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적 천동설을 넘어서"
주인공을 주인공으로 결정짓는 요소는 무엇보다도 시간이다. 보다 밀도있는 생생한 시간을 사는 이는 주인공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를 다시 말하자면, 존재가 시간 속으로 들어온 것이 주인공이다. 흡사,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이 시간 속으로 들어와 예수라는 주인공의 본을 펼쳤듯이.
그래서 주인공은 '존재의 시간'을 산다. 존재의 시간이란 결국 삶이다. 삶은 시간 속에서 우리가 잠시 우리 자신으로서 존재하는 그 상황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또한 삶이란 언제나 우리 자신의 삶일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과 삶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분리하는 순간 그것은 우리 자신이 아닌 것이 되거나, 또는 삶이 아닌 것이 된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얼마나 우리 자신의 삶이라고 하는 것을 상실해왔던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주인공이라는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자신의 분리되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주인공이 주인공인 이유는 그의 업적이나 성취, 혈통, 권위, 또는 여타의 사회적 조건 때문이 아니라, 그가 오롯하게 그 자신으로서 산 그의 삶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우리가 주인공이 될 기회라고 말한다면, 지금 이것은 정확한 이해다. 그러나 이 이해는 우리가 더 화려하고 아름답게 우리의 삶을 전시함으로써 관객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아 주인공으로서의 객관적 권위를 인정받게 된다는 뜻 같은 것이 전혀 아니다. 팔지 말아야 할 것을, 또는 애초 팔 수 없는 것을 팔려고 한 결과는 스스로의 존재가 먼지처럼 하찮게 경험되는 현실이다. 존재의 몰락이다.
실은 과거에 인간이 믿었던 천동설이라는 것이 이 존재몰락의 현실을 지시하고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지구는 왜 우주의 중심으로 설정되었는가? 지구가 우주의 '밑바닥'이었기 때문이다. 타락해서 저주받은 존재들이 사는 곳이 지구였고, 그래서 우주의 모든 것은 지구만 빼고 다 살아있는 것으로서 움직이고 있었다. 영원한 삶의 축제로부터 지구만 소외된 채 저주받은 표본처럼 붙박여 있던 그 존재몰락의 모델이 곧 천동설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마치 표면적으로는 세상의 주인공인 것 같지만, 그 실체는 우주에서 가장 덧없기 그지없는 어떤 빈곤과 결핍의 현실을 묘사한다. 우리가 주인공이라고 하는 것을 이처럼 '세상의 주인공'이 되는 일로 오해하고 착각하는 한, 우리에게는 반드시 이 존재몰락의 현실이 찾아온다.
일상적인 차원에서 떠올려봐도 이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우리가 남의 평가에 의존해 우리 자신을 중요한 존재인 것처럼 세우려 하고, 소위 자신만의 놀라운 재능 및 개성이라는 것을 발휘해 무대의 중심을 비추는 스포트라이트 아래 설 수 있기를 바라며, 카메라 앞에서 모두의 박수를 받게 되는 그 순간을 갈망하며 살아가고 있을 때, 결국 우리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게 경험되었던가에 대해 우리는 익히 알고 있는 바다.
심지어 그러한 것들을 성취했다 하더라도, 그 뒤부터 바로 우리는 톱니바퀴였고, 노예였으며, 가련한 광대였다. 한번 얻은 것을 잃지 않기 위해, 대신 우리 자신을 잃으려고 하던 이 일은 갈수록 가속화되었다. 그러니 누군가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누군가는 향정신성 약물을 달고 살기도 하며, 또 누군가는 자신의 고통을 잊기 위해 대신 남을 고통스럽게 만들고자 끝없이 시비거리를 찾아 싸움을 거는 일만을 지속했다.
자신이 세상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이 생각이 거의 모든 인간사의 난장을 야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중고등학교에서 일진들이 서로를 붙잡으려고 남의 책상을 막 뛰어다니고 남의 교과서들을 막 던져대며 짓고 있던 그 웃음은 자기들을 멋진 청춘영화의 주인공처럼 찍고 있을 것이라는 어떤 가상의 카메라가 가정된 것이었다. 그 반대편에서는 소위 선한 영향력이라는 것이 가시적으로 노골화된 카메라 앞에서 행사된다. 이 둘은 달라보이지만 실은 완벽하게 그 성질이 동일한 것이다. 자신이 세상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그 생각이 만들어낸 결과물일 뿐이다.
우리는 이러한 생각에 끌려다닐 시간에 차라리 핵심적으로 중요한 심리학적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심리학은 세상의 주인공이 되려는 이 생각의 정체에 대해 분명하게 말한다. 그것은 열등감이라고. 나아가 실존주의 심리학이라면 부연할 것이다. 모든 열등감은 존재의 열등감이며, 그것은 개인이 자신의 존재를 잃은 만큼 경험되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자신이 '삶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모를 때, 그러한 이는 '세상의 주인공'이 되려고 한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보상행위로서 일어난 일이다. 자기 자신의 삶이라고 하는 존재의 시간이 스스로 발하던 그 내적인 빛을 잃어, 대신 세상이라는 외적 시선의 빛에 자신이 비추어지기를 꾀해보았던 것이다. 그러면 자신이 괜찮은 존재로 회복되리라고 믿으며.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우리 자신의 삶이라는 것은 오롯하게 우리 자신의 것이다. 다른 누구의 것일 수가 없기에, 다른 누구에게서 온 것으로는 결코 보상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이 삶의 주인공인 줄을 몰라 존재가 몰락하고 열등감이 생겨난 것이라면, 이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도 자신이 삶의 주인공이라는 사실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돌아가야 한다.
지구는 돌아가야 한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정신적 천동설의 저주에 대해 우리도 갈릴레이처럼 똑같이 말해야 하리라.
그래도 삶은 돌아간다고, 다시 또 흘러간다고.
저주에서 풀려나는 법은, 그 저주에도 불구하고, 계속 돌아가는 것이다. 저주는 붙박는 것이며, 곧 집착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저주를 극복하는 법은, 이 우주에서 가장 흐르는 것, 곧 시간을 우리의 편으로 삼는 것이다. 시간을 자신의 시간으로 사는 것이다. 시간에 몸을 던져, 오롯하게 자신의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 시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존재할 이 귀한 기회를 살아가는 존재, 그것이 곧 주인공이 아니던가?
훨씬 더 구체적으로 이 일을 묘사해보자. 무척이나 쉽게.
자신을 세상의 주인공이라고 착각하고 있을 때 우리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남들이 자기를 귀하게 대해주어야 한다고 가정한다. 그리고 그 가정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에 대해 부단히도 화를 내며 원망과 증오만을 쌓아간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삶의 주인공으로 이해하려 한다면, 이제 우리는 스스로를 먼저 귀하게 대하게 될 것이다. 어떤 저주 속에서 일그러지고 하찮아진 그 모습이라 할지라도,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주인공으로서 귀하게 대접받기에 마땅한 소재들을 반드시 발견하게 될 것이다. 펼쳐지는 상황들 앞에서 '남들에게 주인공처럼 보이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궁리하기보다는 '주인공은 지금 어떻게 대해져야 하는가?'를 물으며 우리 자신을 바로 그 대답대로 대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종교적 언어로서 '스스로 귀한 자'에 대한 묘사다.
그의 실존 자체가 그의 귀함의 이유가 되는 방식이며, 곧 실존적 주인공의 모습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산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이러한 실존적 주인공으로서 귀하게 알게 되는 기회를 갖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통속적인 차원에서부터도 왜 혈액형이니 별자리니 또 다양한 심리검사니 하는 것들을 소비하고 있는가? 그 근간에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알고 싶다는 그 궁극의 소망이 있다. 자신이 이 우주에서 절망적으로 저주받은 존재가 아니라, 저 빛나는 별들과 함께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고 있는 또 하나의 별빛임을 알고 싶다는 진실한 소망 중의 소망이 있다.
그래서 존재는 시간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어떤 것을 알려면 시작과 끝이 분명해야 하며, 존재는 시간 속으로 들어와 자신의 시작과 끝을 분명하게 설정했다. 그것을 우리는 삶이라고 부르며, 삶은 우리 자신의 존재가 대체 얼마나 귀하고 대단한 것인지를 우리가 밝혀갈 수 있는 분명한 기회인 것이다. 이것을 '실존적 모험'이라고 부르며, 그 모험을 시동하고 있는 우리는 바로 '실존적 주인공'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