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적 반항의 의미"
실존주의를 반항의 철학이라고 말한다면 상당 부분 동의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그 반항의 양상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한 이해에 따라, 이 '반항'이라는 표현은 또한 상당 부분 실존주의에 대한 오해와 굴절을 낳은 표현이다.
이를테면, 자신의 부모나 기성의 사회제도에 대해 늘 순응하는 착한 아이로만 지내던 이가 있었다고 해보자. 어느 날 그가 이제는 자신이 선택하고 결정하는 주체적 삶을 살아야겠다고 반항하며 실존주의 철학으로부터 그 반항의 정당성을 찾게 되었다면, 이것은 실존주의가 오해된 그 방식이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주체성을 추구하는 이가 자유와 책임 등에 관해 말하며, 공정하고 지혜로운 선택을 통해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 그 진정한 존재론적 책무의 윤리성 같은 것을 주장하기 시작한다면, 그는 어느덧 실존주의의 정반대편으로 내달리고 있게 된 셈이다. 굴절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엇나갔다.
이러한 결과를 가져오는 반항은 보통 '정치적 반항'이라고 불린다. 그 의도는 최소한 관계 속의 갑을 구도를 역전시키겠다는 것이며, 이상적으로는 모두가 갑으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낙원을 꿈꾸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실존주의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실존주의가 극복하고자 했던 근대성의 전형이다. 상기한 자유, 선택, 결단, 책임 등의 개념도 모두 다 근대성의 산물이다. 물론 실존주의에도 동일하게 표현되는 개념들이 있지만 그 함의가 다르다. 같은 언어라도 어떤 눈으로 읽는가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지는 것은 모든 텍스트에 적용될 얘기겠지만, 실존주의는 유독 더하다. 그 이유는 실존주의가 언어를 정교하게 활용해 구성하는 철학적 기획으로서는 무척이나 어설픈 철학이기 때문이다.
실존주의에는 여백이 많다. 차라리 우리가 시를 읽을 때와 그 독법이 유사할지 모른다. 이러한 텍스트는 독자의 삶이 그 안에 침투되는 딱 그만큼만을 비추어준다. 동일한 표현으로도, A를 살고 있는 이는 그 안에서 A를 보게 되며, not A를 살고 있는 이는 정확하게 not A를 보게 된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의도하고자 한 not A로 사상 자체를 구조화할 수는 없다. 그러면 실존주의는 자신의 생명력을 잃는다.
실존주의의 문헌이란 결국 독자의 삶을 끌어오기 위한 것. 시가 설명문이 되면 이동[감동]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실존주의의 문헌은 또한 일종의 종교적 복음서 같은 성격을 갖는다. 그것은 근본적으로는 느낌을 깨우려는 것, 곧 인간의 마음을 울리기 위한 것이며, 그렇게 인간 자신의 삶을 생생한 것으로 다시 실감하게 만들고자 하는 의도 속에 있다.
그러니 실존주의는 이 의도적인 어설픔을 견지하며, 굴절과 오해도 그냥 다 그 안에 둔다. 왜냐하면 이것은 삶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만약 실존주의에서 A를 본 이가 있다면, 그래서 실존주의를 A로 말하고 있는 이가 있다면, 결국에는 그의 삶에서 그 A라는 언어가 만드는 자기모순에 반드시 봉착하게 될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좋든 싫든 간에 그는 not A의 자리를 포착하게 될 것임이 분명하다.
이처럼 실존주의가 삶의 문제인 한, 어떠한 언어적 이해로도 반드시 탐구는 이루어진다. 나아가 실존주의를 근대성으로 이해하며 끌렸다 하더라도, 그것이 실존주의라고 하는 자신의 삶을 비추는 거울에 대한 끌림인 이상 그 끌림 속에는 반드시 그 너머의 것이 있다. 이러한 근원적 끌림의 가능성을 신뢰하며, 실존주의는 모호성(ambiguity)의 철학으로 남고자 하는 것이다.
모호성의 철학이라는 말이 함축하는 사실은 분명한데, 그것은 언어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존주의는 언어 자체에 진리성이 담길 수 있다는 믿음을 갖지 않으며, 그렇다고 진리성을 포기한 채 언어유희만을 즐기지도 않는다.
그러니 실존주의적 반항이란 이 언어에 대한 반항을 기본적으로 내포한다고 할 수 있다. 실존주의가 진리성을 지향하는 그 방향성은 언어가 아니라 존재다. 심지어 많은 경우 언어는 오히려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만나는 길에 지난한 방해물이 되곤 한다. 그러니 언어에 대한 반항은 곧 '존재론적 반항'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조금 더 나아가면 이것은 분명 '종교적 반항'이라는 이름으로 형상화된다. 그러면 우리는 실존주의적 반항의 어떤 핵심에 더 다가간 것이다.
'존재론적 반항'과 반대되는 반항의 양상은 바로 '정치적 반항'이다. 이것은 언어에 반항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쁜 언어에서 더 좋은 언어로의 교체를 요구하는 것이다. 사회나 부모에게 자신을 새롭게 대해줄 규칙을 요구하는 모습은 전형적인 정치적 반항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그 근간에는, 그런 언어를 세우면 그런 존재로 펼쳐질 것이라는 생각이 있다. 그리고 존재론적 반항은 바로 이 "언어가 존재에 앞선다."라는 생각에 반항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는 또한 그러한 언어의 발화대상이 자신의 존재여부를 결정지을 수 있다는 대상적 착각에 반항하는 것이기도 하다. 누군가가 자신을 지지하는 언어를 발하면 자기가 존재할 수 있게 되고, 반대로 자신을 부정하는 언어를 발하면 자기가 존재하지 못하게 될 것다는 착각은 매우 뿌리깊다.
"엄마는 왜 내가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늘 그런 식으로 부정적으로만 말해? ㅜㅜ" 우리에게 상당히 익숙한 대사로서 알려지곤 하는 이 현실에서는 우리는 실은 자신의 존재를 펼치려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의존하고 있는 대상에게 높은 성적표를 받기 위해서만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즉,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남의 삶을 살고 있다.
오늘날 이와 같은 경향성은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는데, 어딜 가나 자신을 평가하는 부모의 카메라 앞에 놓인 이들처럼 우리는 살고 있다.
이 시대에 반항이라는 표현 자체는 거의 죄악시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거세된 아이들의 세상이라고도 말할 수 있고, 조금 유연하게 표현하자면 순응적인 아이들의 세상인 것이다. 이러한 아이들의 눈에는 부모의 눈동자만이 비치며, 그 눈동자 안에 담긴 착한 아이의 모습만이 바라보인다. 그렇게 부모의 눈에 의해 투사된 착한 아이의 모습을 자기 자신의 모습인 줄 알고 살아가는 이것이 바로 정체성이다.
정체성은 대개 남으로부터 온 언어를 당연하게 자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며, 실존주의적 반항은 필연적으로 이 정체성의 문제를 향한다.
'착한 아이'가 결국 귀결되는 지점이 거의 반드시 '정치적 반항'이라는 사실은 이 경우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 둘은 실은 동일한 것이며, 언어에 대한 집착과 맹신이 두 방향성으로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하나는 언어에 요구되는 쪽으로, 다른 하나는 언어를 요구하는 쪽으로. 그리고 그 두 방향성은 다 정체성의 강화에 기여한다.
이것이 이제 정체성의 문제가 되면, 외부의 대상이 없이도 스스로를 자기대상화하며 계속해서 언어를 존재보다 우선시하게 되는 현실을 낳게 된다. 자신이 주체적으로 자기 자신을 만들어나간다는 식의 말은 결국 자신이 언어로 자기의 정체성을 만들어나간다는 뜻이다. 이처럼 언어가 작동하는 곳에는 반드시 그에 따른 정체성이 생겨난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체성이니 만큼, 이제 우리 자신은 언어에 몹시도 취약해진다. 아주 쉽게는, 남의 말에 휘둘리며 치이게 되는 현실이 출현하는 것이다.
상대가 만약 우리 자신으로서 채택하고 있던 정체성을 지지하는 듯한 말을 하면 이제야 진정한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만났다며 그 도취에 휘둘리고, 또 반대로 상대가 우리의 정체성을 무시하고 오히려 우리가 생각하는 나쁜 정체성으로 우리 자신을 규정지으려는 말을 하면 우리는 무수한 수성전의 언어를 동원하여 상대의 위협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방어해야 하는 그 분주함에 치이게 된다.
이것을 우리는 관계의 현실이라고 말하며, 이 현실은 근본적으로 전쟁터에 가깝다. 이 전쟁의 상황을 극복하는 방법은 모든 정체성이 동의할 수 있는 보편적인 운명을 찾아내는 것, 그리고 그 운명에 함께 맞서 연대하는 것. 우리에게 잘 알려진 몇몇의 프랑스 실존주의자들이 귀결된 방식이다. 적을 만들어 뭉치는 그 방식, 이것이 언제나 정체성과, 그 정체성의 추구가 만들어내는 관계의 현실에 대한 해법이었을 것이다.
카뮈가 무척이나 아름다운 언어들로 『반항인』이라는 책을 쓰고, 반항을 실존적 인간조건으로 제안했음에도 불구하고, 카뮈 또한 이 정체성의 문제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나는 반항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그의 선언에서 우리는 '반항하는 인간'이라는 정체성에의 의지를 읽게 된다. 그래서 이 정체성 역시도 연대를 꿈꾼다. 인간을 억압하는 그 모든 부조리한 것에 함께 맞서 싸우는 그 가장 착한 아이의 모습을.
『페스트』에서 "신이 없는 세계에서 성자로 사는 일은 가능한가?"라고 묻고는 카뮈는 그것이 바로 인간이라고 자답한다.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이라고. 어떻게 살라고 요구된 언어는 없지만, 인간 스스로가 올바른 언어를 만들어 그에 따라 자신과 인류 그리고 세계를 책임지며 살아간다고 하는 이 인간상은 아름답지만 무겁다. 그것은 바위를 든 시지프이기 때문에.
시지프가 바위를 산정상으로 올리던 것은 실은 거기에 카메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카뮈가 묘사한 『시지프의 신화』에서도 분명 그러하다. 시지프는 스스로의 의지로 바위를 드는 일을 선택한 척하며, 또 그렇게 신들이 형벌로 내린 그 바위의 무게를 오히려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더는 바위가 당위적인 형벌이 아닌 자신의 주체적인 자유의 행사인 척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시지프는 분명 신들을 의식하고 있으며, 그들의 시선 앞에 자신이 신들보다 더 고귀하고 선한 존재로서 드러나기를 꿈꾼다. "어이쿠, 우리가 졌다. 우리는 힘들라고 저 과업을 부과했는데, 저 녀석은 글쎄 저리도 행복하게 미소짓고 있구만." 그렇게 신들의 규칙이 잘못되었고, 시지프의 규칙이 그 잘못된 규칙을 넘어선 더욱 위대한 규칙이었음을 증명하고자 하던 것이 결국 시지프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이는 다시 또, 세계를 지배하는 언어의 교체, 그것에 다름아니다.
보다 더 인간적인 정체성이 신이라는 정체성보다 우위에 있음을 증거하기 위해 벌이던 그 관계 속의 투쟁, 바로 그것이었을 뿐이다.
어떠한 맥락에서, 카뮈 및 사르트르 같은 프랑스의 실존주의자들이 실존주의의 막을 내렸다고 평가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실존주의를 결국에는 연대로, 관계로, 구조로, 그렇게 실존주의가 가장 무시되고 부정될 그 지평으로 몰고 간 까닭에.
그래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존재의 문제로 돌아온다.
실존주의적 반항이란 대체 어떤 반항인가 하는 그 물음으로.
그것 없이는 우리가 존재할 수 없다고 믿고 있는 바로 그 착각에 대한 반항, 우리는 이제 실존주의적 반항을 이렇게 말하려 한다.
이를테면 이는, 신이 없다고 우리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책임감을 갖고 신의 역할을 하면 된다, 와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바로 신에 대한 의존이다. 더 일상적인 예로, 부모 없이는 내심 자기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가 빨리 부모와 같은 능력을 갖추어서 더는 비루하게 부모의 신세를 지지 않고 살겠다고 말하는 것 또한 여전히 부모에 대한 의존 속에 있는 것이다.
상대적인 차원에서의 독립과 의존이라는 주제는 실은 다 동일한 의존에 불과하다.
실존주의적 반항은 이 모든 상대적인 것을 넘어선 절대적인 것을 향한 지향이다. 곧, 절대적 반항인 것이며, 초월적 반항인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존재하는 그 모든 근거를 오직 자신의 존재 자체에만 귀속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같은 이의 "자식이 그 부모보다 먼저 존재했다." 등의 말은 바로 이러한 원리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부모로부터 "너 같은 것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아이였어."라는 말을 들은 이가 있다. 그의 존재는 부모로부터 철저히 거부당했다. 그러나 실존주의적 반항 속에 있는 이에게는 이러한 저주의 말이 아무 영향이 없다.
왜? 자신은 자신이 살고 싶어서 사는 것이지, 부모가 살라고 해서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이미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은, 즉 실존은 실존에의 소망이다.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존재하고 싶었기 때문이지, 누군가가 다른 대상이 우리를 존재하게 해주었기 때문이 아니다.
이것을 존재각성 내지 존재자각이라고 불러보자. 이 각성과 함께 우리는 진실로 우리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종교적 현실에서 이는 비유적으로 '새로운 존재' '거듭남' '다시 태어남' 등과 같은 용어들로 표현된다. 자신의 존재를 각성한 이는 그 순간 자신이 정말로 지금 막 존재하게 된 것으로 경험한다. 이것은 부모 등을 위시한 어떤 선행적인 대상물들에 의해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것에 반항함으로써 오직 존재 자체만을 향하던 자신의 시선에 의해 개방된 현실이다. 그러니 "나는 나에 의해 태어났다."라는 종교적 언술은 존재론적으로 사실인 것이다.
이처럼 자신이라는 존재가 오직 자신의 존재 그 자체에만 근거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실감하게 된 이는, 이제 상대의 말에 영향받지 않게 된다. 자신에게 특정한 정체성을 강요하려는 다른 누군가의 견해와 입장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것들이 자신이 존재하는 일에 단 1mg도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이 우주적 사실로 자리잡기 때문이다.
이것은 위대한 실존주의적 반항의 결과다. 존재가 정당한 자신의 자리를 다시 찾은 것이며, 그렇게 스스로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영웅적인 업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무리없이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일에 가깝다.
물을 떠올려보자. 물을 흐리게 하고, 또 수면에 물결을 일으켜 모든 것을 번잡하게 만드는 일들에 대해 물은 대체 어떤 방식으로 '반항'하는가?
물의 반항은 깊이로 드러난다. 더 깊이 스스로를 향해 내려감으로써, 더욱 크고 고요한 내적 현실을 발견해낸다. 아무리 표면에 작은 요동이 있더라도 그 표층의 일이 깊은 고요함의 현실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이것을 불교적으로는 마음작용과 본래마음 등의 표현으로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존주의적 반항이 이와 같다. 근원을 향하고, 뿌리를 향하며, 곧 존재의 깊이를 향하는 것이다.
그것은 고요한 반항이다.
우리가 시를 음미하던 순간의 그 침묵을 기억해보자.
우리는 그 순간 분명 고요한 반항인이었다. 존재의 깊이를 향해 내려가, 존재의 문을 부드럽게 노크하고 있던, 존재의 모험가였다. 이것이 반항인 이유는, 세간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하던 그 일에 우리가 이처럼 도전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상대적인 것으로부터 절대적인 것을 향하겠다고, 매우 작고 조잡한 정체성으로부터 가장 크고 온전한 존재의 면모를 우리 자신으로서 바로 찾고야 말겠다고.
그 반항의 몸짓이 고요했던 것은 우리 자신의 존재를 회복하고픈 그 소망이 그만큼 깊었기 때문일 것이다. 떠올려보면 이 또한 분명하다. 가장 거대한 반항을 시도하는 이들은 원래 그 자리에 대뜸 엎어져버리거나 털썩 주저앉아버린다. 전자는 보통 기도라고 불리고 후자는 좌선이라고 불린다. 이것은 완전한 복종(surrender)의 의미. 완전한 개방성(openness)의 의미이며, 그렇게 최고의 반항인들은 존재 자체를 향해 완전히 스스로를 열어젖히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존재론적 반항이 존재론적 복종과 동일한 의미라는 사실로 드러날 때, 우리는 다시금 물의 비유를 떠올리게 된다. 물은 흐르며, 스스로를 향해 깊어진다. 그 운동이 때에 따라서는 반항으로 또는 복종으로 언술화될 뿐이다. 그러나 그 방향성은 같다. 우리는 다만 우리 자신의 존재를 향해 깊어지는 것이며, 그렇게 우리 자신이 되어가는 것이다. 부자가 자기 자신의 것을 다시 찾는 일에 호들갑스러워야 할 이유는 없다. 고요한 그 미소가 수면에도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