그 정도의 표현으로는 감히 묘사할 수 없는 어떤 돌발적이면서 압도적인 폭발의 순간을 우리는 분명 맞이해보았다.
유튜브를 보면서 편히 쉬고 있다고 생각하며 누워있던 그 날에.
이유없이 찾아온 것이 아니라, 매우 분명한 이유로 그것은 찾아온 것이다.
우리가 미친듯이 몸을 착취하고 있었기에. 무척이나 잔혹하게도 우리의 몸을 스스로 괴롭히고 있었기에.
우리에게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파괴할 운명 속에 놓여 있었다.
이것은 운명의 장애. 곧, 성격의 장애였으며, 유튜브 안에서 일어난 일이다. 결코 그 불길이 꺼지지 않는 곳, 쉬지 않고 끝없이 전기신호의 불빛들이 돌아가는 곳, 오늘날의 정신적 불야성인 그곳에서.
"할 것도 딱히 없고,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심심하기는 하고."
이는 불야성에서 자주 들려오는 매우 익숙한 대사다. 다들 충혈된 눈을 어떻게든 붙잡고서 결코 쉬지 않으려 하는 것은 결국 보상을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하루의 마지막에 유튜브를 소비하면 소소한 재미와 웃음과 교양과 감동이라도 얻는 것 같아서. 그나마 자신의 하루가 아주 약간은 의미있어지는 것 같아서일 것이다.
기승전유튜브의 이 문법은 유튜브성격장애의 주요한 양상이며, 고작해야 유튜브만이 그 자신의 삶에서 거의 유일한 보상의 기제로 되어있는 매우 심대한 존재결핍의 상황이다.
자신의 존재가 결핍되어 있는 만큼 우리는 모종의 보상을 갈망하게 된다. 이것은 심리학적 사실이다. 결핍된 존재를 그 보상물로서 어떻게든 채워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존재를 채울 수 있는 것은 존재뿐이기에 그 어떤 보상물이라도 더 심한 갈증만을 야기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존재를 채운다는 것은 존재가 더 왕성해진다는 것, 더욱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존재의 증강을 위해서는 공간이 필요하다. 여백 그 자체가 필요하다. 이는 우리가 여백의 시간을 어떻게 향유하는지의 그 문제를 지시한다. 우리가 여백을 여백 그 자체로서 향유할 때, 그 자리에는 이제 존재가 가득 찬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증대시키기 위해 우리의 자유를 쓰는 것이며, 이것이 자유의 가장 올바른 방향성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쉼의 의미라는 사실을 우리는 다시 기억해볼 수 있다.
쉰다는 것은 어떻게든 억지의 보상물을 만들기 위해 유튜브를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 것도 없으며, 그렇기에 아무 것도 할 필요없는 여백 속에 우리를 놓아둠으로써, 우리는 그동안 결핍되었던 우리의 존재를 채우는 것이다. 존재가 채워진다는 표현과 에너지가 채워진다는 표현은 동일한 것이다. 존재는 에너지다. 그것은 우리의 살아있는 삶 그 자체다.
'유튜브성 성격장애'는 자신의 생명을 가장 빠르게 추방한 뒤, 대신 가상의 이미지를 그 생명의 자리에 옹위하려는 자기파괴적 성격을 의미한다. 이것은 생명의 현실 대신에 가상의 현실을 중시하는 미디어의 성질 그 자체를 반영한다. 미디어의 성질이 그대로 인격화된 현상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것은 힘들지만 살아볼 만한 것이 전혀 아니다. 왜? 이것은 애초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삶을 가장 부정하는 것일 뿐. 그 실체는 힘들지 않은 척하면서 우리를 더 빠르게 산화되도록, 곧 종말에 이르도록 하는 일이다.
오히려 힘든 것은 우리에게 쉼이 필요할 때 유튜브와 거리를 두는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힘들지만 해볼 만한 것이다. 쉼이라는 것이 낯설고, 쉬면 안될 것 같지만, 한번 쉬어볼까, 그렇다면 이것은 우리가 살아볼 만한 삶이다.
이제는 우리가 결핍되지 않고 스스로 채워지기에, 보상에 대한 갈망에도 그로 인한 화의 문제에도 더는 치이지 않는 삶. 우리가 살아있다는 이 존재의 사실 자체가 가장 큰 보상임을 이해하게 되는 삶. 결국에는 그 자체가 쉼 같은 삶. 쉼이 성격이 되고 우리의 운명이 되는 이러한 삶을 바로 우리는 살고 싶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