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 세대

"마음으로 살아가는 아웃사이더들의 시간"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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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큰 동조를 얻을 얘기들은 아닐 수 있다. 586세대에게도 또 영포티에게도,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의 대극으로 설정하곤 하는 소위 말하는 MZ세대에게도. 그러한 방식의 세대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틈새의 얘기다. 대세의 언어가 아닌 얘기. '그 밖'의 얘기이며, 곧 아웃사이더의 얘기다.


아웃사이더. 우리는 그 울림을 실존주의 문화비평가 콜린 윌슨의 명저 『아웃사이더』에서 들려오던 그 설렘의 울림으로 듣고자 한다. 그는 말한다. 문명이 한계에 부딪혔을 때는 반드시 아웃사이더의 정신이 출현하며, 그 각성으로 말미암아 문명은 기존의 닫혀있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생명력의 활로를 열 수 있게 된다고.


윌슨은 신실존주의(neo-existentialism)의 운동으로 이 아웃사이더의 입장을 더 명확히 묘사한다. 그들은 일종의 종교적 영혼들이다. 그들이 특정한 제도종교나 어떤 영성전통들에 심취한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이 상대적인 언어의 세계가 가상이라는 것을 직관하고, 자신의 본래적인 존재성을 희구하고자 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본원을 향하려는 그들의 초월적 몸짓으로 말미암아 문명도 구원된다. 스스로를 초월한 인간 자신의 자화상이 달라지기에 이제 문명은 새로운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아니, 이제야 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말해보자면, 윌슨은 실은 이렇게 얘기하고 있던 것과 같다.


아웃사이더만이 참된 존재성을 깨달을 수 있으며, 그들의 깨달음으로 인해 이 모든 것의 변혁은 가능해진다고.


이것을 일종의 '존재혁명'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며, 윌슨에 따르면, 이는 아웃사이더가 아웃사이더로 살게 된 이유이자, 그가 부여받은 신성한 임무다.


아웃사이더라는 이 표현이 실존주의적 삶을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묘사라는 사실을 우리가 눈치채기란 어렵지 않다. 실존주의자라고 부르는 대신에 아웃사이더라고 부르면 훨씬 더 정서를 자극하게 되는 이득이 있다. 실존주의가 무수한 인간의 눈물을 담고 있는 철학이라는 사실 또한 더 가까이 와닿게 된다.


아마도 그것이 맞을 것이다. 실존주의는 인간의 눈물에서 태어났다. 모든 것이 다 막혀 절망하던 인간의 그 깊은 눈물 속에서.


극단적으로 우리는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거나 연민하지 않고, 또 냉소하거나 자학하지도 않으며, 오직 그것이 몹시도 힘겹고 아프게 살아온 인간의 상황인 줄을 알고 순수하게 울 수 있다면 그는 실존주의자다.


그러나 인간은 울음을 억지로 참으며 그 삶이 일그러지곤 한다. 실존주의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문제일 것이다. 울지 못하는 인간, 또는 자신의 눈물을 해결해야 한다고 믿는 인간. 그는 눈물이 있어야 할 자리에 언어를 대신 위치시키려는 경향성을 갖는다. 문명을 이루는 대세의 언어 '그 밖'으로 밀려나 불가촉천민이 된 것 같은 자신의 처지를, 더 좋은 언어들을 동원함으로써 돌이켜보려는 것이다. 대세를 반영하는 언어의 힘을 통해 성공적인 계급의 역전을 이루어 '그 안'으로 다시 진입할 수 있기를 꿈꾸며.


실존주의의 입장에서는 '존재의 절망'을 이처럼 '계급의 획득'의 문제인 것처럼 뒤바꾸어놓는 이 일이 가장 큰 기만으로 보인다. 절대성에 닿지 못해 생긴 일을, 상대적인 것들의 위치를 바꾸면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 이 모습이 피터팬들의 소꿉놀이처럼만 보인다. 마치 엄마의 병상 옆에서 화분과 물티슈의 자리를 바꾸어 배치하면 엄마가 살아나게 될 것이라고 믿는 이 일의 실체는 결국 주술이며, 눈물의 자리에 대신 세운 언어는 모조리 다 이와 같은 주술이다.


우리는 오늘날 눈물과 주술 사이에서 헷갈려하고 있다. 헷갈릴 때는 선택지가 아니라, 그 가상의 선택지를 만들어낸 상황 자체로 돌아가면 된다.


우리가 절망했던 그 세계, 그 상황으로.


이를테면 '귀멸의 칼날'과 '체인소 맨'은 왜 또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와 큰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가? 거기에는 어떤 절망의 상황이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절망을 관통하여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모습도. 그것이 공감대를 자아낸다. 마음은 자신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에 끌리며 그쪽으로 이동하려 하기 때문이다.


두 작품의 공통점은 절망 속에 놓인 아웃사이더들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사회와 그 대세의 언어로부터 버려진 이들이 '그 밖'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는가의 모습이 묘사된다.


'그 밖'에는 이러한 것들이 있다. 꿈도 희망도 없는 허무한 웃음. 진흙탕 속에서의 발버둥. 그리고 아주 가끔의 반짝이던 순간들. 기댈 곳 없는 이들의 포옹. 잠시간 포개어지던 온기와 안심. 그러나 정이 들기가 무섭게 다시 또 잘려나가야 했던 그 추방의 시간. 이것은 절망을 구성하는 조건들이다. 어떤 따듯하고 좋은 것으로부터의 영원한 작별, 또는 아무리 해도 영영 닿을 수 없는 그 간절한 희구가 이 작품들의 핵심적인 정서를 형성한다. 낙원에서 '그 밖'으로 쫓겨나게 된 인간의 심정을.


모든 절망은 이처럼 인간이 자신의 낙원을 잃은 그 절망일 것이다.


낙원은 자신을 가장 온전하게 존재하게 해준다고 가정된 곳, 또는 경험된 곳. 그래서 낙원에는 따듯한 친밀감의 공기가 감돈다. 낙원의 시간이란 친밀감이 인간의 가슴속에 가득히 쌓여간 그 시간이다.


귀멸의 칼날은 오니를 베기 이전에 먼저 이 친밀감의 대상을 베어버린다. 독자가 이제 막 친밀해졌다고 느끼게 된 등장인물을 죽이는 데 아무 망설임이 없다. 체인소 맨의 덴지도 친밀감의 대상을 꾸준히 잃어간다. 레제, 파워, 아키, 마키마, 나유타, 어쩌면 아사까지도. 그럼으로써 이 두 작품은 이것이 절망 속에서 인간이 살아가는 이야기임을 분명히 한다.


그렇다면 그 인간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친밀감의 대상을 잃게 된 인간은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주저앉아 있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고, 자신이 상실한 그것이 오히려 자신을 계속 살게 하는 그 이유가 되었다. 상실이 소망이 된 것이다. 마음은 상실한 것으로부터 자신의 가슴속으로 이동했다.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당신이 존재하고 있을 미래를 꿈꾼다고, 당신이 당신 자신으로서 살아가며 미소지을 수 있는 그 미래를.


그것이 없으면 온전한 자신일 수 없다고 믿었던 그 대상이 상실되었을 때, 오히려 역설적으로 인간은 가장 자신으로 드러나게 될 그 현실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정말로 추방이거나 상실이었던 것일까?


낙원을 잃은 이가 그 힘겨움과 아픔에 눈물흘릴 때, 자신의 뺨에 닿는 그 눈물의 온기는 무척이나 생생해서 우리로 하여금 부정할 수 없게 만들어준다.


우리가 지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낙원을 잃었음에도 우리 자신이 지금 아파하고 슬퍼할 수 있는 엄연한 우리 자신으로서 부정될 수 없이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그 사실을.


실은 어떤 인간도 낙원으로부터 추방당했던 것이 아닐지 모른다.


단지 우리 자신이 낙원보다 더 커졌기에, 우리가 자연스레 그 밖으로 이동되었던 것일 수 있다.


눈물이 인간을 성숙시킨다는 의미는 이제 이렇게 해석될 것이다. 눈물로 말미암아 인간은 그가 잃은 것보다 지금 그 자신이 더 거대하게 드러나있는 존재임을, 그렇게 더욱 자기 자신으로서의 존재임을 실감하게 되는 것이라고.


무엇이 인간을 더욱 존재하게 만들었는가, 또는 인간을 더욱 자기 자신이 되도록 만들었는가?


인간이 친밀하게 경험했던 것, 그 낙원의 시간, 그것의 핵심인 마음이 그 일을 했다. 인간이 잃은 것은 낙원이지만, 결코 잃을 수 없던 것은 마음이었다. 마음은 자신다운 것에 끌려서 이동하며, 그렇게 우리가 낙원에서 친밀감으로 경험한 그 마음은 자연스럽게 우리의 가슴속으로 이동했다. 그럼으로써 우리 자신을 더욱 자신답게 만들었다.


낙원을 잃은 절망 속에서 인간이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낙원이 마음이 되어 우리 안에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그 마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우리 자신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절망을 살아가는 법이다.


절망 속에 있으면서도 절망하지 않는 방법은 자신이 되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성을 붙잡는 것이다. 곧, 자신의 마음이 현재 펼쳐내는 대로 그 마음을 살아가는 것이다.


덴지는 무수한 친밀감의 대상을 잃었으면서도 여전히 바보다. 아니 여전히 바보일 수 있었다. 그가 어떤 절망 속에서도 그저 그 자신일 수 있으며, 계속 그 자신일 수 있는 것은, 그의 가슴속에 낙원의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아주 따듯한 친밀감의 심장이 뛰고 있어서다. 그 마음이 덴지에게 계속 살라고 한다. 너는 그냥 너이면 된다고 한다.


아웃사이더 그 자신의 가슴속에서 이 말이 들려와 "나는 그냥 나이면 되는 거였구나."라는 반짝임이 될 때, 그것은 분명 언제인가 낙원을 감싸고 있던 그 빛이다. 그 마음으로 살아갈 때, 그는 무엇을 살든 낙원의 시간을 사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마음으로 살아가는 그로 말미암아 '그 밖'도 새로운 낙원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결국 아웃사이더론이다. 아웃사이더가 '그 밖'에 위치하게 된 것은, 그가 위치하고 있던 문명보다 그 자신의 존재가 커졌기 때문이다. 더 큰 원이 더 작은 원 안에 담길 수는 없다. 큰 원은 필연적으로 작은 원의 '그 밖'에 위치하게 된다.


스스로를 아웃사이더로 경험하는 이들이 많아지는 것은 그 문명이 한계에 부딪혔다는 것이다. 현재의 인간존재의 크기를 담아내기에 더는 좋은 울타리가 아니라는 뜻이다. 아웃사이더의 이야기들에 대한 공감대는 이러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문명은 언어라는 주술로 만들어졌으며, 한계에 부딪힌 문명은 더욱 주술에 집착하는 행태를 보인다. 이 경우 주술은 어떻게든 인간을 작고 약한 존재로 축소시키고 퇴행시키려 하는 폭력적 의지를 갖는다. 그럼으로써 인간이 경험하는 한계의 고통과 소외의 슬픔은 더욱 커져가는 것이다. 근대에는 '보편성의 주술'이 이러한 폭력이 되었고, 탈근대인 오늘날에는 '다양성의 주술'이 동일한 의지로 작동하고 있다.


실존주의가 인간 자신의 눈물의 자각을 통해 주술로부터 인간존재를 깨우려는 몸짓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특정한 시대에 국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계속 살아난다. 근대성의 주술에 저항하는 아웃사이더의 철학으로 고전적인 실존주의가 출현했다면, 오늘날의 신실존주의는 탈근대성의 주술을 극복하고자 다시금 아웃사이더의 목소리를 갖추었다.


실존주의는 분명 근대성과 탈근대성에 동시에 반동한다. 그것은 어떠한 언어적 주술로도 봉쇄할 수 없는, 또는 어떠한 언어적 주술이라도 반드시 야기하고야 마는, 절망 속에 선 인간의 눈물이 곧 실존주의를 이루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실존주의는 결국 인간이 절망하고 있던 모든 시대를 위한 것이다. 또 달리 말하자면, 그것은 모든 아웃사이더를 위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세대론을 말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유일하게 의미있는 얘기, 곧 '그 밖'의 얘기인 아웃사이더의 얘기를 해야 할 것이며, 근대성을 비판하며 성립된 탈근대성에 의해 오히려 인간존재가 '그 밖'으로 밀려나게 된 현실을 경험하고 있는 오늘날의 아웃사이더 세대를 말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를 기꺼이 '실존주의 세대(existentialist generation)'라고 명명해볼 것이다.


이 실존주의 세대는 존재에서 다시 답을 구하고자 하며, 그렇게 자신의 존재로 돌아가려 한다.


그러나 돌아간다는 표현은 떠나왔던 동일한 안쪽의 구조를 다시 향한다는 것이 아니다. 실존주의 세대는 EX('그 밖의')세대다. 열린 그 밖을 향함으로써, 이들은 그만큼 크게 열려있는 자신의 존재성을 역설적으로 다시 발견한다.


안쪽(inside)에의 강박적 집착으로 펼쳐지는 네트워크도 아니고, 관계도 아니며, 언어로 창발해내는 정체성들의 놀이도 아니고, 그러한 정체성들 사이의 권력담론도 아니다. 각자의 임의적 구성물로서의 진리만 있을 뿐이라는 상대주의는 가장 아니며, 그것들 사이의 블록체인 같은 상호관계성의 구조도 물론 아니다.


그 밖의, 오직 존재다. 자신이 자신으로 존재한다는 사태 그 자체다.


그래서 마음이다. 가장 구체적이고 명징하게 존재의 사태를 알리고 있는 존재현상으로서의 마음이 실존주의 세대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며, 뒤집어 말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의 중대성을 눈치챈 이들이라면 그들을 실존주의 세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가슴속 포치타로 살아간다."라는 덴지와는 달리, 아직 "마음으로 살아간다."라는 표현에 익숙치 않다. 그러니 이 표현의 실제는 '그 밖'의 것이다. 이것이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을 가장 크게 변화시켜줄 엄청난 변혁의 운동이라는 사실은, 또 그로 인해 우리 주위의 모든 것을 변하게 만들 일종의 존재혁명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결국 마음으로 적극 살아가고자 하는 실존주의 세대 그 자신들을 통해 증거될 것이다.


누구를 위해 종이 울리는지를 우리가 물을 필요는 없다.


인간의 가슴속에는 누구나, 또 언제나 마음의 종이 친밀하게 울려퍼지고 있었기에. 그 소리를 알아들었을 때 인간에게서 흐르는 것이 눈물이며, 인간에게서 나아가는 것이 그의 발걸음이다. 이제는 기쁘게도 '그 밖'을 향해, 마음의 종소리를 따라 가장 자신다운 존재의 모습을 향해 이동하는 이가 있다면, 우리가 바로 그 실존주의 세대다. 우리는 마음으로 자신의 시간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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